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성씨와 인물(삶의 주체)/태인의 인물

태인 현감(縣監) 신잠(申潛)

증보 태인지 2020. 7. 20. 10:53

현감(縣監) 신잠(申潛, 14911554)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명신(名臣)이다. 본관은 고령인(高靈人)으로 자()는 원량(元亮)이고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봉례공 신주(申澍)의 손자이며 삼괴 선생(三魁先生: 진사시(進士試)ㆍ문과(文科)ㆍ중시(重試)에 모두 제1등으로 합격하였으므로 삼괴라고 일컬은 것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며, 예조 참판(禮曹參判) 종호(從濩)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사이에 42녀 중 넷째 아들로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제 11()인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의 딸에게 장가들어 1491(成宗 22) 3월 모일(某日)에 한성(漢城)에서 출생하였다. 1491년인 성종(成宗) 22(辛亥)에 태어났다. 슬하에 11녀를 낳으시니 아들이 수용(秀溶)이요 사위가 판관을 지낸 청주인 한수(韓洙)이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요 문인으로 1513(中宗 8)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남궁(南宮, 예조(禮曹)의 별칭)에서 보인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사람들이 능히 가업(家業)을 계승할 사람으로 여겼다.

1519(中宗 14)에 고의(古義)에 따라 신과(新科, 현량과(賢良科) 병과(丙科)를 말함)를 신설하자, 선생이 그 선취(選就)하는 시험에 참여하여 모과(某科) 제 기명(幾名)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으나 임명되기 전에 일어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함)가 크게 변하여 신과(新科)를 비방하는 말들이 있었으므로 제도가 폐지되었고, 선생은 관직에서 쫓겨나고 다시 1521(中宗 16)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死)에 연루되어 전라도 장흥부(長興府)에 유배 17년 만에 양주(楊州:지금의 아천동)에서 주거의 편리만 인정받았다. 유배에서 풀린 뒤 20여 년 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 몰두하였다. 1539(中宗 34)에 부모상을 당하여 아차산(峨嵯山) 아래에서 묘막(墓幕) 살이를 하던 3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이른 적이 없었고, 인하여 그 곁에 집을 지어 여생(餘生)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곳은 강산(江山)과 금어(禽魚)의 즐거움이 있어 봄과 가을이 올 때마다 그곳에 나가 살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으니,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1543(中宗 38)에 다시 등용되어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의 주부(主簿)로 임명하였으나 주부라는 관직이 비록 공에게 마땅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은명(恩命)이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대궐에 나아가 사례(謝禮)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신잠은 주부가 됨은 무익(無益)하니, 고쳐 수재(守宰, 수령(守令))에 임명하여 치적(治績)을 살펴보려 한다.” 하고, 이에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보임하였다. 어떤 이는 공이 하찮은 벼슬로 굽혀 임명됨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서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오래도록 다스려 본 경험은 없지만, 본디 산야(山野)의 처사(處士)와는 동류(同類)가 아니고, 은명(恩命)이 이러함에 이르러 의리상 피할 수 없다. 하물며 옛날의 대현(大賢)은 모두 주현(州縣)을 맡는데 편안해 하면서 충분히 그 뜻을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을 뿐이니, 내가 어찌 꺼리겠는가?” 하고, 마침내 나아갔다. 공이 현()을 맡음에 있어 본래부터 일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수양한 바가 이미 많은데다가 또 세상일을 두루 겪은 것이 많았으므로, 이를 한 고을에 베풂에 있어서는 성대하여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백성들을 어루만짐에는 있어서는 그 자서(慈恕)를 다하고, 정사(政事)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신명(神明)을 다 바쳤으므로, 다스린 지 일년 사이에 온 경내가 한결같이 교화되고 복종하였다. 