제4편 성씨와 인물(삶의 주체)/태인의 인물

승려 송만공(宋滿空)-1935년 선종수좌대회(禪宗首座大會)에서 종정(宗正)에 추대되었고 사리탑이 예산 수덕사(修德寺)있다.

증보 태인지 2020. 7. 20. 10:00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불교계의 새로운 중흥조(中興祖)가 출현하였으니, 바로 경허성우(鏡虛惺牛)와 만공월면(滿空月面)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사실상 경허와 만공의 뛰어난 선행(禪行)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만공은 경허의 지도와 선법을 계승하여 덕숭산을 중심으로 40여 년간 선법을 펼치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선원(禪院)체계를 확립하였다.

만공(18711946)은 여산송씨(礪山宋氏), 속명은 도암(道岩 또는 道巖), ()는 월면(月面), 법호(法號)가 만공(滿空)이다. 187137일 태인현(泰仁縣) 군내면(郡內面) 상일리(上一里: 현 태인면 태흥리)에서 부친 신통(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만공의 아명은 바우이며, 도암은 행자시절에 불린 이름이었다는 설도 있다.

12세 때인 1883년에 인근의 금산사(金山寺)에 갔다가 미륵전의 미륵불에 감화를 받은 만공은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만공이 찾아간 곳은 전북 완주의 봉서사(鳳棲寺)와 송광사(松廣寺)였다. 승려 진암(眞岩)을 찾아서 충청남도 계룡산 동학사(東鶴寺)로 들어가니, 이때가 13세 때인 1884년이다.

만공이 진암 문하에서 공부할 때 서산 천장사(天藏寺)에 머물던 경허(鏡虛)가 동학사에서 대중들과 동거수행을 하였다. 이때 진암은 경허에게 만공을 추천하였고 경허는 만공더러 천장암의 태허(泰虛)를 모시도록 하였다. 태허는 경허의 속가(俗家) 친형이었다. 천장사에 들어간 만공은 1884128일에 태허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이때 받은 법명이 월면(月面)이다. 사미계를 받은 만공은 이후 10여 년간을 천장사에서 공양주(供養主) 노릇을 하였다.

만공은 그의 나이 22세 되던 189311월경에 온양의 봉곡사(鳳谷寺)에 들어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온갖 법은 하나로 돌아가니 이 하나는 어느 꼿으로 돌아가는고?)’를 화두 삼아 수행 정진하였다. 1895725일에 정진 중이던 만공 앞에 홀연히 벽()이 트이고 공()하더니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새벽녘에 울리는 종소리에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웠다. 그리고 문득 법계의 본성(本性)을 깨달으면서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 공산의 이기는 고금을 초월했고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 백운 청풍은 저절로 오고 가네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磨越西天)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에서 넘어 왔는가?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뜨네.

 

봉곡사에서 깨달은 만공은 공주 마곡사 보경(普鏡)의 토굴로 들어가 3년간 정진하였다. 만공의 나이 25세 때인 18967월에 경허가 만공이 머물던 토굴을 찾았다. 만공은 경허 앞에서 지금까지의 수생정진과 깨달음의 견처를 꺼내 놓았다. 이에 경허는 불꽃 속에 연꽃이 피었다.”라면서 만공의 견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함에 경허는 만공에게 조주(趙州)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參究)토록 하였다. 즉 원돈(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經截門)을 다시 지으라고 주문한 것이다.

