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무극대도(無極大道) 본부(本部) 터
소재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인로 108
무극도본사(無極道本司)
태인면 태흥리 1번 국도변(1等道路邊)에 2, 3층 규모의 주란화각(朱欄畵閣)이 반공(半空)에 흘립(屹立)하였으니 이것이 무량도본사(無極道本司)이다. 그 웅장(雄壯)함은 보천교본사(普天敎本司)와 조금 차이는 있으나 구조(構造)의 정교(精巧)함은 그에 별(別)로 손색(遜色)이 없다하겠다. 그런데 그 건축은 1924년 3월에 시공(始工)하여 1926년 4월 까지 만 2년에 준공(竣工)하였으니 총 공비(工費)는 약 칠만원(七萬圓)에 달하였다 한다. 건물의 명칭은 중앙 3층은 도율궁(兜率宮), 2층은 영대(靈臺)라 하고 부속건물 10동(棟)이 있으니 그 장치(裝置)의 찬란(燦爛)함이야말로 참으로 장관(壯觀)이다. 역시 원근각지(遠近各地)의 관람객이 부절(不絶)한다.1)
※ 아래 자료사진과 설명은 대순진리회 홈페이지의 자료실에 실린 내용입니다. 글쓴이의 의견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
무극도장터 위치
1925년 4월, 도주님께서 (구)태인 도창현에 무극도장을 창건하셨습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할 만큼 건물들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가 종교단체해산령을 공표하면서 무극도가 해산하게 되었고, 도주님께서 회문리로 가신 이후 건물들은 모두 해체되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무극도장의 건물들을 통하여 그 자취를 조금이나마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 무극도장 건물 배치도는 인터뷰를 토대로 그 규모와 위치를 추정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무극도장 주요 부분 설명
무극도장 전경 ①
‘무극도장 건물 배치도’ 2번 위치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가장 앞쪽에 담장과 대문의 일부가 보이고, 담장 너머로 바로 보이는 지붕은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건물이다. 그 지붕 너머로 보이는 2층 건물이 영대, 바로 왼쪽에 보이는 창문이 사무실, 그 바로 너머로 보이는 3층 건물이 도솔궁이다. (사진 출처 : 1936년, 『정읍군지』, 전일희 소장)
무극도장 전경 ②
‘무극도장 건물 배치도’ 3번 위치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콘크리트로 된 계단 위에 지어진 건물이 영대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단층 건물이 시봉실이다. 그 너머로 도솔궁이 보인다. (사진 출처 : 1944년, 『조선의 유사종교』, 국립중앙도서관)
치마바위(촬영 : 2012-05-09)
태인기술학교 전경
무극도장이 모두 해체된 이후 그 터에 기술학교가 들어섰는데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면서 입학생 부족으로 폐교되었다. 이후 무극도장 터는 사유지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치마바위 위쪽에서만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태인기술학교 1981학년도 졸업앨범)
내소사 보종각(촬영 : 2013-05-30)
도솔궁 건물은 부안군 상서면의 김상기 씨 집으로 옮겨졌었는데 1층은 경주이씨 문중이 매입하고, 도솔궁 2, 3층은 만화동의 구병서 씨가 매입했다. 1965년에 내소사 주지승이 이곳으로 옮겨와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설치하여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보관했다. 이후 내소사 회주였던 우암 혜산선사가 주지로 재임할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는데, 보수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단청을 새롭게 칠했고, 지붕은 팔작으로 바뀐 상태이다.
