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태인의 금석문, 현판

5.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증보 태인지 2018. 6. 11. 12:36

동초(東樵) 김석곤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18741948)은  1874(高宗 11) 12월 13일에 태인면(泰仁面) 태흥리(泰興里) 444번지에서 김해 김씨 진사(進士) 연추(演秋)와 여산 송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처안(處按)이고, 말이 어눌하다 하여 눌오(訥吾, 訥語)라 자호(自號)하였고 중년에는 산외 동곡의 초부라는 의미에서 동초(東樵) 또는 표암(瓢庵)을 주로 많이 사용했고 또 말년에는 팔조거사(八糟居士), 소요처사(逍謠處士)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읽고 쓰기를 즐겼으며 본성이 순수하고 검소하여 신분이 다르더라도 남을 하시(下視)하지 않았다 한다.  어려서는 여러 스승을 모셔 학문을 익혔고 성장하면서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의서(醫書), 산서(山書) 사기(史記)등에 두루 통달하였고, 특히 시서(詩書)로 이름을 날렸고 서예는 오체(五體)에 능하였으며 또한 동초의 작품을 보면 문자학(文字學)에 전념한 흔적이 있고, 전서(篆書)는 고대 하우전(夏禹篆)과 허목(許穆)의 미수체(眉叟體)를 많이 학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해 김씨 족보에 의하면 동초는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交遊)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교윤의 부인이 김해 김씨로 동초의 고모부 뻘 된다. 또한 간재 선생 문인록에는 김교윤의 자(字)는 수렴이며 병진생으로 정읍 칠보면 흥이리 사람으로 김교윤의 부친 김종순(金鍾順)의 시문집인 직헌집(直軒集)에는 전간재(田艮齋, 田愚, 18411922)와 같이 스승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에게 동문수학 하였고, 그의 아들 수당을 간재 선생에게 수학시켰기 때문에 간재 선생도 수당에게만큼은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계화도에 있는 간재 전우를 뵈러 갈 때는 김교윤과 동초는 같이 간재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당 김교윤 같은 학식이나 덕행 높은 사람 좇아 더불어 사귀고 노닐며 도의(義)를 강론하니 사람들은 그를 소요처사(逍謠處士)라 했다.1)

   염재 김균(念齋 金㽦, 칠보의 김학자로 알려졌다. 1948년에 30년 동안 집필해온 대동천자문을 완성함)의 문집인 염재집(念齋集) 권 지육(卷 之六) 서편(序篇)에 기록된 김처안석곤육십일수서정축(金處按晳坤六十一壽序丁丑)을 보면 염재가 동초 회갑(丁丑生)을 맞아 글을 지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균은 동초와 학문으로도 교류했음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동초의 제자로 조카인 김진쾌의 증언에 의하면 동초는 어려서는 칠보에 사는 송학자(宋學者)에게 배웠다고 하였으며 중년에는 계화도에 사는 간재 선생을 자주 찾았다고 하나 어느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른 기록에는 간재의 문인이며 19세에 구례군수를 지낸 서택환과 교류했다고 기록이 나온다. 서택환은 이평면 출신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스승임)

   중년 이후(1933년경)에는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되자 그가 태어나 성장한 태인에서 정읍 산외면 동곡리로 이주하여 7, 8년을 이곳에서 살면서 손수 대나무 숲 밑에 본채와 행랑채를 지었는데 현재 행랑채는 유실되어 빈터만 남아있고 본채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며 동곡에서 지금실쪽으로 500m쯤 올라가면 왼쪽에 많은 문인, 석학들과 교유하던 청계정(淸溪亭)과 관리사가 있다.