또 이 고을은 인순(因循)해 오던 폐단을 계승함이 지극하여, 명목(名目)이 없는 부()와 바르지 않은 세()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많이 섞여 나왔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조목조목 계획을 세워 구분하여 처리하여 거의 모두 다를 개혁(改革)함으로써 그것이 구원(久遠)하게 행해지기를 구하였지, 한 때의 이해(利害)에 따라 급히 변칙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백성 중에 일을 가지고 현()의 뜰에 이르는 자가 있으면, 말을 온화하게 하고 자신의 뜻을 낮추어 위엄과 꾸짖음을 가하지 않았고, 부결(剖決)은 합당하여 남의 의표(意表)의 밖에서 나왔다. 골육(骨肉)끼리의 소송(訴訟)이 있게 되면, 역시 반드시 은의(恩義)의 중함을 깨우쳐주고, 거듭 그것을 간절하고 상세하게 하므로 백성이 모두 부끄럽게 여기고 탄복하며, 뉘우치고 깨달아서 그 다툴 바를 잃어버리고 물러갔다. 그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예()를 흥기시키고 풍속을 선량하게 하며, 재목이 될 만한 이를 육성(育成)하고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방촌리사(坊村里社)에 널리 국당(局堂)을 설립하여 스승과 학생을 위한 장소로 삼았는데, 전포(錢布)를 많이 출자(出資)하여 그 비용을 넉넉하게 하는 한편, 종종 직접 방문하여 종용히 소속된 이들을 가르쳤다. 그 가르친 바는 사조(辭藻)를 기송(記誦)하여 익힘에 있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을 존양(尊養)하고 효절(孝節)을 기리고 선양함에 있었으므로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반드시 경이(敬異)를 더하고, 그 성명(姓名)을 기록하였다. 절기(節期)가 이르면 혹 늠미(廩米)와 술 및 음식을 보내어 장려(獎勵)하였고, 미미한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에 이르러서도 역시 반드시 직접 점검하였다. 그리고 아전들이 살피지 못한 것을 살펴 밝혔으므로, 아전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때마침 연이어 흉년을 당하여 유리(流移)하는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먹을 것을 바라자, 이에 부정공(富鄭公, 송나라 때 사람 부필(富弼)로 청주의 난민을 구제하는 데 대한 구체적 내용을 진달한 적이 있음)의 고사(故事)를 끌어와 방실(房室) 백 칸쯤을 벌여 설치하여 거처하게 하면서 매양 음식을 먹게 하였고, 대악(大惡)을 저지른 자가 아니면 반드시 몸소 임하여 살폈으며, 무릇 의약(醫藥)으로 조호(調護)할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조치(措置)가 섬세하고 구비되는 등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원근(遠近)에서 소문을 듣고서 다투어 태인(泰仁)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아 이에 의지해서 목숨을 온전히 한 자가 무려 수천인이었다. 이에 관찰사(觀察使) 김광철(金光轍)공이 조정에다 그 일을 올렸는데,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고서 일급(一級)을 가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공이 비록 은명(恩命)의 무거움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맞는 직책을 얻지 못한 채 오래도록 현()을 맡은 것이 자기의 뜻은 아니었으나, 연이어 국상(國喪, 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의 죽음을 말함)을 만나고, 또 흉년이 거듭 드는 바람에 관직에서 떠나갈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현()을 힘써 다스린 지 6년 만에 마침내 종묘서 령(宗廟署令)으로 내직에 돌아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공을 애모(愛慕)하여 머물러 주기를 바랐으나 그럴 수 없자, () 대제학(大提學) 소세양(蘇世讓)공에게 선정기(善政記)를 청하고, 비석을 세워 덕을 드러내어 밝혔다.1)

1543(中宗 38)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부임해 1549(明宗 4) 간성군수(杆城郡守)로 갈 때 까지 7년 동안 재직하며 사부학당(四部學堂: 북에 세운 교육기관)을 세워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선정을 높이 받든 그곳 주민들이 그의 선정과 치적을 추모하기 위해 선정비(善政碑)2)를 건립하였다.3)

이 선정비는 신잠의 어진 정치와 행적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 림(儒林)인 김 원(金 元: 道康人), 백삼귀(白三龜: 水原人) 등의 발의(發議)로 이 비()를 세우고 생사당(生祠堂: 武城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또 그의 가족들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성황당(城隍堂)에 봉안하고 삭망(朔望: 115)으로 다례(茶禮)를 올리고 태인 고을의 안녕(安寧)을 빌었다. 신잠 소상은 전라북도 지정 지방민속자료 제3호로 보존되어 면사무소에 보관하고 있다. 1553(明宗 8) 상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다 그곳에서 죽었다. 상주 백성들은 그를 부모처럼 받들었다.

