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태인의 금석문, 현판

3. 김공재일기적비(金公在一紀蹟碑)

증보 태인지 2018. 6. 21. 09:49

   김공재일기적비(金公在一紀蹟碑)

 

 

김공재일 기적비(金公在一 紀蹟碑, 140cm×70cm)

  

   김재일은 태인 사람으로 부유한 사람이었다. 김재일이 태인 객사 건물을 매입하여 읍원정을 중수한 것을 기리기 위해 기적비를 세웠다. 이 기적비의 글씨는 김진민(金瑱珉)이 10대 때 쓴 것이라고 한다.

 

 

   1865(고종 2)1950, 본관은 광산(光山), ()는 상숙(相淑), ()는 양재(陽齋), 한식(漢植)의 아들로 태인면 태흥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과 1913년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자 빈민들에게 돈과 곡식(錢穀)을 제공하고, 호세(戶稅)3년간 대납하였다.1)

   거금(距今) 24(1936년 기준) () 임자(壬子) 겸년(歉年, 흉년)에 정조(正租, ) 300여석(餘石)을 희사(喜捨)하여 군내(郡內) 빈민(貧民) 등을 구제(救濟)하였고 후() 수년(數年)에 당지(當地) 향교(鄕校) 퇴락(頹落)함을 감창(感愴, 슬퍼하며)하여 거액(巨額)의 사재(私財)로써 중수(重修)하였다.2)

   1920년 고향에 있는 시정(詩亭)인 읍원정(揖遠亭, 1855년 건립)을 중건하였다.3)

   1924년 갑자(甲子) 겸년(謙年, 흉년)에 역시 3,000여원(餘圓)으로써 부근(附近) 45개 면() 이재민(罹災民) ()을 구제(救濟)하는 동시에 그 이재민(罹災民)34년간(年間) 호세(戶稅)를 대납(代納)하였고 기() () 각지(各地) 조수해(早水害) 이재민(罹災民)에게 5600()의 구제금(救濟金)을 연출(捐岀)하였으며 1928년에 읍원정(挹遠亭) 중수비(重修費) 2,000여원과 유지(維持) 기본재산(基本財産)으로 답() 10() 두락(斗落)을 의연(義捐)하였고 성황당의 유지비(維持費) 50()을 갹출(醵出)하였다. () 정읍사회(井邑社會)에 있어서 자선가(慈善家)를 말하자면 씨()에게 선지(先指, 저명인사)를 굴()하겠다.4)

   1930년에는 동학농민운동 때 태인 수성군에 장살(杖殺; 죄인의 볼기를 큰 형장으로 치던 형벌)된 문선명(文鮮明)의 처 밀양박씨열녀비(密陽朴氏烈女碑)를 세웠다.5)

   19332월 중건(重建)시 출의인(出義人)은 김재일(金在一)이다.6)

   태흥리(泰興里)에 주거(住居)하는 당년(當年) 72()의 노년유지(老年有志)이다. 선천적(先天的) 후덕(厚德)한 성격(性格)의 소유자(所有者)로 자선(慈善) 및 공익사업(公益事業)에 대()하여는 사재(私財)를 불석(不惜, 아끼지 아니함 )하는 모범적(模範的)인 인물(人物)이다.3)

   광복 후 태인 중학교(현 태인 중학교·태인고등학교) 설립에 토지 36,000(119,008)을 희사한7) 토지를 근거로 1947925일 태인중학원의 설립 인가를 받았다.8)

   읍원정에 그의 공적비가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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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이버 지식백과] 김재일 [金在一] (두산백과)

2) 崔玄植, 新編 井州井邑 人物誌(정읍문화원, 1990. 12. 20), 391.

3) [네이버 지식백과] 김재일 [金在一] (두산백과)

4)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345346.

5) 崔玄植, 新編 井邑 人物誌(정읍문화원, 2007. 2. 25), 339.

6) 임남곤,井邑文化財誌(정읍문화원, 1999. 12. 30), 667.

7) 崔玄植, 新編 井州井邑 人物誌(정읍문화원, 1990. 12. 20), 391.

8)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崔玄植, 新編 井州井邑 人物誌(정읍문화원, 1990. 12. 20), 391.

