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역사(삶의 내력)/제6장 조선시대와 태인

5. 조선의 지방교육제도(地方敎育制度)와 태인향교(泰仁鄕校), 6. 그외 관아, 7. 창고

증보 태인지 2018. 2. 6. 15:22

5. 조선의 지방교육제도(地方敎育制度)와 태인향교(泰仁鄕校)

 

   조선은 창건 초부터 고려 말에 극심하였던 불교(佛敎)의 폐단(弊端)을 없애기 위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를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초기에 민심을 통일하는 수단으로 공(()의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사상을 적극 장려한 결과 유학(儒學)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 등의 지치주의(至治主義)학파의 실천유학이 일어났으나,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파(性理學派)의 이론유학이었다. 인종(仁宗선조(宣祖) 시대에 그 절정에 달했던 성리학파의 교육사상이 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교육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서울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鄕校), 민간교육기관으로는 서원(書院)과 서당(書堂)이 있었다. 과거제도(科擧制度)가 고려시대보다 더 뿌리를 내리게 되어 이 제도의 활용으로 인재발굴과 교육진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도구(道具)가 되어 도리어 정상적인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 향교(鄕校)

 

   향교의 유래는 992(高麗 成宗 11)에 처음 설치한 국자감(國子監)으로부터 비롯하여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유일한 교육기관이었으며 공자(孔子)이하의 중국 명현(名賢)만을 제사하여 오다가 1022(高麗 顯宗 13) 1월에 조선(朝鮮)의 유현(儒賢)인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을 배향하였고 지방에도 이와 같은 기관을 설치하였는데 1304(高麗 충렬왕 30)에 국자감을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와서도 서울에 사학당(四學堂: , 西, , )을 두고 지방에는 각 고을에 향교를 두었으니 각 도의 관찰사에 명하여 항교의 운영여하로 수령들의 치정(致政)의 척도로 삼게 했던 것이다.

   향교는 문묘(文廟)와 어진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공자와 여러 성현(儒學者)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유학(儒學)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다. 향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과거제도가 처음 실시된 고려시대였지만, 특히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은 국가의 정책적 교육 사업으로 모든 군현(郡縣)에 향교를 설치하였다.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한 조선이 지방의 사회질서 또한 유교문화로 하루빨리 재편시킬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국가의 이념이 되는 유교문화를 지방사회까지 뿌리 뻗게 만드는 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였던 것이다. 향교의 흥패를 가지고 지방관의 인사고가를 삼기도 했다. 따라서 향교의 입지는 관아와 함께 매우 중요했다. 그 고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관아와 향교 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양택풍수(陽宅風水)1)를 공부하고자 한다면 향교 터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향교의 조직(組織)은 주(), () ()에는 교수(敎授), 500()의 군, (, )에는 훈도(訓導), 500() 미만의 현()에는 학장(學長)만 두었다.

   향교의 교생(校生)은 대개 15, 6세의 양반(兩班)집의 아들이어야 했다.

   교과(敎科)내용은 소학(小學: 中國 宋나라때 劉子澄朱子의 지도를 받아서 편찬한 初學者用 교양서), 사서(四書: 論語, 孟子, 大學, 中庸), 오경(五經: 詩經, 書經, 周易, 禮記, 春秋)을 위주로 가르쳤다.

   군수(郡守)나 현감(縣監)은 매달 향교의 운영상황과 교생들의 성적(成績)을 도()의 감사(監司)에게 보고(報告)하면, 감사는 순시(巡視)때 이를 시험(試驗)하고 학령(學令)에 따라 상()을 주고 일강(日講), 월강(月講)에 우수한 교생(校生)에게 호역(戶役)을 감해 준다.

   향교는 크게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와 교육 기능으로 나눈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大成至聖文宣王)를 모시고, 그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사성(四聖,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송나라 사현(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해동18(海東18,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대제(大祭)를 모신다.

그리고 향교에서는 도의교육(道義敎育)으로 민간의 풍습(風習)을 길러 왔으며, 연중행사(年中行事)로 향음주례(鄕飮酒禮: 덕행이 있는 노인들에게 경로잔치와 같은 것), 향사례(鄕射禮: 경노잔치에 활쏘기를 하는 것), 양노례(養老禮: 일반 노인들에 대한 경로행사)를 하였다.

   향교의 운영은 국가(國家)에서 전토(田土)를 주어 운영하게 하였는데, 이 전토(田土)를 학전(學田)이라 했다. 학전(學田)의 크고 작은 것은 향교의 대소(大小)에 따라 달라, , (, )의 향교는 5()씩을 주었다. 향교의 재원(財源)은 이 밖에 특지가(特志家)의 희사(喜捨)와 교생(校生)들의 출연금(出捐金)으로 충당되었다.

   처음에는 향교가 매우 융성(隆盛)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많이 불탔고, 서원(書院: 私立學校와 같음)이 일어난 뒤에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고종(高宗) 31년 갑오경쟁(甲午競爭) 뒤에는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없어지자 쇠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서의 힘은 없어지고, 옛 성현(聖賢)을 모시는 제사의식(祭祀儀式)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의 향교에서는 대성전은 문묘(文廟: 孔子를 비롯하여 四聖 이하 中國 歷代大儒新羅 이후의 朝鮮의 큰 선비들을 함께 모신 집)이고, 명륜당(明倫堂: 조선 때 성균관(成均館)에 설치되어 儒學講義하던 집)은 강의실과 같은 구실을 했으며, 동서재(東西齋)는 기숙사(寄宿舍)의 역할을 했다.

 

1) 태인향교(泰仁鄕校)

 

   원래 태인(泰仁)은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 두 고을을 병합(倂合)하여 된 고을이다. 그 전에는 각 고을로, 두 곳에 향교가 있었을 것이다.

   1386(고려 우왕 12) 에 태산(泰山인의(仁義) 두 현()에 향교를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인의현(仁義縣)의 향교 터(遺址)만 신태인읍(新泰仁邑) 백산(栢山)의 서쪽 기슭(西麓)에 남아 있다고 전하고 있다.2)

   현재 알려진 대로 태인향교의 창건 시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제34권 태인현(泰仁縣) 궁실조(宮室條) 객관의 기록으로 볼 때, 1421년이라는 주장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궁실객관 정곤의 기에,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과 인의 두 고을인데, 우리 조정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에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오치선(吳致善)이 이어 와서 드디어 옛 객관의 서쪽에 지세를 살피고, 기해년 가을에 비로소 후청(後廳)ㆍ동서침(東西寢)ㆍ남청(南廳)ㆍ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신축년 여름에 안기(安起)가 오공(吳公)의 뜻을 이어받아 좌우랑(左右廊)ㆍ좌우마구[左右廐]ㆍ대문ㆍ고옥(庫屋)ㆍ향교ㆍ성전(聖殿)을 더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하였다.