신 잠(申 潛)은 간성군수 등을 거쳐 1553(명종 8)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역시 그곳에도 선정을 베풀던 중 1554년 향년 64세에 목숨을 다하였다. 장흥예양강서원(長興汭陽江書院), 태인무성서원(泰仁武成書院), 상주옥성서원(尙州玉城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의하면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견본착색(絹本着色, 비단 천에 여러 색을 칠하여 그린 그림)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 원문에는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로 소개되어 있고 심매도(尋梅圖)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라고도 불리고 있다.화조도(花鳥圖)가 그의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난죽(蘭竹)을 잘 그렸다. 유집(遺輯)으로는 영천집(靈川集)이 있으며,

태인에는 이외에 신잠 선생 소상(申潛 先生 塑像: 지방 민속자료(地方民俗資料) 4)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원량(元亮)은 문장에 능하고 서화도 잘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으며, 풍도와 아량이 있어 인망이 자자하였다. 계해년 진사(進士)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기묘년에 현량과(賢良科)에 뽑히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에 파방(罷榜)되어 홍패(紅牌 붉은 종이에 쓴 과거 급제증)를 거두어 가고, 마침내 백패(白牌 흰 종이에 쓴 진사 합격증)마저 잃어버리자, 아차산에 은거하며 절구 한 수를 읊기를,

 

홍지(紅紙)는 회수되고 백패(白牌)는 잃어 버렸으니 / 紅牌已收白牌失

진사시의 장원 또한 헛이름일세. / 翰林進士摠虛名

돌아와 아차산(峨嵯山) 밑에 사니 / 從此嵯峨山不住

산인(山人)이란 두 글자야 누구와 다투리. / 山翁二字孰能爭

(출전: 해동잡록 권4. 신잠편)

*홍지: 장원급제 한 자에게 임금이 내리는 교지

*백패: 진사시험 합격증

 

하였다. 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세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모두 이름이 났었다.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 지음(醉題梨花亭)

 

[원문]

"이곳에 와서 놀던 그날 어느 사이 30년이 지났는데,

우연히 옛 자리 찾으니 쓸쓸한 마음 절로 상하네.

정자 없는 뜰 앞엔 배꽃나무만 남아 있고,

가무하던 그 사람들 찾아 볼 길 없구나."

 

[풀이]

여기와 놀던 때가 삼십대 청춘,

우연히 옛자취 찾아보고 눈물지었오.

뜰 앞에 배꽃은 피어 있건만,

그 때 함께 놀던 이들 어디로 갔나. 4)

(출전: 한경지략(漢京識略)2 명승 · 누정 · 제택, 문일평 근교산악사화중 이화정과 일옹정)

 

신잠비(申潛碑)

 

19844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된 지방문화재로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92번지에 있다.

1549(명종 4)에 건립된 신잠의 비석이다. 비는 높은 자연석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세웠는데, 비몸돌의 윗변 양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크기는 가로 81, 세로 189, 두께 19이며, 비의 좌대(座臺)는 가로 150, 세로 92, 높이 90로 되어 있다. 비문(碑文)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해서로 썼으며 비액은 전서로 쓰지 않고 해서로 쓴 것이 특징이다. 지은 글이 오랜 세월의 풍우(風雨)로 닳아 없어지고 석질(石質)의 변화로 문자(文字)를 알아보기가 어려워 졌다.

 

 

신잠 비문(申潛 碑文)

 

새 그물을 치고 대밭 집에 한가히 있음에 베옷에 띠 두르고 기뿐 얼굴로 자기를 소개 하면 서 보기를 원하는 두 선비가 있으니, 김태학 생원과 백태 학생 삼귀였다.

우리는 태인 고을에 여러 대를 살았다면서 신잠 군수의 행적을 말하였다.

