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지리(삶의터전)/제5절 조선시대

제 5절 조선시대(朝鮮時代)와 태인

증보 태인지 2018. 1. 2. 16:13

5절 조선시대(朝鮮時代)와 태인

 

   조선의 중앙행정조직은 의정부와 6(六曹)의 체제로 편제되었다. 의정부는 그 우두머리인 3정승,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합좌기관(合坐機關)이다. 3정승은 국가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하고 그 합의사항을 국왕에게 품의하며, 왕의 재가는 역시 의정부를 거쳐 해당관부에 전달되었다. (((((()6조가 각기 맡은 임무는 고려의 6부와 별 차이가 없으나, 그 기능이 보다 강화되었다.

   장관을 판서(判書), 차관을 참판(參判)이라 하는데, 이들 고급 행정관원은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켰다. 이 밖에 왕명의 출납을 맡은 승정원(承政院)이 있어 그에 소속된 도승지(都承旨) 이하 6승지는 각기 6조의 행정업무를 분담하여 왕의 비서(祕書) 기능을 맡았으므로 때로는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기구로서 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이른바 3(三司)가 있다. 이들 3사는 정책결정 및 집행과정의 착오와 부정을 막기 위한 언관(言官)으로서, 특히 사헌부는 백관(百官)을 규찰하는 감찰관이기도 하였으며 서경(署經)이라 하여 임명된 관리의 신분·내력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可否)를 승인하는 임무도 맡았다. 홍문관은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으로서, 경적(經籍)을 모아 정사를 토론하고 문필을 다스려서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지방 행정조직은 전국을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길(咸吉) ·평안(平安)8()로 나누고, 그 밑에 부() ·() ·() ·()을 두었다. 도에는 관찰사(觀察使)가 장관으로, 행정 ·군사 및 사법권을 행사하며, 수령을 지휘 ·감독하고, 민생을 순찰하는 감찰관의 기능도 있다. 경주 ·전주 ·개성 ·함흥 ·평양 ·의주 등 대도시의 책임자인 부윤(府尹), 여주(驪州) 20개 목()의 목사(牧使), 군의 군수(郡守), 현의 현령(縣令)과 현감(縣監) 등을 수령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일반국민을 직접 다스리는 이른바 목민관(牧民官)이었으며, 그 주된 임무는 공세(貢稅) ·부역(賦役) 등을 중앙으로 조달하는 일이었다.

   군 ·현 밑에는 면 ·이를 두고 지방민을 면장(面長) ·이정(里正)으로 임명하여 수령의 통할 하에 자치토록 하였다. 지방관은 행정 ·사법 ·군사 등의 광범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나, 그들의 임기는 관찰사가 360, 수령이 1,800일로 제한되어 있었고, 또 자기 출신지에는 임명될 수 없는 상피제가 적용되었다. 이는 지방에 거주하는 양반들, 특히 자기의 동족과 결탁한 변란이나 작폐를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군 ·현에는 각기 그 지방 양반들로 조직된 향청(鄕廳)이란 것이 있어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향청은 고려 말의 유향소(留鄕所)의 후신으로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있어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경재소(京在所)라 하여 지방양반 중 유력자를 서울에 파견하여 사무적인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2-3> 조선시대 전라도 지방관제도

 

지방관제

觀察使

()

()

2

府尹

留守

大都護府使

목사

都護府使

감영 소재지

2

2

3

당상관

3

당상관

3

지역

전주

全州

 

 

나주, 제주,

광주, 능주

남원, 여산 무주, 장흥, 순천, 담양, 장성

지방관제

군수

현령

현감

찰방

4

5

6

6

전라도

익산(금마), 김제, 순창,    고, 금산, 진산, 영암, 영광, 진도, 낙안, 대정, 정의, 보성

임피, 만경, 금구, 용담,

    창평

용안, 함열(함라), 옥구, 고산, 부안, 임실, 정읍, 옥과, 태인, 고창, 흥덕, 무장, 진안, 운봉, 장수, 무안, 구례, 곡성, 동복, 화순, 흥양, 해남, 광양, 함평, 남평, 강진

삼례도, 오수도,

벽사도, 제원도,

청암도, 경양도

 

 

   지방 각 고을에는 모두 중앙의 6조를 모방한 이 ·····공의 6(六房)이 있어서 사무를 나누어 맡았는데, 6방의 일을 맡은 것은 지방의 토착 향리(鄕吏 : 衙前)들이었다. 이들은 직무를 세습적으로 수행하거나 국가로부터 일정한 급료를 받지 못하므로 각종 부정행위가 많았는데 특히 호방(戶房) ·이방(吏房)이 심하였다.

