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기타 비지정 문화재

기념탑 - 태인 3·1 운동 기념탑

증보 태인지 2018. 3. 21. 11:34

태인 3·1 운동 기념탑

 

 

 

   소재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 33-6

 

 

1. 태인 31운동 전개과정1)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각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하였다. 19192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2·8 독립 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이 영향으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 요구를 위한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3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33인은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내에서는 35일을 기하여 군산, 이리, 옥구, 전주, 태인, 오수, 남원, 만경 등지에서 불꽃처럼 치열한 항일 구국운동이 점화되었다.2)

   태인 지역의 봉기는 316일 음력 215일이었으니 태인 장날이었다. 중앙과 어떤 관계로 이루어졌는지 확실한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1919515일 광주 지방법원 정읍지청 판결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태인에서는 191933일에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갔던 송수연(宋洙淵), 김현곤(金玄坤), 박지선(朴址宣) 등이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을 만나 31운동의 계획을 가지고 와서 송한용(宋漢鏞), 송진상(宋鎭相), 오석흥(吳錫興), 송영근(宋榮根), 김진호(金鎭浩), 유치도(柳致道), 김순곤(金淳坤), 송덕봉(宋德奉), 김진근(金鎭根), 백복산(白福山), 김용안(金龍安), 최민식(崔敏植), 김부곤(金富坤) 등과 거사를 논의했다.3)

   송수연이 19193월 초순경 태인 읍내의 공고판에 독립선언서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떼어내어 입수하여 3522시경 야밤을 틈타서 세 사람이 태흥리 오리부락, 고목(속칭 韓亭子) 밑에서 밀회하여 316(태인 장날)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였다.

 

 

2절 일제강점기 태인 지역의 독립투쟁

 

   7일부터는 읍원정(挹遠亭)에 근거를 두고 진행 준비를 모의하였는데 이때부터 오성학교 학생인 송문상(宋文相)4), 김달곤(金達坤) 등이 그들과 합류했고, 그 준비로서 시정(詩亭)에서 태극기 약 300장를 만들었으며, 이어서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군중에게 배부하고자 그 인쇄를 김현곤에게 부탁하였는데, 김현곤은 12, 13일경 밤 신기선(辛基先)과 함께 관할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그가 근무하는 태인면사무소에서 그곳의 등사판을 사용하여 손병희 이하 33명의 성명이 열기(列記)된 조선독립에 관한 선언서 약 300매를 인쇄하였다.

   송수연은 유치도에게 오석흥의 집의 객문(客問)에는 많은 사람이 오므로 그 집에 위 선언서 20매를 가지고 가 달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316일 오전 11시경 박지선, 송한용, 송진상 등 청년들은 몇 명씩 짝을 지어 태인면사무소 앞의 우시장(牛市場) 부근에서 종이로 만든 태극기 60장 정도와 독립선언서를 시장에 모인 장꾼들에게 나누어주고, 5, 6명의 청년들은 보통학교 생도, 졸업생, 다른 청년들 약 200여명이 큰 소리로 선창(先唱)하고 군중이 이를 따라하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송연수의 선봉으로 의혈 청년들은 조국광복을 부르짖는 가두연설을 하고 대오를 지어 시위행진을 하니 장날의 장꾼들이 이에 합세하여 순식간에 만세 시위군중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예기치 않았던 군중의 만세 시위에 겁을 먹은 일본 헌병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온 시가와 노점 등이 모두 문을 닫은 채 철시(撤市)상태가 되기도 하였다.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다가 헌병대와 주재소 등 관공서로 몰려들자 이를 제지하려 주재소 헌병들과 그 보조원들이 발동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고, 또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시위 군중들을 구타하기도 했는데, 이때 박지선이 타박상을 입고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성난 군중들은 조선인 헌병보조원들을 향하여,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냐?”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왜놈의 개냐?”