   현재 관리사는 반파되어 볼썽사납게 보이지만 바로 그 위에 올라가면 동초가 직접 지었고 손수 관리하던 “청계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건물의 편액 청계정은 허목(眉叟)의 전서(篆書) 필의(筆意)를 가미하여 동초가 썼고 사방에 두른 12개의 주련은 모두 동초의 초서로 썼으며 그 안에는 김교윤이 '청계정기'를 행초로 썼으며 많은 문인 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시를 지은 후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동초는 이 '청계정'에 많은 토지를 희사하여 현재까지도 관리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사용하고 있으며 정자 주변 개울가 넓은 바위에 조화 있게 자연에 어울리는 시구(詩句)들이 명필, 동초의 글씨로 새겨져 있고, 청계정의 연혁을 빗돌에 새겼는데 비문 음기(碑文 陰記, 후면)에 새긴 서체(書體)가 독특한 '허미수' 필의(筆意)의 전서로 우리 주위에서 보기 드문 금석문으로 서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청계정기(淸磎亭記)

 

   태성(泰城태산泰山또는 태산太山〉) 즉 태인의 옛 이름의 동쪽에 산이 있으니 이르기를 상두산(象頭山)이라 한다그 봉우리는 겹겹이 솟아 빼어나니 시내로 막혀 있고 시내는 흰 모래톱과 맑은 여울이 소새(簫灑산뜻하고 깨끗함)하다

   향기로운 곳에 좋은 나무가 울창하고 신령스러운 풀이 화려하게 우거져 있다높은 들과 평평한 내이며 논밭은 비늘처럼 이어지고 마을은 푸른 소나무와 대숲 사이에 멀리 떨어져 은은히 비치니 아마도 은군자(隱君子부귀공명을 구하지 않고 숨어 사는 군자)가 살지 않겠는가

   여기에 정원의 연못이나 정자의 좋은 경치가 아직 없었을 적엔 계유년 가을에 동지 14인이 있어 맑은 시내 가에 연락(宴樂)과 거문고로 즐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세웠. 인하여 청계(淸磎)라고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여기에는 대청이 있고 방이 있으며 창문은 밝고 책상은 정갈하여 독서하기에 좋다.

   매양 좋은 날에는 다정스럽게 둘러앉아 고상한 모임으로 글을 논하고 시를 읊으며 혹은 꽃에 물을 주고 대나무를 애호(愛護) 하니 하물며 저 고원(高遠높고 원대함)한 정취(情趣)와 시문(詩文)은 세상이 탐내는바 부귀의 밖에 멀리 떠난 일로 구름 낀 숲 속에서 고기 안주를 즐기고 오건(烏巾은사가 쓰는 검은 두건) 쓰고 학창의(鶴 衣지난날, 지체 높은 사람이 입던 웃옷의 한 가지) 입은 차림 새로 때로 바둑을 둔다

   일찍이 고송(古松)과 유수(流水)의 밖에서 듣기를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신선(神仙)으로 여긴다그러나 진실로 이에 미침이 부족함은 아마도 성찰(省察)의 공을 낮춤이 아닌가고요할 적에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고 거동할 때는 중절(中節) 중정(中正)하며 절조(節操)가 있음을 지키게 하면 물루(物累세상에 얽매인 여러 가지 관계)에서 스스로 풀려난다맑고 밝음이 몸에 있은즉 주부자朱夫子주자 곧 주희(朱喜)가 감흥(感興)한 시에 가을 달이 찬 물에 비추다(秋月照寒水)라고 몇 번이나 일렀던가.

   이 정자는 지키는 사람이 없을 수 없다. 그 지키는 사람의 집이 있어야 하고 전답이 있어야 한다각별한 뜻을 가지고 감수(監守)하며 또한 계()를 맺어 춘추로 담론(談論)하는 모임을 가지기를 영원히 백 년 토록 함으로써 자손들은 덕을 더하여 끼치고 대를 이어 서로 친애함을 도모한다면 장차 이 정자에는 빛이 날 것이다.

   비록 그러나 인성(人性)이란 모두 가지런하지 않아서 착한 일을 하도록 권하고 서로 도와서 어질도록 권면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 가지라도 그 도리를 미진한 일이 있게 되면 뒤에 이 정자에 올라 장부(帳簿)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사간원(司諫院)을 면치 못하게 할 것이다.