내소사 보종각 다포(多包) (촬영 : 2013-05-30)
내소사 보종각 천정
경주이씨 재실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당하마을 소재)
경주이씨재실 전체 모습(촬영 : 2013-05-30)
도솔궁은 건물 전체가 김상기 씨의 집으로 옮겨졌었는데, 1958년에 경주이씨 월성군파에서 도솔궁의 1층을 옮겨와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경주이씨재실 측면(촬영 : 2013-05-30)
재실 2층 내부 단청
재실 2층 내부 천정화
경주이씨재실 바깥마루(촬영 : 2013-05-30)
촬영 : 2012-04-12, 경주이씨재실 포(包)와 기둥
경주이씨재실 내부 구조도
도솔궁 1층은 밖에서 봤을 때는 단층이지만 실제로는 2층 건물이다. 1층은 재실로 사용되고 있고 2층은 예전에 이씨 문중 사람들이 모임을 갖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먼지만 쌓여있다. 2층 중앙에는 기둥이 4개 세워져 있고, 천정에 악사 몇 명과 용을 타고 있는 사람, 몸통만 보이는 흑룡이 그려진 나무판이 붙어 있다.
경주이씨재실 1층 ①(촬영 : 2013-05-30)
경주이씨재실 1층 천정(촬영 : 2013-05-30)
경주이씨재실 1층 ②(촬영 : 2013-05-30)
경주이씨재실 2층 출입문(촬영 : 2013-05-30)
경주이씨재실 2층(촬영 : 2013-05-30)
경주이씨재실 2층 천정그림 ①( 촬영 : 2013-05-30)
경주이씨재실 2층 천정그림 ② (촬영 : 2013-05-30)
용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실제로는 용머리가 그려진 나무판 두 장이 떨어져 그 부분이 비어있는 상태이다. (이 사진은 용머리 그림을 따로 찍어 천정의 그림과 합성한 것임)
경주이씨재실 2층 기둥 주변
태인 톨게이트를 지나 30여 분을 더 가니 무극도장 터가 있는 도창현(道昌峴: 現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도챙이 고개 혹은 돌챙이 고개라고 하며 삼리(三里) 마을 동북쪽에서 독양(犢養) 마을로 넘어가는 항가산(恒伽山) 중턱의 고개를 가리킨다. (1925년 4월, 도주님께서 (구)태인 도창현에 무극도장을 창건하셨습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할 만큼 건물들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가 종교단체해산령을 공표하면서 무극도가 해산하게 되었고, 도주님께서 회문리로 가신 이후 건물들은 모두 해체되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무극도장의 건물들을 통하여 그 자취를 조금이나마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전경』에 상제께서 도창현이 있기 때문에 태인에 자주 머무셨다는 구절은 훗날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계시로 이곳에 무극도장을 마련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삼리 마을길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도로 왼편에 고물상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그 안이 바로 무극도장이 있었던 터다. 그날은 아쉽게도 정문으로 들어가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고물상 뒤편 언덕 위에 올라가서 보기로 하였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고물상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발밑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평평한 바위들이 마치 병풍처럼 옆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 바위가 바로 치마바위다. 현재 고물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면적은 예전에 무극도장 터로 쓰이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도장 터를 바라보며 무극도장에 있던 건물인 영대(靈臺), 도솔궁(兜率宮) 등을 비롯한 여러 건물의 위치가 어디였을까 나름대로 상상 해보았다. 1920년대 초에 이 정도 규모의 도장을 건립하는 일은 그 당시 우리나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참으로 엄청난 대공사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전경』에는 무극도장의 규모나 자세한 구조에 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1936년에 발행된 『정읍군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 웅장함은 보천교 본부와는 다르지만, 건축물의 장식이 아주 화려해서 원근각지(遠近各地)의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무극도장이 이룩되고 나서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고, 도주님께서는 진업단을 구성해서 안면도와 원산도에 간척사업을 하시는 등 전국 각지에서 구세제민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셨다. 그러나 1930년대 말부터 무극도를 비롯한 민족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도주님께서는 종도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낸 후 무극도장을 조선총독부에 기증하고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무극도장을 경매 처분하였고, 1943년에 부안의 갑부였던 김상기 씨가 무극도장의 주요 건물인 영대와 도솔궁을 비롯한 몇 개 동의 건물을 낙찰받아서 자신의 집으로 이건(移建)하였다. 그러나 1947년에 김상기 씨가 사망하자 얼마 후 자손들이 건물 일부를 매각하였다.