 

   1409(태종 9, 己丑)에 두 현이 합현(合縣)이 되면서 태인현으로 개칭하였으며, 1416(태종 16, 丙申) 8월에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새로운 치소를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居山驛)이 있는 곳으로 옮겨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역() 건물을 그대로 쓰다 보니 시설이 비좁고 누추하였다. 2년 후인 1418(태종 18, 戊戌) 겨울 현감 오치선(吳致善)이 거산역의 객관이 있던 곳보다 서쪽에 새로운 관청을 지을 터를 잡고, 1419(태종 19, 己亥) 가을 비로소 후청(後聽)동서침(東西寢)남청(南廳)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웠고, 다시 2년 후인 1421(세종 3, 辛丑) 여름에는 현감(縣監) 안기(安起)가 좌우랑(左右廊)좌우마구(左右馬廐)대문고옥(庫屋)향교성전을 세웠다.3) 이로써 유교적 관념에 입각한 지방도시의 체제를 확립하였고 향교성전을 건립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태인향교는 강학(명륜당)과 제향(대성전)의 기능을 갖춘 것으로 짐작된다.

   1421년 건립 이후 태인향교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일부 자료에서는 태인향교가 한차례 이건(移建)하였다고 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고4)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추가적인 검증 작업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건(移建)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면, 1936년에 간행된 井邑郡誌에 태인향교가 390여 년 전에 이건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5) 이것이 태인향교의 이건(移建)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인다. 간행연도에 비추어 ‘390여 년 전1540년에 해당하는데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태인향교가 현재의 위치보6)다 서쪽에 처음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7) 이는 지리지, 읍지류 기록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태인현의 정황을 전해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가 현의 서쪽 2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8) 165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지와 그 이후의 읍지들에서는 향교가 현의 서쪽 2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9) 기록상 1리의 차이를 두고 태인향교가 이건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결국 154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기존의 자료들은 아직 단언하기 어려운 추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태인향교는 옛 읍치의 북서쪽에 입지하였으며, 주산(主山)인 성황산을 등지고 남향하고 있다. 대성전이 있는 제행영역을 북쪽에 두고, 명륜당이 있는 강학영역을 남쪽에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이다. 홍살문11)(-)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주요 건물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일직선의 축을 이루고 있다.

   태인향교는 크게 4부분의 영역, 즉 홍살문에서 만화루(萬化樓)까지의 진입공간, 만화루에서 명륜당을 거쳐 내삼문에 이르기까지의 강학공간(講學空間), 내삼문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제향공간(祭香空間), 그리고 내삼문에서 장수재(莊修齋)가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완만한 경사지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에 각 영역들은 단차(單差)를 이루고 있고, 한식 담장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다.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은 상하로 배치되었고, 장수재12)가 있는 공간은 그 중앙 서쪽에 배치되었다. 강학공간의 대지는 진입 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림 6-9>

 

 

 

<그림 6-9> 태인향교 배치 현황10)

   태인향교의 특징은 외삼문(外三門) 대신 문묘의 문루(門樓)13)인 만화루가 세워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묘우(廟宇)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만화루이며, 이외에 내삼문과 협문, 장수재, 홍살문 등이 있다. 장수재 앞에 있던 관리사는 최근 철거되었다.14) 명륜당 동쪽에는 향교 중수 관련 비석15)과 문화재 안내판이 있다. 향교를 구성하는 주요 건물 중 하나인 동서무(東西廡)과 동서재(東西齋)는 현재 없는 상태이다. 제향공간의 남동쪽 모서리 부분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식재되어 있다.16)

   규모는 대성전 26, 명륜당 23, 장수재 13, 만화루 18, 기타건물 217평으로 되어있다.

   태인향교는 불우헌 정극인이 훈도로 재임한 곳이요, 또 현감 신 잠이 유학을 진흥시킨 본거지로 역사적인 유서를 지니고 있다.

   유학(幼學)의 전통이 깊은 고장인 탓이겠지만, 역대(歷代) 수령(守令) 가운데, 흥학(興學)에 힘쓴 사람이 많으니, 신 잠(申 潛), 고용후(高用厚), 오희길(吳希吉), 조상우(趙相愚), 이익저(李益著), 김시보(金時保), 허 후(許 逅), 유 유(柳 兪), 조 정(趙 政), 서호순(徐灝淳), 심능숙(沈能淑), 이승경 (李承敬), 박희성(朴羲性), 홍범식(洪範植) 등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敎) 1인과 장의(掌議) 수 명이 맡고 있다.

 

2) 태인향교 만화루(萬化樓)

 

지정현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

지정년월일: 198698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581

시 대: 조선후기

규 모: 정면 4, 측면 2, 중층, 팔작지붕

 

   향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만화루는 외삼문(外三門)을 격에 맞지 않게 번듯한 누문으로 대신하는 만화루가 세워진 것인데, 만화루는 문묘(文廟)의 문루(門樓), 그 어원(語源)공자지도(孔子之道) 만물화생(萬物化生)’에서 따온 것으로 공자의 도로 만물을 교화 한다라는 뜻이다. 공자가 밝힌 길을 통해 우주 만물에 대한 이치(理致)와 도리(道理), 윤리(倫理)를 터득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이러한 당호(堂號)는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사용된다. 17)태인현과 같은 작은 고을에 만화루가 건립된 이유를 황실과 관련지어 언급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없다.18) 언제부터 향교에 누각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록상 고려 말부터 향교 누각의 존재가 확인된다. 향교의 누각은 고려 때 성행하던 여름 공부(夏課)를 하기 위해 건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현재까지는 현감 조항진(趙恒鎭)이 정사(丁巳)년에 만화루 정면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을 쓴 사실을 근거로 1797(정조 21)에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推定)할 뿐이다. 만화루 편액에는 歲丁巳仲夏耐翁書’20)라는 작은 글씨와 함께 趙恒鎭印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조항진은 17946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갔으므로21) 편액(扁額)에 쓰인 정사년(丁巳年)은 재임(在任) 연대를 환산(換算)한다면, 부임(赴任)한지 4년째인 1797(정조 21)에 해당한다.

   현감 조항진이 태인현에 부임하여 1797년에 향교 누각의 편액을 썼다고 해서 기존의 추정대로 이때 만화루를 건립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조항진은 만화루와 피향정(披香亭)의 편액도 썼다. 피향정 편액은 임기를 마치고 두 달 전인 17994월에 썼는데22), 이때 피향정을 중건(重建)했다거나 수리(修理)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23) 만화루의 경우에도 편액을 쓴 사실과 건물의 중건 또는 수리 여부를 연관 지을 만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조항진이 쓴 편액으로 인하여 만화루가 최소한 1797년 이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줄 뿐이다.

   태인현의 모습이 나타나는 옛 지도를 살펴보면, 조항진이 편액을 쓰기 이전에 이미 만화루가 건립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태인현의 옛 지도 5점 정도이며, 이 중에서 향교에 만화루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지도는 4점이다.

