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거사 사리탑명(迦山居士 舍利塔銘)
가산거사(迦山居士)는 김수곤(金水坤, 1873~1950)의 호이다. 본관 김해(金海), 자는 공욱(共彧), 호는 죽헌(竹軒), 가산(迦山)으로 주로 가산거사로 불린다. 근대의 자선가. 1873년(高宗 10)에 가산(迦山) 인주(麟柱)의 아들로 정읍군 태인면(井邑部 泰仁面)에서 태어났다. 몽연(夢蓮) 김진민(金瑱珉 )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유생(儒生)으로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일찍이 백양사(白羊寺) 청류암(淸流庵)에서 좌선(坐禪)을 하다가 1937년 2월 28일 문득 입속에서 옥치(玉齒)와 같은 이사리(齒舍利)를 얻었음으로 1939년 10월 내장사에 사리탑(舍利塔)을 안치하고 영호선사(映湖禪師)의 기문(記文)과 손재형(孫在馨)의 오체혼합필체(五體混合筆體)의 탑비(塔碑)를 세웠다.
선생은 1922년 옹동면(瓮東面) 칠전리(七田里) 보안석교(保安石橋)를 사재로 가설하고 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미륵상불(彌勒像佛)을 조성하고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 금산사(金山寺) 등 여러 사찰에 불사를 했다.1) 1894년(高宗 31年) 동학농민혁명으로 건물이 소실된 칠보 석탄사를 중건했다.2) 또한 교육 사업에도 참여하여 태인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김복진3)의 생애와 활동을 기록한 문헌을 보면 "1936년에 만든 금산사(金山寺) 요청의 「미륵대불」과 1939년에 정읍 김수곤(金水坤)의 시주 3만원으로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착수하였던 법주사(法住寺)의 「미륵대불」이 있다. 그러나 「법주사미륵대불」은 광복 이후 윤효중(尹孝重)·장기은(張基殷)·임천(林泉) 등의 손을 거쳐 1963년에 변질된 형태로 완성되었었고, 현재는 청동대불로 변하였다."4)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수곤은 불심(佛心) 이 강산 불교신자로 부친 김찬주(김찬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금산사, 법주사를 비롯하여 전국의 유명사찰에 많은 시주를 하였으며, 칠보의 석탄사를 중건하였다.
1950년에 돌아가셨다. 묘는 태인면 거산리 항가산 남쪽 기슭에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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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崔玄植, 『新編 井州․井邑 人物誌』 (1983. 10. 8.), 381.
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호남인물검색 시스템>.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인지. 정주시지.
3) 호는 정관(井觀). 충청북도 청원 출신. 소설가 김기진(金基鎭)의 형이다.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이다. 1920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조각을 전공하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한민족백과사전.
4)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가산거사 사리탑명(迦山居士 舍利塔銘, 정읍 내장사 부도전, 155cm×75cm)
1939년 법주사 미륵대불(시멘트)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의 본존불상
1935년 3월 9일 밤에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금산사 미륵전의 본존불상이 불에 타 앞으로 넘어졌다. 사찰의 전언에 의하면, 이 불상은 솥을 엎어 대좌로 사용한 입불상이었는데, 사람들이 동전을 그 위에 던지곤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동자승이 그 동전을 주우려고 밤에 촛불을 들고 법당에 들어갔다가 그만 실화로 중앙 본존불이 불에 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언에는 미륵전에서 불공을 드리던 사람들이 실화한 것이라고도 한다.
중앙의 본존불상을 재건하기 위하여 1935년 9월 25일 기부금 모집원을 당국에 제출하여 3만 5십 원의 허가 금액을 받았다. 하지만 곧 예산변경원을 제출하여 10월 27일에 2만 1천 6백 원의 허가를 받았지만 실제 모금액은 1만 6천여 원이었다.
