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10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성 밑에서 크게 부수니 남은 적이 도망하여 본진으로 돌아가므로 추격하여 소촌역(召村驛)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오다. 본도 우순찰사 김성일이 거창에 있다가 승전의 보고가 이르매 본주로 달려와서, 적의 송장이 서로 베개 삼아 깔렸고 피비린내가 땅에 가득한 것을 보고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이어 성에 들어가 목사가 누워 있는 방 안 탄환에 맞아 안에 누워 있었다. 으로 들어가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한참이나 하였으며,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으로 가목사(假牧使)를 삼아서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즉일로 장계를 올리니, 다음과 같다.
김해ㆍ부산(釜山)에 유둔하던 적이 3만여 명을 모아 합쳐서 마구 몰아 함께 전진하여 9월 24일에 세 패로 나누어 노현(露峴)의 군사를 습격해 부수고, 27일에 또 창원부를 범하매 병사(兵使)가 다시 패하여 전후에 죽은 자가 1천 5백여 명이나 되니, 군사의 마음이 저상되고 백성들은 무너져 흩어졌으며, 적병은 승세를 타서 마치 회오리바람과 같았습니다. 본원 2일에는 나아가 함안을 함락시키고 5일에 선봉으로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의 북봉(北峯)에 바로 이르러 형세를 두루 보고 가로질러 달리면서 뽐내었으나, 목사는 성중에 전령하여 못 본 척하고 화살 한 개 총알 한 개를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성내에 잘 바라보이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장막들을 많이 치고 성중의 노약자와 남녀를 다 모아서 모두 남자 옷을 입혀서 군세(軍勢)를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날 신시에 적들이 온 길로 도로 향하자 목사가 곧 날래고 건장한 사람을 시켜서 산에 올라 바라보았는데, 적병 수만 명이 진주 동쪽 10리 되는 임연대(臨淵臺) 등지에 진을 쳤습니다. 6일 이른 아침에 적이 대탄(大灘)으로부터 일시에 마구 몰아 말을 타고 가로 달리는 놈들이, 혹은 자루가 긴 둥근 금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흰 바탕 누른 무늬의 금 삽선[翣翁]을 짊어졌는데 온갖 채색으로 그려서 바람을 따라 펄럭이매 광채가 번쩍거리며, 혹은 닭털로 만든 관을 쓰고, 혹은 머리를 풀어 헤친 가면을 썼으며, 혹은 뿔이 있는 금색 가면을 쓰고 각기 잡색 기(旗)를 짊어졌는데 길거나 넓은 것이 그 수효를 알 수 없었고, 혹은 푸른 일산을 받쳤거나 붉은 일산을 들고 흰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리매 살기가 하늘에 뻗치니, 무릇 기괴한 형상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 패로 갈라 산을 덮어 내려 와서 한 패는 동문 밖 순천당산(順川堂山)에 진을 치고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또 한 패는 개경원(開慶院)으로부터 바로 동문을 지나서 봉명루(鳳鳴樓) 앞에 벌여 섰으며, 또 한 패는 향교 뒷산으로부터 바로 순천당산을 넘어서 봉명루의 왜놈들과 합하여 한 진이 되고, 기타 각 봉우리에 둘러선 왜놈은 벌처럼 개미처럼 둔취하였습니다. 왜놈 장수 6명은 모두 검정 단의(單衣)를 입고 쌍견마(雙牽馬)를 타고 창과 칼을 가진 자가 앞뒤에 끼고 섰으며, 희거나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 역시 쌍견마를 타고서 시종하는 왜놈을 많이 거느리고 장수 왜놈의 앞에 섰으며, 걸어서 따르는 여자들 또한 그 수가 많았습니다. 순천당산에 진을 친 왜놈은 총수(銃手)가 1천여 명쯤 되는데 성중을 향하여 총알을 일제히 쏘니 뇌성이 진동하고 우박이 날리는 것 같으며, 3만여 왜놈이 일시에 크게 소리치니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중에서는 전연 동요하지 않고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것 같다가 그놈들의 기운이 쇠하기를 기다려서 또한 소리 지르고 북을 두드리고 포를 쏘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적들이 흩어져 민가로 들어가서 문판(門板)이나 관판(棺板)을 혹은 마루판을 가져와서 성밖 백 보 밖에 벌여 세워 놓고 판목(板木) 안에 가만히 엎드려 총 쏘기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편의 민가에 분탕질하고 또 동편의 초가지붕을 걷으며, 혹은 촌락의 대[竹]를 베고 혹은 짚을 실어 와서 일시에 만들어 6, 7리에 뻗쳤는데 모두 푸른 장막으로 둘렀습니다. 