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태인의 금석문, 현판

2. 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

증보 태인지 2018. 6. 25. 10:04

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

 

 

 

泰仁流觴臺碑記 趙持謙

 

 

泰仁郡,卽新羅泰山郡文昌侯崔公舊所莅也。郡南七里許,巖石盤陀,巖下流水環廻。文昌每觴詠於斯,倣逸少故事,至今父老相傳焉。臺歲久荒廢,余友趙使君子直,視篆之暇,逍遙乎臺上,悠然有曠世之感。累石增築,立小碑以識之,屬余爲記。
頃年余爲吏楓岳下,地稱神仙窟宅,思一修飾,而未暇及。子直其多乎哉!余惟先生生星一周,涉海萬里。未弱冠,擢大唐巍科,踐霜臺,入金門,天下已爭知之。及其從事轅門,磨墨楯頭,使販鹽老賊魄褫膽落,眞所謂賢於百萬師矣。以其高才盛名,捲而東還,推出緖餘,亦足以維持一邦。顧乃沈淪銅墨若梅子眞,終焉浮遊方外,自託於羨門之屬,何也?
噫!公之生世不辰,入中華則亂離瘼矣,歸故國則危亡兆矣,道不可行,身且難容。以此飄然遐擧,蟬蛻棼濁,誦紅流一絶,未嘗不三復歎憐其志焉。想其婆娑徜徉於是地也,感慨繼之者,豈但俛仰間陳迹而已哉?公之淸風逸韻,溢於宇宙之間,而知公志者蓋亦尠矣。
夫地之重與輕顯與晦,未嘗不由於人。古人有言“蘭亭茂林,不遇逸少則不傳”。余亦云“是臺水石,得文昌而始彰”。而千有餘年,又得子直增修而表揭焉,玆豈非有待於其人歟?不知是後繼子直而修者又誰也。

 

 

태인 유상대의 비기〔泰仁流觴臺碑記〕[조지겸(趙持謙)]

 

   태인군(泰仁郡)은 바로 신라의 태산군(泰山郡)이다. 이곳은 문창후(文昌侯) 최공(崔公)이 옛날에 태수로 재직한 곳이다.

   관아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이 매번 여기에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하며 일소(逸少)의 고사를 흉내 냈다고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전한다.
   그 누대도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고 말았는데, 나의 벗인 조 사군 자직(趙使君子直 조상우(趙相愚))이 정사를 행하는 여가에 그 누대 위에서 소요하다가 먼 과거의 일에 대한 감회가 뭉클 솟아오르자 바위를 쌓아 증축한 뒤에 작은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왕년에 내가 풍악(楓岳) 아래 고을에서 재직할 적에 신선의 굴택(窟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지역을 한번 수식(修飾)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할 틈을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자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태어나서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에 바닷길로 만리 멀리 중국에 건너갔다. 그리하여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대당(大唐)의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에 상대(霜臺 어사대(御史臺))를 밟고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에 들어갔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선생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원문(轅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는 방패에 먹을 갈아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으로 하여금 넋이 달아나고 담이 떨어지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100만 군사보다도 낫다는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는 뛰어난 재질과 성대한 명성을 지니고서 몸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쓰고 남은 찌꺼기만 끄집어내어 활용했어도 한 나라를 유지시키기에는 충분했을 것인데, 그만 매자진(梅子眞)처럼 동묵(銅墨)의 지위에 침륜(沈淪)했는가 하면 끝내 세상 밖에서 떠돌면서 연문(羨門)의 무리에 자신을 의탁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난 그 시운이 불우해서 중국에 들어가서는 난리에 휩싸였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위망의 조짐이 보였으므로, 도를 행할 수 없을 뿐더러 자기 한 몸도 보전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표연히 멀리 떠나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혼란한 탁세를 벗어났던 것이었으니,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를 읊다 보면 미상불 두 번 세 번 탄식하면서 그의 뜻을 동정하게도 되는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그가 이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곤 했을 것이니, 계속 감개(感慨)하여 마지않게 되는 것이 어찌 다만 면앙(俛仰) 간의 묵은 자취뿐이겠는가. 공의 청풍(淸風)과 일운(逸韻)이 온 우주 사이에 흘러넘친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공의 지취(志趣)를 아는 자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대저 어떤 지역이 중하게 되고 유명해지는 것은 미상불 그곳의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정(蘭亭)의 무림(茂林)도 일소(逸少)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 유상대의 수석(水石)도 문창(文昌)을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말하련다. 그리고 다시 1천여 년이 지나서 또 자직(子直)을 만나 증수(增修)하고 표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일을 행할 적임자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르겠다마는, 앞으로 자직의 뒤를 이어서 증수할 적임자가 또 누가 될는지.
[주-D001] 조지겸(趙持謙) : 
1639~1685.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의 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주-D002] 일소(逸少)의 고사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주-D003] 풍악(楓岳) 아래 고을 : 
강원도 고성(高城)을 가리킨다. 조지겸은 1681년(숙종7)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풍악은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주-D004]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 : 
12세 때를 말한다. 별은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으로, 옛사람들은 세성이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고 여겼다.
[주-D005]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 : 
황소(黃巢)를 가리킨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금을 파는 일에 종사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舊唐書 卷200下 黃巢列傳》
[주-D006] 매자진(梅子眞)처럼 …… 하면 : 
고운이 외방에 나가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자진은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자이고, 동묵(銅墨)은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매복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D007] 연문(羨門) : 
고대 선인이었던 연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 가를 유람하면서 연문자고 등의 선인을 찾았다고 한다.
[주-D008]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 : 
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을 읊은 절구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지척 간의 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권1에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주-D009] 난정(蘭亭)의 …… 것이다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