『금산사지』에는 “주지 황성렬사가 해광 김극인, 삼능 조영찬, 보응 김시택, 법운 국창용, 내장사 주지 매곡 정봉모, 구암사 주지 일헌 김종렬, 신사 김수곤, 비구니 유지승 등의 조력을 자(藉)하여 가산거사 김수곤 등 대방 단가의 시금 1만 6천여 원을 수하여 양공(良工) 김복진에게 명하여 소화 13년 9월 3일로서 소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1936년 7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38척의 불상, 김복진 씨 제작중 - 2백70일 동안 1만 4천원을 들여」라는 기사에서는 제작 기일과 순금 금박 6천 원어치를 포함한 제작비가 소요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위 두 기록을 비교하여 보면 제작 연도에서 큰 차이가 있다. 『금산사지』에서는 소화 13년, 즉 1938년 작이라 하였다.
그러나 1935년 12월경 착수하여 1936년 9월 3일 낙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936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여전히 모금 중인 상황이 전해지고 늦어도 가을에는 건립식을 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미륵불상에 대해서 『증산도 도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밤에 금산사 미륵전에서 불공을 드리던 사람들이 실수하여 장륙미륵불상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좌우 시립한 보살상과 미륵전은 화마를 피하였으나 가운데에 서 있는 미륵불만 불에 타서 왼쪽으로 넘어졌다. 장공 김복진(金復鎭)이 조각을 시작한 지 2년 9개월 만에 완성하여 1938년(戊寅年) 9월 3일에 육장 반(六丈半)의 미륵불을 모셨다는 것이다.
이 소조불상은 작가 스스로 ‘서울에서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서울에서 만들어서 기차로 운송하여 현지에서 조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 조각가 김복진이 제작한 이 불상은 11미터가 넘는 대형의 장육불상이다. 정면을 향하여 있으며 좌우에는 조선 인조대에 만들어진 협시보살이 있다. 머리 정상에는 붉은 색 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머리는 나발이다. 귀는 양쪽으로 늘어져 있으나 긴 편은 아니며 반개한 눈에 근엄한 표정이다. 몸에는 통견을 둘렀으나 양쪽 가슴이 길게 늘어져 보이고 왼손은 앞으로 들어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들어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두 다리는 치마 아래로 윤곽이 드러나 보이고, 아래로 지그재그의 옷 주름이 다리 사이를 관통하고 있으며 양손 아래로 내려온 소매의 주름도 지그재그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도상은 파괴되기 전의 불상을 참고로 제작한 것이며, 얼굴 표정과 손가락의 표현 등에서는 전통적인 조각과 달리 신식 조각가로서 인체의 특성을 불상에서 구현하였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이 남긴 작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불교상 제작을 신식의 조각가에게 의뢰하였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으며 소조불상을 서울에서 만들어 김제 금산사까지 기차로 우송하였던 것은 미술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은 소실 전 그 자리에 있던 불상 사진을 보고 제작하였으므로 원안에 충실하였으나 얼굴 표정이 조금은 어둡고 가슴팍의 근육이 아래로 늘어진 점 등은 일본에서 작가가 불교상을 제작할 때 영향 받았던 점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당당한 자세나 유려한 선의 흐름, 수직이면서도 유연하게 위로 솟은 듯 한 몸체의 율동감 등은 근대 조각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마디가 길고 고운 대개의 전통 불상에서 보는 것과 달리 인체와 유사한 손의 표현은 도상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창작의 힘을 발휘하는 예술가가 조성한 불교상임을 보여준다.
