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현감 신잠 선정비(泰仁 縣監 申潛 善政碑)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05호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92번지
1549년(명종 4)에 건립된 신잠의 비석이다.
비는 높은 자연석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세웠는데, 비몸돌의 윗변 양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크기는 가로 81㎝, 세로 189㎝, 두께 19㎝이며, 비의 좌대(座臺)는 가로 150㎝, 세로 92㎝, 높이 90㎝로 되어 있다.
영천심잠이 1543년(중종 38)에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동, 서, 남, 북의 사학당을 세우는 등 선정을 베풀고 1549년(명종 4) 간성군수로 이임하자 그 유덕을 추모하여 진사 김완(관 도강), 백삼귀(관 수원) 등 유림들의 발의로, 비문(碑文)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5)이 해서로 썼으며 비액은 전서로 쓰지 않고 해서로 쓴 것이 특징이다.
지은 글이 오랜 세월의 풍우(風雨)로 닳아 없어지고 석질(石質)의 변화로 문자(文字)를 알아보기가 어려워 졌다.
좌찬성 소세양 씀(左贊成蘇世讓記)
내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찾아오는 이도 드물었다.
하루는 대 밭 서재에 앉아 있으니 큰 옷에 넓은 띠를 한 두 유생(선비)이 찾아 왔는데 생김새가 헌칠했다.
명함을 보니 김상상(金上庠, 進士) 원(元)과 백상상(白上庠, 進士) 삼구(三龜)이었다. 두 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태인에서 살아 왔습니다.
우리 고을 현감 신 잠(申 潛)의 정사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져 합니다.
우리 고을은 교통이 번화하나 인구는 적고 일이 많으며 역사(부역)는 번거하고 부세(세금)는 많으니 느리게 다스리면 주전(음식점과 여관)이 박하고 급하게 다스리면 백성들의 원성이 일어나 모두 근심거리여서 적당히 다스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갑진년(甲辰年, 1544) 신 후(申 潛)가 현감으로 와서 부임하는 날 오랫동안 백성의 폐해를 물어서 개혁하고 민심을 무마하며 시비를 밝혀 법을 엄하게 다스리며 백성들을 친절하게 대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칭송하는 노래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신 후(太守, 申 潛)는 말하기를 아직 미흡하다.
옛날 자유씨(子游氏 : 子游氏-공자의 제자. 특히 禮에 밝았음. 魯나라의 武城郡守를 지냄.)는 무성(武城) 읍재로 있을 때 예악(禮樂)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니 공자(孔子)도 기뻐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후세 덕화의 정치가 통하지 않고 형벌로만 속박하여 다스림으로 순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내 부질없이 치도에만 얽매이겠는가? 하고 이에 학문(學問)을 일으키고 풍속을 변화하려는 뜻으로 방리(坊里)에 각각 마을 서당을 설치하고 서책을 인쇄하여 정서하게 하였으며 관곡을 풍부히 하고 마을의 준수한 자제들을 모아 스승을 데여다가 가르치고 부모를 잃은 고아와 과부들을 구조하여 절개와 예의를 숭상하고 염치심을 기르고 몸소 순수하고 돈독하게 행하여 교화의 길을 밝히니 호사하고 간활한 향리들도 움츠리고 마음을 고치지 않는 이가 없이 즐거이 선을 하게 되어 1년이 못되어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습니다.
일찍이 퇴식지당(退食之堂: 자기 집)에 삼사(三事)를 편(扁)하였으니 대게 고인들의 관로(官路)의 법을 취한 것으로 오직 청(淸)과 신(愼)과 근(勤)이 있을 뿐이다 하고 세 자의 뜻을 해석하여 크게 써서 벽에 붙이고 스스로 몸을 닦고 또한 뒤에 오는 군수(郡守)들에 더욱 힘쓰게 하였습니다.
당의 동편에 초가 수 칸을 지어놓고 틈이 있는 날에는 거문고를 올리고 즐기며 벼슬을 잊고 소연하였습니다.
옛날 신라(新羅) 말(末) 최문창(崔文昌) 고운(孤雲)이 일찍이 우리 고을의 군수로 있을때의 치적의 여운이 지금까지 사람의 입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 군수의 문장과 도량을 고운(孤雲)과 더불어 천년 동안 아울러 논의 되지만 사람의 애모함과 우러러 하는 정도가 최고운도 어쩌면 신후(申侯)를 앞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신후의 이름은 잠(潛) 자는 원량(元亮)이요 관은 고령(高靈)이니 훈상 숙주(叔舟)의 증손으로 삼괴(三槐) 선생 종호(從濩)의 아들이다.
일찍이 정훈을 받아 가업을 이러 문장, 서․화에 능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 일컬어 원근에서 구하려(작품을) 찾아오는 사람이 집안에 가득하다.
매양 공무에도 조금도 지체함이 없었으니 마치 포정(백정)이 소를 다루는데 칼 놀림처럼 척척 여유가 있었도다.
이제 임기가 되어 돌아감에 행랑(보따리, 이삿짐)이 쓸쓸하여 휴대물과 도서가 몇 짐에 불과하였도다.
고을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수레를 붙잡고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이미 만류할 수가 없게 되어 돌을 다듬어 그 치적을 새겨 큰 길 거리에 세워 길이 전하고저 하오니 선생의 칭찬하는 글을 얻고자 한다며 글을 청하다.
내 듣고 이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탄식하다. 원량(元亮)의 정사함이 이른바 덕으로써 인도하고 애로써 다스림이다.
한(漢)나라의 공경(公卿: 三公九卿, 고위관직)이 양이천석(良二千石: 太守 良二千石-漢나라때 郡의 太守(郡守)의 봉급 年 二千石이었음.)에서 많이 나왔는데 신후(申侯)도 그런 사람인가 다만 한스러운 것은 늙고 못난이의 서투른 문장으로 어찌 제군의 소망을 채울 수 있으리오.
그러나 원량은 계유진사(癸酉進士)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내 문생의 벗이다.
시산(詩山: 泰仁)은 내 집에서 먼 거리에 있으나 신후의 백성에 대한 특이한 정사를 들은 지가 오래이다.
이러한데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있다면 도인의 선을 폐함이 아니겠는가?
항차 사관(史官)이 붓을 잡아 역사에 쓰는 경우도 하나 둘이 아니니 어찌 나의 글을 기다리오만 우선 두 사람의 서로 하는 말을 써서 그 부모들에게 주고 또한 뒤에 오는 군수들에 규범이 되었으면 한다.
가정기원 二十八 년 창룡기사중춘개망승전대부전의
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이양
진산 소 세 양 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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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新撰 井邑文獻錄』 (井邑文化院, 1997. 12. 25.), 8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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