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교 유지(大脚橋 遺址)
소재지 :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대각교(大脚橋)는 옛날 태인현(泰仁縣)의 남천(현 泰仁川)에 있던 다리이다.
삼남대로(三南大路)는 한양에서 충청․전라․경상도 방향으로 가는 길을 말하는데, 전국 각지로 가는 노선이 9개 있었다. 삼남대로(三南大路) 중 제7로(第七路)가 동작진(銅雀津)에서 삼례, 전주(全州) 감영(監營), 금구(金溝) ,태인(泰人), 고부(古阜)를 지나 남도(南道)로 내려가 제주에 이르는 970리 길이었다.1) 이 노선으로 인해 태인은 교통(交通) 요충지(要衝地)가 되었다. 그래서 이 대각교 앞에는 여행객에게 말이나 숙식을 제공하는 거산역(居山驛), 태거원(泰居院), 주막(酒幕)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유명한 것은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崔淑嬪)의 이야기와 요승(妖僧) 행호(行乎)의 일화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교통(交通)에 대한 생각과 다리를 놓는 일(治道橋梁)에 매우 등한시(等閑視)하였음으로 통행(通行)에 대한 불편이 대단하였다. 이곳도 남북교통(南北交通)의 주요도로(主要道路)이나 충분한 교량시설(橋樑施設)이 없어 통행인(通行人)의 불편이 많았으므로 260여년전(1936년 기준)에 태인현 백암리에 거주하는 자선가(慈善家) 박잉걸(朴仍傑先生)이 단독(單獨)으로 사재(私財)를 털어 만년불패(萬年不敗)의 굉장(宏壯)한 석교(石橋)를 가설(架設)하여 통행인(通行人)의 편리(便利)를 도모(圖謀)하였다. 고금(古今)을 물론(勿論)하고 선생의 공노(功勞)를 찬양(讚揚)하여 사람들이 ‘큰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명칭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대각교’이다.
대각교는 큰물이 져도 별 손상 없이 잘 버티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서울과 목포를 잇는 국도 1번 도로가 아래쪽(下便)으로 이설(移設, 현 국도 1호선)되어 개통되고 제방을 쌓아 물길을 바꾸면서 현재의 위치인 태인면 거산리에 다리가 새로이 건설되어 이 대각교(大脚橋)도 자연히 폐교(廢橋)되고 말았다. 이름도 그 지명을 따서 거산교(居山橋)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제7로(第七路)가 현 거산교 입구의 제방에서 하류쪽으로 해서 남도(南道)로 갔다. 대각교는 이 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림 >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에 그려진 대각교2)
<그림 > 대각교 터 위성사진3)
태인면(泰仁面) 거산리(居山里) 거산교(居山橋, 태인천 상류)의 동측(東側)에 있었다. 증왕(曾往, 옛날부터)은 교통(交通)에 대한 관념(觀念)이 적어 도로와 다리를 놓는 일(治道橋梁)에 매우(퍽) 등한시(等閑視)하였음으로 통행(通行)에 대한 불편이 대단하였다. 이곳도 남북교통(南北交通)의 주요도로(主要道路)이나 충분한 교량(橋梁)이 없어서 통행인(通行人)의 불편이 많았다. 260여년전(1936년 기준)에 태인현 백암리에 거주하는 자선가(慈善家) 박잉걸(朴仍傑先生)이 단독(單獨)으로 사재(私財)를 털어 만년불패(萬年不敗)의 굉장(宏壯)한 석교(石橋)를 가설(架設)하여 통행인(通行人)의 편리(便利)를 도모(圖謀)하였다. 고금(古今)을 물론(勿論)하고 선생의 공노(功勞)를 찬양(讚揚)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세(時勢)의 변천(變遷)을 따라 그 길이 아래쪽(下便)으로 이설(移設, 현 京木線 一等道路)됨에 따라 이 대각교(大脚橋)도 폐지되었다.4)
대각교(大脚橋)는 옛날 전주 감영(全州 監營)에서 남도(南道)로 내려가는 교통(交通)의 요지(要地)였다. 그러나 교량시설(橋樑施設)이 없어 행인(行人)의 불편이 많았으므로 태인현 백암리에 거주하는 박잉걸(朴仍傑)이 사재로 만년불패(萬年不敗)의 석교(石橋)를 가설하였으니5) 홍수가 나면 유실되곤 하던 교각을 사람들은 이를 '큰다리'라 하고 '대각교(大脚橋6) 또는 泰居橋7)·大角橋)'로 명기하였다. 지금은 '거산교(居山橋)라 부르기도 한다.