불교라는 종교 조각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조각가 김복진이 제작하고 진행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김복진의 불상 작업은 충북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에서 장엄한 대미를 장식한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김복진 생애의 마지막 조형 작업으로서 미완인 상태로 별세하게 되어 더욱 안타깝게 한 회한의 장소이기도 하다. 미륵대불은 법주사 가람 내에 팔상전의 서쪽 산자락 앞에 조성되었다. 재료는 시멘트로 높이 1백 척(尺)의 대작이었다. 우선 시멘트의 미륵대불 오른쪽 옆에 건립했던 <미륵불상조성상기념비(彌勒佛像造成紀念碑)>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법주사는 신라 진평왕 14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하였고 혜공왕 2년에 진표 율사가 전북 금산사에서 본사로 옮겨 7년 주석(駐錫)중 주로 미륵 불상을 주성(鑄成)하여 천여 년 동안 서 있다가 대원군 때 50층의 여대(麗代) 철제찰간(鐵製擦竿), 등간(燈竿)과 함께 없어졌다고 한다. 왕조의 쇠망을 뒤따른 민족사의 슬픔 속에서 옛날 미륵불이 서 있던 자리는 황량한 빈터로 남아 있었다. 여기 있어 전북 태인에 살던 가산 김수곤 거사가 본사 장석상(張石箱) 주지의 지도를 받아 이 자리에 미륵불상의 건립을 발원하고 가재(家財)를 헌공하여 1939년부터 80척의 불상을 건조하게 되었다. 조각은 거장 김복진이 조성 도중 1940년 아깝게도 요절하였고 가산거사 또한 1950년 향년 77세로 별세하였다. 물심양면으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완성을 거의 앞두고 회향을 보지 못한 채 별세하였으니 가산을 위하여 애통하다 하겠다. …
가산거사를 비롯한 다수 신도의 화주시주(化主施主)의 공덕은 이 불상과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1964년 6월 14일 갑진(甲辰) 음 5월 5일 점안식(點眼式)을 거행하니 그 신앙상 의의에 있어 고금에 다를 바 없으려니와 옛날 이 자리에의 미륵존상을 연상하면서 반 오십 년 만에 인연 공적을 길이 기념하는 바이다.”(서기 1964년 6월 14일/ 대한 불교 조계종 속리산 법주사 / 주지 박추담(朴秋潭) 찬(讚) /김충현(金忠顯) 서(書))
‘법주사 미륵대불은 은진미륵보다 키가 큰 60척이고 두상은 빡빡 깍은 머리 즉 관이 없는 나발이다. 제작기간은 금년(1939년) 봄부터 2개년 간에 2만원의 경비로 연 인원 약 8천명의 인부를 사용하여 완성키로 되었다. 재료는 돌로 쌓은 다음 콘크리트로 마감하는 기법을 쓴다. 불상의 모습은 신라 불에 가까우며 건전한 체격으로 표현한다.’ 라는 이 같은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다가 같은 해 3월 13일 드디어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조선 제일의 대불’이란 제목 하의 당시 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충북 속리산 법주사에 높이 75척이 되는 미륵존상이 조각되게 된다는 소식을 1200년 전에 진표 율사가 용화보전을 건조하고 그 안에 미륵존상을 안치시켰던바 백여 년 전에 풍우와 화재 등으로 변을 겪어 도괴됨에 이르러 이의 중흥을 생각하고 있던 차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거주하는 김수곤씨의 특지로 경비 약 3만원을 들여 전기와 같이 높이 75척 되는 미륵존상을 건조하기로 되어 지난 13일 정식 기공식을 동 사원 내에서 거행하였다. 더욱 이 불상 조각에는 조선미술원 김복진씨가 조각을 하게 되어 미술상으로도 더욱 빛나게 되었는데 내년 10월경에 준공을 보리라 한다. 만약 이것이 완성을 보게 되는 날에는 미술학상에도 일대 자료가 될 것인바 은진미륵 보다는 약 20척이나 높게 될 것이라 한다.” 1)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이렇듯 대중적 관심 속에서 차질 없이 건립이 진행되었다. 김복진의 원안에는 머리 위의 관이 없는 미륵 입상이었는데, 한마디로 금산사 미륵 입상과 흡사한 형식이었다. 금산사의 미륵 입상이라면 현재 소림원소장의 석고 미륵 입상이나 조선미전 출품의 「불상습작」과 함께 모두 동일한 형식이란 의미가 된다. 미륵불 모형은 전체적 느낌이 앞의 금산사 작품과 똑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로써 김복진은 동일한 미륵 입상을 설정한 이래 재료와 크기만 바꾸면서 변주하듯 미륵 사상을 조형적으로 심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완성을 앞에 두고 김복진은 1940년 8월 18일 요절했다.