장수 왜놈은 혹은 향교 안에 들어가고 혹은 민간의 큰 집에 거처하였습니다. 이날 소와 말에 짐을 싣고 점심부터 저물녘까지 연락을 끊이지 않고 동쪽으로부터 들어오더니, 초경(初更)에 적이 한 곳에서 호각을 불자 곳곳에서 서로 응하고 뭇 왜놈들이 소리를 높이다가 식경(食頃)에 그치고, 총 쏘는 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막사를 지은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피웠습니다. 이날 밤에 곽재우가 심대승(沈大承)을 보내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 올라서 호각을 불고 횃불을 들자 성중 사람들이 또한 호각을 불어 서로 응하니, 적들이 크게 놀라 소란하여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 밤새도록 자지 못하였습니다. 7일에 적들이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총을 쏘아 그치지 않고 또 장편전(長片箭)으로 어지럽게 성중에 쏘고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적들이 흩어져 불태우고 약탈하니 수십 리 안에 민가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먼 곳 가까운 곳의 긴 대를 죄다 꺾어서 묶거나 엮고 솔가지를 많이 모아서 진 밖에 높이 쌓았으며 큰 나무를 베어다가 끊이지 않고 실어 들이는데 어디 쓸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목사는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힘써서 밤이면 악공을 시켜 문루 위에서 피리를 불어 한가로움을 보였습니다. 적진 가운데 조선 아이들이 많은데 혹은 서울말을 하고 혹은 시골말을 하면서 매양 성에 돌아다니며 크게 외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고 8도가 붕괴되었는데 새장 같은 진주성을 네가 어찌 지키랴. 속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오늘 저녁에 개산 아빠[介山父]가 오면 너희 장수의 세 머리를 마땅히 깃대 위에 달 것이다.” 하니, 성중 사람들이 분노하여 소리를 높여 꾸짖고자 하나 목사가 금지하여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진 뒤에 적이 대 엮은 것[竹編]을 가만히 동문 밖에 세웠는데 수 백보에 뻗쳤으며 그 안에 판자를 벌여 세우고 빈 섬[石]에다 흙을 담아 포개어 언덕을 만들어서 성을 내려다보아 총을 쏘고 화살을 피할 처소를 만들었는데, 대 엮은 것이 앞을 가렸으므로 우리 군사가 처음에는 몰랐다가 아침에 보니 이미 토성(土城)이 되었습니다. 8일에 적이 대나무 사닥다리[竹梯]를 많이 만들었는데 수천 개나 되었으며 또 넓은 사닥다리를 만들어 대를 심히 빽빽하게 엮었는데 넓이가 한 칸쯤이나 되었으며, 멍석을 덮어서 비늘처럼 연달아 배열하여 여러 군사가 바로 올라올 길을 만들고, 또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윤전(輪轉)하여 성을 누를 계책을 하였습니다. 목사가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세 번 쏘아서 산대 만드는 왜놈을 관통하니, 놀라고 두려워하여 물러갔습니다. 목사는 적이 솔가지를 많이 쌓은 것이 성을 넘으려 함이며 대나무 엮은 것으로 앞을 막은 것은 성에 맞닿으려 함인 줄을 추측해 알고 불 지를 도구를 미리 준비하되, 생나무가 젖어서 태우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종이에다 화약을 싸서 묶은 마른 섶 속에 넣어서 성밖으로 던져 솔가지를 태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성 위에는 진천뢰(震天雷)ㆍ질려포(蒺藜砲)ㆍ큰 돌덩이를 설치하여 성에 붙는 적을 치려 하고 또 자루가 긴 도끼와 낫 등 물건을 준비함은 윤전산대(輪轉山臺)를 부수기 위함이요, 여장(女墻) 안에는 또 가마솥을 많이 설비하여 물을 끓여서 적에 끼얹으려 하였습니다. 