무극도장 건물 중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소재가 파악된 건물은 도주님께서 기거하셨다는 도솔궁이다. 도솔궁 1층은 김상기 씨 집에 있던 것을 전북 부안의 경주이씨 문중에서 다시 사들여 재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2, 3층은 김상기 씨 집에서 구병서 씨가 다시 사들였는데, 3층은 1965년 부안의 내소사에 기증하였고, 이후 보종각(寶鐘閣)으로 쓰이게 되었다. 2층은 계속 사용하다가 1980년대에 태풍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모두 폐목 처리했다고 한다.
무극도장 터는 (태인)미륵불교에서 사들여 1953년에 태인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인가된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1983년에 중등교육과정이 의무화되면서 폐교되었다. 이후 전문대를 세우려던 사람이 이 터를 다시 사들였으나 설립에 실패하였고, 지금은 통일교에서 소유하고 있다. 예전의 화려했던 무극도장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기계소음만이 진동하는 이곳에서 세월의 변화를 새삼스레 느꼈다.
다시 우리 일행은 무극도장의 일부인 도솔궁 1층을 보기 위해 부안에 있는 경주이씨 재실로 향했다. 버스로 40여 분 가니 재실이 있는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당하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로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기에 도로에서도 그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재실에 당도한 후 얼마 안 있어 현재 이 재실을 관리하고 있는 문중의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분은 올해 연세가 75세라고 했다. 언제 이 건물을 옮겨 왔는지에 대해 여쭈어 보니 지금으로부터 50년쯤 된 것 같다고 했다. 원래 이곳에 조그만 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당시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있는 어느 부잣집(김상기 집)에서 건물을 매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중에서 사서 옮겼다고 한다. 그분도 어른들을 따라서 그 부잣집에 직접 갔었는데 그 집(김상기 집)도 예전에 어딘가에서 뜯어서 옮겨지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김상기 씨가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건물 일부를 사들인 곳이 무극도장임이 틀림없었다. 아, 무극도장 건물을 눈앞에서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일행들도 다들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경주이씨 재실은 무극도장의 도솔궁 1층이 김상기 씨의 집에서 이곳으로 이건된 것이다. 도솔궁은 우리 도장의 영대처럼 외부에서 보면 3층이지만 내부는 4층으로 된 구조였다. 이중에서 경주이씨 재실은 도솔궁의 외부 1층, 내부 2층의 구조물이 옮겨온 것이다.
얼마 후 관리인이 1층 방문을 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1층 건물이었으나 내부에 들어가니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 바닥은 나무마루였고 천정 반자는 단청이 되어 있었다. 단청의 색은 외부보다는 상당히 잘 남아 있는 편이었다. 기둥 곳곳에 이 건물이 이건되었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보였다. 얼마 후 2층도 보여 달라는 부탁을 하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짐을 치우고 문을 열어주었다. 예전에 다녀왔던 사람들 말이 그동안 2층은 얼굴만 내밀어서 잠시만 보았을 뿐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날은 운 좋게도 우리 일행을 위해 기꺼이 개방해 주었다. 먼저 올라간 사람이 보더니 감탄을 연발했다. 직접 올라가 보니 과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천장과 벽을 비롯한 곳곳에 그려져 있는 단청과 벽화들이 그동안의 세월에 비해 너무나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주님께서 기거하셨다는 무극도장의 도솔궁을 이렇게라도 직접 보고 만져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이곳의 여건이 좀 더 좋아져서 관리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관리인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한 다음 마지막 목적지인 부안의 내소사(來蘇寺)로 향했다.
약 50여 분을 지나서 내소사 입구에 도착했다. 매표소가 있는 일주문을 지나니 아름답기로 유명한 전나무 숲길이 펼쳐졌다. 이곳은 약 150여 년 전에 전나무를 심어 지금의 울창한 숲길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너무나 울창해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숲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능가산의 연봉들을 배경으로 한 시원스런 내소사 경내가 한눈에 펼쳐졌다. 이 사찰은 633년(백제 무왕 34년)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했다고 한다. 그 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은 것이 지금의 내소사라고 한다.