1960년대 이후의 미륵대불은 김복진의 원형에서 형편없이 변조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법주사 미륵대불은 김복진 원안에 가깝게 조성된 것이라고 수정해야 할 듯하다. 부산 석정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법주사 미륵존상은 김복진의 원형을 거의 살려 낸 상태라고 했다. 해방기에 법주사를 방문한 바 있던 그는 미륵존상이 거의 외형을 드러낸 상태였으며 비계목을 설치한 상태로 제작이 중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미륵대불은 김복진이 제자들과 함께 제작하다 그가 사망하자 윤효중 등 제자들이 스승의 원안에 가깝게 일차 완성을 한 다음에 1950년대로 넘어가게 된 듯하다. 일설에는 윤효중과 함께 권진규도 약 6개월간 마무리 작업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다.
작가의 사망으로 비록 완벽한 완성은 보지 못했지만 작가에게는 심혈을 기울이면서 작가 생활의 한 전환점으로 삼았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그는 늘 사람은 역사 속에 살아야 한다고 이번에 동경을 간다는 것은 이제 내 일생을 바쳐서 예술의 진미를 알아내고 미증유의 예술품을 남기기 위해서이고, 속리산 법주사 대불․청주 용화사 불상을 완성하여 놓고 나서 최후로 동양미술사를 편집하여 놓을 일 등 등, 이상의 이상안(理想案)을 쉰 안에 다해 놓고 나서는 산수가 좋은 고요한 곳에 은퇴하여 갖고 조용히 독서하고 있다가 안면하기가 소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품었던 이상안을 반도 못 다하시고 40을 일기로 세상을 끝맺었으니, 그의 한이야말로 그 얼마나 깊었을 것인가”
이 같은 부인의 회고처럼 김복진은 법주사 미륵대불 조성을 즈음하여 새로운 인생 설계를 마련했다. 때문에 법주사 미륵대불은 작가 김복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중 있는 미륵대불이 보전 문제라는 다소 설득력 없는 이유로 1987년 4월에 철거되었다. 12일간의 해체 작업 결과 미륵대불은 애초에 예상과 달리 단 한 개의 철근도 사용하지 않고 돌로만 쌓아 올린 공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즉, 시멘트 내부의 철근 부식 등의 이유로 도괴 위험을 들어 철거했으나 김복진은 선진 기술로 영구성 문제 등을 이미 감안하여 시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도괴 위험의 이유로 김복진의 시멘트 불상 작품을 헐어 낸 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어떻든 법주사측은 김복진의 시멘트 작품을 철거하고 그 옆에 청동으로 재건립했다. 비록 이전의 불상은 시멘트 작품인지라 철거가 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청동대불은 김복진의 미륵대불 원형을 생각하여 재료만을 바꾸어 다시 제작했다고 하지만 현재 법주사의 청동불은 원래 김복진의 온화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친근감이 사라지고 자비의 모습보다는 중압감을 먼저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마디로 김복진의 작품을 철거한 것은 문화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철거 이유가 보전 문제상의 도괴 위험이었으나 김복진 불상은 예상외로 철근 한 개도 사용하지 않은 돌로만 쌓아 올린 특수 공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현재 법주사의 청동미륵대불은 원작가 김복진의 조형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청동상의 형태가 시멘트 불상을 원형 틀로 삼아 재 건립했다니 또한 아주 무관한 것도 아니다. 작가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하여 미완의 상태가 작가명 규명 작업에 걸림돌이 되었던 차에 이제는 청동으로 재료까지 바꾸었으니 작가명의 귀속 문제는 논란거리로 남을 소지가 충분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청동상이 시멘트 불상의 원형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면 김복진의 체취가 상당수 스며 있다고 간주해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따라서 이 청동대불의 작가명은 ‘김복진 이외 다수 작가의 참여’ 혹은 ‘원안 김복진 작가의 사후 여러 작가의 참여 후 완성’ 등과 같은 표현 방식도 차세대 작가를 위하여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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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일보. 1939년 3월 16일
2) 朴玉姬, “김복진 작품연구”, (2004. 2), 32~37.
1939. 3월, 법주사의 재촉으로 <미륵 대불>제작에 착수하다. 제작
기간 2년, 비용 2만원, 연인원 8천명의 인부를 동원하겠다고
<조선일보>1월 10일 자에 발표함.
