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院) 터
조선의 교통과 통신[역체(驛遞)] - 역참(驛站)
국내 교역이 대부분 장시나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은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육상교통으로 사람은 보행, 기마 이외에는 교자(轎子)를 주로 사용하였고 짐(物貨)을 수송하는 데에는 인력, 소나 말 이외는 관에서는 대차(大車), 편차(便車), 곡차(曲車), 강주(杠輈)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보통 가정에서는 전거(田車) 조차도 보급되지 못하였었다.
물화의 수송에는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다. 수로에서는 판선(板船)이 많이 이용되었다.
조선 시대에 실시되었던 통신 제도인 파발제(擺撥制)에서 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을 참(站)이라고 지칭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으며, 고려 때에 이루어진 교통로를 중심으로 도로를 정비, 발달시켰다.
따라서 조선조의 모든 제도가 정비되었던 성종 대에 역제는 9대 간선도로와 140여 개의 지선을 중심으로 교통망이 형성되었으며, 전국적으로 23개의 찰방도(察訪道)와 18개의 역승도(驛丞道) 관할 하에 모두 543역이 분포하였었다.
그 후 일부 구간에서 역의 폐지, 신설 등이 있었으며, 찰방이 모두 역승(驛丞: 고려 ·조선시대 역(驛) ·관(官) 등을 관장한 관직.)으로 대체되었을 뿐 역제는 큰 변화 없이 1895년(고종 32) 우체사(郵遞司)의 설치와 함께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들 도로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하였으나 군사적인 목적이 더 강하였기 때문에 최종 관할은 병조(兵曹)였고, 실질적인 관할은 병조의 승여사(乘輿司)였다.
각 역에는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역정(驛丁)·역노(驛奴) 등을 두어 역무와 공역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관둔전(官屯田)과 마전(馬田) 등의 역전(驛田)을 지급하여 역의 운영 경비와 역원들의 급료를 충당하게 하였다.
관용교통 통신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驛)으로서,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 정도의 거리마다 역을 두고 마필(馬匹)과 역정(役丁)을 두어 공문을 전송하였다. 그리고 공무 여행자에게 역마(驛馬)를 제공하며, 그 밖에 진상(進上)이나 공납(貢納)의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이것은 공용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나 공용에 준하는 사용(私用)에도 허락되는 일이 있었다.
상부의 행정 및 군사적 관계사항이 있을 때에는 말을 태웠거나 혹은 보행으로 다음 역까지 릴레이식으로 신속 정확하게 전달했다.
각급 관원이 출사할 때에는 포마(鋪馬)의 문빙(文憑: 증거가 될 만한 문서)을 얻어 릴레이식 순차로 바꿔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다. 정부 각 기관으로부터 여러 주 군에 보내는 공문서를 피대에 넣어 역졸이 이 역에서 저 역으로 체송(遞送)하는 것인데, 용건의 완급에 따라서 그 피대(皮帒: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자루 가방)에 방울을 달았으니 3급에는 3령(鈴)을 달고, 2급(보통 급한 일)에는 2령(鈴)을 달고, 1급(평상시)에는 1령(領)을 달았다.
역참(驛站)과 역원(驛院)은 임무는 같았으나 역참은 정령(政令: 정치상의 명령 또는 법령) 및 공보의 전달과 군사적 연락과 관리의 왕래와 숙박 및 특수 물자의 수송 등을 사명으로 일했다. 그러므로 역참에는 역정(驛丁), 역전(驛田) 및 역마(驛馬)를 두어 그 직무를 운영케 했다.
역원은 역의 관리(官吏)들이 전통을 가지고 길을 가든 중이거나 또는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해가 저물어 더 가지 못하고 묵어야 할 때 숙박을 한 곳, 즉 국립지정여관이었다.
고관이나 공무 여행자의 숙식에 대비, 지방 관아에는 관(館) 또는 객사(客舍)라는 숙소를 두었고, 요로마다 원(院)이라는 일종의 관영 여숙(旅宿: 여관)을 설치하였다. 원은 사용자가 극히 제한된 까닭에 점차 퇴폐해간 것이 많았다. 사용(私用)으로 여행하는 민간인은 점(店) 또는 주막이라는 사설 여숙을 이용하였다.
원(院)은 원주(院主)를 두어 이를 관리하게하고 재정으로는 원위전(原位田․院田)이라는토지를 주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대로(大路)에 있는 원은 1결(結) 35부(負), 중로(中路)에는 90부, 소로(小路)에는 45부(負)를 주었다.