   비석을 세우는 의의를 말할 것 같으면 그 정자와 같은 것은 또한 안색(顔色)이 없으니 어찌 이것에 제현(諸賢)의 마땅히 면려를 가해야 할 바가 있겠는가?  대개 이 정자가 건축되기 시작할 때부터 태고 시절부터의 황무지(荒蕪地)가 하루아침에 환하게 빛나 경관을 고치니 아닌 게 아니라 돌에 글을 새겨 그 자취를 남기고자 하던 날에 김석곤(金晳坤)군의 제안으로 박용래(朴墉來)군은 그 뜻에 호응하여 널리 동조를 구하였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만약에 이 산의 경치를 보려 하고 올라가 즐김에 내가 마음 편하게 깊은 정회를 뗄 수 있다면 이 정자도 옛 준례에 따라 기록이 있어야 한다이 글을 청탁하면 사양치 않을 것이다.

 

   동초에게는 동생 김달곤(1896~?)이 있었는데 호(號)를 “석천”이라 하였으며 시, 서, 화(詩, 書, 畵)에 두루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인물로 3.1 운동에 가담하여 전주 재판소에서 3년형을 받았고 그 후 대구형무소에 이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사경에 이르자 대구 복심법원에서 병보석으로 출감 5일 만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일로 동초는 동생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고 그의 아들을 손수 가르치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하여 자기 집 사랑방에 서당을 차리고 제자들에게 한학과 글씨를 가르쳤다. 그때는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제자들에게 함석에다 글씨를 연습시켰다 한다.  함석이 너무 커서 그것을 알맞게 잘라 그 위에 진한 먹물로 연습을 시켰고, 함석에 검정 먹물이 입혀지면 나중에는 말려서 맑은 물로 글씨 연습을 시켰다.

   또한 큰 글씨(大字)를 쓸 때는 솜뭉치나 칡뿌리를 짓이겨 사용하였다고 하며 제자들에게 '왕희지'나 '한석봉'의 이야기를 자주 하였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필첩과 호산(浩山) 서홍순(徐弘淳)의 필첩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일부는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의 본처인 현풍 곽씨 사이에서 아들이 없어 셋째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하였으나 후처인 강릉 유씨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동초의 학문과 예술정신을 이어받지 못하였다. 동초는 기와집을 지을 능력이 있었지만 초가집을 좋아하여 7칸 겹집에서 살았으며, 한울타리 안에 동생들은 집을 지어 살았다 하나 지금은 동생집 행랑채만 남아 있을 뿐, 그가 살았던 태인의 초가집은 흔적조차 없고 돌담과 함께 창암 이삼만이 즐겨 쓰던 문구인 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글귀가 방문 옆에 빛바랜 채 남아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동초의 제자로는 장조카인 '진쾌'(2005년 사망)에게 '창암 이삼만'과 '호산 서홍순' 필첩을 물려줘 가족이 보관하고 있으며  옹동에 거주했던 박정기 씨 정도만 알려져 있다.

   동초의 묘소는 태인면 태흥리 항가산(恒伽山) 김해 김씨 선영에 모셔져 있는데, 자신이 죽은 후에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여, 지금도 그의 묘소에는 월석비 하나 없이 조용히 잠들어 있다.

 

   동초는 천품(天稟)이 청검(淸儉)하여 세상사(世上事)를 초월하였으며 1910년(대한제국 융희 4) 8월 29일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나라를 잃게 되자 뜻있는 선비들과 어울려 자연을 벗 삼아 전국의 유명 산천을 유람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넓은 바위나 나무 등에 그의 독특한 서체로 글씨를 쓰고 새긴 금석학자로 5체(五體)에 능한 서예가였다.  이때 예술의 혼을 불태우는 작업을 할 때는 글씨 한자 크기가 사방 1미터를 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시문을 짓고 암벽 공간에 직접 글씨를 써서 석공을 시켜 새기게 하였다 하니 일반적으로 비문이나 암각서(巖刻書)를 새길 때는 종이에 글씨를 써 붙이고 새기는데 그는 바위나 나무에 직접 글씨를 써서 새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전문적인 석공이나 조각을 하는 전문가를 곁에 두고 있으며 산에 갈 때는 그들을 수행케 하여 글씨를 쓰면 즉시 새겼다고 한다. 즉 그가 쓴 편액 뒷면에 하도(河道)와 김예갑(金禮甲)의 각(刻)이라 새겨져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경승지(景勝地)의 기암(奇巖)에 예초(隸草)로 기념 시구(紀念 詩句)를 음각(陰刻)해 놓은 기인(奇人)이다. 