1) 고운집(孤雲集)』 > 孤雲先生事蹟 事蹟 泰仁流觴臺碑記, 韓國文集叢刊 1輯 

 

   고운 최치원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 (海雲)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열두 살 때 당나라에 건너가 열여덟 살 때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栗水縣尉)를 지냈고, 최치원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21세인 다음 해에 현위직을 내어놓고, 박사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고자 산에 들어가 詩作과 학업에 몰두하였으나 좌절을 맛봤다.  그러나 재입신을 위고 고병(高騈)의 추천을 받아 관역순관(館驛巡官) 되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24세 되던(880년) 해로 보인다.

   879(희종 6)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 이 스물 셋이었다.

   881년 고병(高騈)이 제도행영(諸道行營) 병마도통(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0의 난(亂)(875∼884)을 토벌하게 되자, 최치원을 종사(從事)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이때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보고 황소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 공로로 25세에 승무낭 시어사 내공봉(承務郞 侍御使 內供奉)에 올랐다.3) 

   고병의 문하에서 그는 비교적 한가하고 유복한 생활을 활용하여 문장을 연마하면서, 일류명사들과 광범위한 교류를 하였다. 특히 동년에 급제한 고운(顧雲)과는 서로 시(詩)를 화답하면서 교분을 나누었는데,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할 때 고운(顧雲)은 송별시(送別詩)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그와의 교류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심화되었던 道敎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최치원은 또한 24세나 연상이었고 예리한 기지와 풍자를 지녔던 나은(羅隱)과도 교류하였고, 그에게서 훗날 신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해 묵과할 수 없었던 강한 비판의식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방림십철(芳林十哲)의 일인으로 유명한 시인인 장교(張喬)와의 교분은 훗날 최치원이 벼슬에 초연하여 자연에 은거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최치원은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일급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이들의 기질과 의식도 내적으로 함께 포용하였다. 귀국 후 최치원의 활동 또한 그러한 문인들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아 그들의 영향력이 중요한 일인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28세 되던 해(884)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 희종에게 귀국을 청하였고, 당 휘종(僖宗)은 그에게 詔書를 주어 예빙사절로 신라에 보냈다. 최치원은 신라 사신으로 회남에 왔던 김인규(金仁圭)와 종형(從弟) 최처원(崔棲遠)과 함께 출발하였으나 풍랑이 심한 탓에 그 해 겨울을 곡포(曲浦)에서 지냈고, 그 이듬해인 신라 헌강왕11년(885)에 귀국하였다. 그의 귀국 동기는 오랫동안 부모 슬하를 떠나 있어 귀국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수년간 전란의 영향으로 당 제국은 혼란에 빠져있었지만, 고병은 누차에 걸쳐 조정의 출사명령에 불응하였다. 고병은 만년에는 신선술(神仙術)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였고, 최치원은 그의 밑에서 더 이상 희망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비명서(山碑銘序)에서도 최치원의 당나라 생활 시절에 내부의 환관의 발호와 번진(藩鎭)의 난으로 망국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민심의 피폐라는 당의 국내적 상황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귀국을 결심하는데 한 동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밖에도 외국인으로서 생활하는 고독이 절실했고 이것이 귀국의 결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을비 내리는 타국의 여관에서 스스로를 가엾게 여겨 동정하는 쓸쓸함을 선정(禪定)에 든 중으로 표현하거나, 타국을 떠돌며 고생하면서도 귀향하지 못하는 충을 읊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때마침 영접하러 온 최서원을 통해 경문왕 이후 국내의 안정된 상황을 듣고, 금의환향하여 크게 쓰임 받아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펼쳐보려는 기대를 가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885(헌강왕 11)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 등 벼슬을 지냈고, 외직으로 태산·천령·부성 등의 태수를 역임하였다.1)