역마(驛馬)를 사용할 때에는 마패(馬牌)라는 증빙할 표가 있어야 했는데, 사용자의 품계에 따라 각 역에서 제공하는 마필 수에 차이가 있었고, 말을 그 수대로 새겨 넣은 구리쇠로 만든 원패(圓牌)를 마패라고 한다. 마패 발급은 중앙에서는 상서원(尙瑞院), 지방에서는 감사나 병사(兵使), 수사(水使)가 발마패(發馬牌)를 받아서 계문(啓聞) 또는 진상(進上)등 필요한 때에 이것으로 발마케 하고 군사상 긴급한 때에는 쌍마(雙馬)를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국 41개도(道)의 도로에 524여 개의 역이 있었다. 역에는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들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公役)에 담당하게 하였고, 수 개 내지 수십 개의 역을 한 도(道)로 하여 찰방(察訪, 종6품) 또는 역승(驛丞, 종9품)이 이를 관장하는 동사에 교통로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보고하기도 하였다. 각 도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이를 관장하게 하고, 각 역에는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의 관리와 공역(公驛)을 담당시켰다. 역은 삼남 지방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었는데, 대개는 각 읍 인근에 소재하였다.
또 수도 주변이나 경기지방의 도선소(渡船所)인 벽란도, 한강도, 임진도, 노량도, 낙하도, 삼전도, 양화도 등에는 각각 「도승」(渡丞)을 두었다.
역승은 1535년(중종 30)에 모두 찰방으로 승격되어 없어지고 도승도 뒤에 별장(別將)으로 바뀌었다. 역승, 도승은 찰방과 마찬가지로 녹이 주어지지 않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역은 고려시대 이래 비교적 정비되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이전(吏典) 외관직조(外官職條)에 수록된 전국의 역참조직은 41역도(驛道)-524속역(屬驛)으로 편성되어 『고려사』에 보이는 520여 개와 별 차이가 없다. 조선시대는 이 방면의 역의 수는 감소되는 한편 새 국경선을 따라 한성-의주 간, 한성-경흥 간의 간선과 강계방면, 삼수방면의 지선의 정비되었다. 그 대신 중부 이남은 거의 대부분의 역이 고려시대 이래 소재지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답습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 수백 년간 교통 상황의 큰 변화는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역은 삼남지방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고 찰방도 경상도와 같은 곳에는 11개소나 되었다.
조선 초기 전라도에는 찰방도(察訪道)가 37개, 역승도(驛丞道)는 22개가 있었다. 찰방도는 삼례도찰방(參禮道察訪, 13),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 12),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 12)였으며 역승도는 경양도역승(景陽道驛丞, 7), 벽사도역승(碧沙道驛丞, 10), 제원도역승(濟原道, 5)가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전라 좌도에 벽사도(9), 오수도(11), 경양도(6), 제원도(4)가 있었으며 전라 우도에는 청암도(11), 삼례도(12)로 변화되었다.
역로(驛路)는 규모에 따라 대로(大路), 중로(中路: 重譯), 소로(小路: 小驛)의 3등분으로 구분되었다.
대로로(大路路)는 경기에 12역이며, 중로로는 경기에 9역, 공충도에 24역, 전라도에 4역, 경상도(慶尙道)에 5역, 강원도에 6역, 황해도에 11역, 평안도에 13역, 함경도에 37역이며, 기타는 모두 소역(小路)에 속한다. 전라도의 역로는 삼례(三禮), 반석(半石), 앵곡(鶯谷), 양재(良才)가 대로였고 나머지는 소로였다.
공충과 전라 우도는 금천(衿川)ㆍ수원의 통로를 경유하고, 공충과 경상 좌도는 광주(廣州)ㆍ이천의 통로를 경유하고, 전라 좌도와 경상 우도는 과천(果川)의 통로를 경유한다.
전라도(全羅道)의 대로로 4역에 속하는 전주 삼례도(參禮道)는 중심역이 삼례역(三禮驛)이다. 전주․여산(礪山)․태인(泰仁)․정읍(井邑)․임실(任實)․함열(咸悅)․임피(臨陂)․김제(金堤)․부안(扶安)․고부(古阜) 방면의 도로를 관할하였다. 전주의 반석(半石)과 앵곡(鶯谷), 여산의 양재(良才), 태인의 거산(居山), 정읍의 천원(川原), 임실의 오원(烏原)과 갈담(葛潭), 함열의 재곡(材谷), 임피의 소안(蘇安), 김제 내재(內才), 고부의 영원(瀛源) 등으로,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증가된 것으로는 부안 부흥(扶興) 역이 있었다.