낮에는 여장 안에 군사를 매복시켜 서서 내다보지 못하게 하고 풀 인형을 많이 만들어서 활에다 화살을 메기고 성 위에 나왔다 숨었다 하게 하였으며, 군사에게 엄하게 단속하여 헛되게 화살을 쏘지 말게 하고 상시에 돌을 던져 적으로 하여금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적이 대 엮은 것을 많이 만들어 점차로 성에 가까이 오고 흙을 쌓기를 점점 높이 하였으며, 두 곳의 산대는 4층을 만들고 앞에는 목판을 달아 화살과 돌을 가리면서 총 쏘는 처소를 만들었습니다. 밤 2경에 고성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와 본주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이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각기 십자횃불을 가지고 남강(南江) 밖 진현(晉峴) 위에 벌여 서서 호각을 불자 성중 사람들이 구원병이 이른 것을 바라보고 곧 큰 쇠북을 울리며 호각을 불어 호응하니, 적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떠들면서 곧 각 막사에다 불을 피우고 각기 복병을 보내어 강변에 가로막고 벌여 서서 구원병을 막았습니다. 9일 새벽에 적 2천여 명이 단성으로 향하는 길에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고 한 떼는 단계현(丹溪縣)으로 향하다가 합천 가장 김준민에게 쫓기고, 한 떼는 단성 읍내를 분탕질하다가 역시 김준민에게 쫓겼으며, 한 떼는 살천(薩川)으로 향하다가 정기룡(鄭起龍)ㆍ조경형(曺敬亨)에게 쫓겨서 해가 저물자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대로 남아 있던 왜놈들은 총을 쏘고 화살을 발사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고 흙을 지고 나르는 역사를 전일에 비하여 더욱 급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산대에 올라 무수히 총을 쏘자, 성중에서는 현자총통을 세 번 쏘아 대 엮은 것을 뚫고 또 큰 목판을 뚫었으며 한 화살은 적의 가슴을 뚫어 즉사하니 그 뒤에는 적이 감히 다시 산대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복병장 정유경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진현으로부터 사천(沙遷)에 이르러 벌여 서서 열병(閱兵)하고, 또 용사 20여 명을 뽑아서 남강 밖에서 분탕질하는 적과 대[竹] 베는 놈들을 무찔렀습니다. 본진에 남아 있던 왜놈 2백여 명이 강을 건너 추격하자, 정유경이 퇴각하였습니다. 이날 저녁 때에 적이 횃불을 들고 열을 지어 왕래하면서 서로 약속하는 형상을 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달아나 신북문(新北門)에 이르니 바로 본주에서 포로가 되었던 자였습니다. 불러들여 적의 실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일 새벽에 적이 힘을 합하여 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0일 4경 초에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을 싣고 나가 거짓으로 퇴각하는 형상을 보여 우리 군사를 태만하게 하고 그런 뒤에 불을 끄고 가만히 돌아왔습니다. 4경 중에 두 떼로 갈라서, 한 떼는 1만여 명이 동문 새 성에 육박하여 각기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혹은 방패를 지고 혹은 향교에 제사지내는 대그릇을 쓰며 혹은 멍석을 베어 머리를 싸고 혹은 쑥대나 엮은 풀로 관을 만들어 써서 화살과 돌을 피하고, 3층의 가면을 쓴 풀 인형을 만들어서 차례로 사닥다리에 올라 우리 군사를 속였습니다. 그런 뒤에 적이 성에 기어오르고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뒤를 따라 돌진하면서 비 오듯이 탄환을 쏘아대고 뇌성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장수 왜놈은 말을 달려 횡행하면서 칼을 휘둘러 독전(督戰)하였습니다. 목사는 동문 북격대(北隔臺)에 있고 판관은 동문 옹성(擁城)에 있어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결사적으로 싸우는데 혹은 진천뢰와 질려포를 쏘고 혹은 큰 돌을 던지며, 혹은 불에 달군 쇠[火鐵]를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럽게 던지며 끓는 물로 적에게 끼얹으니, 적이 물밤쇠[菱鐵]을 밟거나 활에 맞고, 돌과 화살에 맞아 죽거나 머리와 얼굴이 불에 탄 자가 수없이 많았으며, 또 진천뢰에 부딪쳐 엎어져 죽은 것이 삼[麻]처럼 쌓였습니다. 