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성씨와 인물(삶의 주체)/태인의 인물

서예가 김진민(金瑱珉)

증보 태인지 2020. 7. 16. 10:20

일제 강점하의 서예와 김진민(金瑱珉)

 

 

윤범모(尹凡牟)

 

. 머리말

 

몽연 김진민(夢蓮 金瑱珉, 1912-1991)은 일제 강점하 여류서예가로 활동을 했다. 그는 조선미전에 여덟 번 참가하여 모두 16점의 서예작품을 발표한바, 그 가운데 5점은 특선을 차지했다. 조선미전 등 서예 공모전에서 이렇듯 높은 성과를 보인 서예가 특히 여류서예가는 일찍이 없었다. 그것도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10대에 이룩한 성과였다. 더불어 그는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사찰의 현판 글씨를 남겼는데, 그 역시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이룩한 성과였다. 대작으로 영광 불갑사의 <佛甲寺>나 장성 백양사의<雨花樓> 같은 편액은 작가의 나이 불과 11세의 작품이다. 김진민은 당대 서단(書壇)에서 여성으로 그것도 어린 10대의 나이로 일가를 이룬 불세출의 서예가였다.

김진민은 전북 정읍 태인면 태흥리에서 천석꾼의 대지주인 가산 김수곤(迦山 金水坤)의 무남독녀(無男獨女, 양자 제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했고, 그의 총명함은 9세에 맹자를 수학할 정도였다. 부친 가산거사(迦山居士)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금산사와 법주사의 미륵대불(彌勒大佛) 조성 시 대시주자(大施主者)일 만큼 불사(佛事)에 적극적이었다. 김진민이 10대의 어린 나이로 사찰의 현판 글씨를 쓰게 된 배경은 이와 같은 불교 가정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명필로 소문이 난 김진민은 당대 서화계(書畫界)의 대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를 스승으로 삼아 사사하였다. 특히 그는 웬만한 팔씨름에서도 지지 않을 만큼 완력(腕力)이 세었는데, 이는 글씨를 쓸 때 필력(筆力) 구사(驅使)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김진만은 이진형과 결혼하여 12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4명을 일찍 여의었고, 양육과 건강 문제로 작가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1)

김진민은 1920년대 서예계의 독보적 존재로 천재성을 발휘했던 이색적인 존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논고는 물론 그 흔한 서예전시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 예컨대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의 <한국현대서예사>(1981)를 비롯 예술의 전당 주최 <한국서예 1백 년> (1988) 같은 대형 서예전시 등에서도 주목받지 못했으며, 작가가 전북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미협 전북지회 발행 전북미술근대사(1997) 같은 책에서도 빠지어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일제하 서예계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상을 보인 여류서예가 김진민과 그의 서예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 경원대 미술대 교수

1. 김진민 연구와 관련, 필자는 2002년 작가의 유족 이성기 님으로부터 증언과 자료협조를 받았기에 이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더불어 작가 발굴에 도움을 준 대전대 강탁림 교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식민지하의 서예 분야는 직업적 서예 인구만 양산했지 격조 있는 서예의 발전상은 보기 어려웠다는 평가이다. 일제하 서예 분야에서의 예술성 유무 문제는 냉정한 검토를 요구한다고 본다. 다만 이 자리에서 확인할 것은 바로 장르의 명칭 문제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글씨 분야를 일본식으로 서도(書道)라고 통칭했다. 하지만 해방이 되어 일제 잔재를 걷어내면서 글씨 예술은 서예로 개칭되었다.

