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성씨와 인물(삶의 주체)/태인의 인물 8

태인 현감(縣監) 신잠(申潛)

현감(縣監) 신잠(申潛, 1491∼1554)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명신(名臣)이다. 본관은 고령인(高靈人)으로 자(字)는 원량(元亮)이고 호(號)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봉례공 신주(申澍)의 손자이며 삼괴 선생(三魁先生: 진사시(進士試)ㆍ문과(文科)ㆍ중시(重試)에 모두 제1등으로 합격하였으므로 삼괴라고 일컬은 것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며, 예조 참판(禮曹參判) 종호(從濩)와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제 11자(子)인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의 딸에게 장가들어 1491년(成宗 22) 3월 모일(某日)에 한성(漢城)에서 출생하였다. 1491년인 성종(成宗) 22년(辛亥)에 태어났다. 슬하에 1남 1녀를..

국악인-판소리 백근룡, 대금 신달용, 고수 전계문, 산조 전홍련

백근룡(白根龍) 태인에서 출생하여 근대의 판소리 국악인(國樂人)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심청가(沈淸歌)에 능하였으나 40세를 전후해서 타계했다. 신달용(申達用: ? ) 태인면 오봉리 출생으로 전계문(全桂文)의 문하생으로 대금(大笒)의 명인(名人)이다. 초산음률계원(楚山音律契員)이다. 전계문(全桂文: 1872~1940) 태인면 태창리 49에서 출생한 명창 전도성(全道成)의 종질(從姪: 사촌 형제의 아들)이다. 근대 고법(鼓法)의 중흥기로 일컫는 고수(鼓手)의 명인(名人)이다. 그는 고수로 명성을 떨쳤을 뿐만아니라 대금(大笒), 거문고, 양금(洋琴), 승무(僧舞)에도 일가(一家)를 이룬 명인으로 일컬었다. 그의 고법(鼓法)은 정원섭(丁元燮: 익산 망성), 박창을(김제 봉남)에 이어져 송영주(宋榮柱)에 전수..

호남지방(湖南地方)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 일재(一齋) 이항(李恒)

호남지방(湖南地方)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 일재(一齋) 이항(李恒)1) 1499(燕山君 5)~1576년(선조 9) 선생은 성주이씨(聖州李氏)로 자(字)는 항지(恒之), 호(號)는 일재(一齋) 또는 수일재(守一齋), 시호(詩號)는 문경(文敬)이다. 성주이씨는 고려 말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명문거족으로 이항은 이조년의 7대손이다. 1499년(燕山君 5)에 서울 신혼동(晨昏洞)에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인 아버지 이자영(李自英)과 소경전 참봉(昭敬殿 參奉 )인 최인우(崔仁遇)의 딸로 어머니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했다. 영월 신씨(辛氏: 辛伯粹의 女)와 혼인하였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친구들과 놀기를 즐겨하였으며 품성이 강직하고 호탕하며 날램..

승려 송만공(宋滿空)-1935년 선종수좌대회(禪宗首座大會)에서 종정(宗正)에 추대되었고 사리탑이 예산 수덕사(修德寺)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불교계의 새로운 중흥조(中興祖)가 출현하였으니, 바로 경허성우(鏡虛惺牛)와 만공월면(滿空月面)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사실상 경허와 만공의 뛰어난 선행(禪行)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만공은 경허의 지도와 선법을 계승하여 덕숭산을 중심으로 40여 년간 선법을 펼치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선원(禪院)체계를 확립하였다. 만공(1871~1946)은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속명은 도암(道岩 또는 道巖), 휘(諱)는 월면(月面), 법호(法號)가 만공(滿空)이다. 1871년 3월 7일 태인현(泰仁縣) 군내면(郡內面) 상일리(上一里: 현 태인면 태흥리)에서 부친 신통(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만공의 아명은 바우이며, 도암은 행자..

자선사업에 힘쓴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자선사업에 힘쓴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박잉걸 선생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자는 여웅(汝雄), 호는 모은(慕隱)이니 뒤에 이름을 종원(宗元)으로 개명하였으며 1676년(肅宗 2)에 만엽(萬葉)의 아들로 현재의 칠보면 백암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학업을 닦아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여 학문이 심오하였으며 또 부모에 대한 효도가 지극했을 뿐 아니라 선영을 위하는 정성이 남달리 돈독했다. 부모의 산소 명당을 구하기 위하여 칠보산(七寶山)에 들어가 산신에 백일기도를 올렸다. 목욕재계하고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 예로부터 산중의 왕으로 일컬은 영물인 이 호랑이는 은근히 옆으로 다가와 선생의 옷자락을 물어 당기는 것이었다. 호랑이의 뜻을 알아챈 모은(慕隱) 선생은 ..

난중잡록(亂中雜錄)에 기록된 민여운(용종(龍從), 閔汝雲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10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성 밑에서 크게 부수니 남은 적이 도망하여 본진으로 돌아가므로 추격하여 소촌역(召村驛)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오다. 본도 우순찰사 김성일이 거창에 있다가 승전의 보고가 이르매 본주로 달려와서, 적의 송장이 서로 베개 삼아 깔렸고 피비린내가 땅에 가득한 것을 보고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이어 성에 들어가 목사가 누워 있는 방 안 탄환에 맞아 안에 누워 있었다. 으로 들어가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한참이나 하였으며,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으로 가목사(假牧使)를 삼아서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즉일로 장계를 올리니, 다음과 같다. 김해ㆍ부산(釜山)에 유둔하던 적이 3만여 명을 모아 합쳐..

김수곤(金水坤)과 속리산 법주사(俗離山法住寺)

본관 김해(金海), 자는 공욱(共彧), 호는 죽헌(竹軒), 가산(迦山) 인주(麟柱)의 아들로 1873년(高宗 10)에 태인에서 태어났다. 유생(儒生)으로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일찍이 백양사(白羊寺) 청류암(淸流庵)에서 좌선(坐禪)하다가 1937년 2월 28일 문득 입속에서 옥치(玉齒)와 같은 이사리(齒舍利)를 얻었으므로 1939년 10월 내장사에 사리탑(舍利塔)을 안치하고 영호선사(映湖禪師)의 기문(記文)과 손재성(孫在聲)의 오체혼합필체(五體混合筆體)의 탑비(塔碑)를 세웠다. 선생은 1922년 옹동면(瓮東面) 칠전리(七田里) 보안석교(保安石橋)를 사재로 가설하고 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미륵상불(彌勒像佛)을 조성하고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 금산사(金山寺) 등 여러 사찰에 불사했다..

서예가 김진민(金瑱珉)

일제 강점하의 서예와 김진민(金瑱珉) 윤범모(尹凡牟)✽ Ⅰ. 머리말 몽연 김진민(夢蓮 金瑱珉, 1912-1991)은 일제 강점하 여류서예가로 활동을 했다. 그는 조선미전에 여덟 번 참가하여 모두 16점의 서예작품을 발표한바, 그 가운데 5점은 특선을 차지했다. 조선미전 등 서예 공모전에서 이렇듯 높은 성과를 보인 서예가 특히 여류서예가는 일찍이 없었다. 그것도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10대에 이룩한 성과였다. 더불어 그는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사찰의 현판 글씨를 남겼는데, 그 역시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이룩한 성과였다. 대작으로 영광 불갑사의 나 장성 백양사의 같은 편액은 작가의 나이 불과 11세의 작품이다. 김진민은 당대 서단(書壇)에서 여성으로 그것도 어린 10대의 나이로 일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