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재 이선생 신도비명(一齊 李先生 神道碑銘)
문경공 일재 이선생 강마소(文敬公 一齊 李先生 講磨所)
일재(一齊) 이항(李恒)선생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이항(李恒, 1499~1576)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5학(五學)의 한 사람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아버지는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자영(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이다. 박영(朴英)의 문인이다.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어 무예를 익혔으나, 30세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서 수년 간 독학한 뒤 태인(泰仁)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1566년(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의영고령(義盈庫令)·임천군수를 지냈으나 직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고 사퇴했다. 선조초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1574년 사헌부장령·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기대승·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서한을 통하여 학문을 논하며, 이(理)와 기(氣),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일체라고 주장했다. 1539년 41세에 칠보산(七寶山, 분동 동쪽 약 10里)의 중턱에 자그마한 서재(書齋)를 세우고 이곳을 강학소(講學所)로 하였으며 일(一)자의 재액(齎額)을 붙이니 학자들이 이곳을 일재(一齋)라 일컫고 선생의 호로 호칭하게 되었으며 또는 수일재(守一齋)라고도 일컬었다. 일(一)자는 선생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학문의 철학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수일재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이항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태인 남고서원에 제향되었다. 일재 이항을 기리기 위한 신도비는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있다.
일재(一齊) 이항(李恒) 유허비(遺墟碑)
소재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 399-1
태인면(泰仁面) 태서리(泰西里) 원분동(元紛洞)에 있으니 일제(一齊) 이항선생(李恒先生)의 주거(住居)하던 지적(地跡)을 기념(紀念)하기 위해 후손(後孫)인 성주(星州 李氏 門中)에서 창건(創建)한 것이다.1)
이 비각(碑閣) 앞에 이항(李恒)이 공부할 때 보림사(寶林寺)까지 가면서 물을 건너 가기 위하여 가지고 갔다고 전(傳)하는 바위가 우뚝 서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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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70.
2) 임남곤, 『井邑文化財誌』(井邑文化院, 1999. 12. 30),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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