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태인의 금석문, 현판 9

1. 가산거사 사리탑명(迦山居士 舍利塔銘)

가산거사 사리탑명(迦山居士 舍利塔銘) 가산거사(迦山居士)는 김수곤(金水坤, 1873~1950)의 호이다. 본관 김해(金海), 자는 공욱(共彧), 호는 죽헌(竹軒), 가산(迦山)으로 주로 가산거사로 불린다. 근대의 자선가. 1873년(高宗 10)에 가산(迦山) 인주(麟柱)의 아들로 정읍군 태인면(井邑部 泰仁面)에서 태어났다. 몽연(夢蓮) 김진민(金瑱珉 )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유생(儒生)으로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일찍이 백양사(白羊寺) 청류암(淸流庵)에서 좌선(坐禪)을 하다가 1937년 2월 28일 문득 입속에서 옥치(玉齒)와 같은 이사리(齒舍利)를 얻었음으로 1939년 10월 내장사에 사리탑(舍利塔)을 안치하고 영호선사(映湖禪師)의 기문(記文)과 손재형(孫在馨)의 오체혼합필체(五體混合筆體)의 탑비..

2. 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

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 泰仁流觴臺碑記 【趙持謙】 泰仁郡,卽新羅之泰山郡,文昌侯崔公舊所莅也。郡南七里許,巖石盤陀,巖下流水環廻。文昌每觴詠於斯,倣逸少故事,至今父老相傳焉。臺歲久荒廢,余友趙使君子直,視篆之暇,逍遙乎臺上,悠然有曠世之感。累石增築,立小碑以識之,屬余爲記。 頃年余爲吏楓岳下,地稱神仙窟宅,思一修飾,而未暇及。子直其多乎哉!余惟先生生星一周,涉海萬里。未弱冠,擢大唐巍科,踐霜臺,入金門,天下已爭知之。及其從事轅門,磨墨楯頭,使販鹽老賊魄褫膽落,眞所謂賢於百萬師矣。以其高才盛名,捲而東還,推出緖餘,亦足以維持一邦。顧乃沈淪銅墨若梅子眞,終焉浮遊方外,自託於羨門之屬,何也? 噫!公之生世不辰,入中華則亂離瘼矣,歸故國則危亡兆矣,道不可行,身且難容。以此飄然遐擧,蟬蛻棼濁,誦紅流一絶,未嘗不三復歎憐其志焉。想其婆娑徜徉於是地也,感慨繼之者..

3. 김공재일기적비(金公在一紀蹟碑)

김공재일기적비(金公在一紀蹟碑) 김공재일 기적비(金公在一 紀蹟碑, 140cm×70cm) 김재일은 태인 사람으로 부유한 사람이었다. 김재일이 태인 객사 건물을 매입하여 읍원정을 중수한 것을 기리기 위해 기적비를 세웠다. 이 기적비의 글씨는 김진민(金瑱珉)이 10대 때 쓴 것이라고 한다. 1865(고종 2)~1950, 본관은 광산(光山), 자(字)는 상숙(相淑), 호(號)는 양재(陽齋), 한식(漢植)의 아들로 태인면 태흥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과 1913년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자 빈민들에게 돈과 곡식(錢穀)을 제공하고, 호세(戶稅)를 3년간 대납하였다.1) 거금(距今) 24년(1936년 기준) 전(前) 임자(壬子) 겸년(歉年, 흉년)에 정조(正租, 벼) 300여석(餘石)을 희사(喜捨)하여 군내(郡內)..

5.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동초(東樵) 김석곤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1874년 ∼ 1948년)은 1874년(高宗 11) 12월 13일에 태인면(泰仁面) 태흥리(泰興里) 444번지에서 김해 김씨 진사(進士) 연추(演秋)와 여산 송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처안(處按)이고, 말이 어눌하다 하여 눌오(訥吾, 訥語)라 자호(自號)하였고 중년에는 산외 동곡의 초부라는 의미에서 동초(東樵) 또는 표암(瓢庵)을 주로 많이 사용했고 또 말년에는 팔조거사(八糟居士), 소요처사(逍謠處士)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읽고 쓰기를 즐겼으며 본성이 순수하고 검소하여 신분이 다르더라도 남을 하시(下視)하지 않았다 한다. 어려서는 여러 스승을 모셔 학문을 익혔고 성장하면서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면..