 

<그림 6-10> 비변사인방안지고 호남지도(17391750년 추정, 규장각 12155)

 

 

<그림 6-11> 해동지도(1750년대 초, 규장각 古大4709-4112155)

 

 

<그림 6-12> 여지도(17361767년 추정, 규장각 4790-68)

 

 

<그림 6-13> 지승(17761786년 추정, 규장각 15423)

 

   먼저 17391750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 方眼地圖) 호남 지도(湖南地圖)에는 두 동의 건물로 표현되어 있고 각각 鄕校萬化樓로 표기되어 있다. 만화루는 단층 건물로 표현되어 있는데, 피향정이 중층 건물로 표현된 것과 대조적이다. 당시 만화루가 단층 건물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간략하게 표현된 결과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만화루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는 지도이다. <그림 6-10>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海東地圖)」24)173617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여지도(輿地圖)」25), 그리고 1776178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지승((地乘)」26)에 표현된 태인향교의 모습은 동일하다. 향교는 두 건물로 표현되어 있고 개개의 건물 명칭은 생략된 채 전체를 鄕校라 표기하고 있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비변사인방안지도 호남지도와는 달리 만화루로 추정되는 전면의 건물이 중층 건물로 묘사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피향정과 함께 만화루도 중층 건물로 묘사된 것을 보면 지금과 같은 중층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궤와 같이 정확하게 건물을 묘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지도에 누각 형식의 건물로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태인향교의 만화루는 적어도 18세기 중엽에 중층 형식의 건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태인현감 조항진이 편액을 쓴 1797년 보다 조금 앞서는 시기로 추정되기 때문에, 편액과 만화루가 동시대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 6-11, 12, 13>

   한편 현재와 같은 만화루의 모습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모습의 만화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간행된 井邑郡誌가 최초이다. 4×2칸의 평면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문지방(門地枋)27)의 형태로 미루어 지금과 같이 아래 층 가운데 2칸에 문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와 같이 계자난간(鷄子欄干)28)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간단하게 살대로만 엮은 평난간(平欄干)29)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 차이점이다.30)

   향교 누각의 정면칸수는 대부분 3칸 또는 5칸인 것이 일반적이다. 태인향교의 만화루와 같이 정면 4칸을 취하는 경우는 경북 군위 의흥 향교의 광풍루(光風樓) 정도만 알려질 정도로 극히 이례적이다.31) 정면 칸수를 4칸으로 하였을 경우 삼문(三門)의 형식을 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향교 누각에서는 이러한 평면 규모를 채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인향교의 누각을 4칸으로 계획한 의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추후 이에 대한 세심한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면 4, 측면 2칸으로, 지붕 측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翼工) 집으로, 화강석(花崗石)의 바른 층 쌓기의 기단(基壇)의 중앙 부분을 끊어, 장대석(長臺石)32)으로 넓은 계단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며, 더욱이 정면을 짝수 칸으로 하여 아래층에는 4칸 중 중앙의 2칸에 태극문양이 그려진 향교의 출입문을 만들고, 나머지 2칸은 판벽(板壁)으로 막았으며 위층에 만화루라는 누()를 구성하였다. 태인향교의 만화루와 같이 출입문을 두 곳으로 나누어 낸 것과 옆을 판벽으로 처리하는 경우는 다른 건물에서 아주 보기 힘든 모습이다. 평지에 어울리는 누각을 만드는 황금비율을 찾는 과정에서 키는 낮추고 품을 넓혀 그리 디자인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누는 사방으로 터져 있으며 마루 주위에 난간을 돌렸던 것 같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고개를 숙이고 키 낮은 문에 들어서면 누각을 떠받친 우람한 붉은 누하주(樓下柱)33)들 사이로 오른쪽 끝에 누각으로 오르고 좁고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기둥과 주초들은 저마다 제각각으로 생겨서 그 다양한 생김새에 호감이 간다. 어느 기둥 하나 못생긴 것을 찾을 수 없다. 저마다 자기 생김 그대로 자기의 일은 누각을 떠받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듯 튼실하다. 계단을 오르면 기둥들은 모두 붉은 색이고 대들보와 서까래들은 죄다 푸른색이다. 누각 안에는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고, 다만 커다란 푸른 용과 붉은 용 2마리가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뭔가에 놀란 듯 퉁방울눈을 부릅뜬 채 재미있는 표정으로 마주보며 대들보 위에 턱 걸치고 아랫도리는 용트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유쾌하다. 대개 용에게서 풍기는 위엄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34)

   누각 한 풍경은 심각하고 진지한 것을 벼르고 올라왔다가 뜬금없이 우스운 장면을 맞다드린 듯 유쾌하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이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뭔가에 놀란 듯 퉁방울눈을 부릅뜬 채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다. 대개 용에게서 풍기는 위엄은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렇듯 해학적인 용을 보니, 독서삼매에 빠졌던 학생들이 만화루에서 용들을 희롱하며 머리를 식히는 모습이 떠오른다.35)

   만화루는 1984년 해체보수를 시행하였다. 그 이전에는 부분 번와(翻瓦)36) 공사(工事) 정도가 1976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할 뿐이다. 지정 이후에는 1997년 번와 공사를 시행하였고 1998년에는 기단을 보수하였다. 2000년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태인향교 명륜당(明倫堂)

 

   향교의 기능은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와 함께하는 제향 공간(祭享空間)과 명륜당, 서재로 이루어진 교육 공간(敎育空間)이 향교교육의 주요 공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강학 공간 중에서도 명륜당은 강학의 핵심 건물이다. ‘명륜(明倫)이란 대개 군자의 학문을 말하고, 학문을 배우고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이를 닦는 집을 명륜당이라 한다. 맹자(孟子)등문공편(謄文公篇)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즉 명륜당은 인륜(人倫)를 밝힌다는 의미에서 시공(時空)를 함께하는 입체적인 인간관계를 체계화한 오륜(五倫)를 강학하던 강당이다. 또한 명륜당은 강학을 하던 중앙부 대청의 공간과 함께 좌우양측이나 한쪽에 교관의 거처인 방을 들인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이는 조선 초부터 국가에서 지방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군현(郡縣)에 교관(敎官)을 파견하여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도록 하게 됨에 따라 명륜당에 거처소가 필요하게 되면서 방을 드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만화루 뒤편에 낮은 자세로 앉아 있는 명륜당은 지방의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던 강당으로 차분하고 단정하다.

   명륜당이 1631년37)1862년38)에 중수(重修)되었다는 사실만 전할 뿐 변화과정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862년 명륜당을 중수할 당시 태인 현감은 홍종관(洪鐘觀)이며, 1861년 부임하여 이듬에 파직(貶罷)당했다.39)

   잿빛이 도는 예스러운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이 5, 측면이 3칸의 이고주 오량가(二高柱五樑)40)에 초익공양식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이며, 좌우 양합각(兩合角)에는 방풍판(防風板)을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 구성방법에는 객사형(客舍形), 양방형(兩房形), 일방형(一房形), 마루형으로 구분할 수 있41)다. 평면배치(平面配置)는 가장 일반적인 양방형 평면구성은 가장 일반적인 양방형 평면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전후면 툇간 없이 가운데 3(三間)이 대청(大廳)이며, 좌우 양측 협칸에 각각 온돌방() 한 개씩이 들어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3칸의 대청(大廳) 마루 앞에는 띠살무늬 분합문들을 달아 드나들도록 하였다.

   기단은 자연석 기단으로 정면은 이벌대의 바른층42) 허튼층43)으로 쌓았고 배면은 외벌대로 쌓고 기단 내밀기는 사면이 모두 동일하다.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44)를 사용하였으나 전면의 협칸 초석은 화강석으로 가공한 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주와 각주를 혼용하여 사용하였는데 대청에서 좌우측의 방의 칸막이벽 중앙에 각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다. 두리기둥(원기둥)16본이고, 각기둥은 2본을 사용하였다. 기둥의 높이는 초석의 높이차이로 인하여 일정하지 않다.