 

 

   김진민(金瑱珉: 1912~1991)은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376번지에서 호남의 갑부(甲富) 김해 김씨(金海 金氏) 가산(迦山) 김수곤(金水坤)의 무남독녀(無男獨女)1912(壬辰年) 23일에 태어났다. 191223일에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의 거부(巨富)인 김해(金海) 김씨 가산(迦山) 김수곤(金水坤)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성당 김돈희 사사, 행서, 해서, 예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의 육조체를 수학한듯 황정견체와 친연성이 강하다.1) 호는 불하(不瑕), 불하자(不瑕子), 불하당(不瑕堂), 몽연(夢蓮), 몽연여사(夢蓮女史), 몽연산인(夢蓮山人)으로 한국 서예사(書藝史)에서 최초의 일제강점기시대 천재 소녀 여류서예가(女流 書藝家)이다.

   가산 김수곤은 아들이 없고 외동딸을 낳았기에 자녀교육에 남달라 7세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9세에 맹자를 익혔다. 특히 글씨에 소질이 있음을 감지하고 9세부터 부친의 권유로 한말 검사출신으로 서화협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를 초빙하여 학문과 서예를 사사받게 하였으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 등 당대의 많은 문인 묵객들과 교분이 있어 그들이 자주 찾아와 서화에 대한 담론을 하였으니 이런 분위기속에서 서예이론과 실기를 연마하였다. 김진민은 고법(古法)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적인 서풍(書風)이 나와야 한다는 김돈희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 법첩(法帖)과 안진경(顔眞卿), 황정견(黃庭堅) 등의 서첩(書帖)을 공부하였고 나아가 금석문(金石文)을 익힌 후 장천비(張遷碑)와 조전비(曹全碑) 등의 한예(漢隸)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11세부터 전남 영광의 불갑사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불갑사 금강문의 불갑사(佛甲寺), ()에 티가 없는 사람이 되라는 뜻, 왼쪽 하단부에는 네모진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11세 불하당(不瑕堂)', '김진민 인'이라는 2개의 관지가 있다.와 백양사의 우화루(雨花樓)등의 현판 글씨를 쓰면서 소녀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12(1924)에는 조부 김기섭의 묘비명을 썼고, 같은 해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당시(唐詩)를 행서(行書)로 출품하여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선전) 서예부(書藝部)에 사상 최연소, 최초의 여성으로 입선하면서 서예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이어서 제4(1925)에는 난정서(蘭亭序: 행서)를 출품하여 ‘4등상을 수상했다.

   제5(1926)에는 유란부(幽蘭賦: 행서)서보절록’(書譜節錄: 초서)을 출품 행서는 특선, 초서는 입선하였고, 6(1927)에는 죽리모옥’(竹籬茅屋: 초서)은 입선과 독서락’(讀書樂: 행서)으로 특선을 하였고, 7(1928)에는 군중서원’(郡中西園: 행서)취미산거’(翠微山居: 초서)3점을 출품하여 모두 무감사로 입선을 하였다.

   제8(1929)에는 누실명’(陋室銘: 행서)으로 특선을 하였고, 9(1930)에는 칠언대련’(七言對聯: 행서), 서회(書懷: 예서)서원역두’(西原驛頭: 초서)3점 출품하여 칠언대련은 특선 그 외는 입선하였다.

   이때부터 호를 예서작품에 불하자(不瑕子)와 몽연(夢蓮)을 사용하였고, 10(1931)에는 난정집자’(蘭亭集字: 행서)관하’(官河: 행서), ‘서한예’(西漢隸: 예서)를 출품 난정집자는 특선 그 외는 입선을 하였다.

   이때부터 몽연(夢蓮)으로 사용하였으며 선전은 10회를 끝으로 서예부는 폐지되고 대신 공예부가 신설되었으며 서예부에 속한 사군자부(四君子部)는 동양화부에 흡수되었다.

   서예부가 폐지되는 193110회 조선미술전람회까지 매년 연속 1점 이상 3점까지 총 16점의 작품을 출품하였고, 그 가운데 난정서(蘭亭序: 행서)를 출품하여 ‘4등상’ 1, 유란부(幽蘭賦): 행서(1926), ‘죽리모옥’(竹籬茅屋: 초서)독서락(讀書樂): 행서(1927), 누실명(陋室銘): 행서(1929), 칠언대련’(七言對聯: 행서) (1930), 난정집자(蘭亭集字): 행서(1931)6점이 특선을 차지하는 등 4등상 1, 특선 6, 입선 9점을 수상하여 서단에서는 그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면서 주로 사찰의 편액이나 비문 등을 많이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