이 고을은 교통이 혼잡한 곳으로 인가는 드물되 일은 많아서 부역이 자주 있고, 조세 부담 이 무겁다. 늦추면 예산이 부족하고 서두르면 원망이 심하니, 둘 다 병이되는 사리를 깨닫고, 신군수가 갑진년 상반기에 먼저 읍민의 폐해를 개혁할 법을 세우고, 읍민을 무마하며, 송사에 삼가고 자기는 엄하게 다스리며 사람을 대하는 것을 너그러이 하니, 읍민이 기꺼이 따르다.

자유가 무성군수로 읍민을 예로서 가르치니, 공자가 기뻐하시다의 명언을 본받아 이러함이 백성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형법으로 엄하게 백성을 억누르니, 순후하고 아름다운 풍습이 드물게 되었다. 어찌 법으로만 하리오.

학문을 일으키고 풍습을 변화시킴에 뜻을 하고 마을에 서당을 세우고, 서책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녹미를 남기여 스승을 맞아 고을의 준수한 자제를 가르치고,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며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여 염치를 갖게 하며, 순후하고 독실한 행동으로 과오를 범치 않게 하니, 호협하고 교활하던 벼슬 하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마음을 고쳐 착한 행동을 하게 되어 차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거처하는 방 벽에 청렴, 신중, 근면을 대서하여 부쳐 좋고 벼슬하는 법도는 삼으면서 동 편에 집 수 칸을 얽고 틈이 나면 군민과 더불어 거문고 치고, 시를 읊어 속세의 진애를 물리 쳤다.

옛날 신라 말에 최문창 고운이 힘써 이 고을에 있었던 유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우리 신 군수의 시문의 재주와 흉금의 지혜가 천 년 전의 최고운과 같으며, 읍민이 사랑하고 부러워함이 최고운에 뒤짐이 없다. 신 군수의 이름은 잠이요. 자는 원양이며, 고령인으로 조선조 정승을 지낸 숙주의 증손이 며, 삼괴선생 호종의 아들로 가훈을 받들고 가업을 이었으며, 문장과 서화를 세상에서는 삼절이라고 칭송하였으니, 찾아와 배우고자 한 선비가 문 앞에 가득하였다.

이제 관직이 만료되어 떠났으나, 군민을 다스리는 것은 교묘한 포용으로 공적이 많았다.

군민의 노소가 망설이지 말고 돌을 갈고 선정의 치적을 색겨 거리에 세우기로 회의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 하였다.

원양의 치적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르쳐 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이 지방군수로서 정 사를 잘 함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내가 늙고 졸렬하여 어찌 기문을 지어 여러 사람을 만족하게 하리요 만은 원양은 계유년 진사 시험에 합격한 동문생이며, 시산과 나의 집 거리가 머나 잘하는 정사를 고을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며, 또 역사들이 대서특필한 서책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어찌 나의 글이 필요하리요 만은 두 선비와 마을 노인들의 요청을 사양치 못하고, 또 뒤에 부임할 군수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가정기원 二十八 년 창룡기사중춘개망승전대부전의

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이양

진산 소 세 양 기

 

 

영천자 신잠(申潛)의 탐매도(探梅圖)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여기서 살펴 볼 탐매도는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 작품이다.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길이가 210.5cm, 폭이 43.9cm로 횡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탐매도는 눈 속에 피어 있는 매화를 찾아가는 선비의 모습을 뛰어난 솜씨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그림은 선비가 동자와 함께 초봄이 올 때마다 늘 당나귀를 타고 장안(長安)에서 파교(灞橋)를 건너 설산(雪山)에 들어가 한 떨기 매화를 찾아 길을 떠났다는 중국 당나라 때의 맹호연(孟浩然)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러한 소재는 문인 취향에 잘 맞기 때문에 예부터 산수화의 화제로 곧잘 등장하여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가족과 이별하는 모습에서 다리를 건너는 모습, 그리고 매화꽃이 핀 모습이 긴 두루마리로 된 한 화면에 담겨 있다.

눈 내린 산속 풍경이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보여주며 여기에 엷은 채색을 가미하여 정교하게 그렸다. 겨울의 눈 속에 매화가 마치 눈꽃같이 피어 있는 모습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향기롭게 살아가는 선비의 자세를 보게 한다.