근대에 와서는 그 길이 하편으로 이설됨에 따라 대각교는 자연히 폐교되고 말았다. 그 위치는 현 태인면 거산리에 있는 거산교의 하류로 추측된다.8)
그 후 대각교는 몇 십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979년에 모래 채취 작업 중에 장대석(長大石) 등이 대량 발굴되어 '대각교(大脚橋) 유지(遺址)'가 찾아졌다. 현 거산교(居山橋)의 하류 제방으로부터 북쪽으로 200m가량 떨어진 논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유지(遺址)에는 길이 3m, 넓이 0.5m나 되는 장대한 석판(石板)과 많은 석재가 발굴되었으니 당시에는 여간 볼 수 없는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9) 작업을 의뢰하셨던 분과 그 땅의 주인께 여쭤보니 상판과 좌대로 쓰인 장대석 및 소나무로 깎아 만든 커다란 말뚝이 대량 발견되었으나 원래 형태나 놓인 방향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장대석이 가장 많이 발견된 곳 근처에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길과 주막도 있었는데 이 역시 국도 1호선 개통과 농경지 개간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대각교 유지는 늪지처럼 되어 있는데 모래채취 중 나온 장대석들이 유적 현장에 쌓여 있고, 그 아래 집 마당에도 몇 기가 있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가 화단석으로도 사용되어져 있다. 거산교 자락에 있는 식당 정원에도 여기에서 옮겨다 놓은 장대석 1기가 있다. 또한 다리 유지 부근, 즉 장대석이 쌓여있는 곳 옆에 흙더미가 불쑥 솟아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자리가 주막터며, 동네 노인들이 어렸을 때만해도 그 주막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땅 주인은 장대석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좀 넘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숙빈 최씨 만남의 광장’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언젠가 대각교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낸 장대석 대부분은 땅에 다시 묻고, 농토로 사용할 부분에 묻혀 있던 돌들은 근처에 쌓아 놓거나 정원 둘레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각교 터 위를 지나 동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대각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땅 주인의 민원으로 이루어졌다. 원래의 대각교가 없어지면서 주민들이 그 옆에 있던 거산교를 대각교와 혼용해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땅 주인은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마땅할 대각교가 이름까지 사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민원을 제기하였고, 그 뜻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대각교는 원래 있던 터와는 거리가 좀 멀고, 오히려 신내교 아래쪽이 더 가까운 위치이다. 국도 1호선 설계 당시에는 신내교가 설치된 부분이 둑 형태로 시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천을 막으면 홍수가 났을 때 물이 빠질 곳이 없고 주민이 왕래하기도 불편하다는 민원 때문에 다리형태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땅 주인은 초기 설계 계획을 보고 민원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다리가 ‘대각교’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2번째 만들어진 대각교(1933년), 거산교((居山橋, 1986년), 그리고 최근에 만들어진 대각교(2005년) 등 3개의 다리가 나란히 남아 있다.
대각교에는 영조의 생모 최숙빈의 설화와 중종 때의 행평승(行平僧)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10)
첫 번째 이야기는 ‘대각교(大脚橋)와 최숙빈(崔淑嬪)’이다.
숙종(肅宗)때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260여년전(1936년 기준)에 인현황후(仁賢皇后, 肅宗王妃) 민씨의 아버지인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11)이 마침 영광(靈光) 군수(郡守)로 발령을 받고 부임(赴任)하러 가던 때의 일이다. 서울을 떠난 행차(行次)는 전라감영을 거쳐 태인에 이르러 대각다리 태거원에서 길을 멈추고 쉬고 있었다.
옆에는 이제 여덟 살 먹은 딸을 안은 둔촌의 부인도 동행하고 있었다. 마침 둔촌의 일행 앞을 지나가던 7∼8세가량의 어린 소녀 거지(乞食少女)가 있었다. 얼른 보아 옷은 남루(襤褸)하나 용모(容貌)가 단아하고 총명(聰明)하고 잘 생긴 소녀였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이 소녀의 모습은 안고 있는(包) 둔촌 부인의 딸 모습과 닮은 데가 너무 많았다.
지나는 소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둔촌 부인은 이름과 부모와 가정환경(父母兄弟의 有無를)을 두루 물어 보았다. 성은 최씨(崔氏)요 부모님은 돌아가신지(死別) 오래고 형제친척(兄弟親戚)이 없는 무의무탁(無依無托)한 가련(可憐)한 고아(少女)였다. 둔촌 부인은 자기(自己) 딸을 생각하는 동시에 그를 동정(同情)하여 의복(衣服)을 개착(改着)시켜 딸과 같이 불쌍히 여겨 이 소녀를 임지(任地)로 데리고 갔다(抱去) 한다. 그 뒤 자기 딸과 다름없이 글공부(工夫)와 예의범절(禮儀凡節)을 가르치며 친딸과 똑같이 생각하며 길렀는데 예의 바르고 얼굴 곱고 재주 뛰어남이 이를 바 없었다.(才質이 敏捷하야 一覽輒記하였다.)