미륵대불 사랑 代를 잇다, 김수곤과 그의 딸
전통시대부터 존재하던 속리산 법주사의 금속제 미륵대불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반출됐고, 이후 일대는 1939년까지 약 70년 동안 허허벌판으로 잡초만 우거진 채로 방치됐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손을 맞잡은 사람이 전북 태인 출신의 갑부인 가산(嘉山) 김수곤(金水坤)과 당시 법주사 주지 석상스님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배불정치에 크게 분개했다.
'당시의 주지 장석상씨는 대원군의 배불정치로 불상이 뜯겨 역사상 큰 오점을 후세에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에 일치, 바로 그 자리에서 김 씨의 사재로 미륵불을 더욱 크게 세우기로 했다. 조각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김복진 씨에 의해 높이 80자의 콘크리트 불상 건립에 착수했다.'-<경향신문 1964년 6월 15일자>
가산이 미륵대불 불사금으로 내놓은 사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1960년대 발간된 경향신문은 밝히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콘크리트 시멘트불이 낙성되자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의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는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김수곤 씨의 특지로 경비 약 3만원을 들였다'라고 김수곤이 희사한 불사금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우리나라 화폐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하의 소(牛) 가격은 '70원' 정도였다. 이를 현재 소값 4백만원 안팎과 비교하면 당시의 '1원'은 현재돈 '6만원' 정도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김수곤은 당시 한우 420여마리의 화폐가치를 법주사 미륵대불 공사비로 희사한 셈이 되고 있다. 전북지역 향토 사료에 의하면 가산의 집안은 부친 '김찬주'(金贊柱) 때부터 부를 크게 일궜다.
가산은 재력 만큼이나 불심이 깊었다. 따라서 그는 법주사 외에 금강산 유점사 53불, 금산사 미륵불, 관촉사 불사 등에도 시주를 많이 했고, 칠보의 '석탄사'를 중건하기도 했다.
김진민 작품 10곡병(十曲屛) 중 일부
또한 교육 사업에도 참여하여 태인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그의 조카에게 운영토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수곤과 법주사가 맺은 인연은 그의 딸 김진민(金王+眞珉·1912~1991)에게로 이어졌다.
역시 전북지역 향토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김수곤(金水坤)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7세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9세에 맹자를 익혔고 그의 집안에는 이당 김은호(金殷鎬), 성당 김돈희(金敦熙) 등 당대의 유명한 서화가들이 드나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아버지 가산의 권유로 9세부터 김돈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서예 실력을 연마했다. 그녀는 11세에는 백양사 우화루(雨花樓) 편액을 쓰는 등 소녀 서예가임에도 불구하고 강건하고 웅대한 서풍(書風)을 구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김수곤이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불상을 조성하면서 시주로 복장에 5천여 자(字)의 글씨를 써넣고, 그 내용은 금강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미륵대불 철거 후 작품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그녀는 말년에 만공스님을 자주 만나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일로 소일하시다가 1991년 타계, 평소 자주 들리던 속리산 법주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하여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이런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충북일보 / 조혁연 대기자 / 2014-05-13 오후 2:57:14
금산사의 화재 비화
https://cafe.naver.com/navi36/5 (원인 모르게 소실이 진실로 밝혀지다 퍼 온 글)
태극진경③:111 1934년 새해 아침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내가 봉천명(奉天命)한지 이제 26년이니 머지않아 무극주(无極主)께서 구천상제님 제위에 임어(臨御)하시게 되느니라.
전 도인은 각자 납폐지 십만 장씩을 100일 이내에 소화하라.』하시므로 봉행 하니라.
이해 3월 9일에 금산사의 미륵존불(彌勒尊佛)이 원인 불명의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신이하게 좌완(左腕,왼 팔)은 소실되지 않고 양협시불(兩脇侍佛)과 불전에도 불이 번졌으나 타지 않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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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의 경우, 현재는 불단의 설치로 말미암아 불족부분부터 보이지 않는다. 불단 넘어 내부로 진입하면 좌대 복련 바닥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솥부분은 지하로 처리했기 때문에 법당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주목할 것은 이 솥의 의미이다. 무엇보다 불상 제작상 평면의 바닥에 거대 입불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솥이라는 내부가 텅 빈 공간 위에 버팀목을 설치한 후 입불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재료와 함께 김복진의 탁월한 기술적, 조형적 역량이 확인된다.
