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국가지정 문화재 8

1. 피향정(披香亭, Pihyangjeong)

피향정(披香亭, Pihyangjeong)1)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泰仁面)에 있는 조선 중기의 누정(樓亭). 지정번호: 보물 제289호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2 시 대: 조선시대 중기 규모양식: 정면 5칸, 측면 4칸, 누정 익공계 팔작지붕 종 류: 누정(樓亭) 소 유 자: 국유 1. 창건 886년에서 887년경에 최치원에 의해 최초로 창건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나2) 증거가 미약하고 1454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전국적으로 20여개의 누정이 기록되어 있으나 피향정의 기록은 없다. 1480년(成宗 11)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530년(中宗 25)에 증보(增補)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2. 조선시대 피향정 연혁

2. 조선시대 피향정 연혁 피향정의 창건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몇 차례에 걸쳐 중수했던 기록과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중수 기록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 직 후인 광해군 때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이지굉(李志宏)이 광해군 때인 1615~1618년 사이에 태인 현감을 지내는 동한 초라한 피향정을 크게 확장하는데 현재의 모습은 이 때 중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지굉의 중수 근거는 유근(柳近)이 철종 때 쓴 피향정 중수기에 아주 미약하게 근거가 나타나고 있다. 즉 「…이첨추의 계속된 수리…(…李僉樞之繼修 …)」가 그것이다. 그 후 현종 대에 들어와 현감 박숭고(朴崇古)가 다시 중건을 하게 된다. 박숭고는 현종 때 태인 현감을 하게 되는데 이때..

3. 해방이후 피향정의 연혁과 보수

3. 해방이후 피향정의 연혁과 보수 한국전쟁은 전국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태인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1957년 면사무소를 새로 지을 때까지 피향정은 약 4년간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었던 것도 전쟁의 피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59년~1960년 경 찍은 피향정 사진을 보면 기둥 사이에 문틀이 아직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진에 의하면 합각부분도 지금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합각부분이 지금처럼 판자로 막은 것이 아니라 표면을 흙으로 바른 것으로 보인다. 면사무소를 이전한 다음해인 1958년에는 피향정이 국가지정 국보43호로 지정되었으나 1963년 국보지정을 취소하고 보물 제289호로 재지정하였다. 건조물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이처럼 국보에서 보물로 하..

4. 태인팔경과 피향정 관련 고시 (古詩 )

4. 태인팔경(八景)과 피향정 관련 고시 (古詩) 태인팔경 중 제5경이 ‘피향연화 (披香蓮花)’이다. 피향정의 상하연지에 핀 연화가 아름다워 팔경 중 하나로 꼽은 것이다. 피향정의 연화는 반드시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연화가 필 때면 그 향이 그윽하게 정자 주변을 감싸기 때문에 보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향기에 취하는 즐거움도 경관에 못지않게 아름다웠던 것이다. 따라서 피향정은 연화를 제외하고 경관의 가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피향정과 연화를 하나의 틀 속에 넣어 함께 생각할 때 정자의 아름다움이 빛나게 되는 것이다. 태인에는 피향정 경관 외에 7 개의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아름다운 태인팔경은 다음과 같다. 태인은 예로부터 산수가 좋을뿐 아니라 선현들의 유적이 많아 시인묵..

5. 피향정 실측조사

5. 피향정 실측조사 피향정의 평면구성은 정면5칸, 측면4칸으로 면적은 99.96㎡(30.23평)으로 구성된 건물로 외진평주(外陣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형식으로 되어있다. 평면비는 동, 남측 기둥1번 중심을 기준으로 전면 도리통 11,900mm, 측면 양통 8,400mm로 정․측면의 길이비는 1.41 : 1로 장방형이다. 하층 평면에는 별다른 구조물이 없고 기둥만 세워져 있는데 정면5칸, 측면4칸으로 각 주칸마다 빠짐없이 28개의 석주(石柱)가 설치되어져 있다. 이것은 누마루에 많은 사람이 올라앉을 경우에 구조적인 안정감과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주 2개(서측 계단에서 바로 뒤 내진주 2개)는 3개의 통돌을 서로 다르게 그랭이질하여 쌓아올린 기법이 매우 인상적이다. 기존바..

6. 피향정에 관련된 용어 보충자료

** 보충 자료 ** 기둥 - 건물 지붕의 하중을 받아서 초석(礎石)에 전달하는 구조물.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되는데, 기둥높이는 건축물의 높이를 결정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며, 입면(立面)의 크기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기둥의 형태는 수직선의 요소가 되어, 기단·도리·처마선·지붕마루선 등의 수평적 요소와 대조를 이룸으로써 입면에 아름다움을 준다. 기둥의 역사 - 한국에서 기둥이 사용된 것은 신석기시대의 수혈주거(竪穴住居)에서 비롯되었다. 즉, 수혈 안의 가장자리에 구멍을 파서 세우거나 바닥에 직접 세워서 그 윗부분의 구조물을 지탱하게 한 것이 기둥의 시작이라고 추측된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혈주거지의 기둥구멍들은 지름 10∼20㎝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쌍영총의 팔각석주(八角石柱)나 고분벽화..

7. 피향정 중건기문(重建記文)

披香亭 重修序 肅宗四一年(西紀 1715) - 현감 유근의 중수기문이다. 『蓋聞天上桂殿 在聲 不聞之鄕 海中銀臺 卽微茫難求之域 鵬宵萬里 適資 禽之嘲 鰲背三山空 燕土之腕, 是皆六合之外, 群聖在而不論 豈若四海之間, 一世得以寓目者哉, 至如, 唐家一時之制都, 置沆水之材, 漢室十里之關, 只誇凌宵之栢, 雖曰曲盡乎人巧, 亦非自得於天然美哉, 披香之爲亭也, 非高明寬敞之稱非輪奐壯麗之謂始營小寔取便於延賓, 前臨大池, 別有宜於翫物, 百頃涵境若對錢湖之塘, 十丈開花會移玉井之種, 露 紅 之苒苒風, 飜翠盖之依依, 濂園物理之靜觀, 受淨植之淸願竹 世慮之逍遺, 何待薰爐之焚燒, 乍燕寢之凝淸, 悅欄室之生臭, 殆同令君之坐席, 長留 可笑博望之乘 , 遠求安息, 疑曼陀之散雨, 卽色空兮非太乙之泛波 孰披拂兮聊暇日而寓賞, 得古人之命名, 是邑也, 海東名區, 湖..

8. 피향정 상하연지와 관련된 한시(漢詩)

오랜 세월에 걸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온 상하연지와 관련된 한시(漢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1) 割鶴當日播淸芬 枳棘鸞捿衆所云 千載吟魂何處覔 芙蕖萬柄孤雲 占畢齋 金宗直(1431~1492)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元亮2)新埋土 孤雲己上天 空餘池水在 白露滴秋蓮 石川 林億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