수년 후 둔촌은 외직(外職)에서 내직(內職)으로 승진(陞差)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을 때에도 이 소녀만은 같이 데리고 갔었다. 이 무렵 숙종대왕의 처음 부인(初娶)이신 인경왕후(仁敬王后: 光山 金氏)가 승하((昇避)하자 다시 현숙(賢淑)한 왕후 민씨(閔氏)를 선택하셨으니 이 분이 바로 둔촌의 딸이었다. 그때까지도 민씨(閔氏) 왕후는 이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왔던 최씨를 데리고 입궁(入宮)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숙종대왕께서는 장희빈(張禧嬪)이라는 아름다운 궁녀에 매혹(迷惑)되고 말았다. 장희빈은 대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자 결국 민씨(閔氏) 왕후는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厚德하신 閔氏를 廢黜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최씨(崔氏)는 밤이나 낮이나 민씨(閔氏) 왕후 생각뿐이었다. 밤마다 삼경이 되면 민씨(閔氏) 왕후가 하루 속히 궁내로 돌아오도록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났다.
어느 날 밤에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암행(暗行)에 나섰던 숙종대왕이 궁중의 후원을 홀로 산책하다 최 씨의 이런 장면을 목격하시고 옛 주인을 사모하는 갸륵한(嘉尙) 정성에 감탄하여 그를 자기 곁에 있게 하였다.
속담에 낫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전(傳)한다고 최씨는 처녀의 몸인데도 배가 불러가니, 까닭을 아는 사람들이 한입 두입 건너 필경(畢竟) 장희빈(張禧嬪)의 귀에 들어갔다. 이를 알게 된 장희빈(張禧嬪)은 구박하기 시작했다. 시기와 질투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 갔다. 최 씨는 숙종 대왕의 성은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장희빈의 날로 더 해가는 구박에 견디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숙종(肅宗)께서 낮잠을 주무시는데 꿈을 꾸었다.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내전(內殿)마당에 놓인 「독」밑에서 용(龍) 한 마리가 나오려다가 못나오고 거의 죽게 되는 꿈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나서 급(急)히 내전(內殿)에 들어와 두 말씀도 않으시고 「독」을 들어라하시니 질식(窒息)하여 거의 죽어가는 최씨(崔氏)가 「독」 밑에 있었다.
이러하므로 숙종(肅宗)께서는 최씨(崔氏)를 구하는 한편 장씨(張氏)를 미워하여 사사(賜死: 사약을 내려 죽게 하고)하시고 인현왕후 민씨(閔氏)를 궁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 후 최 씨가 생남(生男)하니 바로 숙종의 둘째 왕자로 연희군(延禧君)이오. 뒷날의 영조이다. 영조(英祖)가 탄생(誕生)함으로 바로 최씨(崔氏)는 상궁(尙宮)으로 봉(封)하였다.
상궁(尙宮)은 자기 몸이 귀히 됨에 태인 현감에 명하여 친척을 조사하였으나 한 사람도 없었으며 부모의 분묘(墳墓)를 조사(調査)하였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연희군을 낳은 최 씨는 동궁에서 숙빈으로 상대(上待)되었다. 최숙빈(崔淑嬪)은 태인현 최사령(崔使令)의 딸이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1694년(肅宗 20) 9월 13일 연희군을 낳았으며 1718년(肅宗 44) 3월 9일에 졸(卒)하니 후(厚)한 장례(葬禮)로 우송(優送)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영조(英祖)는 어머니 최숙빈(崔淑嬪)을 위하여 수빈묘(淑嬪廟)를 세웠는데 후에 육상궁(毓祥宮)으로 일컬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728년(英祖 4: 戊申)에 태인 박필현란(朴弼顯亂;이인좌란[李麟佐亂])이 일어났을 때 태인현을 관대(寬大)하게 보아 준 것은 영조의 외향(外鄕)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때 안음현(安陰縣: 경상남도)은 현감 정희량(鄭希亮)이 박필현과 함께 반란 했다하여 폐현(廢縣)되었던 것이다.
최숙빈의 인연을 지닌 대각교는 근대에 와서 서울 목포간의 국도가 그 위쪽으로 나게 되어 폐교(廢橋)되고 말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최숙빈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딸이며 어떤 설움을 간직하고 영민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두고 세월은 또 흐르고 있다.12)
두 번째 이야기는 ‘대각교와 걸승(傑僧) 행호(行乎) 스님 이야기이다.
고려(高麗) 때의 숭불사상(崇佛思想)은 불교(佛敎)를 배격(排擊하고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는 배불숭유(排佛崇儒)의 건국이념(建國理念)을 가진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중종(中宗)때 행호(行乎)라 하는 스님이 있었다. 불가(佛家)에서 뛰어난 스님이었다. 행호의 속성(俗性)은 최씨(崔氏)였다.