만공에 대한 경허의 지도는 주로 무자화두참구(參究)였다. 뒤에 만공은 무자화두 참구를 통해 크게 깨달았으며, 학인(學人)들에게도 무자화두 드는 법을 자주 설명하곤 하였다. 18987월에 만공은 경허가 머물던 서산의 도비산(都飛山) 부석사(浮石寺)를 찾았다. 부석사에서 스승 경허로부터 법을 묻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불법의 현현(玄玄)한 묘리(妙理)를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당시 동래 범어사의 계명암선원(雞鳴庵禪院)에서 경허를 초청하였다. 만공은 경허를 모시고 계명암선원으로 들어가서 한안거(夏安居)를 마쳤다. 계명암선원에서 경허와 헤어진 만공은 통도사 백운암(白雲庵)으로 들어가서 다시 정진하였다. 백운암에서 정진하던 당시는 장마철이었다. 보름째 정진하던 만공은 새벽예불 종소리를 듣고서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30세 때인 19017월경에 천장암으로 돌아온 만공은 임운자재(任運自在)한 경지에서 법계유희(法界遊戲)의 생활을 하였다. 만공의 나이 33세 때인 19047월경 함경도 갑산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앞에 만공은 몇해 동안 무자화두를 참구하며 경절문을 닦은 참선공부와 깨달음, 그리고 임운자재한 경지를 내보였다. 이때 경허는 만공의 경지를 인정하고 전법게(傳法偈)와 만공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경허는 만공에게 불조의 혜명을 자네에게 이러 가도록 부촉(付囑)하노니 불망신지(不忘信之)하라.”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1912년 봄에 스승 경허가 타계하였다는 소식에 만공은 도반인 혜월(慧月: 18611937)과 함께 함경도 갑산으로 갔다. 그리고 경허의 다비를 정성껏 챙겼다. 이어 34세 때인 1905년에 덕숭산 내에 조그만 모암(茅菴)을 지어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하고 임운자재한 생활을 하였다. 더불어 중생 교화를 시작하였으니 이때부터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 등을 중창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거느리며 선풍(禪風)을 떨쳤다. 한때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과 비로봉, 태화산, 오대산, 팔공산 등지를 유력(遊歷)하다가 덕숭산(德崇山)으로 돌아온 만공은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만공은 1930년대 초에 선학원(禪學院) 설립을 주도하였고,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 모임 성격의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선행(禪行)을 부활시키기 위한 만공의 노력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64세 때인 1935년에 마곡사 주지가 된 만공1937311일에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이 주재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였다. 주지회의에서 만공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한국불교의 일본불교화 시도를 정면으로 공박하였다.

 

스님이 충남 대본산 마곡사 주지로 잠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31본산 주지회의가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다고 초청을 해 부득이 상경하였더니, 조선 13도 도지사와 31본산 주지가 모여서 조선불교의 진흥책을 농의 하려는 참이었다. 그때 일본 총독 미나미[南次郞]가 혀를 놀여 말하기를 조선불교는 과거엔 아무리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 하더라도 현재로는 부패한 불교이므로 전날의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씨의 공이 막대하거니와 장차는 마땅히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를 합하여야 잘 된다.”하고는 일본 침략정책에 의하여 한국불교 전통을 말살하고 민족 주체사상을 괴멸시키려는 야심으로 강력한 설득 작업을 하였다. 이에 스님이 분연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등단하여 크게 호령하여 이르되 청정(淸淨)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하고 좌중을 물었다. 이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였다. 스님이 큰소리를 떨쳐 한번 갈()하니 그 소리와 위엄이 장내에 넘쳤다. 일동의 좌중이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르거늘 스님이 다시 그 불가함을 말씀하시기를 전 총독 데라우치씨는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 승려로 하여금 일본 불교를 본받게 하여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부처님의 계율을 파하게 한 불교에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음이 끝이 없을 것이니라. 우리 조선불교는 15백년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하거늘 일본불교와 합하여 잘될 필요가 없으며, 정부에서 종교를 간섭하지 말라. 불교 진흥책은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라며 일갈하였다.(만공법어)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 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회의에서 만공이 이같은 발언은 일체의 지위나 권위, 경계를 초월한 무심도인(無心道人)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은 만공을 찾아와서 잘했다.! 사자후여! 한번 갈()을 하매 그들의 간담이 떨어지게 하였구나! 비록 한번 갈을 한 것도 좋지만, 통쾌한 방망이를 휘둘러 때려주고 나올 것이지라고 하였다. 그러자 만공은 차나 한 잔드세, 이 좀스런 사람아!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영리한 사자는 갈을 쓰느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만공은 한국불교의 수행과 전통을 계승하고 선풍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만공은 여러 선방을 유력하면서 선풍을 진하였지만 그의 행적은 역시 덕숭산을 중심으로 쌓여갔다. 말년에 덕숭산 동쪽 산에 띠집을 지어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하고 달과 더불어 유희하였다고 한다.

