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기타 비지정 문화재 11

사우(祠宇) - 태흥사(泰興祠)

태흥사(泰興祠)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591번지 1926년에 발간된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에 실린 김유신의 초상화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영정을 봉안하고 봄, 가을에 향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태인면에 거주하는 김해김씨 문중에서 창건한 가묘(家廟)로 1930년 음력 3월 3일 건립하였고, 1954년 신라태대각간 흥무왕 김유신(新羅太大角干 興武王 金庾信)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춘추(春秋)로 향사(享祠)한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김유신에게 향사를 올리는 사당은 태흥사 외에도 경주 서악서원, 진천 길상사, 강릉 화부사, 광주 장렬사, 고창 백양사, 무안 연계사 등 전국에 걸쳐 약 20곳이 있다.1) 태흥사 중수기공비(泰興祠 重修紀功碑..

도챙이고개(돌챙이고개)

도챙이고개(도창현) 위치  현재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태인군 군내면 지역) 지명의 유래와 역사 태인면은 본래 태인군 군내면, 인곡면, 흥천면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 3면을 병합하여 태인면이라 하고, 정읍군에 편입하였다. 그 뒤 1935년 4월 지방 행정구역 재조정 때에, 이웃 보림면을 없애고, 4개리인 태서, 매계, 태남, 오류가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태흥리는 본래 태인군 군내면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홍문리, 쌍갈리, 사리, 오리, 칠리, 거산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태인이 흥왕하라는 뜻으로 태흥리라 하고 정읍군 태인면에 편입하였다. 도창현은 도챙이 고개, 돌챙이 고개라고도 하며 삼리 마을에서 동북쪽에서 독양 마을로 넘어가는 항가산 중턱의 고..

하마거리(일명 하마청거리)

하마거리[下馬街] 현재 위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향교마을(전라북도 태인군 군내면 지역) 지명의 유래와 역사 태인향교가 있는 태성리는 본래 태인군 군내면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사창리, 사리, 육리, 칠리, 십리, 십일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태인향교 대성전이 있기 때문에 태성리라 하고 정읍군 태인면에 편입하였다. 향교마을의 이름도 향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인향교를 마주보면 왼편에 태인사거리가 있는데 예전에는 하마가(하마거리)라고 했다. 사거리는 예전에는 삼거리였는데 향교 앞으로 새 길을 만들어 사거리가 되었다. 태인사거리에서 1번 국도를 타고 태인면사무소 방향으로 전북동화중학교를 지나 200m 정도 가다보면 왼편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예전에 모든 사람들이 ..

각종 정자(亭子)와 루(樓)

진남루(鎭南樓) 객관(客舘)의 문루이다. 현감 유근이 다시 고치고 지은 「중수기(重修記)」가 있다.1) 주: 유근 - 1713년(肅宗 39, 癸巳) 9월 – 1715년(肅宗 41, 乙未) 12월 貶下(선생안 참조) 1713년(肅宗 42) 탁지부(度支部: 현 財務部)의 보조를 받아 현재의 피향정를 중건하였음. 태인현(泰仁縣) 원태인현(元泰仁縣) 객사(客舍)의 문루(門樓)이었으니 현감(縣監) 유근(柳近)이 중건(重建)하였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진남루는 태인현지(泰仁縣誌, 1786년 간(刊))에 기록되어 있는 누각(樓閣)이다.2) 관덕정(觀德亭) 객관의 서쪽에 있다. 현감 이익저(李益著)가 세우고, 현감 조정(趙晸)이 다시 고쳤다.3) 주: 이익저(李益著) - 1685년(肅宗 11, 乙丑) 12월 – ..