성 동쪽에서 한창 싸울 때에 또 한 떼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가만히 와서 돌연히 구 북문(舊北門) 밖에 이르러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방패를 짊어지고 형세가 장차 뛰어들 듯하였는데,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들이 모두 놀라 무너졌다가 전 만호 최덕량(崔德良), 목사의 군관(軍官)인 이납(李納)ㆍ윤사복(尹思復)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싸웠습니다. 무너졌던 군사가 다시 모여 방법대로 적을 방어하기를 동문과 한결같이 하여 노약과 남녀까지도 돌을 던지고 불을 던져 성중에 기왓장 돌과 초가지붕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한참 만에 동방이 밝으려 하자 적세가 조금 누그러지는데 목사가 왼편 이마에 탄환을 맞아 정신을 잃었습니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북격대를 대신 지키며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힘껏 싸워서 쌍견마를 탄 왜장을 죽였고, 4경부터 교전하여 진사시(辰巳時)나 되자 적이 비로소 퇴군하였습니다. 두 곳 싸움터에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적들이 곧 송장을 끌고 가서 촌락에서 불 속에 태웠으므로 머리를 벤 것은 겨우 30여 개에 불과하였습니다. 적이 물러간 후에 촌락에 불태운 뼈가 곳곳에 쌓여 있고 장수 왜놈의 송장은 농에 넣어 가지고 메고 갔으며 포로가 되었던 사람과 우마를 버리고 창황히 도망해 가는 데도, 목사가 총알에 맞고 장수와 군사가 힘이 다되었으며 또 계속 응원하는 군사가 없어서 추격해 다 죽이지를 못하였으니 지극히 통분합니다. 목사는 난이 난 후에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염초(焰硝) 5백 10여 근을 미리 제조하여 두고 왜놈의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총통 70여 자루를 새로 제조하여 경내(境內)에 재간 있는 사람들을 따로 뽑아서 상시로 총 쏘기를 익혔습니다. 그 때문에 싸움에 임하여 화약을 물 쓰듯 하고 섶 속에 화약을 싸서 성 밖에 던지며 연달아 총을 쏘아 큰 적을 꺾었습니다. 대개 온 나라가 붕괴된 나머지에 한 사람도 감히 성을 지킬 계책을 못하는데, 목사만은 능히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서 바깥 응원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능히 큰 적을 물리쳐서 한 도를 보전할 뿐만이 아니라 또 호남을 보호하여 적으로 하여금 내지에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으니, 목사의 공은 이것이 큽니다.
○ 처음에 진주가 여러 진(陣)에 급함을 고하였더니 정인홍(鄭仁弘)이 가장 김준민과 중위장(中衛將) 정방준(鄭邦俊)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예한 사수(射手) 5백여 명을 선택하게 하여 달려 보내어 구원하다. 본월 9일에 단계에 이르니 해가 이미 뜨다. 큰 마을 하나가 시내의 동편에 있는데 앞에 대숲이 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므로 머물러 밥을 짓다. 전라 우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로 전진하려 하다. 단성의 피란하는 남녀들이 산에 올라서 바라보고는, “절라도 대군이 본현에 머물러 있고 또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다행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밥 먹은 뒤에 장수와 군사들이 출발하니 짐수레가 앞에 섰다. 몇 리쯤 가자 앞서 가던 자가 뛰어와 외치기를, “많은 적이 여기 이르렀다.” 하였다. 준민이 놀라 일어나 보니 단성 청고개(靑古介)로부터 단계에 이르기 까지 산과 들의 촌락을 일시에 분탕질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다. 준민 등이 불의에 이것을 당하자 사세가 심히 창황하여 몸을 날려 말에 뛰어올라 대숲 밖에 나가서 아래위로 달리며 충돌하는 즈음에 군관 윤경남(尹慶南) 등이 또한 달려와서 크게 외치기를, “두 장수가 이미 포위 속에 들었는데 너희들은 와서 구하지 않느냐.” 하다. 이에 5백여 명이 고함을 치며 함께 나가니 적이 우리 군사를 바라보고는 대숲 속으로부터 차차로 나왔는데 큰 군사의 매복이 있을까 겁내어 접전한지 얼마 안 되어 퇴각하여 시냇물을 건너다. 두 진이 상대하고 있는 곳에 화살은 비 오듯 하고 총소리는 뇌성과 같다. 