   태인면 태성리 성황산 아래 산정 가든 옆에 초서로 새긴 백천대(白千臺, 백길 천 길이 되는 누대(樓臺)라는 뜻으로 국운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나라 잃은 선비의 꿋꿋한 기개를 보는 듯하다. 210 cm×95cm)’, 태인면 고천리 녹동마을 입구의 하천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둑길 옆의 넓은 바위에 '세연암(洗硯巖, 선비들이 시를 짓고 벼루를 씻었다는 바위, 260 cm×115cm)'이란 세 글자를 초서로 새겼고, 태인 다천사 부근에 전서의 대전체(大篆體)'상영태청(上靈太淸, 상제의 혼백이 쉬는 태청,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삼청 중 하나의 궁, 이 중 '영'은 신령 '령' 자로 무당 '무' 밑에 말씀 '언'을 위아래로 배열하고 말씀 '언' 부문도 전서의 이체자로 구성해 문자학적 공부가 깊었음을 드러낸다.2))'

 

 

 

 

 

 

   그리고 정읍시 옹동면 칠석리의 김석곤선생선조비문(金晳坤先生先祖碑文, 142 cm×90cm)’,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 상두산 산봉우리의 백운대(白雲臺)’와 남쪽 평사천(平沙川) 상류에 초서로 새긴 유수불패(流水不腐,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즉 끊임없이 스스로 노력하면 발전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있다. 流水(유수)는 不腐(불부)하고 호추(戶樞)는 불두(不蠹)라는 『여씨춘추(呂氏春秋)』 「계춘기(季春記)」의 <진수(盡數)> 조에 나오는 말이다.  500 cm×450cm)’,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의 청계정 비문(淸磎亭 碑文)’, 정읍시 북면 칠보산(七寶山) 남고서원 위 보림사(寶林寺) 경내에 위치한 일재(一齎) 이항(李恒) 선생의 서당지(書堂())의 근측대암(近側大岩)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가 사람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도가 가까이 있으니 꾸준히 수신으로 도를 연마하라는 것이다. 즉 성현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선비로서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다. 『중용(中庸)』 제13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100 cm×50cm)’, 내장산 불출봉(佛出峰) 불출암(佛出庵)의 뒤쪽의 서쪽으로 약 200m 지점의 암벽에는 '내장풍악(內藏楓嶽, 내장의 단풍 아름다운 가을 산, 금강산의 가을 이름인 풍악산(楓嶽山)에 비겨서 지은 글귀이다.)’, 정읍시 고부면의 두승산(斗升山) 정상의 말봉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 물로 재는 말()과 나무로 재는 되(), 140 cm×70cm)’이라고 새겼다 