   상부 목가구의 구성은 대청상부에는 직선으로 치목한 대들보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로 삼분변작법(三分變作法)45)에 의한 동자주(童子柱)46)를 설치하였으며, 그 위로 종보(-)47)를 놓고 좌우 양쪽으로 중도리를 걸고 중도리 사이에는 널반자를 설치하였다. 종보의 중앙 위에는 사다리꼴의 판대공을 놓고 그 위로 종도리를 받는 2고주 5량가이다.

   도리의 형태는 모두 굴도리48)를 사용하였고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있으며, 양협칸(兩夾間)에는 방을 드리고 동측의 방은 2칸 반으로 북측의 1칸 하부에는 함실아궁이49)를 들였고 그 위로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서측의 방 역시 북측에 아궁이를 설치하였으나 상부에 마루는 없다. 양협칸의 방 모두 천장에는 목조반자틀50)을 설치하였고 바닥은 구들을 들인 온돌구조이다.

   처마는 홑처마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 끝에는 모두 와구토(瓦口土)51)를 물렸다. 용마루는 착고와 부고를 사용한 5단이고 내림마루는 착고만을 사용한 3단이다.

   지붕마루 끝에 걸려있는 망와는 모두 근래 교체된 기와로 오래된 명문이나 문양은 없다.

   명륜당 편액(扁額)은 대청 정간(正間)의 처마부분에 걸려있는데 향교의 입구 쪽에서 바라보이도록 남측에 설치되어 있고 검소하게 고색가칠(古色加漆)52) 되어있다.53)

   비지정문화재인 명륜당은 1984년 해체 보수하였고, 1996년과 2012년에는 지붕 보수가 시행되었다.54)

 

4) 태인향교 대성전(大成殿)

 

지정번: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5

지정년월일: 198441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82-1

시 대: 조선후기

규 모: 정면 3, 측면 3, 단층, 맞배지붕

 

   명륜당 뒤에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공자의 정식 호칭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다. 굳이 뜻을 풀이하자면 크게 이루어 성인의 경지에 올라 글을 널리 펴는 왕이라는 뜻이다.

   태인현은 행정구역상 작은 고을이기 때문에 소설위(小設位) 정도의 규모로 석전제(釋奠祭)가 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中國) 제현(諸賢)인 공자를 비롯한 5(五聖, 顔子, 曾子, 子思, 孟子), 송조(宋朝) 4(四賢, 周敦頤, 程顥, 程頤, 朱熹), 우리나라 18(十八賢)55)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配享)되기 때문에 동서무(東西廡)는 건립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인현 관련 문헌들에서도 동서무가 설치되었던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1935년에 간행된 조선호남지(朝鮮湖南誌)에는 5성과 함께 송조 4현과 동국 18현을 동서종향(東西從享)하고 있으며, 동서무는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6) 그 이유는 태인향교는 소설위(小設位)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위패는 어떻게 모셨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61년에 간행된 태인향교 유도회 유림안대성전 위차도(大成殿 位次圖)’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배위 서열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최치원(崔致遠)이 설총(薛聰)보다 더 높다는 사실이다. 이는 태인의 지역적 특성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최치원은 태인 지역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로서 당시 이곳 태수를 지냈고, 이런 인연으로 현재도 무성서원에 배향(配享)되고 있다. 현재는 다른 향교와 같이 설총이 최치원보다 더 상위의 위계를 점하고 있으며, 송조 4현과 동국 18현이 출신 국가와 무 관하게 시대순으로 섞여있다.

   전해 오는 유물(遺物)로는 제기(祭器), 제복(祭服), 서적(書籍) 등이 향교지(鄕校誌)와 비품(備品) 목록(目錄)에 기록되어 있다. 향제(享祭)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첫째 丁日)에 춘향제와 추향제로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한 달에 두 번인 삭()() 때 분향제(焚香祭)를 올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신 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향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은 공자와 성현들을 모신 대성전이다. 때문에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하여 대성전을 앞에 두고, 강학공간인 명륜당은 그 뒤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하지만 경사진 곳에서는 강학공간을 앞에 두고 그 뒤에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를 택했다. 둘 다 대성전을 가운데나 높은 데 두어 전체적으로 모든 건축물이나 시선이 대성전을 향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 태인향교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어 명륜당을 지나야 대성전에 이를 수 있는데, 이는 태인향교가 들어선 터가 경사가 져 있기 때문이다.

   유학의 유()는 선비라는 뜻이다.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옛 사람들은 이곳 향교에서 대성전을 가득 채운 성현들의 말씀을 자나 깨나 배우고 익히며 필요한 사람이 되어갔던 것이다.57)

   사당은 혼이 있는 곳이어서 어둡다. 그래서 4짝 문은 창살 없이 판으로 만들어 빛을 차단했다. 단지 벽 가운데는 좁은 폭의 넉살무늬 광창이 옆으로 길게 나 있다. 그 긴 창을 버티기 위한 샛기둥을 여럿 세웠는데 양쪽 벽면을 서로 다른 비율로 나누고 있어서 구성의 아름다움까지 은근하게 표현했다.

   평면 형태는 퇴칸이 없는 폐쇄형으로 자형이고 규모는 정면(正面) 3(三間), 측면(側面) 3(三間)으로 정면과 측면의 주간거리 비율이 1.60: 1의 장방형 평면을 가진 건축물로 내진고주 없이 통칸으로 되어 있다. 실구성은 3칸의 정칸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골판문(骨板門)59)을 달았고 양협칸(兩夾間)에는 채광을 고려하여 1짝의 정자창살을 가로로 길게 설치하고 나머지 벽체는 심벽(心壁)60)으로 마감하였다.

   기단은 외벌대의 장대석으로 기단의 높이는 전면이 1자 정도 높게 설치되고 기단바닥은 강회다짐 하였다.

   주춧돌은 원주형 화강암(花崗巖)을 총 12개를 사용하였고, 기둥은 전체 두리기둥으로 전면과 배면 열에는 평주를 8본 사용하고 양측면의 중앙 칸에는 종보를 받을 수 있도록 고주를 4본 사용하였다.

   기둥상부에는 주두를 놓고 도리방향으로 외부에 2출목을 두어 살미와 첨차가 교차하게 하였고 첨차의 하단부는 연화두형으로 조각하고 살미는 익공향식의 형태로 꾸민 주심포 양식으로 외출목도리가 있다.

   정면 중앙에 4개의 널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쪽에는 새살의 살창을 붙였다.

   지붕은 측면에서 볼 때 균형미를 지닌 사람 인()자 모양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처마 끝은 막새기와를 사용하고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양성 바르기 하여 마감하고 목부재면은 금모로 단청한 아름다운 집이다.61) 맞배지붕을 올리기 위해 처마를 길게 빼고 창방과 장여 사이에 커다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화반이 올라있다. 화반(花盤)이란 꽃꽂이 접시라는 뜻인데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다. 게다가 새가 두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의 익공이 3겹으로 쌓여 화려하기 그지없다. 공자를 모신 성스러운 집답게 위엄과 장엄으로 꾸며졌다.