글씨 예술의 이름으로 서예로 바꾼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다. 식민지하 서도의 시대는 가고 행방 이후 서예의 시대가 도래했음은 서예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의미한다. 이 대목에서 전통적 글씨 쓰기의 명칭을 서도에서 서예로 바꾸었음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이제 한반도에서의 글씨 쓰기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독자성을 획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김진민의 가계와 스승 김돈희의 역할

 

가산거사 김수곤은 전북 정읍 태인면의 천석꾼 대지주였다. 김진민은 무남독녀 외딸로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김진민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불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불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생가와 가까운 내장사를 자주 왕래했으며, 이는 뒤에 사찰의 현판이나 사리탑 비명을 집필하게 된 배경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7세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 9세에 맹자를 익혔다. 11세에 <불갑사> 현판을 비롯하여 명필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서예가로 입지를 굳혔다. 12세에 조부 김기섭의 묘비명을 집필했고, 특히 김진민은 팔씨름을 잘해 웬만한 남자들과 겨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남성적 필치의 서풍과 무관하지 않은 부분이다. 김진민은 12세인 1924년 조선미전에 처음 출품한 이래 모두 8번 참여하여 16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조선미전의 서예부가 폐지되는 1931년까지가 그의 공식적 서단 활동 기간이다. 그러니까 10대의 어린 나이에 서예가 활동을 하고 사라진 상황에 해당하는 신화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이진형(경동고 교사 역임)과 혼인한 뒤 12명의 자녀를 두었고, 양육과 건강 문제로 서단 활동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아들 이성기의 증언에 의하면, 김진민은 가정교육을 중히 여기며 거의 집안에서만 생활했고 시부모 봉양을 성심껏 했다고 한다. 더불어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며 <국가 재건 당면문제>와 같은 문건도 집필하여 자녀들에게 삶의 지표로 삼도록 교육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과 물질보다 인간성 회복에 관련된 것이었다. 본격 서예작품은 제작할 수 없었지만, 가정에서 수행의 방편으로 사경(寫經) 작업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는 22~23세경까지 서예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유족은 추정한다.

김수곤은 재력을 바탕으로 여러 사찰의 불사를 도운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전답을 팔아 불사에 도움을 줄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13) 그가 사주하여 이룩한 대표적 불사의 목록만 보아도 사찰에서의 그의 활동상을 짐작하게 한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소조 본존상

충남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상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시멘트 미륵대불

 

이들 3점은 대시주가 김수곤이지만 불상의 작가가 김복진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한다.14) 정혜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 뒤에 불화는 보응(普應)의 작품(1943)으로 그 화기(畵記)의 시주자 명단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15)(도판1, 2)

 

전북 정읍군 대인면 태흥리 / 淸信士 癸酉生 金迦山 / 淸信女 乙亥生 李大願性 / 長子 甲寅生 鎭慶 / 子婦 丁巳生 李泳喜16) / 胥 甲辰年 李璡亨 / 女息 壬子生 瑱珉

 

이로써 보면 김수곤의 가족은 부인 이대원성, 장자 김진경(양자)과 강영희 부부, 그리고 딸인 김진민과 그의 부군인 이진형 부부임을 확인하게 한다. 관음전 관음보살좌상의 시주자는 김수곤이고 작가는 김복진 그리고 현판은 김진민, 이들 3인의 특이한 인연은 눈길을 끈다. 김복진이 서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특히 전각이나 추사의 존재를 언급한 것은 이렇듯 김진민을 당대 서단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김진민은 9세에 성당 김동희를 처음 만나 서예 스승으로 삼고 그의 문화에서 수학했다. 김돈희는 일제 서단(書壇)에서 하나의 거목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하던 서예가였다. 19225월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미술 정책의 하나로 연례 공모전인 조선미전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당시 신문은 주요 작가를 탐방 그들의 조선미전 출품준비 상황을 소개하면서 미전 홍보에 앞장을 섰다. 매일신보서예대가(書畵大家)’의 첫 번째로 서예가 김돈희를 선정, 기사화했다.

 

무교정에서 있는 서화협회를 어느 날 오후에 방문하였는데 질서(質素)하게 아무 장식이 없는 방안에서 그 회장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씨가 옥판선지를 앞에 펴놓고 벼루에 붓을 담아 가면서 출품하려는 작품에 휘호(揮毫)하는 중이요, 양화가로 유명한 모 화백은 옆에서 소설 삽화를 그리기에 골몰하는 중이다. 김 씨는 세상에서 아는 바와 같이 조선에서 손꼽는 필가로 그 안진경(顏眞卿)의 골수를 얻은 필법은 누구나 탄생하는 바이요, 기왕 내각에 관리가 되었을 때 고종 대 황제께서 오셔서 깊이 칭찬해오신 광영을 가진 대가이다. 지금은 충추원에서 출근하는 여가로 서화협회의 회장이 되어 그 회무의 발전에 노력하는 중이요, 이번에 조선 미술 전람회 제1회 심사위원으로 촉탁되었다. 씨는 그 온화한 얼굴에 긴장한 기운을 띄우고 가끔 미소를 보이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예서로 쓰는 중이다.”17)