근대종교 문화재 - 태인 미륵불교(彌勒佛敎 )

태인 미륵불교(彌勒佛敎 ) 미륵불교는 증산교 분파의 하나이다. 정인표(鄭寅杓)는 전라북도 완주 출신으로 미륵불이 출세한다는 믿음과 함께 도통입명(道通立名)에 뜻을 두게 되어 틈틈이 수양생활을 계속하던 어느 날 태양이 입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얼마 뒤 다시 선관(仙官)이 나타나 미륵산(완주 母岳山)으로 가라는 계시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의 미륵산 산제당에서 오주문(五呪文)으로 치성을 드린 결과, 사흘 뒤인 1934년 1월 천신으로부터 도통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인표는 미륵불의 성령이 자기에게 접응되었으므로 자신은 곧 인불(人佛)이라 자처하면서 그 길로 하산하여 과거 김형렬(金亨烈)이 이끌었던 신도들을 규합하여 미륵불교의 재기를 꾀하며 포교활동을 하였다. 1938년 태..

근대종교 문화재 - 태인 무극대도 본부(無極大道 本部) 터

태인 무극대도(無極大道) 본부(本部) 터 소재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인로 108 무극도본사(無極道本司) 태인면 태흥리 1번 국도변(1等道路邊)에 2, 3층 규모의 주란화각(朱欄畵閣)이 반공(半空)에 흘립(屹立)하였으니 이것이 무량도본사(無極道本司)이다. 그 웅장(雄壯)함은 보천교본사(普天敎本司)와 조금 차이는 있으나 구조(構造)의 정교(精巧)함은 그에 별(別)로 손색(遜色)이 없다하겠다. 그런데 그 건축은 1924년 3월에 시공(始工)하여 1926년 4월 까지 만 2년에 준공(竣工)하였으니 총 공비(工費)는 약 칠만원(七萬圓)에 달하였다 한다. 건물의 명칭은 중앙 3층은 도율궁(兜率宮), 2층은 영대(靈臺)라 하고 부속건물 10동(棟)이 있으니 그 장치(裝置)의 찬란(燦爛)함이야말로 참으로 장관(壯觀..

근대종교 문화재 - 매계교회

매계교회(梅溪敎會) 소재지: 정읍시 태인면 북태길 204 호남지역 개신교는 맨 처음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전주에 선교부가 개설됨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전주선교부를 중심으로 전북지역 각처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복음은 봉동, 고산, 진안, 무주 등 동북부 지역과 김제, 부안 등 서부지역 그리고 남서부 지역인 임실, 남원 및 정읍, 고창 등에 이르기 까지 빠르게 전파 되어갔다. 정읍지역의 교회 태동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우선 전주선교부의 정식 개설 이전 레이놀즈 선교사의 답사 여행일지(일지 사본 참조)에 태인, 정읍, 고창 등이 한글로 기록된 것이 보인다. 물론 이때 복음 전도가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냥 지나쳤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답사여행의 경험이 토대가 되어 후일 선교지역이 되었음은 ..

기념탑 - 태인 3·1 운동 기념탑

태인 3·1 운동 기념탑 소재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 33-6 1. 태인 3․1운동 전개과정1)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각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하였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2·8 독립 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이 영향으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 요구를 위한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33인은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내에서는 3월..

역원(驛院) - 거산역(居山驛) 터

거산역(居山驛) 터 소재지: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원거산 조선의 교통과 통신[역체(驛遞)] - 역참(驛站) 국내 교역이 대부분 장시나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은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육상교통으로 사람은 보행, 기마 이외에는 교자(轎子)를 주로 사용하였고 짐(物貨)을 수송하는 데에는 인력, 소나 말 이외는 관에서는 대차(大車), 편차(便車), 곡차(曲車), 강주(杠輈)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보통 가정에서는 전거(田車) 조차도 보급되지 못하였었다. 물화의 수송에는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다. 수로에서는 판선(板船)이 많이 이용되었다. 조..

역원(驛院) - 원터(院-)

원(院) 터 조선의 교통과 통신[역체(驛遞)] - 역참(驛站) 국내 교역이 대부분 장시나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은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육상교통으로 사람은 보행, 기마 이외에는 교자(轎子)를 주로 사용하였고 짐(物貨)을 수송하는 데에는 인력, 소나 말 이외는 관에서는 대차(大車), 편차(便車), 곡차(曲車), 강주(杠輈)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보통 가정에서는 전거(田車) 조차도 보급되지 못하였었다. 물화의 수송에는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다. 수로에서는 판선(板船)이 많이 이용되었다. 조선 시대에 실시되었던 통신 제도인 파발제(擺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