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기타 비지정 문화재

근대종교 문화재 - 매계교회

증보 태인지 2018. 3. 22. 09:16

매계교회(梅溪敎會)

 

 

   소재지: 정읍시 태인면 북태길 204

 

 

 

   호남지역 개신교는 맨 처음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전주에 선교부가 개설됨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전주선교부를 중심으로 전북지역 각처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복음은 봉동, 고산, 진안, 무주 등 동북부 지역과 김제, 부안 등 서부지역 그리고 남서부 지역인 임실, 남원 및 정읍, 고창 등에 이르기 까지 빠르게 전파 되어갔다.

   정읍지역의 교회 태동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우선 전주선교부의 정식 개설 이전 레이놀즈 선교사의 답사 여행일지(일지 사본 참조)에 태인, 정읍, 고창 등이 한글로 기록된 것이 보인다. 물론 이때 복음 전도가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냥 지나쳤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답사여행의 경험이 토대가 되어 후일 선교지역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최중진은 1870년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상학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정읍에서 성장하였으나, 가족을 이끌고 순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894년 동학동민군의 지도자였던 매부를 따라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매부가 처형되면서 농민군이 해산되었다. 대대적인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때 순창으로 피해있었다.

   동학혁명 전에 이미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테이트(Lewis Boyd Tate, 한국명 : 최의덕)선교사는 일시 서울로 철수하였다가 1895년에 다시 전주에 와서 정식으로 선교부를 개설하였다. 테이트선교사는 선교부 개설 이후 금구, 태인, 고부, 정읍, 흥덕, 임실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 후 최중진은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레이놀드(Reynolds,W.D.)·테이트(Tate,L.B.)·젠킨(Jenkin,W.M.) 등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선교사 테이트(L. B. Tate)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고, 그의 조사(助事, 보조자)가 되어 김제·정읍·태인·매계 등 테이트 선교구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04년 매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고, 같은 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김필수, 윤식명 등과 함께 입학하여 이들 3인은 각기 호남지역에서 목회를 하면서 평양을 오르내리며 목회와 공부에 전념하여 1908년 평양신학교 제2회 호남지방 첫 졸업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 3인은 1909년 9월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朝鮮예수교長老會獨老會, 平壤章臺峴敎會)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읍, 태인 등지의 교회에 니즈벳(J. S. Nisbet) 선교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1)로 임명되었다.

   호남지역 최초의 신학생이자 최초의 목사가 된 최중진은 1900년 매계교회(태인면 매계리)를 설립함으로 정읍 지방에 첫 교회가 설립 된 것이다  

   개신교 선교 초창기 전북인의 대표라 할 만한 최중진 목사는 대개 정읍을 거쳐 광주로 나가는 국도변에 주로 교회를 세웠다. 화호교회, 화해교회, 천원교회 등이 모두 국도변에 있다.

  이처럼 그가 국도변에 교회를 세운 것은 다니기에도 편리하고 마을들이 국도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중진 목사가 정읍지역에서 제일 먼저 세운 매계교회는 약간 다르다.

   당시 집사였던 최 목사는 먼저 태인에 가서 전도하려했으나 유교적인 인습이 강해 실패하였다. 

   그 후 최중진은 데이트 목사의 보조자로 활동하면서 호남지방 최초의 장로가 되었고 정읍지역을 맡아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태인 매계교회 초대 목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태인, 매계, 정읍, 고부 들을 순회하면서 전도하였고 천원교회, 정읍교회, 고부교회 등 8개 교회의 당회장직을 맡았다.

   대개의 초창기 교회가 그렀듯이 정읍 최초의 매계교회는 태인의 거부 황운섭이라는 사람의 사랑방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1900년에 시작되었다.

   1910년 최중진 목사가 정읍, 부안, 고창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자주교회2)를 선언하고 전라대리회로 부터 탈퇴했고 전라대리회는 최중진 목사의 목사직을 박탈당하는 한국교계의 목사직 제명 1호라를 기록을 남기게 되는 갈들을 겪었다. 교회가 폐쇄된 후 최중진 목사는 정읍에서 소외된 천민과 백정들의 해방을 위해 형평운동에 힘을 쏟다가 여생을 마쳤다. 최중진 목사는 호남 최초의 한국인 장로이자 목사로서 이 지역에 한국토착의 자주적인 교회 건설을 꿈꾸었던 것 같다.