 

위의 기사처럼 김돈희는 조선 유수의 필가(筆家)’로 안진경의 골수를 얻어 서예가로 괄목할만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그렇다면 김돈희의 서예관은 무엇일까. 김돈희는 서화협회보서도(書道)연구의 요점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조선 소화계의 본격적인 단체라고 볼 수 있는 조선서화협회의 기관지에 김돈희는 서예 부분을 맡아 서예의 요점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그만큼 서단에서의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는 조선미전의 심사위원과 서화협회장 회장으로 미술계에서 영향력을 크게 떨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그에 대한 후진 서예가의 평가는 다음과 같은 혹평을 낳게 했다.

 

13. 예향 춘추 전북 서예 100년사, 전주 KBS, 1996. 9. 22 방영.

14. 졸고, 김복진 불상예술의 세계, 아세아 문화연구(1), 북경 인민출판사, 1995. 11.

이성경 외, 김복진의 예술세계, 얼과 알, 2001, 재수록.

졸고, 김복진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2006.

15. 졸고, 김복진 제작의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상 발굴기, 아트 인 컬쳐, 2002. 10.

16. 화기 가운데 이영희라는 이름은 誤記이며 본명은 康泳喜이다.

17. 조선미전 출품준비에 忙殺書畵大家, 매일신보, 1922, 12

 

일제하 선단에서 김돈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발언이다. 그만큼 선단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는 뜻이며, 거꾸로 이 지적은 김돈희의 영향력에 다른 폐해도 적지 않았음을 암시한다.20)

 

. 김진민의 조선미전 출품작

 

김진민의 조선미전 참가는 1924년 제3회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931년까지 매년 참가하여 총 16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 작품 가운데는 5점의 특선작도 포함되어 그의 기량을 짐작하게도 한다. 다만 그의 작품은 1931(10) 전시를 끝으로 마감되는데 이 해부터 조선미전은 서부(書部)를 폐지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조선미전의 서예부 폐지는 김진민의 작품발표 무대를 제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미전 출품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3(1924) 唐詩입선

4(1925) 蘭亭序4

5(1926) 幽蘭賦특선, 書譜節錄입선

6(1927) 讀書樂특선, 竹籬茅屋입선

7(1928) 郡中西園, 翠微山居, 學書爲樂이상 무감사 입선

8(1929) 陋室銘특선

9(1930) 燕人群花특선, 書懷입선, 西原驛頭입선

10(1931) 蘭亭集字특선, 官河입선, 西漢隷입선

 

12세의 김진민은 제3회 조선미전에 처음으로 입선을 하여 서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출품작은 행서(行書)로 활달하게 쓴 唐詩였다(도판 3). 당시의 언론은 신진 여류서예가인 혜연 방무길(蕙淵 方戊吉)을 주목했지만, 전북 정읍에서 거주하는 10대 초의 불하(不碬)(초호, 初號) 김진민의 존재는 주목하지 않았다. 4회전(1925)에 서 13세의 김진민은 蘭亭書(도판 4)를 출품하여 4등상을 수상했다. 이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를 충실하게 임서(臨書)한 듯 학습 단계의 서풍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 말미에 글자 하나를 누락시켰다는 표기를 했으며 초보자답게 경직된 서풍을 보이지만 조선미전에서 수상작의 하나로 주목을 받았다.

