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역사(삶의 내력)/제6장 조선시대와 태인 10

제 5절 암행어사와 태인

제 5절 암행어사와 태인 1. 1717년(숙종 43)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영복 - 정치란 거문고와 같아서 어사 조영복이 전라우도 태인 땅에서 겪은 이야기. 어사 조영복은 강직하게 고을을 다스렸으나, 간활한 아전들의 비리를 끝까지 단속하지 못한 김상옥의 사연을 밝혀낸다. 숙종 43년 봄. 장날을 맞은 말목장터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끓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매월 숫자가 3과 8로 끝나는 말목장날이면 인근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갖가지 물건을 사고팔며 정을 나누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장터 한켠에 말이 쉴 수 있는 마방까지 갖춘 탓에, 서산의 마방, 서울의 말죽거리 등과 함께 배들평(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말목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사노 한..

제 6절 태인군(泰仁郡)의 선생안(先生案)

제 5절 태인군(泰仁郡)의 선생안(先生案) 조선시대 모든 지방에는 수령(守令)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칠두칠사(七令七事)’라 이르는 임무를 맡아 행정․사법․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향촌을 통치하였을 뿐 아니라, 향촌민의 생활전반에 실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들을 ‘목민관(牧民官)이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백성의 어버이요 스승이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있어서 향촌민들의 편(便)․불편(不便)과 안위(安危)는 거의 수령들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 편찬된 읍지(邑誌)마다 수령의 명단을 빠트리지 않고 기재한 것도 지방사회 운용에 있어 수령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시대, 한 지역의 역사를 보고자 할 때 빠트려서는 안 ..

제 6장 조선시대(朝鮮時代)와 태인, 제 1절 조선(朝鮮)의 건국(建國)과 태인, 박필현의 난

제 6장 조선시대(朝鮮時代)와 태인 제 1절 조선(朝鮮)의 건국(建國)과 태인 1. 조선의 건국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고려 말기 나라 안팎의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개창(開創)되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밖으로는 원(元)에서 명(明朝)으로 중국의 왕조가 교체하는 국면이 전개되고, 안으로는 이에 대응하여 당시의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요동정벌(遼東征伐) 및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라는 획기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려시대는 건국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거란(契丹)․여진(女眞)․몽고(蒙古)․홍건적(紅巾賊)․왜구(倭寇)로 이어지는 대외관계의 복잡한 양상이 계속되었다. 대외관계로부터 초래되는 영향이 그대로 국내의 정치상황을 변모시켰다. 급기야 12세기에 이르러 약 40년에 걸친 대몽항쟁(對蒙抗爭)을 거쳐 몽고..

제 2절 조선시대 태인 지역의 행정(行政)과 교육기관(敎育機關), 1 행정제도, 2. 태인현 행정조직, 3. 태인현 객사

제 2절 조선시대 태인 지역의 행정(行政)과 교육기관(敎育機關) 1. 조선의 지방행정제도(地方行政制度)와 태인 지방행정제도는 1410년(太宗 10)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道)로 나눈 8도제로 유도부(留都府) 1, 부이(府尹) 6, 대도호부(大都護府) 5, 목(牧) 20, 도호부(都護府) 74, 군(郡) 73, 현(縣) 154로 구획한 고려 후기에 정비되기 시작한 행정구역을 기반으로 큰 변혁 없이 지내오다가 다소의 수정을 거쳐 1413년(太宗 13)에 확고한 제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 글자를 딴 것이며, 고려 초기에 전주목(全州牧)이었다가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라북도 일대를 강남도(江南道)로 정하였으며 1018년(현종 9년)에는 고려 현종이 강..

