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역사(삶의 내력)/제7장 근대와 태인 3

제 1절 근대사회와 태인, 동학혁명과 태인

제 7장 근대(近代)와 태인 제 1절 근대사회와 태인 1.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改革政治) 대원군은 영조(英祖)의 5대손으로 20살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863년(철종 14)에 후사(後嗣) 없이 철종이 죽자 조대비(趙大妃, 익종비(翼宗妃))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高宗))이 즉위하게 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해진 그는 어린 고종(高宗)의 섭정(攝政)까지 맡게 된다. 이로부터 대원군은 10년간의 집정시대(執政時代)를 맞아 안동 김씨의 세도를 제거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사색(四色, 남(南)·북(北)·노(老)·소(少))을 신분·계급·출..

제 2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독립투쟁

제 2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독립투쟁 1. 일제강점기의 무단정치 일제강점기의 35년은 한국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正統性)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다는 점에 치욕적인 특성이 있다. 일본은 1860년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하여 급격히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래 조선 정부의 대일외교정책에 순응하여 수동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던 대(對)조선의 외교방향을 능동화하여,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권피탈(國權被奪)에 이르기까지 긴 침략의 장정(長征)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일본은 대원군의 하야로 개국으로 급전(急轉)한 조선 정계의 기류를 타고, 조선의 문호 개방에 첫 수호국(修好國)으로서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쟁..

제 3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교육과 사회․경제 생활

제 3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교육과 사회․경제 생활 일제강점기에 민족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요소 중의 하나가 교육이었다. 태인 지역의 민족․사회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이 재학생들이거나 졸업하여 태인 3․1운동에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1907년 태인군 군내면(郡內面) 칠리(七里)의 향교 부속 건물에 사립(私立) 인명학교(仁明學校)와 같은 해 송영권(宋泳權)이 사립(私立)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1)되었다. 인명학교(仁明學校)는 1911년 6월 30일 태인공립보통학교(泰仁公立普通學校)로 인가(認可)되었고 같은 해 9월 15일에 수업을 시작하여 25일에 개교식을 행하였으며, 12월 1일에는 태성리(泰成里)에 있는 태인동헌(泰仁東軒)으로 이전하였고, 제1회 졸업생 9명을 배출하였다. 입학은 8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