5회전의 경우, 14세의 김진민은 해서에 가까운 행서 유란부(幽蘭賦)와 사군자에 김진우 씨의 추죽(秋竹)이 있어 사람의 이목을 끌고 있다22)고 소개했다. 6회전에서도 김진민은 서예 부문으로 유일한 조선인 특선작가로 선정되었는바, ”특선 된 김진민 씨의 독서락(讀書樂)이란 글씨는 실례의 말로 여자의 티도 볼 수 없이 웅건한 필치에 감복치 아니할 수 없었다.“23) 고 소개했다. 여류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김진민의 작품은 웅건한 필치를 보여 여성적 티를 내지 않고 있음을 전달해 준다. 이들 작품에 대한 구체적 평가는 다음과 같은 조선미전 인상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선의 영예를 독대(獨擡)한 김진민 양의 행서(行書) 독서락은 단려온건(端麗穩健)하여 장중(場中)의 백미(白眉)됨에 부끄럽지 아니하나 나란히 걸려 있는 초서(草書)죽리모옥(竹籬茅屋)의 일폭은 아직 필치 필력에 다 같이 불급처(不及處)가 있음을 느끼겠다. 그러나 이것은 연소 규수(年少 閨秀)의 작품인가 하고 보면 더욱 그 재기가 사랑흡다.”24)

8(1929)에 이르러 김민진은 아호를 불하자몽연(不瑕子夢蓮)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1932년부터 조선미전의 서부 폐지와 더불어 김진민의 작품활동은 점차 대중의 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20. “여기서 판을 치는 것은 김돈희의 방법을 그대로 재현하여 현대 서예라는 명목을 들어 본래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을 구실로 자신의 무식을 정당화하려는 부류들의 대두가 해방 후 年年歲歲 강성하기만 한 것이 오늘의 한국 書藝像이라 하겠다. 물론 김돈희의 제자인 까닭에 그 수법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김돈희를 지적하여 그래도 견문과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가정

한다고 그 제자는 그만한 양심조차 지니지 못하는 것도 世降俗抹의 현상인 바에야 어찌 이를 탓할 것이겠는가. 그리하여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족문화 발전의 일환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개최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20여 회를 계속하는 동안, 그 서예부에는 바로 鮮展의 서도부를 장악하던 김돈희와 동일한 방법으로 일개인이, 그도 동일인이 그의 서풍만을 고집하여 왔 다는 사실이 곧 한국의 현대 서예가 당면하고 있는 眞相이다.“ (김응현,한국현대서예론)

22. 朝鮮魂懊惱도 싣고, 매일신보, 1927. 5.14.

23. 금일부터 개막되는 제6회 미전 인상, 중외일보, 1927. 5. 25.

24. 미전 인상기, 중외일보, 1927. 6. 1~6. 11.

 

 

. 김진민 작품의 서체와 특성

 

김진민은 행서, 해서, 예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했다.25) 그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육조체를 수학한 듯 보이는 바, 육조체를 잘 구사하면서 해서와 행서가 튼튼해지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는 육조체는 황정견체(黃庭堅體)와 친연성이 강하며 여기서 골기(骨氣)가 있어 탄탄한 서풍을 보인다. 산곡도인(山谷道人)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만년작 송풍각시권(宋風閣時券)(대북 국립고궁 박물관(臺北 國立故宮 博物館) 소장) 등에서 보듯 송대(宋代) 행해서(行偕書)의 일가를 이룬 서예가이다. 특히 황정견은 선불교의 요체를 자신의 서예에 깊이 수용했다. 그는 글자 중에 필()이 있는 것은 선가(禪家)에서의 구절 중에 혜안(慧眼)이 있는 것과 같다.”26) 라며 선사상과 서예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취급했다. 서체상 김진민의 특징은 스승 성당 김돈희와의 친연성을 무엇보다 헤아리게 한다. 김돈희는 중국의 안진경과 황정견의 서체를 선호했다. 따라서 김진민의 서체적 특징은 성당식(惺堂式) 안진경체라고 범주 설정을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강건하고 웅대한 서풍을 구사했다는 의미이다.