   태인향교는 광복 이후 지금까지 20회 정도의 크고 작은 보수가 있었다. 1967년 보수 이후, 1981년과 1995년에 대성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보수가 있었다. 1989년과 1996, 2005년에는 지붕 보수가 있었고, 1998년에는 대성전 창호를 보수하였다.

 

5) 태인향교의 기숙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명륜당과 함께 강학영역의 주요 구성 건물인 동서재(東西齋)에 관한 기록도 일제강점기가 돼서야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던 1935년에 간행된 조선호남지(朝鮮湖南誌)에는 동서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62) 그러나 이듬해인 1936년에 간행된 井邑郡誌와 그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서재에 대한 기록이 없다.63) 이 기록대로라면 동서재는 19351936년경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배치 상황에서 보면 동서재는 명륜당의 전후, 즉 전당후재(前堂後齋)와 전재후당(前齋後堂)의 배치형식 모두 물리적으로 가능하게끔 공간이 비어 있다. 그러나 호남지역에서는 주로 전당후재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동서(東西)로 마주보며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추후 발굴을 통해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64)

 

6) 내삼문(內三門)

 

   내삼문은 향교 내에서 제향공간인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전면에 계단을 두고 세워진 솟을삼문 건물이다.

   전면 3, 측면 1칸 규모에 외벌대의 기단으로 전면과 배면에는 가공한 화강석기단을 설치하고 양측면은 자연석기단으로 되어있다.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초석의 기둥과 만나는 주좌는 가공을 하여 둥글게 처리한 후 그 위로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각 칸 전면 열에는 대성전 방향으로 열리는 두 짝 판문을 달았으며 전면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 넣었다.

   전면의 기단은 단을 주어 2단으로 설치하고 오름 계단은 자연석으로 되어있다.

   전면과 배면열에 세워진 기둥은 원기둥으로 정칸의 원기둥은 4본이다.

   정칸의 좌우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형(소의 혀 모양) 익공과 하단부를 초각한 보아지를 두었고 창방을 가로질러 소로수장65) 하였다. 건물 협칸 양끝기둥에는 주두 없이 도리와 보가 결구되고 도리의 하부에는 단장여(短長欐)66)를 설치하였다.

   상부 목가구의 구성은 3량가(三樑架: 도리가 세 개 있는 지붕)로 구성되어있고 보는 방형으로 사면을 궁굴렸으며, 보의 중앙에 각기둥을 세워 보를 받치고 보의 상부에는 동자대공(童子臺工)67)을 놓고 종도리를 받는다.

   도리의 형태는 정칸은 굴도리이고 양협칸은 납도리68)이다.

   처마는 홑처마로 지붕은 솟을삼문(-三門)69) 형태의 맞배지붕으로 처마 끝에는 모두 와구토를 물렸고 용마루는 착고와 부고를 사용한 5단이며, 내림마루는 착고만을 사용한 3단이다. 양측면에는 방풍판(防風板)70) 없이 박공만을 설치하였고 내삼문은 가칠단청(假漆丹靑)71) 되어있다.72)

   내삼문은 1984년 해체 보수되었으며, 1996년과 1998, 2008년에도 번와 등의 보수공사가 있었다.

 

7) 장수재(莊修齋)

 

   현재 남아있는 장수재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935년에 간행된 조선호남지에 처음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건립된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일부 태인향교에 대한 자료 중에는 앞에서 장수재 외에 사마재가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현재 사마재와 양사재는 없다. 1936년에 간행된 井邑郡誌1957년에 간행된 신편 정읍군지에는 장수재와 사마재가 존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73) 반면, 1965년에 간행된 태인지에는 양사재와 사마재가 문묘 동쪽 1리에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74) 향교에서 동쪽으로 1리 떨어진 곳에 양사재와 사마재가 있었다면 그 위치는 지금의 태인 동헌 근처일 것으로 보이며, 결국 양사재와 사마재는 배치상 태인향교와는 무관하게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61년에 간행된 태인향교 유도회 유림안에는 당시 태인향교의 모습을 담은 삽화가 남아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배치는 지금과 같이 전학 후묘이며, 당시에도 동서무와 동서재는 없었다. 내삼문의 서쪽에 장수재가 있는 것도 현재의 모습과 같다. 다만 장수재 전면의 고사(庫舍)’는 최근까지 있었던 관리사를 묘사한 것으로 1935년에 간행된 조선호남읍지에도 庫舍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전직사(典直舍)’, ‘전직고사(典直庫舍)의 다른 건물 명칭이 보이지만 모두 관리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5)

   장수재는 향교의 서측면에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면 4칸에 측면 2칸으로 전면에 툇간을 두어 정칸의 중앙 2칸은 대청으로 우물마루가 깔려있고 좌우측 1칸은 구들방으로 전면에 대청보다 높게 툇마루를 두고 하부는 함실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서측의 방은 정면에 1짝 세살창을 설치하였고 동측의 방은 정면에 2짝 살창으로 되어있으며, 대청에서 양측 방으로 출입하도록 하부에 궁판널76)을 댄 2짝 세살문을 달았다. 대청의 배면에는 2칸에 각각 2짝의 골판문으로 되어 있다. 동측방의 배면에는 반침을 달아 사용하고 있다.

   정면의 기단이 이벌대의 자연석기단이고 배면은 외벌대로 지면이 전면으로 경사져있다. 기둥은 전면 열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후면은 모두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이고 그 위로 기둥을 세웠다.

상부 목가구의 구성은 기둥 위에 장여를 맞춤하고 도리를 올려 보와 결구되어 있는 간략한 구조이다. 가구는 3량가로 구성되어있고 보는 원형으로 자연스러운 곡재를 사용하였으며, 보의 중앙 상부에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고 있다. 도리의 형태는 납도리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처마 끝에는 모두 와구토를 물렸다. 용마루는 착고(着高)와 부고(付高)를 사용한 5단이고 내림마루는 착고만을 사용한 3단이다. 현재 건물의 상태를 보면 창호는 일부 유실되고 뒤틀려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벽체는 균열되어 탈락이 진행되고 있으며, 기단바닥도 균열되어 전반적인 보수가 요구된다. 건물의 목부재면은 고색가칠(古色假漆)로 되어있다.77)

   장수재는 1988년과 1998년에 보수되었는데 공사 범위는 알 수 없다.

 

8) 협문(夾門)1과 협문(夾門)2

 

   협문1은 대성전 영역과 서측에 있는 장수재를 연결하는 협문으로 담장면과 연결되어있다. 협문1은 기둥사이에 상방과 하방을 두고 2짝의 판문을 설치하여 대성전 쪽으로 열리도록 하였다. 바닥은 몰탈로 마감되어 심초석(心礎石)78)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었고, 심방목(心枋木)79)은 부식이 심한 채로 콘크리트로 덮여있다. 담장 사이에 설치된 협문은 담장과 만나는 면에 용지판(-)80)을 대고 각기둥을 세웠다. 전후면에 샛기둥81)500mm 간격으로 세워 심방목에 고정하고 측면은 널판으로 마감하였다. 가구는 중앙에 민도리(납도리)82)를 기둥 위로 보와 결구하여 설치하고 각재의 평연을 저울대 형식으로 놓아 상부면은 개판(蓋板)83)을 수평으로 깔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처마 끝은 모두 와구토를 물렸고 용마루는 착고와 부고를 사용한 3단이며, 내림마루는 착고만을 사용한 3단이다. 양측면에는 박공으로 마감하였다.