내소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633년(조선 인조 11) 청민(淸旻)선사가 대웅전(大雄殿)을 지으면서 중건하였다. 그 후 1865년(고종 2) 관해(觀海)선사가 중수하고 만허(萬虛)선사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스님이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伽藍)을 이루었다. 이곳에는 3가지 보물이 있는데 보물 제291호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청림사(靑林寺)에서 옮겨온 보물 제277호로 지정된 고려동종(銅鍾),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切本寫本)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려동종은 높이 103cm, 입지름 67cm 크기로 우리나라 종에서만 보이는 특유의 음통(音筒)10과 용머리 모습을 한 종고리 등을 갖추고 있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종이라고 한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시대인 1222년(고종 9)에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들어진 것을 1853년(조선 철종 4)에 내소사로 옮겼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동종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기 위해 온 보종각(寶鍾閣)이다.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 곳을 거쳤다고 한다. 처음 있었던 곳은 태인의 무극도장이다. 그 당시 외부 3층으로 된 도솔궁 건물의 제일 상층부였던 건물이다. 이후 무극도가 일제 강점기의 종교단체해산령으로 해산될 때 무극도장의 영대와 도솔궁 및 몇 개 동의 건물을 김상기 씨가 사들여 집으로 사용했고, 그가 사망한 후 도솔궁으로 쓰였던 2, 3층 건물은 구병서 씨의 집으로 또다시 이축되었다. 그중 3층은 내소사 주지스님 원경이 법당 앞마당(서남향)에 보종각을 건립할 때 또 한 번 이축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會主) 우암 혜산선사가 주지로 재임할 때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현재 보종각의 모습은 다행히 잘 보존되고 있는 듯했다. 기둥과 공포, 바닥을 비롯한 대부분의 목재가 그 당시 것인 듯했으나 단청과 기와 등은 새로 한 것이었다. 무극도장의 도솔궁 3층 건물이 부안의 유명한 사찰 중의 하나인 내소사에 그것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보물을 지켜주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번에 무극도장의 자취가 남아 있는 세 장소를 답사하면서 도주님께서 창도(創道)하신 무극도의 실체를 피부로 절감하며 우리 종단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게 할 수 있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아울러 도주님의 유법(遺法)을 그대로 계승하신 도전님의 뜻을 더욱더 바르게 새겨 진정으로 상제님의 덕화를 선양할 수 있는 수도인으로 거듭나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보았다.2)
무극대도(無極大道) 본부 터는 도창고개에 있다.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출신의 조정산(趙鼎山, 이름은 哲濟, 1895∼1958)은 15세 때 항일투쟁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부친을 따라 만주류하현(만주류하현)으로 이주했다가 그곳에서 살다가 보천교 교인 김혁(金赫)에 의하여 강증산 교리를 듣고 입산수도하여 개안(開眼)이 되었다. 1916년(23세)에 만주에서 보천교(普天敎) 포교를 하다가 귀국하여 이치복에 수업하고 1917년 태인면 마동(泰仁面 馬洞)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보천교가 보관 중이던 강증산의 유품 둔궤(遁櫃)를 가져오게 된다. 증산의 매씨인 선들부인을 맞아들여 증산제와 인연을 맺어 기세를 올리고 개척사업 등 경제기반을 닦았다. 1921년에 그는 신앙대상을 구천상제 강증산(姜甑山)으로 하고 도호를 정산(鼎山)이라 하였다. 조성산은 1923년 12월에 "도장의 기지는 태인 도창현(道昌峴)이 천장길방지지(天藏吉方之地)니라. … 그러나 그곳에 치마바위가 있어야 한다"라며, 본부 후보지를 태인으로 정하였다.