중심 역은 조선 초기에 종 9품의 역승(驛丞)이 있었으나 성종대 이후 앵곡도(鶯谷道)와 합쳐지면서 찰방(察訪)으로 승격되었다. 이 역도(驛道)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관할범위는 여산(礪山)-전주(全州)-금구(金溝)-태인(泰仁)-정읍(井邑)-장성(長城)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驛路)와 전주∼남원(南原) 방면, 전주∼순창(淳昌) 방면, 함열(咸悅)-임피(臨陂)-옥구(沃溝) 방면, 함열․만경(萬頃)-부안(扶安)-고부(古阜)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驛路)이다. 이상 전라 우도에는 3등마 272필과 아전과 군졸 6,349명이 있었다.
<표 > 조선 후기 역편제와 현재의 지명: 전라우도 | |||
찰방 |
역승 |
소관역수 |
소관역명: 현재지명(2001년) |
삼 례 도 찰 방 |
전라우도 |
13 |
삼례역(三禮驛):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 해남로 |
반석역(半石驛):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학동 - 통영로 | |||
양재역(良才驛): 전북 익산시 여산면 영전(영너머)마을 - 해남로 | |||
오원역(烏原驛): 전북 임실군 관촌면 오원강변 - 통영로 | |||
재곡역(才谷驛):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행동 | |||
소안역(蘇安驛): 전북 군산시 대야면 보덕리 덕봉마을 | |||
앵곡역(鶯谷驛): 전북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 앵곡마을 - 해남로 | |||
거산역(居山驛): 전북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원거산마을 - 해남로 | |||
천원역(川原驛): 전북 부안군 행안면 역리 역말 | |||
내재역(內才驛): 전북 김제시 죽산면 옥성리 내재마을 | |||
영원역(瀛源驛): 전북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역도 | |||
갈담역(葛潭驛): 전북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시장 일대 | |||
앵곡도와 통합, 갈담(葛潭) – 창활도에서 편입 |
태인의 역(驛)은 거산역(居山驛, 在縣 南1里)으로 삼례도(參禮道)의 속역(屬驛)으로 태인면 거산리에 있는 중로(中路)의 역으로 관리(管理) 11명, 번인(番人) 10명, 노복(奴僕) 3명, 실무비(失務婢) 2명, 실무마(失無馬) 11필, 위전답(位田畓) 45석 16두락(斗落)이었다.
1789년(정조 13)경에 만들어진 읍지를 뒤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편년 미상의 태인군 읍지에는 역원내역을 보면 관리 15명, 노비 15명, 말 15필로 기록되어있다.
태인의 원(院)은 태거원(泰居院), 왕륜원(王輪院), 정어원(鼎魚院)이 있었다.
태거원(泰居院)은 태인현에서 서쪽으로 5리(거산리의 南川: 현 泰仁川) 떨어져 있으며, 현재 태인면 대각교지(大脚橋址, 원래 泰居僑)의 앞에 있었다. 대각교(大脚橋)는 전주감영(全州監營)에서 남도(南道)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태거원(泰居院)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유명한 것은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崔淑嬪)의 이야기와 요승(妖僧) 행수(行手)의 일화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이다.
왕륜원(王輪院)은 태인현에서 북쪽으로 9리 떨어진 현재 태인면 고천리 왕림마을(旺林-)에 있었으며, 전주감영에서 정어원을 거쳐 태인현으로 들어오는 길 부근이다.
정어원(鼎魚院)은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전주감영에서 정어원(鼎魚院)을 거쳐 태인현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감곡면 통석리 통사 부근으로 추정한다. 통사마을에는 예로부터 '원터'라는 이름이 전해져 내려온다. 정어원(鼎魚院)은 부근에 위치한 솥튼재와도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고도서(古圖書)와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난 1989년 이전의 역원(驛院)과 교량(橋梁)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역원(驛院)]
居山驛 南2里 (승람: 역리(易理) 15명, 역노(驛奴) 15명 역마(驛馬) 15마리) (여지)(지지)(호남)
鼎魚院 東10里 (승람: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여지)(호남)
泰居院 西5里 (승람: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여지)
王輪院 北9里 (승람: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여지)
[교량(橋梁)]
泰居橋 南5里 (승람)(여지)(지지)(호남) 長灘橋 서5리 (지지)
虎川橋 北5里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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