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태인의 단묘(壇廟) 6

관성묘(關聖廟)

관성묘(關聖廟) 위치는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1길 53-3. 묘명(廟名)은 관성묘(關聖廟) 1831년(純祖 31). 뒤편의 대숲속에 있는 건물지는 약 100년 전부터 관운장(關雲長)을 모시던 사당터인데 1995년경에 철거된 유적이다. 이 사당을 관성묘(關聖廟)라고 하는데 철거당시에도 많이 훼손되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건립시기(建立時期)는 1831년(純祖 31)1)에 참봉(參奉) 송석진(宋錫珍)2)이 가문의 여력을 모아 관운장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라는 설과 1891년(高宗 28)3)에 세웠다는 두 설이 있으며 1980년 후반쯤 없어졌다. 관왕묘(關王廟)의 특징(特徵)은 중앙정부나 지방단체가 아닌 개인에 의해 지어진 사당으로서 관운장을 향사(享祀)하는데 별도..

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 사직단 현의 서쪽 3리에 있다.1) 관아의 서쪽 3 리에 있다.2) 태인면(泰仁面) 태성리(泰成里) 성황산(城隍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주(註) 단의 넓이는 사방(四方) 2장(丈)5촌(寸), 높이는(高) 3척(尺) 4촌(寸)으로 된 것인데 춘분(春分), 추분(秋分) 상무일(上戊日)에 토지신(土地)과 곡물신(穀物神)께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이니 요컨대 토지(土地)와 곡물(穀物)은 오인생활상대본(吾人生活上大本)이어서 옛날에 각 군현(郡縣)에서 중대(重大)한 제전(祭典)을 하는 것이다.3) 태인면 태성리 성황산 서쪽 기슭 위에 있었고 지금은 부서져 없다.4) 사(社)는 동편에 있고 직(稷)은 서편에 있다. 단의 너비는 각기 5장(丈), 높이는 3척 6촌이고, 사방으로 나가는 계단이..

성황당(城隍堂) 및 단(壇)

성황당(城隍堂) 및 단(壇) 성황사 현의 서쪽 4리에 있다.1) 성황사(城隍祠) 관아의 서쪽 4 리에 있다.2) 태인면(泰仁面) 태성리(泰成里) 성황산(城隍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곳은 당우(堂宇)를 건설(建設)하였다. 거금(距今) 390여년전에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현감(縣監)으로 부임(赴任)하여 거산(居山)에 있는 읍(邑)을 이곳으로 이전(移轉)하고 치적(治績)이 대행(大行)하였음으로 읍인(邑人)이 그를 사모(思慕)하여 당우(堂宇)를 건설(建設)하고 선생(先生) 부처(夫妻)와 자녀(子女)의 초상(肖像)을 건설(建設)하고 삭망(朔望) 마다 관속(官屬)이 지성치제(至誠致祭)하며 새로이 임직(任職)을 당(當)했거나 소원(所願)하는 바 있으면 여기에 기도(祈禱)하였고 당시 리방(吏房)이 국세(國..

애련당(愛蓮堂)

애련당(愛蓮堂) 피향정(披香亭)의 북편(北便)에 애련당(愛蓮堂)이 있어서 역시(亦是) 구조(構造)가 정교(精巧)하고 화려(華麗)하더니 거금(距今) 50여년전(五十餘年前)에 훼철(毁撤)되고 그 후적(後跡)에 점포(店鋪)가 버려있으며 상지(上池)는 보토(補土)하여 현(現) 시장(市場, 그 당시에는 아래시장)이 되었다.1) ----------------------------------- 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60.

여단(厲壇)

여단(厲壇)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1) 관아의 북쪽 5 리에 있다.2) 여제단(厲祭壇) 태인면(泰仁面)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주(註) 어떤 군현(郡縣)을 물론(勿論)하고 읍(邑)의 주산(主山)을 성황산(城隍山)이라하며 산정(山頂)에는 필(必)히 성황단(城隍壇)이라는 제단(祭壇)를 세우고 성황신(城隍神)을 안위(安慰)하여 춘추(春秋)에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이니 군(郡), 현(縣) 내의 질병(疾病)과 재앙(災殃)을 예방하게 하는 것이다. 주(註) 모든 군현(郡縣)을 물론(勿論)하고 이를 설치하여 여질(厲疾, 傳染病)의 유행(流行)하는 시기에는 필(必)히 제사를 드려야 질병(疾病) 예방(豫防)을 발원(發願)하는 것이다.3) 여제단(厲祭壇) 태인군의 북쪽 3리에 있었고 지금은 부서져 없어졌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