   이때 태인은 백제 때 형성된 대시산군과 빈굴현이라는 이원적 행정체계가 조선 건국 후에는 하나로 통합되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림 2-1> 조선시대 태인현 주변 행정구역

(지도:대동여지도, 1860년대, 10333)

 

 

 

   태인은 1409(태종 9)에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을 통합하고 각 지명의 앞 글자를 따 태인현(泰仁縣)이라 명명하였다. 이 때 현의 치소는 옛 태산현에 그대로 두었으나, 그곳은 태인현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서쪽의 인의현 사람들이 왕래하는데 큰 불편을 겪었다.

1413(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임내였던 능()나향(羅鄕)과 대곡(大谷)개문(開門)도전(桃田) 부곡은 조선 초기에 직촌(直村, 군현의 수령이 직접 통치하는 촌락)이 되었다.

   1414(태종 13)에 태인 현감을 두었다.

   태인현의 옛 치소는 현재의 칠보면 시산리로, 인의현의 옛 치소는 신태인읍 백산리로 추정되므로 그 거리는 거의 20km에 이른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1416(태종 16) 8월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새로운 치소를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居山驛)이 있는 곳으로 옮겨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 건물을 그대로 쓰다 보니 시설이 비좁고 누추하였다. 2년 후인 1418(태종 18) 겨울 현감 오치선(吳致善)이 거산역의 객관이 있던 곳보다 서쪽에 새로운 관청을 지을 터를 잡고, 1419(태종 19) 가을 비로소 후청(後聽)동서침(東西寢)남청(南廳)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웠고, 1421년 여름에는 좌우랑(左右廊)좌우마구(左右馬廐)대문고옥(庫屋)향교성전을 세웠다. 이때 비로소 신도시로서의 태인현 읍치가 자리를 잡게 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는 태인과 인의의 옛 치소와 함께 거산역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데, 거산역은 태인과 인의의 중간 지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잇는 조선 전기 주요 간선로상의 역이었다. 즉 태인현은 현의 중심지이면서 교통의 중심지인 거산역 가까이 읍치를 이동하였다. 현재의 태인향교는 신도시 건설의 계획에 따라 1421(세종 3) 창건되었던 것이다.

   영조(英祖) 때 태인현지(泰仁縣誌)에는 거산면(居山面)이 있다.1)

 

 

<그림 2-2>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0년대, 10330)

 

 

<그림 2-3> 현재의 읍치 위치(추정)

 

   이러한 체계가 조선말인 1895(고종 32) 일제의 압력으로 일본과 같은 현()제도를 모방하여 관찰사를 폐지하고 군으로 통합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전국 8도를 폐지하고 23부로 개편하여 종래의 목, , , 현의 명칭을 군으로 통일하였으며 부윤, 목사, 군수, 서윤, 판관, 현령 등 현의 모든 관명을 군수로 통칭하였다. 이에 따라서 전라도에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 제주부가 설치되었고, 그 중 전주부는 20개 군을 통할하게 되었으며 태인, 고부, 정읍군은 전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태인은 전주부(全州府) 관할의 고부군·태인군(泰仁郡)군으로 승격이 되었다.

   이러한 행정개편은 현실과 잘 맞지 않아서인지 그 다음해인 1896(고종 33) 8월에 다시 도제(道制)를 부활시켜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전라도는 남도와 북도로 갈리고 북도에는 26개군을 관할하게 하였으니 태인은 군내면, 인곡면, 홍천면을 구역으로 하는 전라북도 태인군(泰仁郡)이 되었다.<그림 2-4>

 

 

<그림 2-4> 해동지도(고대4709-41)_태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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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고장傳統文化(정읍군청 공보실, 1983. 11. 9.), 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