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선의 과거제도(科擧制度)
조선시대에는 관리를 뽑기 위해 과거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여 고려 말의 소수의 혁명파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상대로 모든 관리를 과거를 거쳐 선발하고자 하였다.
관리로 등용되어야만 출세할 수 있었던 당시에는 관리(官吏)의 임용제도(任用制度)로서의 과거(科擧)가 크게 주목되었다. 이후 조광조(趙光祖)의 주장에 의한 천거제(薦擧制)인 현량과(賢良科)가 도입되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조선 왕조 전 기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과거가 실시되었다. 과거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문과(文科)·무과(武科)·잡과(雜科)로 크게 구분하였지만,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은 여전하여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지적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컸다. 따라서 천인(賤人)은 물론, 같은 양반이라도 서얼(庶孼) 출신은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신분상으로는 일반 서민인 양인(良人)과 양반(兩班)만이 응시할 수 있었으나, 양인이 급제한 사례는 적어 대개 양반들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무과는 신분상의 제약을 훨씬 완화하여 무관(武官)의 자손을 비롯하여 향리(鄕吏)나 일반 서민으로서 무예(武藝)에 재능이 있는 자에게는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잡과는 직업적인 기술관(技術官)의 등용시험(登用試驗)이었으므로 서울과 지방 관청에서 양성되는 생도(生徒)들이 응시하였다. 양반들은 잡과에 응하지 않았고 일반 서민이나 천인은 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잡과는 일정한 신분계급에 의해 세습·독점됨으로써 이들에 의해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층(身分層)이 형성(形成)되었다. 초기에는 모든 합격자에게 백패(白牌)라는 증명서를 지급했으나, 후에 문과 구별하기 위해 문과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지급하였다.
과거에 합격하면 합격자를 위한 방방(放榜) 의식이 근정전 뜰에서 베풀어지며 왕이 홍패와 어사화(御賜花)를 제일급제자 장원(狀元)을 위시하여 순위대로 하사한다. 그리고 급제자(及第者)의 부모를 위한 잔치를 관에서 베풀고, 급제자들은 3일 동안 거리를 누비며 축제를 벌인다. 장원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을 용두회(龍頭會)라 하여 관직을 맡고 떠날 때 보내는 전송연을 한다.
가. 과거(科擧)를 위한 교육(敎育)
조선시대에도 관료로서 출세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우선 과거에 합격하는 데 있었으므로 자연히 교육도 과거의 준비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과거의 고시과목이자 건국 초기부터 정교(政敎)의 근본이념으로 채택된 ‘유학(儒學)’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유일한 도구로 양반계급에 의해 감독되었다. 따라서 교육도 대부분 과거의 응시자격을 구비하고 있는 양반의 자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개 어릴 때 서당에서 유학의 초보적인 지식을 배우고 15,6세 이전에 서울은 사학(四學), 지방은 향교(鄕校)에 들어가서 공부하여 몇 년 뒤에 과거의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합격(合格)하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入學)하는 자격을 얻었다.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사학은 중앙정부에 직속되고 향교는 각 주현(州縣)에서 관할하던 관학(官學)으로서, 상호간에 상하의 연락 계통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각각 독립된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진사(進士)였지만 생원·진사는 사학이나 향교를 거치지 않아도 될 수 있었으며,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에게는 문과(文科) 대과(大科)에 응시하는 자격과 기타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으나, 그렇다고 성균관을 거쳐야만 문과의 응시 자격이 부여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밖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시험은 치를 수 있었다. 이들 관학 가운데서 성균관만은 말기까지 줄곧 최고 학부로서의 시설과 권위를 유지하였는데, 사학(四學)과 향교(鄕校)는 후세에 점점 쇠퇴(衰退)하여서 유명무실하게 되고 그 대신 사숙(私塾)으로서 서당(書堂) 이외에 서원(書院)이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나. 과거의 절차
과거의 시험절차를 살펴보면, 먼저 문과는 소과(小科)와 대과로 크게 구별되었다. 소과는 다시 초시(初試)·복시(複試)의 2단계, 대과는 다시 초시·복시·전시(殿試)의 3단계로 나뉘어 있다.
<표 6-4> 조선시대 문과(文科) 과거시험(科擧試驗) 절차
| ||||
단계 |
종류 |
시험단계 |
한자 |
내용 |
1 |
소과 |
초시 |
初試 |
소과 1차 시험 |
2 |
복시 |
複試 |
소과 최종 시험 | |
성균관 입학 (생원, 진사) | ||||
3 |
대과 |
초시 |
初試 |
대과 1차 시험 |
4 |
복시 |
複試 |
대과 2차 시험 | |
5 |
전시 |
殿試 |
대과 최종 시험 | |
문과 급제 |
모두 5단계를 차례로 거쳐야만 문과급제(文科及第)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표 6-4>
그러나 이 5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대과의 전시와 동등한 자격을 받던 과거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 및 성균관 유생이 보던 반제(泮制)·절일제(節日制)·황감제(黃柑制)·관학유생응제(館學儒生應制) 등이 있었다.
무과(武科)는 소과와 대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單一科)로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가 있을 뿐이었다. 잡과(雜科)도 역시 무과와 같이 소과·대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였으나, 초시와 복시의 2단계로만 나누어 시험을 보던 것이 무과와 달랐다. 문과와 무과는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과거를 시행하여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으나, 잡과는 수요인원이 많지 않은 까닭에 과거로는 식년시 이외에 증광시(增廣試)가 있었을 뿐이었다.