안진경의 서풍은 웅건하고 강건하다고 했고, 더불어 위엄이 있고 온아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웅건하고 온아하다는 평가는 김진민의 서풍에서도 간취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김진민의 조선미전 출품작을 중심으로 그의 서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미전 출품작 가운데 행서(行書) 계열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특선작 독서락(讀書樂)(1927)(도판 6)은 활달한 필치를 구사하는 어린 소녀의 티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이에 반해 군중서원(郡中西園_(1928)은 앞의 작품보다 더 활달한 붓놀림을 보여주었으나 전체적으로 짜임새는 약한 편이다. 학서위락(學書爲樂)(1928)은 보다 큰 글씨로 시원스럽게 서풍을 구사했으나 역시 짜임새의 약한 면모를 보인다. 특선작 누실명(陋室銘)(1929)(도판 7)은 성당풍(惺堂風)의 전형적 행서풍의 글씨이다. 왕희지 서풍의 기본에 황정견 서풍을 가미한 분위기를 보인다. 이 작품의 특징은 글씨의 끝을 길게 빼며 삐침을 강조하고, 역시 파임은 길고 강하게 처리한 점이다. 글씨가 상하로 긴 만큼 좌우의 삐침과 파임을 길게 처리했다. 이는 김진민의 서풍과 성당 김돈희 서풍과의 친연성을 쉽게 파악하게 하는 작품의 좋은 예 가운데 하나이다.

특선작 칠연대련(七言對聯)(1930)(도판 8)은 호아정견 서풍에 성당 서풍이 가미된 행서 기운의 해서이다(내용 연입군화비하상 접심방초 희편현(燕入群花飛下上 蝶尋芳草戱翩翾)). 글씨가 늘씬하고 파임이 자유스럽게 잘 구사되어 있다. 또 하나의 특선작 난정집자(蘭亭集字)(도판 9)는 임음청화란언곡창 유수금일수죽고시(林陰淸和蘭言曲暢 流水今日脩竹古時)‘ 라는 내용을 교습받는 학생처럼 또박또박 써 내려간 해서이다. 둔중하긴 하나 글씨의 동세로 보아 작가의 나이 10세치고는 원숙한 기운을 자아낸다

서보절록(書譜節錄)(1926)(도판 10), 죽리모옥(竹籬茅屋)(1927), 취미산거(翠微山居)(1928), 서원역두(西原驛頭)(1930), 관하(官河)(1931)등의 작품은 초서에 해당한다. <관하>10대 초기작처럼 보이나 사실은 후반기의 작품이다. 짜임이 약하고 둔탁한 편이다. 그만큼 완숙함과 거리가 있는 성당풍의 행초서 계열이다. 반면 <취미산거>는 서당풍의 행초서 계열이면서 초서의 특성을 잘 구사한 수작이다. 이는 성당의 작품 가운데 유사한 계열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죽리모옥>(도판 11)은 해강 김규진 서풍과 친연성이 보일 만큼 굵고 거친 분위기를 보인다. 대자(大字) 초서는 해강의 특장으로 꼽히며 행서를 초서화한 경우는 서당과 해강의 서풍을 감안한 시대 풍조의 하나이기도 하다. 김진민의 유족 소장품으로 1939년 작품이 현존하는바, 이는 성당 서풍의 행초(行草) 계열에 속한다.

예서의 경우, 일반적으로 가로획은 평평해야 하나 오른쪽을 약간 올라가게 하는 것이 김돈희의 특징이다. 글씨를 기울게 하면서 움직임을 넣는 것, 한마디로 삐딱하게 쓰는 방법을 선호했다. 한나라의 예서에 기반을 두었으나 동세(動勢)를 크게 가미하려 했다. 일제하의 예서는 성당의 서풍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손재형이나 김기승 등의 초기 예서는 성당풍과 맥락을 같이 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김진민의 경우, 예서는 약하게 보여 그의 특장으로 꼽기에 주저하게 한다. 예컨대 서회(書懷)(1930)(도판 12)는 칠언절구를 내용으로 하여 굵은 붓으로 힘차게 쓰고자 한 작품이다. 크게 보아 성당풍에 가까우나 파임과 삐침 등 유려한 필체를 구사하지 않는 상황에 해당한다. 또 다른 칠언절구인 서한예(西漢隷)(1931) 역시 필치가 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서의 특장을 잘 구사했다고 보고 어렵게 한다. 이는 19세의 작품이나 낙관 부분에 몽연여사(夢蓮女史)’라고 표기하여 눈길을 끈다.