적이 아직도 용감히 싸우고 퇴각하지 않다가 마침 승의장(僧義將) 신열(信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잇달아 이르매 세력이 더욱 장하여 사기(士氣)가 절로 배나 되어 일시에 어울려 공격하니 적이 드디어 퇴각하여 달아나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청고개에 이르니 적이 기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다. 또 서쪽으로 읍내를 바라보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가리고 총소리는 폭죽과 같다. 정방준이 준민을 불러 말하기를, “저것은 반드시 전라도 군사가 적과 싸우는 것이니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단성으로 달려가니 엎어진 송장이 길에 서로 잇달았다. 전라 의병장은 이미 붕괴되어 물러가고 남은 적이 뒤에 떨어져서 분탕질을 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돌진하는 것을 보고 관망하며 물러가다. 군사들이 물을 길어 창고의 불을 끄고 불에 타다 남은 쌀 6백여 석을 수합하여 관인(官人)을 불러 지키게 하고 이튿날 진양(晉陽)으로 진군하니, 성은 이미 포위가 풀려 있다. 성중 사람들이 모두 합천 군사에게 말하기를, “어제 적이 갑옷을 버리고 칼을 끌고 달아나는 자가 많더니 이제 곧 퇴각해 도망하기에 우리들 생각에, ‘아마도 모처(某處)에서 접전하는 이들이 그놈들의 예기(銳氣)를 꺾어서 그런 것이리라.’ 하였더니, 반드시 그대들이었구나.” 하다. 준민 등이 추격하여 함안까지 이르렀다가 미치지 못하고 돌아오다. 최강(崔崗)ㆍ이달(李達)이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반성(班城)에 이르러 머리 20여 개를 베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왜적이 당초에 국경에 침범할 때에 크게 성세를 떠벌리고 척후병을 곳곳에 나누어 보내 우리 군사로 하여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깊은 산골까지 수색한 연후에 각처의 작은 진을 철수하고 부산(釜山)으로부터 경성에 이르기까지 다만 일로(一路)에 거진(巨鎭)을 벌여 놓다. 사방으로 흩어져 죽이고 약탈하는 데 군사가 부족하므로, 경상도에서 점거한 것이 좌도에는 오직 부산ㆍ동래(東萊)ㆍ경주(慶州)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영천(永川)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 열 고을이요, 우도에는 오직 웅천(熊川)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鎭海)ㆍ고성(固城)ㆍ성주(星州)ㆍ금산(金山)ㆍ개령(開寧)ㆍ선산(善山)ㆍ상주(尙州)ㆍ함창(咸昌)ㆍ문경(聞慶) 등 열두 고을인데, 한 곳에 유둔한 왜놈은 적으면 수백 명을 밑돌지 아니하고 많아도 1천 명을 넘지 않거늘 오직 고성 근처에 모여 유둔한 적이 거의 수천에 가깝다. 이것으로 헤아리건대 영남의 적은 반드시 5만 명에 불과할 것이요, 그 장기(長技)는 조총ㆍ단총에 불과하여 엄습하는 외에는 다시 다른 재주가 없다. 밤이면 갔던 놈들이 도로 와 길을 점차 가득 채워서 수효가 많다는 것을 보이는데, 우리 군사는 왜적 열 놈만 보면 으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적을 토벌할 뜻이 없고 나머지 6도도 그렇지 않은 데가 없거늘, 하물며 평안ㆍ경기ㆍ함경 3도의 왜놈 수효가 이 도보다 두서너 배가 되는데 우리 군사의 힘은 이 도보다 약하여 소문만 듣고는 먼저 무너져서 방어할 뜻이 없으니 온 나라가 함몰됨이 괴이할 것도 없다. 아! 통분하도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각 진에 복수하기를 타이르는 교서를 내리니,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하노라. 이 왜적과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고, 만세에 잊을 수 없다. 우리 종묘사직을 폐허로 만들고 우리 승여(乘輿 임금의 행차)를 거리로 파천하게 하였으며, 우리 능을 범하고 우리 도시와 촌락을 잿더미로 만들어서, 우리 조종께서 수백 년 길러 놓은 백성을 도륙하고 닭 울고 개 짖으며,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던 강토 천 리를 하루아침에 갈대와 띠풀로 가득 차 쓸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문득 살기를 잊고 창을 베게삼아 밤새도록 잠 못 든다. 슬프다 ! 우리 장수와 군사들아!