조선시대에서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종의 명목으로 과거가 자주 실시된 결과 여기에 합격해도 등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과거 시험장에는 남의 글을 표절하거나 책을 끼고 들어가거나 시험문제를 미리 알아내는 등 온갖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함으로써 그 권위는 땅에 떨어져 이에 대한 논란이 심하여 과거의 폐단을 시정하라는 건의도 많았으나, 한번 흐려지기 시작한 제도의 결함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와 병행하여 뇌물과 정실, 문벌의 고하,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니,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인습적인 사회경제면에 대한 혁신 정책 중의 하나로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폐지(廢止)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을 만들기로 의결하기에 이르렀다.
과거는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문과에서는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자제나 재가(再嫁)한 여자의 아들 그리고 서얼(庶孼)의 응시를 금하였다. 서얼들은 이 때문에, 청(廳) 요직에는 문과 합격자만이 임용이 가능해, 정조 때 소청운동을 통해 일부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다. 과거의 종류
과거에는 3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하던 식년시(式年試)가 있었으며, 그 밖에 임시로 보던 과거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임시과거는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 춘당대시(春塘臺 試), 특수한 사람에게 국한된 종친과(宗親科), 충량과(忠良科), 기로과(耆老科), 지방별로 보던 외방별과(外方別科), 도과(道科) 등이 있었고, 한때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발영시(拔英試), 등준시(登俊試), 전문시(箋文試), 진현시(進賢試), 현량과(賢良科), 탁영시(擢英試)의 시험도 치룬 적도 있었다.
생원과(生員科)는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시험은 중국의 경적(經籍)으로 치렀으며, 여기에 합격한 자를 ‘생원’이라 했다. 생원과는 대체로 과거의 예비고사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원은 선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았으며, 진사와 더불어 하급관료에 취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실시한 과거이다.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한다.
고려 때에는 명경시(明經試)와 함께 진사과를 가장 중요시하여 등용되는 범위가 가장 넓었다. 조선시대에는 소과초시(小科初試)의 한 분과로서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시(詩)·부(賦)·표(表)·전(箋)·책문(策問) 등이다. 여기에 합격한 자는 ‘진사’라 하여 초급 문관에 임명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계속하여 중급 관리 등용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조선의 과거제도에는 문과와 무과가 있고 문과는 다시 소과와 대과로 구별되었다.
초시(初試)는 조선시대 복시에 응시할 사람을 선발하는 과거의 제1차 시험이다. 일명 ‘향시’(鄕試). 초시는 이들 각 과의 최초의 시험으로서, 복시·전시를 치기 전해의 가을에 각 지방에서 실시하였는데, 정기적인 시험인 이러한 식년시 외에 증광시·알성시 등에도 초시가 있었다.
전시(殿試)는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보던 과거(科擧)다. 고려 공민왕 때 처음으로 원나라의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3단계 고시제도를 채용하여 시행하였던 것인데,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증광시(增廣試)는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에 보이던 임시 과거제도이다. 1401년(태종 1)에 실시되었다. 본래는 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의미로 즉위년이나 그 이듬해에 실시하였으나, 선조 때부터는 그 범위가 확대되어 원자 탄생·왕비 책례 때도 실시되었다. 그 절차는 식년시와 같아 생진초시·생진복시·문과초시·문과복시·문과전시의 5단계로 나뉘며 시험과목도 같았다.
과거에는 처음으로 벼슬을 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미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던 제도도 있었다. 식년시·증광시 등의 소과에는 통덕랑(通德郞) 이하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은 관원이 응시할 수 있었고, 문과나 무과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의 관원이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이에 합격되면 각각 그 등급에 따라 원래의 관계(官階)보다 몇 관계씩 올려 주었다.
위에서 말한 과거와는 달리 인재를 등용하는 시험제도로서 취재(取才)가 있었다. 양반의 자손 친척이나 경아전(京衙前)인 녹사(錄事)·서리(書吏) 등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실시되었는데, 과거와 다른 점은 일정한 관계(官階)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녹사·서리도 처음에는 취재에 의해 선발하였는데, 하급 수령(守令)이나 외직(外職)의 교수(敎授)·훈도(訓導)·역승(驛丞)·도승(渡丞) 등을 임용하기 위한 취재도 있었다.
무과 계통에도 취재의 제도가 있어, 무과의 합격자로서 아직 관직이 없는 사람을 등용하려거나 해직된 사람을 다시 임명할 필요 등이 있을 때에 실시하였으며, 이 밖에 선전관(宣傳官)·내금위(內禁衛)·친군위(親軍衛)·갑사(甲士)·대정(隊正)·파적위(破敵衛) 등에서도 필요에 따라 그 요원(要員)을 시취(試取)하였다.
잡과(雜科)에는 역(譯)·의(醫)·음양(陰陽)·율과(律科)의 4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관상감(觀象監)·형조 등 각 관서의 기술관원을 채용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는 초시·복시의 두 단계가 있었다. 대체로 그 격이 문과나 무과에 비해서 낮았으며, 또 소요 인원이 적었으므로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가 있을 뿐이었다.
이 밖에 초기에는 승려(僧侶)의 자격을 주기 위하여 국가의 공인 아래 선(禪)·교(敎) 양종에서 독자적으로 실시하던 승과(僧科)라는 시험제도가 있기도 하였다.
음서(蔭敍)는 본인의 학덕(學德)이나 선조의 특수한 공훈으로 말미암아 관리에 서용(敍用)된 일이다. 고려 때부터 이미 음서는 있었고, 조선 왕조에서도 답습되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에 있어서는 음서로 관리에 임용되는 규정이 훨씬 까다로워져서, 과거를 통하지 않고 영달할 길은 훨씬 어려워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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