   협문2는 명륜당 후면 서측의 담장에 설치하여 화장실과 장수재로 연결 되어있다. 협문 기둥사이에 상방과 하방을 두고 2짝의 판문을 설치하여 화장실 쪽으로 열리도록 하였다. 바닥은 몰탈로 마감되어 심초석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고, 심방목이 바닥에 접해있다. 담장 사이에 설치된 협문은 담장과 만나는 면에 용지판을 대고 각기둥을 세웠고, 후면에 샛기둥을 270mm 간격으로 세워 심방목에 고정하였으며, 측면은 널판으로 마감하였다. 가구는 중앙에 민도리를 기둥 위로 결구하여 설치하고 각재의 평연(平椽)84)을 저울대 형식으로 놓아 상부면은 개판을 수평으로 깔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처마 끝은 모두 와구토를 물렸고 용마루는 착고와 부고를 사용한 5단이며, 내림마루는 착고만을 사용한 3단이다. 양측면에는 박공으로 마감하고 가칠단청하였다.85)

 

9) 홍살문(紅箭門)과 비석군(碑石群)

 

   홍살문은 태인향교 만화루 남측 20m 지점인 향교가 시작되는 곳에 설치되어 태인향교의 경역의 시작을 알리는 시설물이다.

   홍살문은 5.4m의 높이로 목재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지면에서 고정은 기둥의 양옆으로 화강석의 지지석을 설치하고 지지석과 기둥을 관통하는 볼트를 아래위 2개를 설치하여 고정시켰다.

  사롱(斜籠)86)살은 30×30mm의 각재를 사용하였고 사롱(斜籠)살을 고정하는 가로재인 상부띠장은 120×180mm, 하부띠장은 120×200mm으로 각재를 사용하였다.

   만화루와 명륜당 사이의 동쪽 편에 문화재 안내판과 공적비가 가지런히 세워져있다.87)

 

10) 그 외 건물 광복 이후 보수내용

 

   관리사는 1988년과 1999년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고 2011년 철거되었다.

   향교 주변 담장은 부분적으로 신축 또는 보수되었는데, 1967년에는 대성전 주변 담장을, 1991년에는 관리사 주변 담장을 시멘트블록으로 쌓았다. 그러나 1999년과 2011년에는 시멘트블록의 담장을 한식 담당으로 교체하는 공사를 하였다.

 

 

<그림 6-14> 무술년에 박용만 등이 태인향교에 보낸 통문

 

무술년 10월에 전주향교의 박용만(朴龍萬) 5명이 연명으로 태인향교에 보낸 통문이다. 이들은 이 통문에서 태인의 사인(士人) 조병제(趙炳濟)의 지극한 효행을 칭송하고 그의 동생 기제(夔濟) 또한 그 못지않다고 말하고 이들의 사적을 함께 감영에 보고하는 한편 이를 통해 조정에 알려 포상의 특전을 받게 하자고 요청하였다.

문서제목

한 자

戊戌年朴龍萬 等泰仁鄕校에 보낸 通文

한 글

무술년에 박용만 등이 태인향교에 보낸 통문

발급자

한 자

朴龍萬 等

한 글

박용만 등

수급자

한 자

泰仁鄕校

한 글

태인향교

관련지역

원문지명

全羅道(전라도) 全州郡(전주군)

문서크기

108×59.3

발급년

戊戌

현소장처

국립전주박물관

소장처고유번호

_6897

 

 

 

 

 

<그림 6-15> 19283월에 태인향교에서 선사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19283월에 태인향교(泰仁鄕校)에서 선사(善士) 김용규(金容奎)의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全州鄕校)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김용규의 호는 해강(海岡)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비서감승(秘書監承) () 김동두(金東斗)의 아들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에 서로 우애가 있으며 선영과 집안을 잘 다스렸고 이웃과도 잘 지내어 원근에서 흠모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직원(直員)으로 향천(鄕薦)되어 전무(殿廡), 사당(祠堂), 문고(門庫), 변두(籩豆) 등을 중수(重修)하였고, 의장(儀仗), 관복(冠服), 기명(器皿) 등의 제구(諸具)를 마련하여 준비하는 등 이를 칭송하여 표창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작성연도 부분에는 태인향교라는 검은색의 향교인(鄕校印)이 찍혀 있고, 발문(發文)에 참여한 사람은 다사(多士) 23명이다.

 

. 서당(書堂)

 

   조선시대 태인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사학(私學)이다. 태인 지역은 신라 때 최치원이 태수를 지낸 곳으로 유교문화(儒敎文化)의 역사(歷史)가 깊은 곳이다. 15세기에는 향교와 더불어 사학이 세워져 유학의 진흥을 도모하였다.

   정극인(丁克仁)은 처자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서당(書堂)을 짓고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으며, 1475년에는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따라서 향약을 만들어 시행하기도 했다. 그 뒤 송세림(宋世琳)이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를 건립하여 향학당(鄕學堂)이라 칭하고, 후학 양성에 힘쓰는 등88) 그 뜻을 이어 받았다. 이렇게 시작한 태인 지역의 사학은 1543(중종 38)부터 7년간 태인 현감으로 재임한 신 잠(申 潛)이 서울의 사부학당(四部學堂)을 모방하여 태인 지역에 사학당(四學堂)을 설치하면서 절정에 이른다.89) 그는 태인의 동서남북에 학당을 세우고 서책을 인쇄하여 보관케 했다.90) 신 잠이 다른 지방으로 이임(移任)하자 고을 사람들은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고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지냈으며, 신 잠 부부의 목상(木像)을 만들어 성황당에 봉안하고 삭망제(朔望祭)를 올릴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이러한 유교적 전통이 계속 이어져 1735년에 부임한 허 후(許 逅)는 읍치에 일락제(一樂齊)를 건립하고, 1743년에 부임한 유 유(柳 愈)는 산내면에 능교서당(陵橋書堂)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기록상 향학당을 포함하여 7개의 학당이 현() 단위의 작은 고을에 있었던 것은 태인 지역이 유교적(儒敎的) 전통(傳統)과 사림문화(士林文化)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태인 지역의 유교적 학풍 진작은 이 항(李 恒)을 필두로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였고, 호남(湖南) 사림(士林)을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당시 사림들은 서원 설립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태인 지역에도 많은 서원(書院)과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1685년에 사액된 남고서원(南皐書院)1969년에 사액된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는데, 최치원, 신 잠, 정극인, 송세림 등을 배향하는 무성서원은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전북 유일의 서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과 군량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사람들은 이 항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지역 사림(士林)이었다. 특히 전주에 있던 사고(史庫)의 실록(實錄)과 경기전(慶基殿)의 어진(御眞)을 내장산까지 피난시키는데 일조한 인물은 태인 지역의 유생이며 이 항의 문인인 안 의(安 義)와 손홍록(孫弘祿)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임진(壬辰), 정유(丁酉)의 양란(兩亂)을 지나면서도 실록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91)

 

6. 그 외 관아(官衙)

 

. 향청(鄕廳)

 

    향사청(鄕射廳)이라고도 하며 좌수(座首)별감(別監)의 집무처(執務處)였다.

