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
泰仁流觴臺碑記 【趙持謙】
泰仁郡,卽新羅之泰山郡,文昌侯崔公舊所莅也。郡南七里許,巖石盤陀,巖下流水環廻。文昌每觴詠於斯,倣逸少故事,至今父老相傳焉。臺歲久荒廢,余友趙使君子直,視篆之暇,逍遙乎臺上,悠然有曠世之感。累石增築,立小碑以識之,屬余爲記。
頃年余爲吏楓岳下,地稱神仙窟宅,思一修飾,而未暇及。子直其多乎哉!余惟先生生星一周,涉海萬里。未弱冠,擢大唐巍科,踐霜臺,入金門,天下已爭知之。及其從事轅門,磨墨楯頭,使販鹽老賊魄褫膽落,眞所謂賢於百萬師矣。以其高才盛名,捲而東還,推出緖餘,亦足以維持一邦。顧乃沈淪銅墨若梅子眞,終焉浮遊方外,自託於羨門之屬,何也?
噫!公之生世不辰,入中華則亂離瘼矣,歸故國則危亡兆矣,道不可行,身且難容。以此飄然遐擧,蟬蛻棼濁,誦紅流一絶,未嘗不三復歎憐其志焉。想其婆娑徜徉於是地也,感慨繼之者,豈但俛仰間陳迹而已哉?公之淸風逸韻,溢於宇宙之間,而知公志者蓋亦尠矣。
夫地之重與輕顯與晦,未嘗不由於人。古人有言“蘭亭茂林,不遇逸少則不傳”。余亦云“是臺水石,得文昌而始彰”。而千有餘年,又得子直增修而表揭焉,玆豈非有待於其人歟?不知是後繼子直而修者又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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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유상대의 비기〔泰仁流觴臺碑記〕[조지겸(趙持謙)]
태인군(泰仁郡)은 바로 신라의 태산군(泰山郡)이다. 이곳은 문창후(文昌侯) 최공(崔公)이 옛날에 태수로 재직한 곳이다.
- [주-D001] 조지겸(趙持謙) :
- 1639~1685.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의 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 [주-D002] 일소(逸少)의 고사 :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 [주-D003] 풍악(楓岳) 아래 고을 :
- 강원도 고성(高城)을 가리킨다. 조지겸은 1681년(숙종7)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풍악은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 [주-D004]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 :
- 12세 때를 말한다. 별은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으로, 옛사람들은 세성이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고 여겼다.
- [주-D005]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 :
- 황소(黃巢)를 가리킨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금을 파는 일에 종사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舊唐書 卷200下 黃巢列傳》
- [주-D006] 매자진(梅子眞)처럼 …… 하면 :
- 고운이 외방에 나가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자진은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자이고, 동묵(銅墨)은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매복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 [주-D007] 연문(羨門) :
- 고대 선인이었던 연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 가를 유람하면서 연문자고 등의 선인을 찾았다고 한다.
- [주-D008]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 :
- 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을 읊은 절구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지척 간의 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권1에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 [주-D009] 난정(蘭亭)의 …… 것이다 :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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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운집(孤雲集)』 > 孤雲先生事蹟 事蹟 泰仁流觴臺碑記, 韓國文集叢刊 1輯
고운 최치원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 (海雲)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열두 살 때 당나라에 건너가 열여덟 살 때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栗水縣尉)를 지냈고, 최치원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21세인 다음 해에 현위직을 내어놓고, 박사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고자 산에 들어가 詩作과 학업에 몰두하였으나 좌절을 맛봤다. 그러나 재입신을 위고 고병(高騈)의 추천을 받아 관역순관(館驛巡官) 되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24세 되던(880년) 해로 보인다.
879년(희종 6)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 이 스물 셋이었다.