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 이끌고 잡고 받들고 업어서 오직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하고, 또한 부부가 있어 죽으나 사나 함께하기로 맹세하였으며, 형제는 사랑하여 손이나 발과 같고 아들 딸 어린 것은 살펴 주는 것인데, 난리가 극도에 이르러 국가가 함몰되어 혹은 칼날에 걸리어 피가 풀밭을 적시고 혹은 포로로 잡혀 참혹함과 악독함을 당하였으며, 더럽히고 욕을 보여 인도(人道)가 땅에 떨어졌다. 지금 이 오랑캐는 나라의 원수일 뿐 아니라 너희의 사사 원수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밥 먹고 숨쉬는 동안인들 어찌 잊으랴. 내가 듣건대 옛말에 어버이의 원수는 날을 넘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드려 통곡하면서 날을 넘기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인데 세월이 이럭저럭 지나 한 해가 또한 저물었다. 슬프다! 너희들의 마음을 나는 헤아린다. 창을 잡고 싸움에 따라 다니며 피를 뿜고 울음을 삼키어 기회를 살펴 분발하여 이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리라. 속담에 이르기를, “새끼 가진 개는 범을 습격하고, 알을 품은 닭은 삵괭이를 친다.” 하였으니, 지극한 정이 발동하는 바에 강함과 약함이 아주 달라진다. 비겁하던 사나이도 의를 사모하면 용맹이 맹분(孟賁 옛날 중국의 용사)보다 지나치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적을 치면 누구인들 한 사람이 백 놈을 당해내지 못하랴. 사방에 둘러있는 3백 고을 중에 원한을 품은 자가 적어도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하면 진실로 1백만의 강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곰을 두들기고 표범을 잡는 장수와 뇌성처럼 무섭고 바람처럼 날랜 군사가 또 따라서 몰아줌이랴. 내가 감무(監務)의 명을 받고 편안히 처할 겨를이 없이 제군들과 함께 난을 평정하기를 원하고 이에 천병이 국토를 제압하였으니, 소탕할 것이 기약이 있다. 그러나 한 집의 원수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스스로 손을 대지 않는다면 이것은 효자 인인(仁人)의 마음이 아니요, 예의(禮義)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에게 크게 고하노니 너의 마음을 가다듬고 너의 기운을 떨쳐서 각자 제 원수를 갚고 사람마다 힘껏 싸워서 평행장(平行長)의 머리를 베어 음기(飮器)를 하고 또 현소(玄蘇)의 피를 가지고 흔고(釁鼓)한다면 어찌 마음에 쾌하지 않겠는가. 아! 인(仁)한 이는 어버이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의로운 이는 임금을 뒤로 하지 않는 것이니, 《춘추(春秋)》에는 백대의 법을 밝혀 원수 갚음이 위대하였다. 충성과 효도가 두 가지 길이 아니니 기특한 공을 일찍 세우라.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왜적의 화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리오마는 뜻밖에 흉하고 독한 것들이 성세(盛世)에 나왔으니 나라가 수렁에 빠진 욕은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도 없나이다. 파천하신 행차가 지금까지 체류하였으나 한 사람도 칼날을 내밀고 적에게로 향하는 이가 없고 각 고을은 소문만 듣고 달아나서 인심이 붕괴된 것이 물이 가로 흐름과 같으니, 만약 의를 선창한 모든 신하들이 한(漢)을 생각하는 마음을 고동시켜 넘치는 내를 막아 물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나라로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신은 멀리 바다 구석에 처하여 하늘을 깁기[補天]에 힘이 부족하여 원수 놈들과 한 하늘 밑에서 살기를 모두 부끄러워하면서도 죽을 처소를 얻지 못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의 화가 호남에 침입하자 의장신(義將臣) 고경명이 금산(錦山)에서 패하여 죽자, 한 도의 선비와 백성의 마음으로 흐느끼고 간담이 서늘하여 새처럼 보고 짐승처럼 숨쉬면서 적의 칼날이 짓밟는 것을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신은 그윽히 생각건대, 이때를 당하여 요행히 살 수 없으니 다같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나라에 목숨을 바치리라 하였더니, 고을 사람 아무 아무 등이 먼저 신의 마음을 알고 의론이 서로 합하여 고을의 자제들을 