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역사(삶의 내력) 19

제 5절 암행어사와 태인

제 5절 암행어사와 태인 1. 1717년(숙종 43)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영복 - 정치란 거문고와 같아서 어사 조영복이 전라우도 태인 땅에서 겪은 이야기. 어사 조영복은 강직하게 고을을 다스렸으나, 간활한 아전들의 비리를 끝까지 단속하지 못한 김상옥의 사연을 밝혀낸다. 숙종 43년 봄. 장날을 맞은 말목장터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끓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매월 숫자가 3과 8로 끝나는 말목장날이면 인근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갖가지 물건을 사고팔며 정을 나누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장터 한켠에 말이 쉴 수 있는 마방까지 갖춘 탓에, 서산의 마방, 서울의 말죽거리 등과 함께 배들평(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말목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사노 한..

제 6절 태인군(泰仁郡)의 선생안(先生案)

제 5절 태인군(泰仁郡)의 선생안(先生案) 조선시대 모든 지방에는 수령(守令)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칠두칠사(七令七事)’라 이르는 임무를 맡아 행정․사법․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향촌을 통치하였을 뿐 아니라, 향촌민의 생활전반에 실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들을 ‘목민관(牧民官)이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백성의 어버이요 스승이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있어서 향촌민들의 편(便)․불편(不便)과 안위(安危)는 거의 수령들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 편찬된 읍지(邑誌)마다 수령의 명단을 빠트리지 않고 기재한 것도 지방사회 운용에 있어 수령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시대, 한 지역의 역사를 보고자 할 때 빠트려서는 안 ..

제 8장 현대(現代)와 태인

제 8장 현대(現代)와 태인 제 1절 8․15광복(八一五光復) 광복(光復)이란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붕괴(崩壞)되면서부터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8·15광복의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1910년 8월 22일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민족해방(民族解放)을 위한 독립운동(獨立運動)은 계속 전개(展開)되었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

제 1절 근대사회와 태인, 동학혁명과 태인

제 7장 근대(近代)와 태인 제 1절 근대사회와 태인 1.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改革政治) 대원군은 영조(英祖)의 5대손으로 20살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863년(철종 14)에 후사(後嗣) 없이 철종이 죽자 조대비(趙大妃, 익종비(翼宗妃))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高宗))이 즉위하게 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해진 그는 어린 고종(高宗)의 섭정(攝政)까지 맡게 된다. 이로부터 대원군은 10년간의 집정시대(執政時代)를 맞아 안동 김씨의 세도를 제거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사색(四色, 남(南)·북(北)·노(老)·소(少))을 신분·계급·출..

제 2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독립투쟁

제 2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독립투쟁 1. 일제강점기의 무단정치 일제강점기의 35년은 한국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正統性)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다는 점에 치욕적인 특성이 있다. 일본은 1860년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하여 급격히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래 조선 정부의 대일외교정책에 순응하여 수동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던 대(對)조선의 외교방향을 능동화하여,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권피탈(國權被奪)에 이르기까지 긴 침략의 장정(長征)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일본은 대원군의 하야로 개국으로 급전(急轉)한 조선 정계의 기류를 타고, 조선의 문호 개방에 첫 수호국(修好國)으로서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쟁..

제 3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교육과 사회․경제 생활

제 3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교육과 사회․경제 생활 일제강점기에 민족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요소 중의 하나가 교육이었다. 태인 지역의 민족․사회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이 재학생들이거나 졸업하여 태인 3․1운동에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1907년 태인군 군내면(郡內面) 칠리(七里)의 향교 부속 건물에 사립(私立) 인명학교(仁明學校)와 같은 해 송영권(宋泳權)이 사립(私立)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1)되었다. 인명학교(仁明學校)는 1911년 6월 30일 태인공립보통학교(泰仁公立普通學校)로 인가(認可)되었고 같은 해 9월 15일에 수업을 시작하여 25일에 개교식을 행하였으며, 12월 1일에는 태성리(泰成里)에 있는 태인동헌(泰仁東軒)으로 이전하였고, 제1회 졸업생 9명을 배출하였다. 입학은 8세에 ..