적막감이 감도는 설경을 배경으로 익명의 선비가 말을 타고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할 때, 문득 뒤따르는 동자의 발걸음이 더디다고 느꼈던지 고개를 돌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동자는 매화를 찾는 주인의 시심(詩心)이나 조바심 따위는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춥고 지친모습을 사실감 있게 표현되었다.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있는 매화나무에 핀 하얀 꽃이 그림의 주제를 분명히 해주고 있고, 멀리 높은 계곡에 흘러내리고 있는 폭포는 두 사람이 이미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런 모든 정경들이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고, 세부 묘사와 설채법도 뛰어나 원숙한 경지에 이른 신잠의 그림세계를 알 수 있게 한다.

신잠은 기묘사화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게 됨으로써 제약된 현실을 벗어나 자연으로 도피하여 마음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망을 가졌을 것이다. 옛 성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귀를 타고 설중매를 찾아 유유히 산 속을 거닐며 세속을 멀리하고 자연에 몰입하여 인간의 본성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화의(畵意)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탐매도를 그리게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탐매도를 감상하는 사람이 신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화의(畵意)에 관해 설명을 듣지 않는다 해도 그림의 현실 장면의 뒤에 숨어 있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하고 공감하면서 화가와 같은 정신세계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감상자가 실제로 탐매의 풍류를 실제로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의 정서를 더욱 절실히 공감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영천자 신잠(申潛)신잠의 낙관

 

 

영천자 신잠(申潛)신잠의 글씨 1

 

영천자 신잠(申潛)신잠의 글씨 2

 

 

안동 농암고택 긍구당 현판

 

 

신잠선생 영상(泰仁申潛先生影像)

 

1973623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조각상(彫刻像)은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 명관(名官)이던 영천(靈川) 신잠(申潛: 14911554) 선생의 영상(影像)이라고 믿어 오고 있다.

신잠 선생은 중종(中宗) 38(1543: 癸卯)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부임하여 명종(明宗) 4(1549: 己酉)까지 7년간 동(東西南北)4학당(四學堂)을 세워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무명잡세를 없애고 학자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치적(治積)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후 강원도(江原道) 간성(杆城) 군수(郡守)로 떠나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선생의 치적(治績)과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고 성황산(城隍山: 泰仁)에 당우(堂宇)를 지어 선생의 조각상(彫刻像)과 부인(夫人), 큰아들(長子)의 상, 그리고 시녀상(侍女像), 호상(虎像)까지 함께 봉안(奉安)하여 선생을 기념 하였다. 조각상은 모두 나무로 만든 입상(立像)이며 화려한 원색을 사용했다.(선생은 첫째 부인에게 두 딸을 얻고, 재취에게는 소생이 없고 다만 시비(侍婢)에게서 아들 하나를 보았다. 조각상과 부합한다. 호랑이는 간향활리(奸鄕猾吏)에게 무섭게 형장을 내리친 신잠의 재림(再臨)을 희구하는 여망이었다./이종범)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每年) 정월(正月) 삭망(朔望: 一日十五日)에 신잠 선생께 제사(祭祀)를 올려 태인(泰仁) 고을의 태평(太平)과 국세(國稅) 상납시(上納時) 풍랑과 도적 같은 불상사(不祥事)가 없기를 기원하였다.

이곳을 성황당(城隍堂)이라고 불러왔는데 이 영상(影像)을 봉안했던 성황당은 1950년경에 낡아 헐어졌으며, 영상(影像)은 현재 태인면사무소에 보존되고 있다.

1998년에 항가산(恒伽山: 相遠亭 ) 중턱으로 새 집을 지었으나 아직 옮겨가지는 못했다.

영상은 모두 나무(木材)로 만든 입상(立像)이며 조각수법(彫刻手法)이 매우 정교(精巧)하나 만든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크기는 신잠 선생(申潛 先生) 85.6, 부인상(夫人像) 76.5, 장자상(長子像) 58.5, 시녀상(侍女像) 55.5, 호상(虎像) 61.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