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성씨와 인물(삶의 주체)/태인의 인물

김수곤(金水坤)과 속리산 법주사(俗離山法住寺)

증보 태인지 2020. 7. 20. 09:37

본관 김해(金海), 자는 공욱(共彧), 호는 죽헌(竹軒), 가산(迦山) 인주(麟柱)의 아들로 1873(高宗 10)에 태인에서 태어났다. 유생(儒生)으로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일찍이 백양사(白羊寺) 청류암(淸流庵)에서 좌선(坐禪)하다가 1937228일 문득 입속에서 옥치(玉齒)와 같은 이사리(齒舍利)를 얻었으므로 193910월 내장사에 사리탑(舍利塔)을 안치하고 영호선사(映湖禪師)의 기문(記文)과 손재성(孫在聲)의 오체혼합필체(五體混合筆體)의 탑비(塔碑)를 세웠다. 선생은 1922년 옹동면(瓮東面) 칠전리(七田里) 보안석교(保安石橋)를 사재로 가설하고 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미륵상불(彌勒像佛)을 조성하고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 금산사(金山寺) 등 여러 사찰에 불사했다. 1950년에 돌아가셨다.

묘는 태인면 거산리 항가산 남쪽 기슭에 있다.1)

 

미륵대불 사랑 를 잇다, 김수곤과 그의 딸

 

전통시대부터 존재하던 속리산 법주사의 금속제 미륵대불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반출됐고, 이후 일대는 1939년까지 약 70년 동안 허허벌판으로 잡초만 우거진 채로 방치됐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손을 맞잡은 사람이 전북 태인 출신의 갑부인 가산(嘉山) 김수곤(金水坤)과 당시 법주사 주지 석상 스님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배불정치에 크게 분개했다.

'당시의 주지 장석상씨는 대원군의 배불정치로 불상이 뜯겨 역사상 큰 오점을 후세에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에 일치, 바로 그 자리에서 김 씨의 사재로 미륵불을 더욱 크게 세우기로 했다. 조각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김복진 씨에 의해 높이 80자의 콘크리트 불상 건립에 착수했다.'-<경향신문 1964615일 자>

가산이 미륵대불 불사금으로 내놓은 사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1960년대 발간된 경향신문은 밝히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콘크리트 시멘트 불이 낙성되자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의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는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김수곤 씨의 특지로 경비 약 3만 원을 들였다'라고 김수곤이 희사한 불사금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우리나라 화폐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하의 소() 가격은 '70' 정도였다. 이를 현재 솟값 4백만 원 안팎과 비교하면 당시의 '1'은 현재 돈 '6만 원' 정도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김수곤은 당시 한우 420여 마리의 화폐가치를 법주사 미륵대불 공사비로 희사한 셈이 되고 있다. 전북지역 향토 사료에 의하면 가산의 집안은 부친 '김찬주'(金贊柱) 때부터 부를 크게 일궜다.

가산은 재력만큼이나 불심이 깊었다. 따라서 그는 법주사 외에 금강산 유점사 53, 금산사 미륵불, 관촉사 불사 등에도 시주를 많이 했고, 칠보의 '석탄사'를 중건하기도 했다.

 

또한, 교육 사업에도 참여하여 태인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그의 조카에게 운영토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수곤과 법주사가 맺은 인연은 그의 딸 김진민(金王+眞珉·1912~1991)에게로 이어졌다.

역시 전북지역 향토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김수곤(金水坤)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7세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9세에 맹자를 익혔고 그의 집안에는 이당 김은호(金殷鎬), 성당 김돈희(金敦熙) 등 당대의 유명한 서화가들이 드나들었다.

 

김진민 작품 10곡병(十曲屛) 중 일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아버지 가산의 권유로 9세부터 김돈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서예 실력을 연마했다. 그녀는 11세에는 백양사 우화루(雨花樓) 편액을 쓰는 등 소녀 서예가임에도 불구하고 강건하고 웅대한 서풍(書風)을 구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김수곤이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불상을 조성하면서 시주로 복장에 5천여 자()의 글씨를 써넣고, 그 내용은 금강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미륵대불 철거 후 작품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그녀는 말년에 만공스님을 자주 만나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일로 소일하시다가 1991년 타계, 평소 자주 들리던 속리산 법주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하여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이런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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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崔玄植, 新編 井州井邑 人物誌(1983. 10. 8.), 381.

2) 충청일보, 조혁연 대기자(등록일: 2014-05-13) cho3748@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