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국가지정 문화재

8. 피향정 상하연지와 관련된 한시(漢詩)

증보 태인지 2018. 3. 6. 08:55

   오랜 세월에 걸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온 상하연지와 관련된 한시(漢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1)

 

 

 

 割鶴當日播淸芬 枳棘鸞捿衆所云 千載吟魂何處 芙蕖萬柄孤雲

 

   占畢齋 金宗直(14311492)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1459(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元亮2)新埋土 孤雲己上天 空餘池水在 白露滴秋蓮

 

   石川 林億齡(14961568)

   字 大樹, 號 石川, 本貫 善山, 明宗朝 江原道 觀察使 潭陽 府使 歷任, 海南 石川祠 配享.

 

 

 

 

 

敗葉離枝白露薄 水亭殘日吊朱欄 堪憐岸上靑靑竹 獨帶淸陰到歲寒

 

   淸陰 金尙憲(15701652)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본관은 ()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1653년 특명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되었다.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청음전집40권이 있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

서 추앙받았고, 1661(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오봉(鰲峰) 김재민(金齊閔)이 태인현감(泰仁縣監) 柳埏蓮堤에서 읊은 .

 

                       文學博士 梁柱東 譯

                   長堤絃直柳陰陰

堤下淸波丈許深

十畝紅雲鋪鏡面

半山飛雨落盃心

千村向晚烟初起

一葉迎秋籟自吟

入夜重添無限趣

月輝荷影爽塵

 긴 언덕 줄처럼 곧고 버들은 총총한데

 언덕 아래 맑은 물은 한 길이나 깊구나.

 가까운 노을은 거울 같은 수면에 퍼져있고

 한편 산 날리는 비는 잔속에 떨어지네.

 여러 마을엔 저녁연기가 일기 시작하고

 한나무 잎은 가을 맞아 절로 외쳐 읊고 가네.

 밤엔 다시 한 없는 흥취가 더해지는데

 달 빛에 아롱진 그림자는 먼지 낀 가슴 시원케 하는구나.

 

題 吸香亭 金齊閔

            文學博士 梁柱東 譯

詩山南畔大池周

兩岸人家碧樹秋

紅嫩萬莖花錦艶

翠圓千疊葉錢浮

吟邊遠岫含殘雨

郊外斜陽映半樓

醉裡不知歸路晩

深盃頻勤寫離愁

 시산남쪽 두둑 큰 못 둘레에

 두 언덕 집들 푸른 숲속세 가을 맞았네.

 연붉은 온갖 줄기엔 꽃이 비단처럼 탐스럽고

 짙은 초록 여러 숲엔 잎이 돈 조각 같이 떠 있네.

 읊조리는 변두리 먼 골짜기엔 남은 비가 잠겨 있고,

 들판 밖 저녁 햇빛은 다락 한편을 비쳐 주네.

 취한김에 돌아갈 길이 늦음을 알지못하고,

 깊은 잔 자주 권해 근심을 쏟아버리네.

 

 

 

 

六堂 崔南善披香亭 吟

진흙에 피온 연꽃 님이 어찌 보시뎌뇨

혼자만 거니실제 무슨말쌈 하시뎌뇨

저달아 들름잇거든 나만 알려주시소

                                                                   丙寅春(1926년) 尋春巡禮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상연지는 메워져 인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도로가 개설되었다.   

 

   "1910년의 2,787명에서 1925년 에는 3,24명으로 약 16.4%의 인구 증가가 이뤄졌고, 조선시대의 저자가 계속 개설되었으며, 정기시장의 면적은 더욱 확대되어  ‘웃시장(上市場)’과 ‘아랫시장(下市場)’으로 확대·분할되었다. 1929년에 태인의 정기시장에서 거래되는 연간 판매량은 222,820원으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중요한 중심취락(中心聚落)으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정기시장은 규모가 증가하여 이조시대의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한 웃시장(上市場)외에 아랫시장(下市場)과 우시장(牛市場)이 새로이 개설되었다. 아랫시장은 피향정을 둘러싼 연못 중 상연지(上蓮池)를 매립하여 형성된 것이며, 우시장은 하연지(下蓮池)의 남쪽에 새로 개설된 것으로 이들 신시장(新市長)은 취락의 확대와 중심지의 이전에 기여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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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253256.

2) 泰仁縣監 靈川 申潛

3) 李標鎔, 泰仁新泰仁空間構造 比較 硏究(1990), 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