권면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빠진 장정을 불러 모집하여 향병(鄕兵) 2백여 명을 얻었으며, 장흥(長興)의 아무 아무 등이 또한 정예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와서 신에게 소속하고 좌도를 거쳐 적의 초소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의 교만한 장수와 게으른 군사, 토호 백성과 비겁한 사나이들이 모두 유병(儒兵)을 오활(迕闊)하다 하여 헐뜯는 자도 있고 방해한 자도 또한 많아서 기꺼이 서로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니, 군량과 무기를 사사로이 판출하기가 심히 군색하였습니다. 행하여 남원에 이르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의거를 장려하여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부중의 선비들이 자원하여 날라다 주는 자가 약간이었고 옆 고을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호응한 연후에 양식이 부족함이 없고 병력이 차차 강화되었습니다. 전 부사 최경회 또한 경명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우도로부터 나오매 신이 더불어 합세하여 장수현(長水縣)에 함께 주둔하여 혹은 기병(騎兵)으로 침략하고 혹은 달려 들어가 충돌하면서 어지러이 쏘니 무주(茂朱)의 적이 지탱하지 못하여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이 반드시 금산의 적과 서로 합쳐서 도망할 것을 헤아리고 부장(副將) 장윤(張潤)을 보내어 선봉으로 달려가게 하였더니 그날 밤중이 못 되어 적이 이미 도망하였고, 신이 보낸 장사(壯士)들 1백여 명이 추격하여 경계 밖으로 나가 영동(永同) 등지에까지 이르렀으나 흉적의 자취가 이미 멀어 추한 종자들을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신들이 군사를 쓰는데 기회를 잃은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보매 모두 비린내에 물들었고 홀로 이 호남이 겨우 완전히 보존되었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서 우리가 회복할 터전을 열어준 것입니다. 신이 곧 마땅히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서 승여를 호위할 것이나, 다만 생각건대 이 지방이 비록 서울에서 머나 군사며 말이며 부고(府庫)를 운반하는 근본이니 한 나라에 있어서 관중(觀中)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병사(兵使)는 군사를 끌고 멀리 갔으며 순찰사는 군사를 전부 가지고 근왕하였으므로 적이 허한 틈을 탈는지 흉한 꾀를 헤아리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경상도 우감사 신 김성일이 급히 글을 보내어 위급한 사정을 말하기를, “김해ㆍ부산의 적이 합세하여 멀리 몰아 이미 단성을 함락시키고 호남의 경계에 가까이 왔다.” 하기로, 신이 부득이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나아가서 요해지를 끼고 싸움도 하고 방어도 하여서 한편으로 영남의 응원을 하고 한편으로 호남 경계의 충돌을 방어하여 국가의 중흥을 만에 하나라도 보존하려 하나이다. 신이 매양 교서를 받들어 읽으매, 울며 피를 뿌려서 마음은 더욱 붉어지고 한 몸은 더욱 가벼우나 문전에 박두하는 왜적 때문에 서쪽으로 향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가지 못하니 오활하고 늦춘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물은 일만 번 굽이를 꺾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 것이니 신의 몸은 비록 먼 데 있어도 마음은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장차 한 지방이 염려 없는 사세를 본 연후에 호남ㆍ영남 여러 의병과 힘을 합하고 꾀를 같이하여 길에 걸리는 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려는 것이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신은 일개 오활한 선비로 본시 재주와 책략이 부족하나 구구히 이 의거를 하는 것은 뜻이 바다를 메우려는 새와 같고 어리석기가 산을 옮기려는 사나이보다 더하여 충성의 격동된 바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돌아보지 못하는 바입니다. 