 

 

25. 김진민 서예작품의 서체 분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우 교수의 자문을 받았기에 이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26. 수잔 부시(김기주역), 중국인 문인화, 학연문화사, 2008,93

27. 宋民(郭魯鳳 譯), 中國書藝美學, 東文選, 1998, 26.

28. 宋民, 앞의 책, 39-40.

 

 

 

 

 

 

대전대박물관 소장의 행서 진전오록(晉甎五廘)이란 작품도 확인할 수 있어 주목을 요한다. 공공기관에 김진민의 서예작품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을 필요로 하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29) 김진민 유족 소장의 서예작품 가운데 당대(當代) 명필의 작품의 대다수 포함되어 있다. 위창 오세창을 비롯하여 해강 김규진, 김태석 그리고 김돈희가 그들로 이들의 각각 쌍폭의 대련을 수증자인 김진민의 이름을 명시한 합작 병풍작품이다. 위창 작품의 무진춘‘(戊辰春)’이라는 제작년대를 고려, 이 병풍은 1928년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통하여 김진민이 오세창이나 김규진 등 당대 명필과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 김진민의 사찰 편액 및 비명(碑銘) 작품

김진민의 사찰에 남긴 편액이나 사리탑 비문은 대개 고향인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산재되어 있다. 그것의 구체적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전남 영광 불갑사 현판 불갑사(佛甲寺)(11세 작품)

전남 장성 백양사 현판 우화루(雨花樓)(11세 작품)

전북 김제 금산사 대자보전(大慈寶殿)

전북 완주 위봉사 나한전(羅漢殿)

충남 예산 정혜사 관음전(觀音殿)

서울 국군묘지 지장사 능인보전(能仁寶殿)

전남 정읍 장사 학명선사 사리탑 비명(鶴鳴禪師 舍利塔 碑銘)(1935)

전북 김제 명금산 조부 김기섭 비문(12세작)

전북 정읍 태인 김재일 비문

 

김진민은 몇 점의 사찰 편액 작품을 남겼는바, 그 가운데 초기작으로 전남 영광 불갑사의 현판인 <불갑사>(도판 13)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반듯한 해서로 안진경류의 서풍이 가미된 획이 굵고 힘이 넘치는 서체를 보인다. 낙관을 십일세 불하당(十一歲 不瑕堂)’김진민인(金瑱珉印)’으로 되어 있어, 작가의 나이 11세 작품이다. 11세의 소녀가 이렇듯 힘이 넘치는 대자(大字)의 글씨를 쓸 수 있다니, 경이로운 사례에 해당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불갑사>와 같은 해에 집필한 장성 백양사의 우화루(雨花樓)(도판 14) 현판은 행서의 기운이 있고 편필을 사용한 듯한 일반적 편액에 해당하는 서체를 구사했다. 역시 11세의 어린 소녀의 몸으로 이렇듯 대자(大字)를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체의 발달 과정을 고려할 때, <불갑사>에 이어 서울 동작구 흑석동 국군묘지 지장사의 <능인보전>(도판 15) 현판 글씨가 뒤따른다.30) 이 글씨는 서체의 살이 퉁퉁하고 획이 또박또박하며 단정한 구성을 보인다. 익숙해진 단계로 안진경 서체에 황산곡의 서체가 약간 가미된 서풍을 보인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대자보전(大慈寶殿)(도판 16)은 전형적인 현판 서체이나 원숙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서풍이다. 행서 기운이 약간 있으며 서체의 기울기가 있어 조선미전 출품작 <칠언대련>(1930) 계통의 글씨이다. 일반적으로 오래된 편액의 서풍은 굵고 강한 느낌을 자아낸다. 고려말 유행하기 시작한 설암스님 서풍과 황정견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그 때문에 이 편액의 서풍에서 꺾임과 파임이 강하다는 인상은 자연스럽다. 금산사 미륵전의 삼존불 가운데 본존상의 대시주자는 김수곤이며 소조 입상의 작가는 김복진이다. 미륵전 본존상은 실화(失火)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36년 김복진에 의해 완성된 소조상이다 (도판 17). 이 불상의 전각 편액의 하나를 시주자인 김시곤의 딸 김진민이 맡았음은 흥미롭다.