19461020일에 목욕 재개한 만공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때가 다 되었네 그려하면서 껄껄껄 웃고선 타계하였다. 이때가 세수 75세 법납 62세이다. 만공이 떠나기 직전에 일원상(一圓相) 하나를 그렸다. 이는 경허가 입적할 즈음에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이라는 게송(偈頌)을 적고 일원상 하나를 그린 것과 유사한 것이다.

만공은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덕숭산 금선대에 봉안돼 있으며 부도탑인 만공탑역시 금선대 근처에 세워졌다. 이외에 예산의 수덕사와 경기도 의왕의 청계사에 그의 사리탑이 세워졌다. 만공의 제자로는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高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등 한국 근현대 최고 선승들이다.

만공은 스스로 깨달은 존재의 본체를 마음자성(自性)불성여여불(如如佛)허공주인공본래면목(本來面目)자심(自心)일원상() 등으로 표현하였다. 불교의 진면목은 마음을 깨닫는 데 있으며 사람의 가치 있는 삶 역시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 수행을 통해서 현상적인 차별이나 분별의 관념에서 벗어나면 자유롭게 지혜와 자비를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이자 스승이라고 만공은 설파하였다. 더불어 이 같은 깨달음을 위해서는 참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만고잉 강조한 참선이란 이론과 사변을 철처히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이다. 만공은 제자들에게 항상 무자화두를 참구토록 하였다. ‘무자화두는 스승인 경허가 만공에게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만공은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스승인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할 수 있는 적절한 도량 그리고 함께 수도할 수 있는 도반(道伴) 등이다. 만공은 그 중에 스승을 가장 중시하였다.

만공은 납자(衲子)들에 대한 지도는 침묵 또는 방망이질[], (), 격외의 대화, 일원상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1927년 만공이 지은 현양매구(懸羊買拘)”에서는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적었다. 즉 수행에 있어서 임재선풍(臨濟禪風)을 계승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만공의 이와 같은 선사상이 담긴 법어집이 만공법어(滿空法語)이다.

만공법어(滿空法語)11책으로 1983년 문도인 혜암, 벽초, 원담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는 혜암이 쓴 봉향송과 경봉이 쓴 서사(序辭), 원담의 간행사등이 있다. ‘본문은 상당법어 42, 법거량 57, 게송 57, 서문 3, 발원문 3, 기타 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말에는 행장이 들어있다. 상당법어에는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 무상보리(無上無上菩提), 천안불간(千眼不看), 일심만상(一心萬像), 탄진삼세제불(呑盡三世諸佛) 등의 선수행과 관련한 문제들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에 대한 일갈(一喝)도 상당법어에 들어 있다.

법거량은 당대의 고승인 금봉, 수월, 혜봉, 한암, 보월, 성월, 효봉, 혜암, 금오, 벽초 등과의 선지(禪旨)를 문답한 것이다. 이들 선문답은 대체로 이론과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격외(格外)의 대담들이다. 게송 57수는 경허선사영찬(鏡虛先師影讚)’을 비롯하여 달마영찬(達磨影讚)’, 그리고 때와 곳에 따라 심경을 읊은 게송, 법제자와 출가승려 및 재가신도들에게 내린 시들이다. 기타의 3편은 참선곡, 화두드는 법, 훈계 등이다. 참선곡에서 만공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지만 참선하는 한 가지 일만은 진실하다고 하였다.(안후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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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거문고와 수덕사