   1914년 자주교회 주창으로 폐교되었다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고 알려진 독립투사인 박봉래 집사의 헌신으로 1925년에 매계교회가 재건되었다. 후에 이 교회의 장로가 된 박봉래는 1950년 6.25 전쟁 때 태인 도래미산 언덕에서 박봉래장로와 박동춘집사가 공산군에게 순교하였고 아들 김제 난산교회의 박종헌 장로 역시 순교되는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최중진 목사가 선교했던 천원교회에서도 몇 몇의 장로들이 순교했으며 그곳에서 분리된 두암교회에서는 23명의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고 하니 최중진 목사의 기독교 정신은 정읍 땅에서 순교의 정신으로 부활했던 듯하다.
   남녀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ㄱ 자형으로 세워졌던 설립당시의 매계교회는 6.25전쟁 때 공산군의 방화로 훼손되었다가 전쟁 직후에 복구되었다. 1968년에는 복구된 교회가  예배당 신축으로 철거되고 현 교회건물은 1991년 9월에 매계교회당이 있던 그 자리 바로 앞에 신축한 86평의 예배당을 신축했다. 1998년 10월에 예배당 이름을 신광교회에서 '매계교회'로 고쳐 불렀다.
   태인 매계교회의 설립자이자 당시 장로였던 최중진목사는 태인매계교회를 텃밭으로 하여 인근지역에 기독교의 확대를 가져왔는데 그가 복음을 전해 설립된 교회는 1905년 천원 제일, 북면 화해, 고부 구중, 화호, 정읍제일, 고창, 흥덕, 동호, 신촌, 부안, 관동줄포, 진성동 줄포제일교회등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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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유일한 목사 제명 사건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로 시작하여 동역자가 된 최중진 목사는 매계교회, 태인교회, 천원교회 등 정읍지방 8개 교회 당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191015일 북전라대리회에 5개 조항을 서면으로 제출한 것이 발단이 되어 소위 최중진의 자유교회 사건이 발생한.

   최중진은 태인, 매계, 정읍 지역 교회를 돌보다가 그 지역에서 선교하는 미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지나치게 세례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선교 재정의 사용에도 지역적 차별을 두는 것에 불만을 품고, 5개항의 개선 요구 편지를 보내고 만약 그 가운데 한 항목이라도 거부하면 자신은 독립하겠다고 통고하였다. 5개 요구 조항은 ① 신입교인에 대한 엄격한 규율을 폐지하고 학습인으로 세워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할 것(금연, 금주 등의 완화도 포함), ② 군산지방으로 편입시킨 부안지방을 자신의 지역으로 돌려주고, 고창지방도 자신에게 맡길 것, ③ 자신의 지역에 중등학교를 세워 교육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 ④ 교회마다 상구위원(常救委員) 2인씩을 두어 구제할 것, ⑤ 자신에게 집 한 채를 사주어 선교 사업에 재정적 어려움이 없도록 할 것 등이었다.(사택 요구 등)

   1910년 1월 5일에 열린 전라북도대리회는 최중진이 불참한 가운데 이 문제를 토론하고 이 일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로 정죄하여 1월 25일 열릴 대리회에 출석하여 해명하고 대리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당회권리를 행사하지 말라고 1월 7일자로 통지하였다. 그러자 최중진은 1월 10일자로 “대한예수교 자유회 목사 최중진”의 명의로 반박 답장을 보내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나아가서 자신의 행위를 배은, 배약, 분쟁, 무지각함, 불복이라고 규정한 문서를 위원들이 들고 각 교회를 순방한 것에 감정이 악화 되었다. 그는 후에 개최된 대리회에 참석하여 말미에 대한 예수교 자유회 목사 최중진이라 서명한 항의서를 제출하고 퇴장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면직 되었다가 다시 복귀 되는 듯 하였으나 )그러자 대리회에서는 김필수 목사, 매규첸 선교사, 서영선 장로 등을 파견하여 권면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2월 22일 임시대리회를 열어 회개하기까지 “휴직” 처분을 결의하고 같은 해 9월에 열린 제4회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독로회)에도 보고하여 “혁직(革職)”을 결의하였다.