   또  김제시 금산면 선동리 상두산(象頭山) 중턱에 있는 대운폭포(大雲瀑布)의 측면(側面)'산명수류(山明水流, 산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군자의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정읍시 산외면과 김제시 금산면의 경계에 해발 575m의 상두산이 있다.)’, 순창군 구림면 회문산 정상 석굴 암벽에 허목의 미수체(眉叟體)와 비슷한 서풍(風)으로 새긴 '천근월굴(天根月窟, 인체의 12마디와 12 경락, 남녀의 생식기, 삼라만상을 표현한다고 한다. '천근월굴'은 중국 송나라 시인인 강절(康節) 소() 선생 유가의 시 가운데 주역(周易) 복희팔괘(伏羲八卦)를 읊은 耳目聰明男子身   洪鈞賦與不爲貧   須探月窟方知物   未攝天根豈識人 乾遇巽時觀月窟   地逢雷處見天根   天根月窟閑往來   三十六宮都是春에 나오는 글로서 음양의 변화, 조화를 말하고 있다. 이 시의 천근(天根)은 양(陽)으로 남자의 성(性)과, 월굴(月窟)은 여자의 성(性)을 나타내어 음양(陰陽)이 한가로이 왕래하니 소우주(小宇宙)인 육체가 모두 봄이 되어 완전하게 한다는 뜻이다.)’, 김제시 황산면 문수사의 '죽실암(竹實嵒, 봉황이 죽실(竹實)을 먹고 오동나무에서 잠을 잔다는 전설 유래)’이 해서로 남아있고, 부안군 변산면 내변산의 직소폭포 가는 길가 바위에 '봉래구곡(蓬來九曲, '봉래'란 무릉도원과 같은 상상의 산을 이르는 말이다. 원래는 봉래곡의 물이 흐르는 암반 위에 새겨진 봉래구곡이라는 글씨 때문에 일반인들은 봉래곡을 봉래구곡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500 cm×170cm)'이라 쓴 암각서는 그 글자의 크기가 1m가 넘는 큰 글씨를 초서로 새겼다.  

   또한, 부안군 산서면 개암사 뒤 울금바위의 '우금암(遇金, 김유신과 소정방이 만난 장소라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김해 김씨 후손인 동초는 자랑스러운 선조를 흠모하며 그 후예로써 이곳에 글귀를 새겼을 것으로 짐작한다.') '흥무대왕후예김석곤서 을축 중추(興武王後裔金晳坤書 乙丑 仲秋)'이라고 새겼으며 그 옆의 망화대(望華臺)의 그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 옆에 양재(艮才) 서택환(徐宅煥) 소요지처(逍謠之處)… 등의 글이 보인다.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수왕사(水王寺) 뒤 암벽에 '무량굴(無量窟)'이란 세 글자를 초서로 바위 가득 차게 썼고 말미(末尾)에 적은 글씨로 '동초 김석곤(東樵 金晳坤) 을축 맹춘(乙丑 孟春 1925년 봄, 모악산 수왕사의 원래 이름은 물왕이절, 다시 말해 무량의 절이다. 350 cm×118cm)'이라 새겼고, 그 옆에는 '악면층애현차루 선인여적수우우 욕암소설영무량 수어상담세외부(嶽面層崖縣此樓 仙人餘跡水尤優 欲巖掃雪影無量 與相談世外浮, 높은 산비탈 바위 겹겹 쌓아 놓은 절벽에 매달린 누각, 신선이 남긴 자취에 물이 더욱 넉넉해. 바위 눈을 쓸어내리니 무량(無量)이라 하였구나. 누구와 더불어 물외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라. 세속을 벗어나 물외(物外)에 노니는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라는 칠언절구 한시(漢詩)'동초우제(東樵又題, 동초가 또한 글을 짓고 을축년 첫봄에 김석곤이 쓴 것이다. 115 cm×70cm)' 라고 새겼는데, 이 글은 乙丑(1925)년 봄에 무량굴의 선경(仙境)을 보고 읊은 글로 그의 불교적 성향과 선가적인 사상이 같이 함축되어 있음을 잘 엿볼 수 있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단천마을(박달래, 朴檀내, 檀川) 앞 냇물 한가운데에 있는 바위에 초서체로 새겨진 '두류만묵 을축년 9월(頭流萬墨 乙丑年(1925년) 九月, 지리산의 모든 시서(詩書)를 대표한다는 뜻(『花開面誌』), 두류산(지리산)이 온통 이상적인 평등 세계라는 뜻으로 묵자(墨子)의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과 100m 하류에 정류석(停留石)으로 전하는 바위에 남아있는 초서체의 칠언절구 '일경일위유수지, 수유종 횡역부지, 의혹인인막심구 , 상종직자자연지. 동초우제(一經一緯有誰知, 雖由縱 橫亦不知, 疑惑人人莫深究 , 相從織者自然知. 東樵又題, 날줄이 하나이며 씨줄도 하나임을 누가 있어 알리요. 비록 종횡으로 오고 가더라도 또한 알지 못할 것이다. 의혹하는 사람들아 깊이 궁구 하지 마소. 베짜는 사람들과 상종하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동초가 또 짓다.)',