   890(진성여왕 4)에 고운(孤雲)은 서른네 살의 나이로 태산군(太山郡) 태수로 부임하였다. 태산군은 태인군(泰仁郡)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태인면 일대다. 나라가 어지럽고 국운이 날로 쇠미(衰微)하자, 고운은 지방관을 자청하여 마침내 첫 번째로 나간 외직(外職)이었다. 그는 이 해에 또한 낭혜화상비문(朗慧和尙碑文)을 짓기도 했다. 고운은 공무(公務) 여가(餘暇)에 이곳 동진강 맑은 냇가에서 술잔을 띄우고 풍류를 즐기며 세상일을 잊었는데, 그 유적이 뒷날 유상대(流觴臺)라고 불렀다. 물론 유상대는 진()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소흥(紹興)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에서 벗들과 함께 술잔을 띄우며 놀았다는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을 사람들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는데 이것이 선현사(先賢祠).

   1483(성종 14)에 선현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 바로 태산사(泰山祠)이며, 이는 곧 무성서원의 전신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옛터가 정읍 칠보면 시산리 동진강변 최치원에 한 생생한 역사적 기록과 함께 남아있다.

   군에서 남쪽 7리쯤 가면 반석 같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밑에 흐르는 물이 굽이쳐 돌고 있다. 이곳이 문창이 굴곡진 작은 물길을 만들어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그 잔이 수로를 돌아 앞에 오면 시를 읊으며 왕일소(王逸少)의 고사(故事)’를 모방하던 곳으로 지금까지 부노(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고사가 되었다." 그 옆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정자를 세워 감운정(感雲亭)이라 하고 유상대비 (流觴臺碑,1970)가 건립되어 있다.

   감운정은 칠보 행단에서 흐르는 동진강 물줄기와 남쪽 석탄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만나는 자리에 지었다. 고운이 태산군수로 와서 선정을 베풀고 유상대를 만든 뒤 검단선사(黔丹禪師)와 함께 시를 읊으며 소요했던 곳이다. 동진시 왕희자가 난정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만들어 시회를 즐겼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문인들이 소영했던 자리이다.

  고운이 떠난 뒤 오랜 세월동안 빈 터만 남아 구전되고 있었다. 석지 채용신이 1919년에 그린 칠광도에는 무성서원과 송정 그리고 후송정이 나타 나 있으며, 특히 유상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유상대는 높은 석축을 쌓았고 주변 에는 동진강과 작은 하천이 흘러 지세가 물위에 부엽초처럼 떠있는 형상 같았다. 주변에 강이 있고, 느티나무와 버드나무 등 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2)