   그 후 최중진을 따라 장로회에서 탈퇴한 교회들은 일본조합교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최중진은 동생 최대진 목사와 여러 동역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1914년 8월 제4회 전라노회 계속회에서 노회원들 앞에서 회개하고, 10월 계속회에서 강도사로 강등하여 다시 임명되었지만, 1년이 못되어 다시 자유교회를 이끌고 장로회를 떠났다. 그 후 1910년대 후반 정읍, 전주, 개성의 조합교회 목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919년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조합교회에서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20년대 전반기에는 형평운동과 노농총동맹에도 참여하였고, 조선일보 정읍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7년 4월 신간회 정읍지회 설립 준비위원, 동년 7월에는 정읍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70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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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사목사(同事牧師) 한 교회를 같은 권리를 가진 두 명의 목사가 목회하는 경우의 목사를 말한다. 이는 대체로 교회의 성장으로 교인들이 많아져 한 명의 목사가 목회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에 두는 경우이다. 한국 초대 교회에서는 선교사와 한국 목회자를 동시에 두는 예가 많아 이러한 제도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으나 담임 목사의 결정이 불확실할 때 과도적인 기간에 필요에 따라 두는 경우가 있다.

2) 사건의 전말을 요약해 본 것인데, 현시점에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무슨 일이든 시각과 입장에 따라 견해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테이트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미국 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지경이 된 상황에 병을 얻었고. 선교사의 입장에서 본 사건 보고서는 당연히 최중진 목사를 교계에 반기를 든 행위로 규정하였다. 또 호남선교를 다룬 어느 책에는 최중진의 자유교회를 일컬어 민족주의를 가장한 자유교회 그리고 최중진 목사의 배신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중진 목사의 입장에서 보자. 최중진은 최광진 장로, 최대진 목사 등 두형제와 함께 호남지역 선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삼형제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타락한 지방 관리들의 횡포를 목격하면서 자랐다. 이 때문에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삼형제는 혁명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동학군을 진압하던 일본군에 쫓기게 되자 최중진은 동생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들을 앞서 보내고 맨 뒤에 도망 가다가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뒷목덜미를 베이고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였다. (김수진, 호남 기독교 100년사)

   최중진은 초년에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운동에서 민족정신을 밑바탕으로 열정적이며 과단성 있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특히 언변과 통솔 능력이 뛰어나 남을 위압하는 지도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대신 고집과 뚝심도 대단하였고 특히 권위의식이 강한 교역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단 자기도 목사가 되었으니 선교사와 같은 품격으로 또 생활수준과 주택도 신분에 맞게 구비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특히 전도를 위한 선교비 활용 능력에 선교사들과 너무도 격차가 크자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신학사상 문제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교회 운영을 하고자 하는 자유사상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자존 의식으로 선교사에게 대항하게 되었던 것 같다.(전주서문교회 100년사)