6. 태인 현감 신잠 선정비(泰仁 縣監 申潛 善政碑)

태인 현감 신잠 선정비(泰仁 縣監 申潛 善政碑)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05호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92번지 1549년(명종 4)에 건립된 신잠의 비석이다. 비는 높은 자연석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세웠는데, 비몸돌의 윗변 양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크기는 가로 81㎝, 세로 189㎝, 두께 19㎝이며, 비의 좌대(座臺)는 가로 150㎝, 세로 92㎝, 높이 90㎝로 되어 있다. 영천심잠이 1543년(중종 38)에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동, 서, 남, 북의 사학당을 세우는 등 선정을 베풀고 1549년(명종 4) 간성군수로 이임하자 그 유덕을 추모하여 진사 김완(관 도강), 백삼귀(관 수원) 등 유림들의 발의로, 비문(碑文)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5)이 해서로 썼으..

7. 일재 이선생 신도비명(一齊 李先生 神道碑銘)와 유허비

일재 이선생 신도비명(一齊 李先生 神道碑銘) 문경공 일재 이선생 강마소(文敬公 一齊 李先生 講磨所) 일재(一齊) 이항(李恒)선생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이항(李恒, 1499~1576)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5학(五學)의 한 사람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아버지는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자영(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이다. 박영(朴英)의 문인이다.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어 무예를 익혔으나, 30세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서 수년 간 독학한 뒤 태인(泰仁)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1566년(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의영고령(義盈..

8. 증예조판서행사간원 정언 불우헌 정선생 신도비명(贈禮曹判書行司諫院正言不憂軒丁先生神道碑銘)

증예조판서행사간원 정언 불우헌 정선생 신도비명 (贈禮曹判書行司諫院正言不憂軒丁先生神道碑銘) 정극인 선생을 기리는 비(碑)이다. 조선초기의 문인인 정극인(1401~1481)의 호(號)는 불우헌(不憂軒)이다. 1401년 경기도 광주(廣州)군에서 출생, 세종 11년인 1429년 생원시(생원시)에 급제한 후, 세조 때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태인에 돌아가 후진을 가르쳤는데, 성종이 "늙은 몸으로 교육에 전력함을 훌륭하다."하였으며,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고, 태인에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세워졌다. 불우헌곡(不憂軒曲)과 불우헌가(不憂軒歌), 상춘곡(賞春曲) 등을 지었으며, 문집으로 '불후헌집'이 있다.

9. 태인 이로비(泰仁移路碑)

태인 이로비(泰仁移路碑) 소재지 :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871년(高宗 8) 3월에 현감 김인근(金寅根)이 태인면 태창리 하연지 남쪽(피향정 남서쪽 모퉁이 옛날 도로 북쪽)에 세웠다. 현감 김인근이 당시 풍수지리에 따라 명산(鳴山)의 허리를 깎아 통하는 길이 산의 맥(脈)를 끊는다 하여 구길을 없애고 현재의 길로 이설(移設)하였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비석은 화강석으로 된 높이 폭 0.88m, 0.71m 이단(二段) 좌대(坐台) 위에 세워졌다. 비신(碑身)은 높이 2.1m, 폭 0.46m, 두께 0.25m이다. 앞면에는 ‘이로비(移路碑)라 새기고, 그 경위를 기록하고 끝에는 ’숭정 기원후(崇禎 紀元後) 오신미 삼월 일(五辛未 三月 日), 지현김인근식(知縣金寅根識)‘이라 하고 뒷면에는 ‘감관전만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