 

. 책실(冊室)

 

    책방(冊房) 방자(房子)의 집무처

 

. 작청(作廳)

 

    질청(秩廳)이라고도 하며 이방(吏房), 예리(禮吏), 승발(承發), 집사(執事) 등의 집무처

 

. 공방청(工房廳)

 

    공방(工房)의 공고자(工庫子)의 집무처

 

. 장청(將廳)

 

    장교청(將校廳)이라고도 하며 순교청(巡校廳)이니 장교(將校)의 집무처

 

. 사령청(使令廳)

 

    사령(使令)의 집무처

 

. 책방(冊房)

 

    군수(郡守)의 비서(秘書)로 공무(公務)를 보는 외에 군수의 자제 훈육을 담당했다.

 

. 통인청(通引廳)

 

    통인(通引)의 집무처로 수통인(首通引)과 통인(通引)이 있었으니 군수의 지시에 의하 여 관인(官印)을 취급하고 명령을 전달하였다.

 

. 구마청(駒馬廳)

 

    의식이나 관청, 관리의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련한 말을 두는 시설

 

. 군기청(軍器廳)

 

    병기(兵器), 기치(旗幟) 기타 군수품(軍需品)을 만드는 일을 맡아본 관청.

 

. 진남루(鎭南樓)

 

    태인현(泰仁縣) 원태인현(元泰仁縣) 객사(客舍)의 문루(門樓)이었으니 현감(縣監) 유 근(柳近)이 중건(重建)하였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진남루는 태인현지(泰仁縣誌, 1786년 간())에 기록되어 있는 누각(樓閣)이다.

 

7. 창고(倉庫)

 

. 군기고(軍器庫)

 

    각종 군기(軍器)의 저장소, 군기색(軍器色)이 담당

 

. 호적고(戶籍庫)

 

    호적대장(戶籍大帳)을 보관하는 장소로 호적방(戶籍房)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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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속] 집터의 길흉(吉凶)을 점쳐서 판단하는 풍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 박왕희, 한국의 향교건축(문화재관리국, 1998), 242. 김호일, 한국의 향교빛깔 있는 책 들-235 (대원사, 2000), 136.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66. 재인용.

3) 위 본문의 이정섭(), 신증동국여지승람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궁실조 객관(한국고전변역원, 1969), 507.

4)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료들은 문화재청 홈페이지(태인향교 마화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태인향교(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74. 김호일, 한국의 향교빛깔있는 책들-235 (대원사, 2000), 136. 등이다. 재인용

5) ‘-泰仁面泰成里에잇다. 距今三百九十餘年前移建하엿고...’, 井邑郡誌, 3839. 20여 년이 지 난 1957년에 간행된 신편 정읍군지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보인다. 재인용.

6) 1510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주장이 ‘1540(중종 5)’로 잘못 표기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 다. 1540년은 중종 35년이지만, 이를 참고한 자료들이 이건 연도를 중종 5년인 1510년으로 잘못 인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1540년이란 정확한 이건 연도가 어떤 근거에 의해 나오게 되었는 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태인향교가 1510년 이건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료는 문화재청 홈페 이지(태인향교 만화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태인향교(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74. 김호일, 한국의 향교빚깔있는 책들-235 (대원사, 2000), 136. 등이다. 재인용.

7) '新增東國輿地勝覽 泰仁縣 宮室條에 의하면 이 향교는 1421(세종 3)에 건립되었으며 鄕校 在縣西三라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위치보다도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향교가 언제 현재 의 자리로 이건되었는 알 수 없으며...’, 문화재대관(전라북도, 1979), 566. 재인용.

8) 鄕校 在縣西三里’, 新增東國輿地勝覽34권 태인현 학교조 향교

9) 鄕校 在縣西三里’, 東國與地志태인현 학교조 향교(1656). ‘鄕校 在邑西邊二里’, 泰仁郡 邑志학교조 향교(1789년 경). ‘鄕校 在邑西邊二里’, 湖南邑志2책 태인현 학교조 향 교(1895). ‘鄕校 在郡西二里’, 全羅北道邑志태인군 학교조 향교(1896년이후) 재인용.

10)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55.

11) (((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브리태니커

12) 원래 장수재 전면에 관리사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향교를 지원, 관리하는 부속공간이었던 것으 로 추정된다.

13) 대궐이나 성 따위의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4) 관리사는 2011년 철거되었다. 정읍시 자료 참조.

15) 비석은 泰仁文廟重修慕聖碑(1667년 건립), 士人權泰晶功績碑(1967년 건립), 泰仁鄕校保 存會記念碑(1983년 건립) 3기가 있다.

16)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5556.

17) 만화루라는 당호를 가진 누각이 있는 향교로는 전북의 태인향교를 비롯하여 전주향교, 부안향교, 김제향교, 금구향교와 전남의 화순향교, 영광향교 등이 있다. 기록상으로는 경북 상주향교에서도 만화루라는 당호를 가진 누각이 있었다. 박왕희, 한국의 향교건축(문화재관리국, 1998), 159.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6768. 재인용.

18)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가 이 곳 송씨(宋氏)와 같은 성씨이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가 이 곳 출신이기 때문에 그 걸 기념하기 위해 누각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정읍군 지(정읍군, 1985), 702.

19) 조영화, 鄕校建築에 관한 硏究(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5), 4345. 재인 용.

20) 중하(仲夏)5월이고 내옹(耐翁)은 조항진(趙恒鎭)의 호로 추정된다. 이 편액(扁額)을 근거로 詳說古文眞寶大全태인 방각본(坊刻本, 상업적 민간 출판 도서)의 발() 중에서 내옹(耐翁)이 썼음을 밝히는 발문(跋文)을 조항진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윤수, “태인坊刻本 詳 說古文眞寶大全』『史要聚選”, 서지학 연구5,6 합집, 1990, 363366.) 재인용.

21) 甲寅(1794)十一月到任 己未(1799)六月瓜遞’, 호남읍지(1871년 경) 邑先生條 趙恒鎭

22) 피향정 내부에 걸려 있는 편액 중 披香亭이라고 쓴 편액에는 歲己未孟夏라는 작은 글씨와 함 께 풍성’, ‘趙恒鎭印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어 조항진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기미(己未)년은 1799년이고, 맹하(孟夏)4월을 의미한다.

23) 동남종합건축사무소, 피향정 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01). 아리건축사무소, 피향정 수 리보고서(정읍시, 2004) 참조.

24) 서울대학교 규장각학국학연구원 종합지리지정보. (http://kyujanggak.snu.ac.kr/geo/contents/con_map_list.jsp?seq=106#map_hd)

2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147.46.103.182/OIS/GZD/VIEWER.jsp?nodeid=8296&tablename=KYD_GZD_D_TBL&domain=e-kyujanggak.snu.ac.kr)

26)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147.46.103.182/OIS/GZD/VIEWER.jsp?nodeid=8296&tablename=KYD_GZD_D_TBL&domain=e-kyujanggak.snu.ac.kr)

 27) [건축] 문에서 두 문설주 아래에 가로 댄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8) [건축] 난간동자를 닭의 발 모양으로 바깥쪽으로 구부정하게 하여 화초 무늬나 덩굴무늬를 새겨 만들고, 돌난대를 밖으로 내밀어 걸친 난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9) 건축] 양쪽에 엄지기둥을 세우고 수평으로 띳장과 돌난대를 놓아 난간동자로 받쳐 세운 난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0) 정읍시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만화루의 계자난간은 2000년 공사 때 설치되었다고 한다. 재인용.