   한 목회자에 관련된 일을 너무 장황하게 얘기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잃은 양 하나를 귀히 여기는 기독교 정신과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올바른 사회에서의 통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신교 선교 역사를 선교사들의 시각으로만 치우치지 말고 한국인 목회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연구가 전개되어야 함을 전재하면서, 반발하였다고 해서 배신자 취급하며 역사의 죄인으로 각인 시켜온 최중진 목사, 이제 다양한 각도에서 그를 재조명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 한다. 그래야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험난한 속에서 선교에 몸 바친 이들의 희생도 후대에 올바로 전해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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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공식적인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에 보면, 총회가 조직되기 전인 독노회(獨老會) 시기에 전라대리회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마지막에 이단(異端) 항목을 기술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풀어서 옮겨 보면 “1910년 목사 최중진이 자유교(自由敎)를 주창하매 태인, 부안, 정읍, 임실 등 각 군 교회가 부화하여 전북교회에 큰 동요와 근심이 일어나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입니다. 최중진 목사가 자유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단으로 정죄된 것 같기는 한데 그가 주장한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1910년이면 한국장로교회가 처음으로 독노회를 설립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서 최중진 목사가 이단으로 정죄된 일은 매우 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최초의 이단 규정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중진 목사는 1910918일에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회 노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 당시 노회록을 풀어서 옮겨 보면 회중이 최중진 씨의 사건을 제의하므로 기도하기를 동의하여 그렇게 결정하였다. 박정찬 씨가 최중진 씨에게 편지하기를 동의하므로 회중이 편지위원으로 김종섭, 방기창, 길선주 등 세 명을 택하는 것에 찬성하여 결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회의에서 보고되는 내용을 보면 최중진 목사가 소속되어 있던 전라북대리회에서 이미 그를 휴직시켰음을 알 수 있고, 전라북대리회의 이런 결정에 대하여 최중진 목사가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노회에서는 서신을 통해 그를 설득할 편지위원 세 명을 선정하였지만 실제로는 대리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그의 목사직을 정지시킵니다. 과연 최중진 목사는 어떤 이단적인 언행을 하면서 자유교회를 세워 대리회에 반기를 들었기에 결국 이단으로 규정되었을까요?

   최중진 목사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08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노회에서 호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순천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던 중에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테이트(L.B. Tate)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助事)가 되어 태인, 정읍, 고부, 부안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하였고 정읍 최초의 교회인 매계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최중진 목사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중진 목사는 191015일에 열린 전라북대리회에 자신의 요구를 담은 편지를 제출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입교(入敎)를 원하는 새신자인 원입교인을 교육시킬 때 너무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학습을 받고 있는 교인들이 낙심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 기준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하는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최중진 목사가 맡고 있는 목회 지역을 확장시켜 달라는 것으로, 부안지역과 신경운 조사가 맡은 지역을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담당하는 군산 지역에 합하지 말고 자신이 맡고 있는 지역에 편성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셋째는 최중진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선교 지역에 고등학교를 세워 달라는 요구였는데,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교육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넷째는 교회마다 구제를 결정하는 상구(常救)위원을 두 사람씩 임명하자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선교사들이 구제에 대한 결정을 일방적으로 해 온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주택 문제 및 경제적 문제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은 선교사의 경제 형편과 한국인 목회자 및 조사들의 경제 형편의 격차가 심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최중진 목사의 요구사항은 결국 전라북대리회를 이끌던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을 향한 것이었고, 그 핵심은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지도와 결정에 한국인들은 그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들도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최중진 목사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이었습니다.

   그러면 전라북대리회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안타깝게도 최중진 목사의 요구에 대하여 배은(背恩)”, “배약(背約)”, “분쟁”, “지각없음”, “불복종이라고 비난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런 결정은 당연히 선교사들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 당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전도하고 지도하여 목사까지 되게 한 최중진 목사의 요구는 그야말로 심각한 반항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물론 선교사들의 이런 결정의 근저에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에 대하여 선교사들이 변함없이 선생이나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한국 기독교인들을 어린아이로 봤다는 말이지요. 선교사들의 그런 의식은 문화적, 인종적 배경과 선교지인 한국의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선교사들만을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말 잘 들어야 하는 어린아이로 보는 시각을 고집한 채 최중진 목사의 개혁적인 요구를 거부하고 결국 그의 목사직을 정지시키는 결정을 내린 일은 지나치게 편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대리회의 결정에 대해 최중진 목사는 항의서한을 보내면서 대한예수교자유교회 목사 최중진이라고 서명하였는데, 이 서명을 근거로 자유교를 주창하여 큰 동요와 근심을 일으킨 이단적 인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이단이라고 지목당한 최중진 목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단적 사상과 언행을 일삼았다고 평가하기에는 억울한 면이 많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 초기에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혁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한국인 목회자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최중진 목사가 사용한 대한예수교자유교회라는 명칭 속에 담긴 선교사들에게 종속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한국교회, 자유로운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그의 소망이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