행호스님은 불교의 엄격한 수도와 계행(戒行)으로 묘법(妙法)을 통달(通達)하여 천태종(千台宗)의 영수로 초대받은 대승(大僧)이었다. 유교가 득세하던 그때에도 중종(中宗)의 신임이 두터워 궁중(宮中)을 무상출입(無常出入)하였으므로 많은 유생(儒生)들의 투쟁(妬情)과 반발(反撥)이 그칠 줄을 몰랐다.
하루는 대학관(大學館) 유생들이 모두 나오지 않았다. 별안간 있는 일이라 영문을 모르는 중종은 놀라 그 연유를 물었다.
그 때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대답하기를
“상감마마께서 불교를 숭상하시니 유생들은 아무 할 일이 없다하여 오늘 한 사람도 나오질 않았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중종은 크게 격노(激怒)하여 정극인을 당장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추상같은 어명(御命)을 내렸다.
이 때 승상(丞相) 황희(黃喜)가 말하기를
“상감마마, 후일에 정극인을 무슨 죄목으로 참형(斬刑)했다고 하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이 때 승상 황희(黃喜)가 말하기를
“상감마마, 후일에 정극인을 무슨 죄목으로 참형했다고 하시렵니까? 어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했다.
이쯤 되니 임금도 불교를 반대했다는 죄목(罪目)으로 참형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은 참형의 어명을 거두고 정극인을 북방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했다. 정극인은 이로 한하여 결국 귀양살이를 떠나고 말았다.
세상일은 무서운 것이다.
인심은 자꾸 변하기 때문이다. 몇 년 세월이 흘러 정극인이 귀양살이가 풀리게 되고 반대로 행호가 제주도로 귀양살이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귀양 가는 행호의 일행이 태인(泰仁)의 대각교(大脚橋)에 이르러 다른 길손들처럼 잠시 쉬고 되었다.
동서(東西)로는 거산평야(居山平野)가 펼쳐 있고 대각교 밑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맑은 물을 보고 행호승은 자연의 신비로움에 다시 놀란 듯
“아, 여기는 아름다운 산수(山水)의 고을이구나!”라고 하며 감탄하였다.
행호는 일행들에게 물었다.
“이 물은 어디서 흐르는 물이기에 이처럼 맑고 깨끗한 것일까?”
라고 물었다.
“예, 태인 고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인은 정극인의 고향이었다. 말년에도 정극인은 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며 전원생활을 했다. 이 말을 들은 행호는 가슴이 짜릿했다. 지금 자기가 귀양살이에 오른 것도 정극인 같은 유생들의 모략이라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리하여 행호는
“내가 원수의 고향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실 수 있겠는가?”
하고 마시려던 물을 먹지 않고 돌아섰다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인간 세상은 시끌짝한 모양이다. 자기가 맡은 몫에 최소한의 양보와 성실과 윤리성을 부여할 때 조금은 화평의 대도(大道)로 접어들 것이다. 다 어려운 일이다. ‘복수하는 최선의 방법은 악행을 범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는 명언이 머리를 스쳐간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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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경지명답사-대각교 터”, 『大巡會報』 142호(대순진리회, 2013.3.18.), 42~49.
2) 제작년도는 1745-1765년도로 추정되고 제작자는 미상, 제작형식은 필사(방안식), 소장자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3) NAVER 위성지도 편집.
4)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36∼37.
5)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337.
6) 『해동지도(海東地圖, 고대4709-41))』 태인현(泰仁縣).
7) 『태인군읍지(泰仁郡邑誌, 奎17410)』1789년(정조13) 경 만들어진 읍지를 전사한 것으로 추정됨.
… [橋梁] 泰居橋 在邑南邊五里….
이정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궁실조 「토산」(한국고전변역원, 1969), 507.
"…【교량】 태거교(泰居橋)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8)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337.
9) 『井州․井邑 鄕土史蹟資料輯』(정읍문화원, 1987. 11. 10.), 103~105.
10)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337.
11) 민유중은 외직의 군현에 나간 기록은 없고 1665년(顯宗 6) 4월 전라관찰사로 부임했다가 다음해 7월 내직으로 들어갔으며 『전라도선생안(全羅道先生案)』, 인현왕후 민씨는 1667년(顯宗 8) 출생하여 1681년(肅宗 7) 15세에 왕비로 입궁했다가 1689년(肅宗 20) 왕자 전(景宗: 장희빈 소생)의 책봉 문제로 장희빈의 무고에 폐위 당했던 것이다. 1694년(肅宗 20)에 이르러 왕이 이를 깨닫고 인현 왕후를 다시 맞아 들였다. 그리고 동년 9월 연희군이 출생했던 것이다.
12)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36∼37.
崔玄植編,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337~339.
13) 김동필編, 『增補 정읍의 전설』 (정읍문화원, 2001.09.25.), 6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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