 

   태인 박노환씨 소장의 '불화이열 불빙이한(不火而熱 不氷而寒, 불이 없어도 덥고, 얼음이 없어도 차갑다.)'과 '효득병경 손양 삼단 눌오(孝得竝敬 損讓 三單 訥吾, 효도하면 아울러 공경함을 얻는다. 74.5 cm×24.5cm)' 편액,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청계정의 '산기롱종수기청 운심차처고반성 태함지척간어약 수규참차문호성 중극상위무속태 금서위낙각심명 송풍나월한류상 양양도가류우생(山氣巃嵷水氣淸 雲深此處考槃成 苔涵咫尺看漁躍 樹糾參差聞虎聲 中屐相爲無俗態 琴書爲樂覺心明 松風蘿月寒流上 兩兩櫂歌留寓生)', 칠언율시 형식의 작품은 자연 친화감과 몰아 일체감을 리얼하게 표출하여 동양적 관조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편액, 광주에 거주하고 있는 동초의 종손인 김철수 씨 소장의 공자위증자왈(孔子謂曾子曰, 전면은 1949년 음력 8월 18일에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당부하며 『효경(孝經)』의 구절을 인용하여 목판에 새겨 준 것이다. 72.5 cm×47cm)’과 '도불원인 단기 4281년 화담, 주인 소석 조각 김예갑(앞면에 道不遠人 檀紀 四二八二年 和談 뒷면에 主人小石 造刻 金禮甲, 道不遠人은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뜻이다. 동초가 화담(和談 : 조카인 진쾌의 호)에게 주는 나무판 위에 새긴 글귀로 김예갑씨가 각자 하였다.)', '원화실(圓華室, 동초 김석곤 선생이 조카 김진쾌 집 거실에 걸어준 작품으로 가족과 방문하는 손님 모두가 원만하고 화평하게 지내라는 뜻이다. 뒷면에 '何道 刻 癸未 九月'이라 되어 있어 1943년에 판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목판, 94.6 cm×36.2cm)'.

   동초의 손자인 김민수 씨가 소장하고 있는 『삼동화첩(三同畵帖)』은 동초 김석곤, 후암 김창석, 청계 이학노가 합작하여 쓴 서첩인데, 주로 유가와 도가적인 글귀(含仁懷義, 達道, 正心, 格物致知, 治國, 齊家, 修身)가 많이 나타나고 있고 이 필첩 속에는 전서를 비롯하여 예서, 해서가 조금씩 나오고 주로 행서, 초서 필의(筆意)가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또한 동초의 종손인 김철수 씨 소장의 ‘동곡용두(東谷龍頭)’라는 병풍(屛風)이 2점이 있는데 두 점 모두 1953년 이전의 연대 미상으로 8폭 병풍에 지본 묵서(紙本 墨書)로 185 cm×39.3cm이다.   

   이외에도 김민수 씨 소장품을 보면 삼대(夏·殷·周)의 시작인 하나라의 우임금 글씨로 알려진 하우전과 송시열과 예송문제(禮訟論爭)로 정쟁을 했던 미수 허목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수체 계통에 속하는 작품은 '청계정비'를 비롯하여 임실 회문산의 암각서(天根月窟)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동초는 유가에 근본을 두면서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을 뿐만 아니라, 의서와 침술 그리고 잡학에 해당하는 옹동면 박정기가 소장한 『도덕연원(道德淵源)』이란 책을 보면 동초의 쌍 낙관이 찍힌 것으로 보아 동초가 탐독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책은 유불도의 3교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고 동초는 이 책을 다 보고 난 후에 '유불선(儒佛仙)이라 3자를 적었는데 이것은 책의 내용도 함축했지만 한편 동초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사료된다. 