1914년 1월에 제자들이 태인으로 가서 조정산의 뜻에 부합한 부지를 골아 벼 3백 50석에 매입하니 5,500평이다. 매입한 부지에 솟아난 바윗돌 몇 개가 있었다고 한다. 바윗돌 주변을 계속 파내려가니 높이 6~7m 길이 약 100m의 병풍 모양의 바위가 드러났는데, 이를 조정산이 말한 '치마바위'라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부지 중앙에는 샘물이 솟아나, 교인들은 이를 유천(乳泉)이라 불렀다.
'진업단(眞業團)'이라는 노동 단체를 만들어 본부의 건축 공사를 돕도록 하였으며, 1925년 4월에 교단의 주요 건물인 영대(靈臺)와 도솔궁(兜率宮) 등을 완공하였다. 이어서 도명을 '무극대도(無極大道)'라 선포하였다. 1926년 9월에 목조 와가에 단청을 한 영대와 도속궁을 비롯한 포정부, 정침, 사무실, 창고, 문루 등 19동 240여 칸의 청기와를 인 건축물들이 완공되었다. 공사 기간은 33개월, 연 인원 12만명, 공사비 5만원이 든 공사였다.
구천상제의 영위를 안치한 영대는 총 48칸, 도솔궁은 총 72칸이었다. 본부는 동서남북으로 문을 내고 담장을 둘러치니, 당시 세인들은 입암면 대흥리의 보천교 본부와 비교하면서, 보천교의 차월곡을 '차천자'라 불렀듯이 조정산을 '조천자(趙天子)'라 불렀다.
교의강령은 경천수도(敬天修道)·성신양성(誠信養成)·안심안신(安心安身)이며 도규(道規)에 의한 교체조직도 신태인에 교당이 설립된 후 공포되었다. 그는 신도에게 태을주(太乙呪) 등을 읽게 하여 전성기엔 신도수가 10만이 되기도 했었다. 교세의 약화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비롯되고, 1930년에는 평북 무산 국유림을 벌채하기 위해 400여 명의 신도를 보내기도 했으며, 충북 유성에 무극광산(無極鑛山)을 채굴하기도 했다.
1936년 차월곡의 타계를 기점으로 조선총독부는 민족성이 강한 종교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유사종교해산련'을 내렸다. 당시 보천교가 그렇듯이 무극대도의 건축물들도 모두 철거되었고, 교단 본부 역시 해체되었다. 해체된 본부터에 일제 경찰이 주재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약화된 교세를 8·15 이후 복고하려고 노력했으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1948년에 조정산은 무극대도를 '태극도(太極道)'라 고쳐 불렀다. 그리고 "우리의 도의 개화(開花)와 낙화(落花)가 모두 태인 땅이었으며 이는 '큰 씨'가 싹이 트고 자랄 연유이나 꽃이 피었다. 짐은 결실을 위함이라.…"며, 교단 본부를 태인에서 부산의 보수산(寶水山) 아래 보수동으로 옮겼다. 1955년경에는 3천여 세대 1만여 명의 교인이 부산 감천동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조철제 별세 이후에는 부산의 조영래(趙永來), 서울의 박한경(朴漢慶) 교단으로 나뉘어졌다. 태인의 무극대도의 터는 여러 차례 전매되어 학교, 공장부지, 고물 수집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폐허가 되었다.
-------------------------------------------
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20~21.
2) 『정읍군지』, 장봉선 편저, 1936.
『풍수로 보는 한국사찰』, 임학섭 著, 1996.
내소사 홈페이지. http://www.naesosa.org/
증언, 서영목(1938年生), 2007. 06. 16. 재인용.
증언, 김규영(1929年生), 2007. 06. 18. 재인용.
'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 > 기타 비지정 문화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종 정자(亭子)와 루(樓) (0) | 2018.05.31 |
---|---|
근대종교 문화재 - 태인 미륵불교(彌勒佛敎 ) (0) | 2018.03.22 |
근대종교 문화재 - 매계교회 (0) | 2018.03.22 |
기념탑 - 태인 3·1 운동 기념탑 (0) | 2018.03.21 |
역원(驛院) - 거산역(居山驛) 터 (0) | 2018.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