하고 그들을 욕했다. 이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어떤 보조원은 그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이 운동에서 사법경찰관의 헌병상등병 길전홍태랑(吉田鴻太郞)에 의한 체포고발조서에 따르면

 

태인 시장 단속 중 오후 1시가 지날 무렵 태인면사무소 앞의 우()시장 부근에서 다수의 사람의 큰 소리가 발생하고 군중이 이를 따라하는 것을 듣고 그 현장으로 달려갔더니, 150명의 사람이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휴대하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기에, 그 주동자라 생각되는 송수연 외 3(김현곤, 김달곤, 송문상)을 체포하고, 또 소지하고 있던 태극기를 압수하였다.”

라고 공술하고 있다.

 

   저들의 이러한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다시 성황산(城隍山)과 항가산(恒伽山)으로 모여서 시위를 벌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저들이 추격해 오면 항가산에서 성황산으로, 또는 성황산에서 항가산으로 옮겨 다니면서 밤이 깊도록 계속했다. 옹동면(瓮東面) 매정리(梅井里) 권사옥(權士玉)은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김승권(金勝權)으로부터 받은 태극기로 옹동면 산성리(山城里) 뒷산(속칭 바르매)에서 마을 사람들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해가 저물어 가면서 밤이 되자 태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산마루에 횃불이 오르면서 마을마다 수십 명씩 모여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지고 있었다.

   밤을 이용한 산상(山上)의 봉화(烽火)독립만세의 절규는 10여 일간 이웃마을로 이어져 이 고장 곳곳에서 계속 확산되었다. 321일 새벽 4시경에는 신태인(新泰仁) 방면 산에서 봉화가 오르자 이에 따라 사방(四方)에서 산 위에 불을 놓고 서로 신호를 하였다. 오후 5시경에는 정읍(井邑) 뒷산에서 봉화가 올랐는데 이날 오후 1시경 태인장에서 또 만세 함성이 올랐던 것이다. 이때 태인 시장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삽시간에 정읍군내 각 고을로 확산되었다. 323일 정읍 읍내 거사는 미연에 제지되었으나 42일 덕천면 송기룡(宋基龍), 박재구(朴在求)를 비롯한 정읍 읍내의 군중들이 나서게 되었다. 5월까지 정읍군내에서 일어난 봉기는 31회에 걸쳐 18,000명이 참여하여 1명 사망, 20명 부상, 30명이 피검되었다. 그 만세의 물결이 그 후 십여 일을 두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에서 태인의 항쟁이 얼마나 집요하고 용감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태인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자 일본군경은 일본인 거류민까지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으며 80여 명의 동포들을 잡아다가 정읍 헌병 분대로 압송했다. 그중에는 태인 보통학교 훈도(訓導, 敎師) 김승호(金昇鎬), 곽장열(郭獎烈)과 옹동면의 면서기(面書記) 송병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무렵 태인 우편국(郵便局)에서는 칠보면(七寶面) 유생(儒生) 이희섭(李喜燮)이 창덕궁(昌德宮) 황제(皇帝)께 보낸 서신 한 통이 발견되어 한때 주목을 끌었으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각국의 승인(31 독립선언)이 만약 형편 좋게 안 되는 때에는, 비록 약력(弱力)이지만 군병(軍兵)을 일으켜 강하게 경성(京城)을 쳐서 금번 거사에 발각되어 체포 인치(引致)중인 인명을 구출하고, 이들을 지나출병(支那出兵)에 가담하게 하며 또 조선 20만 인을 군사로 일으켜 일본을 구축하고, 독립을 성공해서 왕실(王室)을 복벽(復壁)하며 또 옛날 정치로 회복케 하려 하오니, 후일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잊지 마시고 남방대원수(南方大元帥)에 하명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일본의 장병을 두려워하지 마시며, 정신을 송죽(松竹)과 같이 변치 마시고, 민심의 원한을 씻어주려 하신다면, 유명한 참모와 유지(有智)의 장군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것이오니 부디 잊지 마시고 명심하여 주심을 천만 복망하나이다.”5)

 