   동초의 서법은 유불도의 삼교가 유합된 사상에서 자연을 아우르고 있으며, 특히 필법에서 해행초는 전라도의 서맥을 따르고 있어 주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와 창암 이삼만, 호산 서홍순의 서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지금도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 동초의 자료를 보면 원교필첩(圓嶠筆帖), 호산필첩(湖山筆帖) 등을 동초가 직접 발문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동초의 행초는 암각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태인의 '세연암'과 '백천대', 산외 '유수부패', 모악산의 '무량굴', 부안의 '봉래구곡' 등 이다. 동초의 암각서에 나타난 초서는 자연스러우면서 웅장함이 같이 상존하고, 그 장소에 맞는 명구를 새겨 지리와 천문에 밝았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서의 소전체(小篆體)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서체를 정리한 것이다. 소전체는 대전의 다양한 글씨체를 통일한 것으로 진시황은 즉 태산각석, 낭아대각석을 새웠다. 즉 소전체가 후대까지 널리 쓰이고 비석의 두전(頭篆) 등에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글자의 원형을 탐구하는 문자학으로는 대전체에 가까운 하우전과 허목의 미수체를 많이 답습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미수체와 비슷한 서풍은 '청계정비'를 비롯하여 임실 회문산의 '천근월굴'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동초는 다양한 대전과 소전 공부를 많이 했고, 특히 미수체를 전적으로 학습하고 작품으로 남겼다. 현재 그의 전서작품을 해독하는 데는 많은 공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즉 그의 작품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료를 보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교, 창암 그리고 호산은 동국진체의 맥락 속에서 우리 서맥의 정신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동초도 이러한 우리 글씨의 서맥을 이어받고 있다. 동초 글씨의 특징은 해서에서는 간결함과 단아함이 잘 나타나 있으며, 행초에서는 물이 흐르듯 구름이 가듯 정체됨이 없이 유유히 흐르는 대하의 물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세연암이 써진 암각서는 모든 획이 이어져 있는 연면초(連綿草)로써 바위를 마치 종이 다루듯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또  주로 묵화도 많이 그렸다 하나 남아있지 않다.

   동초는 시대의 불운 속에서 일제의 폭정을 피해 정읍 산외에 청계정을 짓고 자연을 벗 삼고 살면서, 오로지 대붓을 들고 명산을 주유하며 거기에 맞는 명구(名句)를 새긴 것으로 보아 인문지리학에 식견이 높았다.

   다시 말해 동초는 원교와 창암의 서론과 서법을 토대로 동초만의 새로운 서체를 형성하였고, 사실 암각서 분야에서는 독보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서첩과 주련 등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3)

   독우 장봉선 선생이 발간한 『정읍군지』(1936) 29면에 일부 기록과 『동초 김석곤 선생 금석문을 중심으로 정읍지역 금석문 연구』(2007. 9.15) 등을 제외하곤  그의 문집이나 필적에 대한 기록도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이 없다.

   비록 전북 서예사에 알려진 내용은 없으나 시류를 멀리하고 오직 예도의 길을 걸머지고자 한 예술적 경지를 이룩한 한 서예가의 인생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그의 무욕의 삶과 예술적 자질을 재평가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거의 1세기가 경과한 지금에도 비교적 뚜렷이 남아 있으나 방치된 채 인위적. 자연적인 요소에 의해 훼손되어가고 있는 실정에서 암각서에 대한 보존대책을 조속히 수립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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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崔玄植, 新編 井邑人物誌(정읍문화원, 2007. 2. 25.), 92.

2) 전라일보(2015.07.22)

3) 『정읍지역 금석문 연구(정읍시, ()정부정책연구원, 2007. 9. 15.)

4) 김해 김씨 삼현파 홈페이지 http://cafe.daum.net/kimthreepa

   『井邑郡誌(정읍군, 1984), 141.

   구 정읍시홈페이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