신라 이래의 대표적 미륵도량에 ‘거대한 소조미륵상의 대좌 아래에 수안미대좌(속칭 쇠솟이라고도 함)’의 의미는 특이하다. 1)
이 같은 수미대좌로 본 견해에 반해 증산교 계통의 해석은 독특함을 보인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미륵전의 불상을 볼 때, 반드시 지하에 내려가 이 거대한 시루를 한 번씩 만져 보고 온다.’ 2)
물론 예전에는 참배객이 지하까지 내려가 솥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게끔 되었으나 현재는 통로를 차단시킨 상태이다. 그런데 이솥의 의미가 증산교 계통에서는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 교파 간에 논쟁까지도 있을 정도였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
금산사 미륵전 삼존불입상의 작가에 대한 정확한 규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재 금산사의 안내문 등에 작가명이 누락되어 있으며 금산사의 승려 가운데 이 불상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표명하는 증인도 만나기 힘들다고 한다. 그동안 일부에서는 미륵전의 삼존불은 김복진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삼존불입상 가운데 본존상만이 김복진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유통되곤 했으나 그 자세한 이유에 대해서는 규명되지 못했다. 그래도 ‘본존상=김복진 작품’이란 등식만 해도 상당히 진전된 견해였다. 심지어는 김복진 작품 운운의 《금산사지》까지 의심하는 견해까지 있어 더욱더 혼란스럽게 할 따름이었다.
“원래는 진표율사가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수성하여 혜공왕(766)에 봉안한 장륙의 동조 미륵존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하나, 조선 선조 30년(1597)정유재란에 불타 녹아 버리자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소조로 복구해 놓았고, 그 후 다시 주존 미륵불이 소실되어 1938년에 동경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김복진이 석고로 복원해 놓은 것이 지금의 이 미륵불이라 한다. 그러나 사지의 이런 기록들이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못되니 장륙미륵불입상이 서 있었던 그 연화대좌가 지금 불탄 대적광전 앞에 놓여 있어 미륵전이 예전에는 현 위치에 경영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3)
위의 인용문은 금산사 대적광전 동남 측면에 놓여 있는 연화대좌의 예를 들어 진표율사의 미륵존상 존재 유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내용이 수록된 사지의 내용과 함께 현존 미륵존상의 작가에 대한 사지 이외의 뚜렷한 신빙 자료가 제시되어야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에 확고한 증빙 자료는 확보되었다. 이를 소개하기에 앞서 문제의 <금산사지>부터 살펴야 하겠다. 우선 미륵존상이 봉안되어 있는 미륵전에 대한 역사적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 건축물은 조선불전식 3층 목조와즙으로 일명 용화료라 했다. 법상종 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으나 조선 선조 31년(1598) 왜란에 소실, 인조 13년 을해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했다.
그 뒤에 영조 23년(1747) 금파대사가 고종 광무 초에는 용명사가 3천 예금으로 중수했으며, 또 대정 15년(1926) 김호사가 조선총독부의 하부금 4만 6천여 원을 받아 중수하고, 다시 소화 13년(1938) 황성열 주지가 신도의 시우금 2천여 원으로 재중수했다. 외주고 13척, 내주고 44척, 총고 63척에 전면 62척, 측고 51척, 주내 전평 88평, 첨하 낙수내 건평 143평이다. 4)
이 같은 미륵전의 내부에 봉안된 미륵삼존상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본불상은 미륵전에 봉안한 법상종 시대로부터 숭봉하는 본존상이다. 신라 경덕왕 23년 갑진 6월 9일부터 시추하여 혜공왕 2년 병오 5월 1일에 화추한 개산조 진표율사의 소추상은 무보처의 단독상으로서 차는 이조 선조 30년 정유병화에 소실되었다. 현재 삼존상은 인조 5년 정묘에 수문대사의 소조상으로서 그 중에 주불일상은 소화 9년 3월 9일 야의 실화에 소실되었더니 주지 황성렬사가 해광 김극인, 삼능 조영찬, 보응 김시택, 법운 국창용, 내장사 주지 매곡 정봉모, 구암사 주지 일헌 김종렬, 신사 김부곤, 비구니 유지승 등의 조력을 적하여 가산거사 김수곤 등 대방단가 시금 1만 6천여원을 수하여 김복진에 명하여 소화 13년 9월 3일로서 소성하였다. 본불상은 도금소상으로서 주불상은 높이 39척의 입상이요, 보처상은 각 높이 29척의 입상이다.“ 5)
위의 기록에서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면
① 삼존상 가운데 주존상은 소화 9년 (1934) 3월 9일 밤 실화로 소실되었다.