제 6장 조선시대(朝鮮時代)와 태인, 제 1절 조선(朝鮮)의 건국(建國)과 태인, 박필현의 난

제 6장 조선시대(朝鮮時代)와 태인 제 1절 조선(朝鮮)의 건국(建國)과 태인 1. 조선의 건국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고려 말기 나라 안팎의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개창(開創)되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밖으로는 원(元)에서 명(明朝)으로 중국의 왕조가 교체하는 국면이 전개되고, 안으로는 이에 대응하여 당시의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요동정벌(遼東征伐) 및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라는 획기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려시대는 건국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거란(契丹)․여진(女眞)․몽고(蒙古)․홍건적(紅巾賊)․왜구(倭寇)로 이어지는 대외관계의 복잡한 양상이 계속되었다. 대외관계로부터 초래되는 영향이 그대로 국내의 정치상황을 변모시켰다. 급기야 12세기에 이르러 약 40년에 걸친 대몽항쟁(對蒙抗爭)을 거쳐 몽고..

제 2절 조선시대 태인 지역의 행정(行政)과 교육기관(敎育機關), 1 행정제도, 2. 태인현 행정조직, 3. 태인현 객사

제 2절 조선시대 태인 지역의 행정(行政)과 교육기관(敎育機關) 1. 조선의 지방행정제도(地方行政制度)와 태인 지방행정제도는 1410년(太宗 10)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道)로 나눈 8도제로 유도부(留都府) 1, 부이(府尹) 6, 대도호부(大都護府) 5, 목(牧) 20, 도호부(都護府) 74, 군(郡) 73, 현(縣) 154로 구획한 고려 후기에 정비되기 시작한 행정구역을 기반으로 큰 변혁 없이 지내오다가 다소의 수정을 거쳐 1413년(太宗 13)에 확고한 제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 글자를 딴 것이며, 고려 초기에 전주목(全州牧)이었다가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라북도 일대를 강남도(江南道)로 정하였으며 1018년(현종 9년)에는 고려 현종이 강..

4.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기관(地方行政機關)과 태인 동헌(泰仁東軒)

4.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기관(地方行政機關)과 태인 동헌(泰仁東軒) 지정현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지정년월일: 1976년 4월 3일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451-9(정읍 동헌길 24) 시 대: 1816년(조선 순조16년) 중건, 1977년 보수공사 규 모: 정면 6칸, 측면 4칸, 팔작지붕 지방 읍치(邑治)의 관아는 국가적인 공무(公務)를 집행하기 위한 건물인데 이를 일반적으로 ‘공청(公廳)’이라고 한다. 그중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관아(地方官衙)의 정무(政務)인 군현(郡縣)의 행정(行政) 사법(司法)을 총괄(總括)하고 육방(六房) 관속(官屬)을 통솔하였던 중심건물이다. 수령(首領)의 살림채인 내아(內衙)와 지방 관리와 사신의 숙소로 사용된 객사(客舍), 수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

5. 조선의 지방교육제도(地方敎育制度)와 태인향교(泰仁鄕校), 6. 그외 관아, 7. 창고

5. 조선의 지방교육제도(地方敎育制度)와 태인향교(泰仁鄕校) 조선은 창건 초부터 고려 말에 극심하였던 불교(佛敎)의 폐단(弊端)을 없애기 위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를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초기에 민심을 통일하는 수단으로 공(孔)·맹(孟)의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사상을 적극 장려한 결과 유학(儒學)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 등의 지치주의(至治主義)학파의 실천유학이 일어났으나,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파(性理學派)의 이론유학이었다. 인종(仁宗)·선조(宣祖) 시대에 그 절정에 달했던 성리학파의 교육사상이 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교육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서울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鄕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