 31) 의흥향교 광풍루는 태인향교 만화루와 같이 문루(門樓)의 기능을 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경상북도의 향교건축-남서부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355. 재인용.

 32) [건축] 계단의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이는 네모지고 긴 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3) [건축] 다락집 구성에서 마루 밑으로 세우는 기둥. 건물에 따라 목주(木柱)나 석주(石柱)를 세우 기도 하며, 돌기둥의 유구로는 경복궁 경회루가 가장 유명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4) 동진강(사단법인 정읍예총, 2012), 140.

35) 정읍 선비의 길을 걷다(정읍문화원, 2009), 6869.

36)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燔瓦)’라고 하고 기와 덮는 일을 번와(飜瓦)’라고 함.

37) 인조 9년 신미 3월에 명륜단을 중수하였다고 하지만, 근거 자료를 밝히지 않았다. 泰仁鄕校誌 (태인향교지 편찬위원회, 1996), 284. 재인용.

38) 明倫堂上樑文(1862), 泰仁鄕校誌(태인향교지 편찬위원회, 1996), 290. 재인용.

39) 辛酉(1861)二月到任 壬戌(1862)六月貶罷’, 호남읍지(1871년 경) 邑先生條 洪鐘觀

40) [건축] 고주(高柱) 두 개를 써서 오량(五樑)을 구성하는 방식. 들보는 고주에서 합보하고 고주는 마룻보를 바로잡는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1) 박왕희, 한국의 향교건축133.

42) 돌쌓기1 켜 높이는 모두 동일한 것을 쓰고 수평줄눈이 일직선으로 통하게 쌓는 돌쌓기 방식.

43)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44) [건축] 자연 그대로의 돌을 다듬지 않고 건물의 기둥 밑에 놓은 주춧돌.

45) 삼분변작법은 앞 뒤 기둥 간격, 즉 대들보를 3등분하고 1/3되는 곳에 중대공을 각각 배치시키는 법.

46) [건축] 들보나 툇마루, 난간 따위에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7) 마룻보(대들보 위의 동자기둥에 얹히어 중도리와 마룻대를 받치는 들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8) [건축] 단면이 둥근 도리. 집이나 다리 등을 세울 때에, 서까래를 받치는 역할을 하도록 들보와 직각으로 기둥 사이에 얹는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9) 부넘기가 없이 불길이 그냥 곧게 고래로 들어가게 된 아궁이.

50) [건축] 반자를 만들기 위하여 가늘고 긴 나무를 가로세로로 짜서 만든 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51) [건축] 석회와 화강석, 풍화토를 섞어서 기와집 처마의 수키와 끝에 바르는 재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52) 건물을 보수할 때 새로 교체된 부재를 기존의 퇴색된 단청 색상에 맞춰 칠하는 것을 말한다.

53)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180182.

54) 앞의 책, 73.

55) 동국(東國) 18()은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 (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 (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이다.

56) 泰仁 大成殿 在郡 安五聖東西從享宋朝四賢東國十八賢 明倫堂 東齋 西齋 莊修齋 萬化樓 庫舍’, 朝鮮湖南誌2 鄕校.

57) 동진강(사단법인 정읍예총, 2012), 147.

58) [건축] 문짝이 넷으로 이루어진 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59) [건축] 문의 틀에 널빤지를 끼워서 만든 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0) [건축] 목조 건물에서 기둥 사이에 기둥이 드러나게 만든 벽.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1)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177179.

62) 泰仁 大成殿 在郡 安五聖東西從享宋朝四賢東國十八賢 明倫堂 東齋 西齋 莊修齋 萬化樓 庫舍’, 朝鮮湖南誌2 鄕校

63) 大成殿, 明倫堂, 莊修齋, 養士齋, 司馬齋, 典直舍, 萬化樓等하다...’, 井邑郡誌(1936) ‘... 東西齋 今無...’, 태인지(1965) 재인용.

64)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72.

65) 도리밑 장혀를 소로가 받치면 이를 소로수장집이라고 함. 브리태니커.

66) [건축] 주심포(柱心包)집에서, 보나 도리 밑에 보강을 위해 대는 짧은 가로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7) 대들보[大樑종보[宗樑] 등의 보 위에 놓여 그 상부의 보나 도리를 받쳐주는 부재로 한옥 구조물 의 하나. 브리태니커.

68) [건축] 단면이 네모진 도리.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질러 서까래를 받치는 역할을 한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9) [건축] 좌우의 지붕보다 중앙의 지붕을 한 단 높게 꾸민 세 칸 대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0) [건축] 바람을 막기 위해 박공벽에 붙인 널빤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1) 별도의 무늬없이 석간주(石間褓) 칠과 뇌록(磊綠)으로만 가칠한 단청을 말한다. 네이버 문화원형백과

72)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183184.

73) 大成殿, 明倫堂, 莊修齋, 養士齋, 司馬齋, 典直舍, 萬化樓等하다...’, 井邑郡誌(1936) 大成殿, 明倫堂, 莊修齋, 養士齋, 司馬齋, 典直舍, 萬化樓等이 있다.’, 신편 정읍군지(1957) 재인용.

74) ‘...莊修齋 四間在文廟西 萬化樓 司馬齋 在文廟東一里今無’, 태인지(1965) 재인용.

75) 井邑郡誌(1936)신편 정읍군지(1965)에는 典直舍, 태인지(1965)에는 典直庫 舍 五間在莊修齋前로 기록되어 있다. 재인용.

76) 궁판(문의 아랫부분에 낮게 끼워 댄 나무판)은 궁창, 궁판널, 궁창널이라고 부름.

77)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186.

78) 가장 중앙에 있는 초석.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9) [건축] 일각문(一角門)의 기둥 밑에 가로 받친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0) [건축] 벽이 기둥이나 벽선보다 두껍게 내밀게 될 때, 무너지지 않도록 옆을 막아서 대는 널빤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1) [건축] 벽을 치기 위해 본 기둥 사이에 세우는 작은 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2) [건축] 단면이 네모진 도리.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질러 서까래를 받치는 역할을 한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3) [건축] 서까래나 부연, 목반자 따위의 위에 까는 널빤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4) [건축] 오량(五樑) 이상으로 지은 집의 맨 끝에 걸리는 서까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5)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191192.

86) [건축] 대문이나 중문 따위에 창이 없이 가는 나무를 좁게 세워 댄 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화살모양의 나무.

87)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194.

8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4권 태인현 학교조 태산서원

89) 최현식, 태인의 유교전통문화(정읍문화원, 2003), 181.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61. 재인용.

90) ‘...以興學變俗爲意 令於坊里 各設局堂 印藏書冊...’, 申泰仁潛善政記, 최현식, 태인의 유교전 통문화(정읍문화원, 2003), 183188.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 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61. 재인용.

91)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6162.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