호걸의 선비들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계속해 일어나게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고 적의 기운을 탄압하여,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목욕시켜 중흥을 도우겠다는 것이 또한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굽어 살피소서. 행재소(行在所)가 멀고 먼 데 난리로 막히고 떨어져서 간절한 정성을 아뢰지 아니할 수 없어 삼가 종사관 신(臣) 모를 보내어 소를 받들어 올리니 통곡하고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 8도에 교서를 내려 방학(放學)하게 하다. 이보다 먼저 병술년(1586, 선조 19)년에 지방 장관 밑에 제독(提督)을 두어 부속된 향교를 순시하며 독려하여 날로 학문을 힘쓰게 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교훈하는 관원을 모두 혁파하고 봄ㆍ가을의 석전(釋奠)을 폐하며, 유생을 몰아서 군대에 편입하고 교노(校奴)를 관노(官奴)로 삼다.
○ 태인(泰仁)의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웅(熊) 자로써 장표(章標)를 삼고, 기계를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여 영남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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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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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상 만력 21년, 선조 26(1593년)
1월 8일
경상도 우순찰사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10월에 진주(晉州)가 장차 함락되려 할 때에 신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 정랑 박성(朴惺)을 보내어 호남 좌우 의병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임ㆍ최 두 장수가 호남과 영남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는데 존망과 성패에 기회가 급하다 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서로 잇달아 응원하였습니다.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또한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성주(星州)ㆍ지례(知禮)의 경계에 주둔하여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등과 더불어 협력하여 적을 쳐서 누차 접전하여 적을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적이 자못 기운이 꺾여 숨고 나오지 못하므로 한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뢰하여 거의 의각(猗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호남 사람이 행재소에서 돌아와서 전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두 의병장을 불러 근왕하려 한다 하매, 두 장수가 기별을 듣고 바쁘게 곧 올라가려 합니다. 본도가 함몰된 나머지에 겨우 보존된 것이 5, 6곳의 피폐한 고을이니, 흉악한 적이 사면에 가득하여 반드시 집어 삼키고야 말려 합니다. 이때를 당하여 호남의 군사가 비록 여기에 머물러 서로 응원하여도 역시 염려가 있는데 하루아침에 군사를 걷어 물러간다면 적이 응원이 없는 것을 알고 마구 덤빌 걱정이 결단코 아침 저녁에 있을 것이니, 이 도가 이미 함몰되면 호남이 차례로 침범을 당할 것이요, 호남이 지탱하지 못하면 국가가 회복할 근거는 여지가 없어질 것입니다. 생각함이 이에 미치니, 마음이 찢어지려 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조정에서 십분 참작하여 두 장수를 본도에 머물기를 허락하여 보장(保障)을 견고하게 하도록 상세하게 잘 아뢰어 주소서.
체찰사가 또한 사정을 열거하여 급히 장계하니 조정에서 두 의병 부르는 것을 중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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