② 그러나 당시 황성렬 주지가 가산거사 김수곤 등의 시주금 1만 6천여 원을 들여 소화 13년(1938) 9월 3일 완성하였다.
③ 본존상의 작가는 김복진이다.
④ 본존상은 도금 조상이며 높이는 39척으로 입상하다.
이로써 미륵전 삼존상 특히 ‘본불상’에 대한 의문의 상당 부분이 해결케 되었다. 《금산사지》는 또한 ‘미륵불주성력’이란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 도표에 의하면 제1차 진표율사에 의한 조성으로부터 제2차 수문대사의 조성을 밝혔다. 이어 소화 10년 (1935) 3월 9일(양력) 밤 ‘소아 등 부주의 소실’이 있은 후 제3차 조성으로 황성렬 주지 및 김복진에 의한 조성이 자세하게 언급되었다.
특히 자세한 내용은 조성 모금액에 관한 것이다. 당시 기부금 모집원을 당국에 제출하여 허가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 1935년 9월 25일의 기부금 허가 금액은 3만 5십 원이었다. 이것이 같은 해 10월 27일 다시 예산 변경 허가원을 제출하여 허가를 받았다. 그 내용은 변경 금액 2만 1천 6백 원으로 변경되었으나 실제 수입액은 1만 6천여 원이었으며 이 금액의 한도 내에서 지출되어 본존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이 내용은 본존상 조성에 관한 총지출액 이외에 한가지의 중요 사실을 추가하여 밝히고 있다. 그것은 본존상의 파괴가 소아 등의 부주의로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시사 한 바가 많다. 무엇보다 화재에 의한 망실이면서도 어떻게 삼존불 가운데 본존상만 소실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의 상태도 마찬가지이지만 좌우의 보처상과 본존상만이 아니고 보처상까지 손상이 갈 위치이다. 이것은 현존 본존상이 17세기의 작품과 다른 김복진의 작품으로 대체시키는 하나의 관건이 된다. 삼존상 가운데 본존상만 화재로 소실케 된 정황은 이렇다.
원래 삼존상 가운데 본존상은 커다란 무쇠 솥 위에 봉안되어 있었다. 때문에 본체 상과 좌대 아래의 솥 사이에 틈이 생겨 일반 참배객에 노출되어 있었다.(현재는 불단으로 차단시켜 놓음) 참배객들은 이 틈에다 시주금을 넣었다.
어느 날 동승이 솥 안에 들어가 시주금을 수습하다가 그만 한 손에 들고 있던 촛불로 본존상의 복장에 인화케 하였다. 인화성이 강한 소조상의 내부는 불길에 못 이겨 앞으로 쓰러지면서 도괴되고 말았다. 미륵전 본존상은 이와 같은 사연의 의해서 망실되었다.
그 후 황성렬 주지 등의 발원과 김수곤 거사의 시주 그리고 김복진의 작업에 의해 다시 조성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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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윤식, 『한국 불교사의 연구』 (교문사, 1988), 394,.
2) 안경전,『이것이 개벽이다.上』 (대원출판사, 1992), 403.
3) 최완수, 『명찰순례』① (대원사, 1994), 200.
4) 한국학 문헌연구소, 『금산사지』 (아세아문화사, 1983), 143~145.
5) 앞의책, 15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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