예산 수덕사 말사인 정혜사 관음전의 경우 관음보살좌상(1939)의 경우, 시주자는 김수곤이며 불상의 작가는 김복진이다. 게다가 <관음전>(도판 18)이란 편액은 김진민 작품으로 행서 기운이 가미된 기운찬 서풍을 보인다. 정혜사에 이어 김수곤은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대불 조성 시에도 대시주자로 참여했으며, 역시 불상 작가는 김복진이었다.

 

 

29.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晉甎五廘宜子孫 漢洗䉶魚大吉祥’ (진나라의 벽돌에 새긴 다섯 사슴은 자손에게 마땅하고, 한 수에 물고기 두 마리를 씻으니 크게 길하고 상서롭도다.)

다만 고 원정 김창한선생 소장명품선(대전대학교 박물관, 2004) 도록 해설에 작가인 김진민을 비구니로 소개한 것은 오류이고, 백양사 현판을 쓴 것은 17세가 아닌 11세이다.

30.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김진민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사망한 아들을 위하여 그의 재를 국립묘지 안에 있는 지장사에서 봉행했다고 한다. 지장사의 편액은 이와 같은 인연에 의한 결과물이다.

 

 

 

이렇듯 김복진의 주요 불상작품의 시주자가 김수곤이라는 점, 더불어 금산사나 정혜사처럼 현판의 글씨가 김수곤의 딸인 김진민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은 매우 흥미롭다.

<내장산 학명선사 사리탑 비명>(도판 19)은 내장사 부도 구역의 중앙에 있다. 당대 고승이었던 학명선사를 위한 사리탑의 비문은 연호 정호(映湖 鼎鎬), 그리고 글씨는 김진민의 작품이다. 사리탑은 을해년(1935)에 건립되었는바, 당시 김진민의 나이는 23세였다. 비문 말미의 동참자 명단에 승려 명에 이어 재가신자로 김수곤의 이름도 보인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학명선사 사리탑 바로 옆에 김수곤의 사리탑이 건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산거사 김공 사리탑 비명(迦山居士 金公 舍利塔 碑銘)(1939)(도판 20)의 본문은 학명선사의 경우처럼 정호스님이 맡았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담당했다. 김수곤 사리탑의 의의는 무엇보다 재가 속인의 사리탑이 사찰 내의 고승 부도 구역에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주인공의 생전에 사리탑을 건립하여, 김수곤의 불교계 내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김수곤은 정축년(1937) 228일 백암산 관음전에서 정진하던 중 사리 1과를 수습, 이른바 생사리(生舍利)를 입으로 얻었다는 것이다. 이에 가산거사 사리탑명에 의거 그의 불사와 수행 그리고 사리 수습 관련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그는 불사(佛事)를 말하면, 불상을 만들고 사찰을 세우며 종을 주조한 것이 무수한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유점사(楡岾寺)53() 중 근래 잃어버린 12()를 다시 만들어 완전하게 하였고, 금산사(金山寺)의 장육상(丈六像)이 화재를 입자 앞장서서 복구를 꾀하여 원만하게 한 일이다. 또 속리산(俗離山)에 새 미륵상(彌勒像)과 용화사(龍華寺), 관촉사(灌燭寺)를 조성할 때 불상과 난간을 모두 보충하였고, 모악산(母岳山)의 큰 종과 내장산(內藏山)의 불전에도 크게 희사하여 낙성을 보았다.

그의 선거(禪居)를 말하면, 처음 학명노사(鶴鳴老師)의 벽련선원(碧蓮禪院)에서 발의하여 여러 해 하안거(夏安居)에 참여했고, 정혜원(正慧院)과 대각원(大覺院)을 차례로 방문하여 십여 차례 동안거(冬安居)에 참여하였다. 경오년(1930) 여름 황악산(黃嶽山)의 제산선사(霽山禪師)에게 보살계(菩薩戒)를 받았고, 더욱 승려 비니(毘尼)임을 엄하게 하며 수도 선나(禪那)에 더욱 정진하였다.