4.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기관(地方行政機關)과 태인 동헌(泰仁東軒)

4.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기관(地方行政機關)과 태인 동헌(泰仁東軒) 지정현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지정년월일: 1976년 4월 3일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451-9(정읍 동헌길 24) 시 대: 1816년(조선 순조16년) 중건, 1977년 보수공사 규 모: 정면 6칸, 측면 4칸, 팔작지붕 지방 읍치(邑治)의 관아는 국가적인 공무(公務)를 집행하기 위한 건물인데 이를 일반적으로 ‘공청(公廳)’이라고 한다. 그중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관아(地方官衙)의 정무(政務)인 군현(郡縣)의 행정(行政) 사법(司法)을 총괄(總括)하고 육방(六房) 관속(官屬)을 통솔하였던 중심건물이다. 수령(首領)의 살림채인 내아(內衙)와 지방 관리와 사신의 숙소로 사용된 객사(客舍), 수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

5. 조선의 지방교육제도(地方敎育制度)와 태인향교(泰仁鄕校), 6. 그외 관아, 7. 창고

5. 조선의 지방교육제도(地方敎育制度)와 태인향교(泰仁鄕校) 조선은 창건 초부터 고려 말에 극심하였던 불교(佛敎)의 폐단(弊端)을 없애기 위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를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초기에 민심을 통일하는 수단으로 공(孔)·맹(孟)의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사상을 적극 장려한 결과 유학(儒學)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 등의 지치주의(至治主義)학파의 실천유학이 일어났으나,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파(性理學派)의 이론유학이었다. 인종(仁宗)·선조(宣祖) 시대에 그 절정에 달했던 성리학파의 교육사상이 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교육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서울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鄕校..

8. 『조선왕조실록』 지킴이 태인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8. 『조선왕조실록』 지킴이 태인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을 살면서 자기 나름대로 역사상에 빛나는 일을 하며 자기가 사는 사회, 민족 , 국가 그리고 세계 인류에 이바지 하고자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이룩되지 않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역사상 국난(國難)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구국(救國)에 앞장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그래서 우리는 애국자라 부르며 그 활동 내용도 정치, 외교, 국방,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귀중한 사료(史料)이며 국보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보존되어 후세(後世)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兵禍)가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나라..

9. 조선의 과거제도(科擧制度)

9. 조선의 과거제도(科擧制度) 조선시대에는 관리를 뽑기 위해 과거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여 고려 말의 소수의 혁명파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상대로 모든 관리를 과거를 거쳐 선발하고자 하였다. 관리로 등용되어야만 출세할 수 있었던 당시에는 관리(官吏)의 임용제도(任用制度)로서의 과거(科擧)가 크게 주목되었다. 이후 조광조(趙光祖)의 주장에 의한 천거제(薦擧制)인 현량과(賢良科)가 도입되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조선 왕조 전 기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과거가 실시되었다. 과거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문과(文科)·무과(武科)·잡과(雜科)로 크게 구분하였지만,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은 여전하여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지적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컸다. 따라서 천인(..

제 3절 조선시대 태인 유적(遺蹟)과 사회제도(社會制度)

제 3절 조선시대 태인 유적(遺蹟)과 사회제도(社會制度) 1. 조선시대 태인의 유적(遺蹟) 정읍시에서 추진한 태인 오봉농공단지 조성사업부지 내의 청석유적(靑石遺蹟)과 왕림유적(旺林遺蹟)에서 조선시대로 보이는 토광묘(土壙墓) 180기와 회곽묘(灰槨墓) 6기가 조사되었다.1), 2) 2010년 4월 28일부터 2011년 4월 14일까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발굴(시굴)조사한 청석유적, 왕림유적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泰仁面) 오봉리(五峰里) 241-1번지 일원에 해당하며, 과거에는 태산현(泰山縣), 흥천면(興天面) 지역이었다. 1) 토광묘(土壙墓) 청석유적 ‘가’지구에서 조선시대 토광묘가 64기, ‘나’지구에서 44기, ‘다’지구에서 2기, 왕림지역에서 2기 청학지구(靑鶴地區)에서 68기가 조사..

제 4절 조선후기의 태인 사회

제 4절 조선후기의 태인 1. 난후의 제도개편과 태인 가. 군현의 현황 임진왜란 후 백성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8도의 거의 전부가 일본군에게 짓밟혀 약탈과 살육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고 그중에 특히 경상도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인구는 감소되고 농촌은 황폐해져서 굶주림과 나쁜 병에 시달려야 했다. 식량난으로 국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고 매관의 악습까지도 생겼다. 이때에 신분제도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천민(賤民)은 양민(良民)으로 되었고 서자(庶子)도 관직을 받게 되었다. 또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에 훈련도감과 지방에 속오군(束伍軍) 초관(哨官)을 두어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조선 후기의 군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은 인구의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