881년 고병(高騈)이 제도행영(諸道行營) 병마도통(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0의 난(亂)(875∼884)을 토벌하게 되자, 최치원을 종사(從事)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이때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보고 황소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 공로로 25세에 승무낭 시어사 내공봉(承務郞 侍御使 內供奉)에 올랐다.3)
고병의 문하에서 그는 비교적 한가하고 유복한 생활을 활용하여 문장을 연마하면서, 일류명사들과 광범위한 교류를 하였다. 특히 동년에 급제한 고운(顧雲)과는 서로 시(詩)를 화답하면서 교분을 나누었는데,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할 때 고운(顧雲)은 송별시(送別詩)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그와의 교류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심화되었던 道敎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최치원은 또한 24세나 연상이었고 예리한 기지와 풍자를 지녔던 나은(羅隱)과도 교류하였고, 그에게서 훗날 신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해 묵과할 수 없었던 강한 비판의식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방림십철(芳林十哲)의 일인으로 유명한 시인인 장교(張喬)와의 교분은 훗날 최치원이 벼슬에 초연하여 자연에 은거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최치원은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일급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이들의 기질과 의식도 내적으로 함께 포용하였다. 귀국 후 최치원의 활동 또한 그러한 문인들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아 그들의 영향력이 중요한 일인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28세 되던 해(884)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 희종에게 귀국을 청하였고, 당 휘종(僖宗)은 그에게 詔書를 주어 예빙사절로 신라에 보냈다. 최치원은 신라 사신으로 회남에 왔던 김인규(金仁圭)와 종형(從弟) 최처원(崔棲遠)과 함께 출발하였으나 풍랑이 심한 탓에 그 해 겨울을 곡포(曲浦)에서 지냈고, 그 이듬해인 신라 헌강왕11년(885)에 귀국하였다. 그의 귀국 동기는 오랫동안 부모 슬하를 떠나 있어 귀국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수년간 전란의 영향으로 당 제국은 혼란에 빠져있었지만, 고병은 누차에 걸쳐 조정의 출사명령에 불응하였다. 고병은 만년에는 신선술(神仙術)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였고, 최치원은 그의 밑에서 더 이상 희망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비명서(山碑銘序)에서도 최치원의 당나라 생활 시절에 내부의 환관의 발호와 번진(藩鎭)의 난으로 망국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민심의 피폐라는 당의 국내적 상황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귀국을 결심하는데 한 동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밖에도 외국인으로서 생활하는 고독이 절실했고 이것이 귀국의 결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을비 내리는 타국의 여관에서 스스로를 가엾게 여겨 동정하는 쓸쓸함을 선정(禪定)에 든 중으로 표현하거나, 타국을 떠돌며 고생하면서도 귀향하지 못하는 충을 읊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때마침 영접하러 온 최서원을 통해 경문왕 이후 국내의 안정된 상황을 듣고, 금의환향하여 크게 쓰임 받아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펼쳐보려는 기대를 가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88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 등 벼슬을 지냈고, 외직으로 태산·천령·부성 등의 태수를 역임하였다.1)
890년(진성여왕 4)에 고운(孤雲)은 서른네 살의 나이로 태산군(太山郡) 태수로 부임하였다. 태산군은 태인군(泰仁郡)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태인면 일대다. 나라가 어지럽고 국운이 날로 쇠미(衰微)하자, 고운은 지방관을 자청하여 마침내 첫 번째로 나간 외직(外職)이었다. 그는 이 해에 또한 낭혜화상비문(朗慧和尙碑文)을 짓기도 했다. 고운은 공무(公務) 여가(餘暇)에 이곳 동진강 맑은 냇가에서 술잔을 띄우고 풍류를 즐기며 세상일을 잊었는데, 그 유적이 뒷날 유상대(流觴臺)라고 불렀다. 물론 유상대는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소흥(紹興)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에서 벗들과 함께 술잔을 띄우며 놀았다는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을 사람들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는데 이것이 선현사(先賢祠)다.
1483년(성종 14)에 선현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 바로 태산사(泰山祠)이며, 이는 곧 무성서원의 전신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옛터가 정읍 칠보면 시산리 동진강변 최치원에 한 생생한 역사적 기록과 함께 남아있다.
“군에서 남쪽 7리쯤 가면 반석 같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밑에 흐르는 물이 굽이쳐 돌고 있다. 이곳이 문창이 굴곡진 작은 물길을 만들어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그 잔이 수로를 돌아 앞에 오면 시를 읊으며 ‘왕일소(王逸少)의 고사(故事)’를 모방하던 곳으로 지금까지 부노(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고사가 되었다." 그 옆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정자를 세워 감운정(感雲亭)이라 하고 유상대비 (流觴臺碑,1970)가 건립되어 있다.