그의 감응(感應)을 말하면, 먼저 석탄사(石灘寺)를 지어 회향(回向)할 때에 새 신도가 구름처럼 모였다. 또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샘도 마르자 고봉암(孤峯庵) 사람들이 어쩌냐고 소리치고만 있을 때 맏형이 마침내 정념(正念)하고 묵도(默禱)하니, 한밤에 이르러 샘이 끊임없이 솟아나 사람들이 이에 감탄하였다. 근래 정축년(1937) 228일에 백암산(白巖山) 관음전(觀音殿)에서 정진하던 중 사리(舍利) 1()가 입에서 흘러나왔는데, 거울에 비추자 마치 맏형이 관을 쓴 모습과 같이 희고 깨끗하며 빛나고 윤기가 있었다. 이제 탑을 세워 그 사리를 명산에 간직하려 하니 오직 그대의 서명(書銘)뿐이옵니다.“(번역 이완우교수)

김수곤은 금강산 유점사 53불 이외 금산사, 법주사, 관촉사 등 사찰의 갖가지 불사에 참여했고, 수행 정진에도 적극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의 결과로 그는 1937년 백암사 관음전에서 정진 중 사리 1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내장사의 가산거사 사리탑은 승려가 아닌 재가불자의 사리탑이라는 점, 그것도 생전에 건립한 사리탑이라는 점에서 희귀한 예에 해당한다. 이는 내장사에서 김수곤 부녀의 위상을 입증케 하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한다.

 

. 맺음말

 

김진민은 일제강점하 여류서예가로 활동을 한 특이한 경우의 작가이다. 그는 10대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또 대다수의 서예가들이 남성작가들인 사회에서 여성작가로, 조선미전과 사찰을 중심으로 주목할만한 작가 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의 서예계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괄목할 만한 활동상을 보이다. 이내 선단에서 사라진 망각의 작가였다. 그 때문에 오늘날의 미술계는 그의 존재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발굴을 기다리는 작가 가운데 하나였다.

김진민이 활동하던 시대는 서화(書畵)에서 미술(美術)로 전환하는 과도기였다. 그것은 서예와 사군자의 쇠퇴 혹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시대 상황과 맥락을 같이한다. 서화 분리론이 주장되던 시기에 김진민은 어린 소녀의 몸으로 서예라는 장르의 지평을 넓혔다는 데에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그는 다양한 서체를 구사한바, 특히 그의 서체적 특징은 기왕의 신사임당과 같은 여성적 필치에 비해 활달한 남성적 서풍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김진민은 웅건하고 온아한 서풍을 구사하여 나름대로 서예서 계를 구축한 상황에 해당한다.

김진민은 황정견 등 중국 서예가의 서체를 응용하여 성당 김돈희 서풍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의 활동무대는 서예부를 설치한 기간 동안의 조선미전이라는 연례 공모전이었다. 그는 조선미전을 통하여 모두 16점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5점은 특선을 차지했다. 이 같은 성과는 매우 이례적일 때 해당하는 특기 사항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주요 사찰의 편액과 사리탑 비명을 쓰면서 소녀 서예가로서 명성을 드날리기도 했다. 이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부친 김수곤에 의한 가정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더불어 김수곤이 대시주자로 참여산 금산사 미륵전 주존불, 정혜사 관음보살좌상, 법주사 미륵대불의 경우, 조소 작가는 김복진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 전각의 편액 작품이 김진민의 글씨였다는 공통점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김진민은 그의 활동상과 서예사적 위상에 비해 망각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던 불세출의 소녀 서예가였다. 이 글은 망각 속의 작가를 발굴하여 세상에 소개하는 것으로 자족하고자 한다. 작가의 존재와 더불어 그의 유족에게 <난정서>(1925), <서보절록>(1926) 등 조선미전 출품작 3점을 포함하여 대여섯 점의 원작이 보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우리 근대미술사 혹은 서예사에서 김진민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조명받는 기회가 도래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