 

충남 예산군 수덕사에 보관된 공민왕의 거문고 전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 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중심부에 우뚝 서 있다.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계곡이 골마다 흘러내리는 이곳은 예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고 일컬어 왔다. 여기에 불조(佛祖)의 선맥(禪脈)이 면면히 계승되고 많은 고승 석덕(碩德)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수덕사에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민왕의 거문고에 관한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 전설을 증명할 수 있는 공민왕의 거문고가 수덕사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를 더욱더 놀랍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민왕의 거문고가 과연 어떻게 수덕사까지 오게 되었을까?

 

공민왕의 거문고 얘기를 하려면 만공 스님의 얘기가 빠질 수 없다. 수덕사에는 1946년에 입적한 만공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만공 스님, 일명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선사는 근대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鏡虛)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 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이다.

만공 스님은 전라북도 태인에서 부친 송신통(宋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로 와서 태허(泰虛)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법명을 월면(月面)이라 하였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년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중들을 제접하며, 수덕사(修德寺),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을 새롭게 일구어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던 인물.

 

만공 스님은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이강공(李堈公)과는 친분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만공 스님에게는 궐내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혜가 따라 붙었다. 만공 스님과 이강공과의 접촉이 잦아들면서 그들의 친분관계는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강공은 만공 스님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어렵게 이강공이 소장하고 있던 공민왕의 거문고를 줄 수 없느냐는 말을 꺼냈다. 그 당시 공민왕의 거문고는 왕가의 보물로 이강공이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거문고는 왕가의 보물인지라 이강공과 만공 스님과의 친분관계가 아무리 두터울지라도 그의 부탁은 어림도 없는 일.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의 거문고, 즉 왕가의 보물을 보통 스님의 손에 넘긴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강공은 만공 스님에게 공민왕의 거문고 대신 다른 선물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땅을 달라면 원하는 만큼의 땅을 주겠고, 돈을 달라면 원하는 만큼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이다. 그러나 사실 스님이 땅을 소유해봤자 그 땅은 무엇에 쓸 것이며, 또 돈이 많아봤자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만공 스님이 탐내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공민왕의 거문고뿐이었다. 만공 스님은 공민왕의 거문고를 포기하지 않았다. 만공 스님은 궐내를 자주 드나들면서 이강공에게 부탁 또 부탁을 하였다. 끝내 이강공은 만공 스님의 설득에 못 이겨 공민왕의 거문고를 넘겨주게 되었다.

이강공에게 거문고를 받기로 한 약속은 받아내었지만 왕가의 보물인 공민왕의 거문고를 궐 밖으로 내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던 일. 만공 스님은 꾀를 썼다. 일명 개구멍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 대궐 후미진 곳에 안팎으로 몰래 드나들던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을 통해서야 거문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보물이 지금의 수덕사에 자리잡게 되기까지 이 얼마나 우여곡절이 심했던가.

만공 스님은 생전에 이 거문고를 그 어느 물건보다 아꼈다고 한다. 평소 시, 그림, , 음악 등을 섭렵하는 재주꾼이었던 그는 이 공민왕의 거문고를 탈 때면 언제나 수덕사를 둘러싸고 있는 덕숭산 정상에 자리잡은 전월사(轉月舍)라는 초가집에서 타곤 했다.

 

우리나라의 보물 중 하나인 이 공민왕 거문고 뒷부분에는 공민왕의 거문고를 입증해주는 한자가 적혀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이라는 금명(琴名)과 함께 만공 스님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이 글자가 이조묵의 서체라는 확증을 할 순 없지만 이조묵이 거짓으로 거문고에다 그러한 글을 새겨놓을 리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측이다.

 

대가의 실수인가? 연주자의 신기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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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정읍인물33인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근현대인물한국사(기역, 2015. 8. 15), 102109.

2)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