감운정은 칠보 행단에서 흐르는 동진강 물줄기와 남쪽 석탄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만나는 자리에 지었다. 고운이 태산군수로 와서 선정을 베풀고 유상대를 만든 뒤 검단선사(黔丹禪師)와 함께 시를 읊으며 소요했던 곳이다. 동진시 왕희자가 난정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만들어 시회를 즐겼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문인들이 소영했던 자리이다.
고운이 떠난 뒤 오랜 세월동안 빈 터만 남아 구전되고 있었다. 석지 채용신이 1919년에 그린 칠광도에는 무성서원과 송정 그리고 후송정이 나타 나 있으며, 특히 유상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유상대는 높은 석축을 쌓았고 주변 에는 동진강과 작은 하천이 흘러 지세가 물위에 부엽초처럼 떠있는 형상 같았다. 주변에 강이 있고, 느티나무와 버드나무 등 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2)
이곳을 고사대(故事台)라 불러오다가 1682년(肅宗 8年) 현감 조상우(縣監 趙相愚 號 東崗)가 돌로 쌓고 유상대비(碑)를 세우고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兼)이 비문을 지었다. 그런데 1백년이 지나는 동안 유상대비는 홍수에 유실되고 물의 흐름도 바뀌어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1774년(正祖 18年) 현감 조항진(縣監 趙恒鎭)이 부임해 왔으니 공교롭게도 동강(東崗) 조상우(趙相愚)의 후손이었다.
일찍이 태인 고을에서는 현감 조상우가 치적(治績)을 남기고 1년반 만에 내직(內職)으로 승진되어가니 그 치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현감 조항진은 선대의 불망비에 감격했을 뿐 아니라 선인(先人)들의 유업인 유상대가 처참히 헐어진 것을 보고 지방 유림과 상의하여 이를 복구하였다.
그리고 변형된 하류의 원상(原狀)을 복구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조항진 현감은 1797년(正祖 21年)에 태인 향교 만화루(萬化樓)를 세운 치적도 있다.
784년(正祖 8年) 2월 10일 고운선생의 영정(影幀)을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로부터 봉안해 올 때 이곳 유상대에서 머물러간 적도 있었다.
이때 세웠든 유상대비는 유실되어 폐허로 내려오다가 1919년 유림(儒林)들이 그 유지(遺址)에 고운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감운정(感雲亭)을 세웠다.
현재의 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는 1970년 추당 김인기(秋堂 金鱗基) 등 지방유림들이 세운 것이다.
이 외에 태인 일원에 무성서원(武城書院), 피향정, 하연지와 더불어 고운 선생의 유서 깊은 유적지이다.
또한 김제 벽성서원, 군산시 옥산원, 문창서원, 염의서원, 자천대, 현충단, 익산 단동사 등지에서 최치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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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재영, “전국의 최치원 관련 유적지 답사를 통한 관광자원화 방안”, 『경주연구 』제24집 2호(경주지역발전협의회 부설 경주발전연구원 , 2015년 12월), 125.
2) 앞의 책, 146~147.
3) 최영성은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魚袋制度를 받아들여 성립시킨 시기를 대개 경문왕 13년(873) 이후 헌강왕 10년(884) 이전으로 보았다(최영성, 1998 大朗慧和尙白月寶光의 塔碑銘譯註崔致遠全集, 100쪽 주8).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할 당시 緋銀魚袋를 착용한 점으로 보아 이 紫金魚袋를 신라 조정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았다. 추만호도 6두품인 최치원이 檢校右衛將軍이라는 진골만이 향유할 수 있는 직위를 지녔다는 것은 이 시기에 골품체제가 해체되고 관료제로 이행해 나가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라 보았다(추만호, 1999 新羅末思想界의 動向新羅末高麗初의 政治社會變動, 신서원). 또한 이것을 보강하는 자료가 최치원이 받은 자금어대로, 이를 신라조정에서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재운은 최치원이 討黃巢檄文을 쓴 공로로 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것으로 보았다(이재운, 1999 앞의 책).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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