   태인 일대에서 일본에 의해 검속되어 대부분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 송치되었다. 헌병대를 거쳐 정읍 검사국으로 송치된 사람은 송연수 등 25명이었는데, 515일 정읍재판소 1심 판결에서 징역형과 태형, 구류 등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송한용(宋漢鏞) 정읍영광 등지에서 군자금 7,000()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락원인 국창현(菊昌鉉)을 통하여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다.6)

   만세 시위의 주도 인물은 연령상 19세에서 36세로 2, 30대가 주류를 이루며, 그것도 30대는 구속된 인사 25명 가운데 3명에 불과하였다. 계층별로 볼 때 소위 지식인으로 불리는 보통학교 교사, 학생 혹은 졸업생, 면서기와 같은 하급관리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하는 민중들이 다수였다. 특히, 주도 인물들이 다소나마 신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는 점과 31운동 당시 면사무소가 시위대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는데, 태인 31운동에서는 면서기가 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태인면 성황산에 있는 태인 31운동기념탑은 태인 성황산 남쪽 고지에 191931운동 때 태인지방의 봉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3.1운동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주민들의 성금 출연과 군비 보조로 188431일 현 위치에 기념탑을 건립하고 매년 31일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나, 기념탑의 붕괴위험이 있어 20031210일 국비 3천만 원과 시비 35백만 원 포함 65백만 원의 예산으로 기념탑 복원과 함께 25분의 위패 봉안소를 건립하여 매년 31절 기념행사 및 참배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또한 2005년도에는 익산보훈지청으로부터 국비 3천만 원을 지원받아, 태흥리 오리마을에 만세비를 설치하고 3.1운동 밀회장소를 정비하였다.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獨立請願)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노동자ㆍ농민ㆍ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民衆運動)으로 발전되었으며, 3.1운동은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독립의식을 환기시켰으며 민족의 잠재적인 역량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큰 것이고 3.1운동의 참여를 통해 형성된 민중의 자주의식은 이후 태인지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이 지속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7-7, 8>, <그림 7-1, 2, 3>

 

2. 옛 태인 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7)

 

현재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05 일대

당시주소: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읍 태성리

종 류: 시장

 위치고증: 신기선 등 판결문에 관련 내용과 시위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옛 장터의 위치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송한용의 딸 송영순을 비롯한 여러 주민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상태: 멸실(滅失), 당시에는 피향정 주변에 큰 규모의 장이 섰으나 해방 후 이전하였 . 도로가 개설되어 옛 장

              터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 태성리 성황산 자락31운동 기념탑(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

              호 51-1-9)이 있다.

 

 

 

<그림 7-1> 옛 태인 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표 7-7> 전북지역 3·1운동의 일지 중에서8)

 시     기

지     역 

인     원 

주 도  계 층 

운 동  상 황 

 3월  16일

정읍군  태인면 

3,000 

유생, 천도교, 학생 

 만세시위

 3월  21일

정읍군  태인면  

 수천

주민 

 만세시위

 

 

 <표 7-8> 태인 3·1운동 의거 인물

 성     명

 

 주     소

판결 결과 

 훈     격

 수훈연도

송수연(宋洙淵)

1895. 12. 51951

본적-증산리, 주소-옹동면 상산리

 징역 2년

 

 

김현곤(金玹坤)

1900. 3.  31955. 1. 21

본적-태흥리 592, 주소-박산리

15인회 회장(서훈번호 3-213)

징역 1년 6월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송한용(宋漢鏞) 

1893. 9. 181967. 6.  8

태흥리(서훈번호 3-224)

징역 10월

건국훈장 애족장 

1990 

백낙두(白樂斗) 

미     상

태인보통학교 교사

 징역  8월

 

 

송덕봉(宋德奉) 

1895. 10.  8

태흥리

징역  8월 

 

 

송진상(宋鎭相) 

1901.  2. 151962. 9. 23

태흥리 458

징역  8월 

대통령 표창 

2007 

신영식(辛泳寔) 

1899.  9.  6

태흥리

징역  8월 

 

 

박지선(朴址宣) 

1894.  5. 201966. 8. 7

태성리 360

징역  6월 

대통령 표창 

1992 

백복산(白福山)

1890.  1. 28

태성리

징역  6월 

 

 

송영근(宋榮根) 

1897.  7. 201942. 6. 11

태흥리 323

징역  6월 

대통령 표창 

1992 

오석흥(吳錫興) 

1893.  1.  9 1921. 2. 6.

태성리 221

징역  6월 

대통령 표창 

1992 

백학진(白鶴辰)

1896.

태성리

징역  6월 

 

 

송근상(宋根相)

1893.  7. 211952. 7. 17

태성리

징역 3

집행유예 2 

대통령 표창 

2005 

유치도(柳致道) 

1901.  3. 14

태흥리

징역 6

집행유예 2 

 

 

김부곤(金富坤) 

1901.  5.  7

태흥리

기소유예 

 

 

김진근(金鎭根)

1901.  3. 18

태흥리

기소유예 

 

 

오철수(金鎭根)

1899.  5. 22

태흥리

기소유예 

 

 

김용안(金龍安) 

1887.  4. 11

태흥리 또는 태성리

() 90  

 

 

김진호(金鎭浩)

1891.  9. 251945. 7. 24

태흥리 275(서훈번호 3-210)

() 90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최민식(崔敏植) 

1892. 8. 101943. 11. 27

본적-옹동면 칠석리, 주소-태흥리

() 90  

 

 

권사옥(權士玉)

1883. 10.  5

옹동면 매정리

구류 20일 

 

 

김승권(金勝權)

1902. 12. 24

옹동면 매정리

구류 20일 

 

 

송순용(宋順鏞) 

1882.  9.  9

태흥리

구류 20일 

 

 

윤상홍(尹尙弘) 

1850.  2. 28

궁사리

구류 20일 

 

 

김달곤(金達坤) 

1896.  8.  61920. 7.12

태흥리 457, 오성학교 학생

대구복심법원 2심 무죄,

병보석

5일만에 사망

 대통령표창

2007

송문상(宋文相) 

1896. 12.  2

태흥리, 오성학교 학생

대구복심법원 2심 무죄 

 

 

   참고문헌 및 자료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1994). 受刑人名票(井邑郡 瓮東面長, 1977).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金承學,韓國獨立史(1970). 李龍洛,一運動實錄(1969). 정읍항일운동사(정읍문화원, 1994). 전북의 31운동(전북인권선교협의회, 2001). 유원아, 전북 지역 31운동의 전개와 그 성격, (2002)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main.asp)/나라사랑광장/인물찾기 

 

<그림 7-2> 31운동 때 일제의 재판 광경9)

 

<그림 7-3> 태인 31운동 기녑탑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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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316일 전북 정읍군 태인에서 金炫坤.宋洙淵.宋漢鏞 등 주도로 장날을 이용, 200여 명이 만세시위 거사. 한민족독립운동사 3 3.1운동(국사편찬위원회, 초판, 1988), 378.

2) 내고장 傳統文化(정읍군, 1983), 181.

3) 李治白, 全北地域獨立運動史(全北域獨立運動追念塔建立委員會, 2004), 261.

4) 아들 송희석(69)부친은 일찍이 독립사상을 싹틔웠으며 국장에 참여하여 송진우, 김성수 등을 만나 31운동이 일어남을 통보 받고 낙향하여 친형 송근상, 송진상, 김달곤 등과 만나 거사를 모의하였으며 태극기 제작 경비를 조달한 주동자였다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5) 朴成壽, 獨立運動史 硏究, (創批新書, 1980), 330.

6)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admNum=1701)

7) 전라북도 독립운동사적지”, 국내 항일운동사적지 보사보고서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 사연구소, 2010), 406.

8) 독립운동사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483553.

    이용락, 31운동실록(도서출판 금정, 1994), 565599.

    김진봉, 31운동사연구(국학자료원, 2000), 91.

9) 李治白, 全北地域獨立運動史(全北域獨立運動追念塔建立委員會, 2004)

10) 201477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