   이곳을 고사대(故事台)라 불러오다가 1682년(肅宗 8年) 현감 조상우(縣監 趙相愚 號 東崗)가 돌로 쌓고 유상대비(碑)를 세우고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兼)이 비문을 지었다. 그런데 1백년이 지나는 동안 유상대비는 홍수에 유실되고 물의 흐름도 바뀌어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1774년(正祖 18年) 현감 조항진(縣監 趙恒鎭)이 부임해 왔으니 공교롭게도 동강(東崗) 조상우(趙相愚)의 후손이었다.
   일찍이 태인 고을에서는 현감 조상우가 치적(治績)을 남기고 1년반 만에 내직(內職)으로 승진되어가니 그 치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현감 조항진은 선대의 불망비에 감격했을 뿐 아니라 선인(先人)들의 유업인 유상대가 처참히 헐어진 것을 보고 지방 유림과 상의하여 이를 복구하였다.
   그리고 변형된 하류의 원상(原狀)을 복구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조항진 현감은 1797년(正祖 21年)에 태인 향교 만화루(萬化樓)를 세운 치적도 있다.
   784년(正祖 8年) 2월 10일 고운선생의 영정(影幀)을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로부터 봉안해 올 때 이곳 유상대에서 머물러간 적도 있었다.
   이때 세웠든 유상대비는 유실되어 폐허로 내려오다가 1919년 유림(儒林)들이 그 유지(遺址)에 고운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감운정(感雲亭)을 세웠다.
   현재의 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는 1970년 추당 김인기(秋堂 金鱗基) 등 지방유림들이 세운 것이다.

   이 외에 태인 일원에 무성서원(武城書院), 피향정, 하연지와 더불어 고운 선생의 유서 깊은 유적지이다.

   또한 김제 벽성서원, 군산시 옥산원, 문창서원, 염의서원, 자천대, 현충단, 익산 단동사 등지에서 최치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

1) 최재영, “전국의 최치원 관련 유적지 답사를 통한 관광자원화 방안”, 『경주연구 』제24집 2호(경주지역발전협의회 부설 경주발전연구원 , 2015년 12월), 125. 

2) 앞의 책, 146~147. 
3) 최영성은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魚袋制度를 받아들여 성립시킨 시기를 대개 경문왕 13년(873) 이후 헌강왕 10년(884) 이전으로 보았다(최영성, 1998 大朗慧和尙白月寶光의 塔碑銘譯註崔致遠全集, 100쪽 주8).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할 당시 緋銀魚袋를 착용한 점으로 보아 이 紫金魚袋를 신라 조정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았다. 추만호도 6두품인 최치원이 檢校右衛將軍이라는 진골만이 향유할 수 있는 직위를 지녔다는 것은 이 시기에 골품체제가 해체되고 관료제로 이행해 나가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라 보았다(추만호, 1999 新羅末思想界의 動向新羅末高麗初의 政治社會變動, 신서원). 또한 이것을 보강하는 자료가 최치원이 받은 자금어대로, 이를 신라조정에서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재운은 최치원이 討黃巢檄文을 쓴 공로로 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것으로 보았다(이재운, 1999 앞의 책). 재인용.
 

 

 

 

 

 

 

 

南道 정자기행(4268)-정읍 유상대(流觴臺)
전라북도 옥구(沃溝)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하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이 신라 헌강왕(新羅憲康王)때 태산군수(泰山郡守 태인)로 재임중 검단대사(劒丹大師)와 더불어 시를 읊고 소요하던 곳 유상대(流觴臺)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583-3 유상대 유적비가 대신하고 있다.

옛날에는 물굽이를 만들어 놓고 둘러앉아 술잔을 물에 띄워서 잔이 물결 따라 흘러가는 대로 마시면서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운(韻)을 맞추어 시를 짓는 놀이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 하여 그 바위를 유상대(流觴臺) 라 했다.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에, “이곳에는 높은 산, 험준한 봉우리와 무성한 숲, 길게 자란 대나무가 있고, 또 맑은 시내 여울물이 난정의 좌우에 서로 비치는지라, 이를 끌어들여 굽이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운다.〔此地有崇山峻嶺茂林脩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이곳을 고사대(故事臺)라 불러오다가 그 후 태인현감(縣監 1656-1659년 재임) 윤이익(尹以益)이 구지(舊址)를 증수(增修)하였으며, 우의정을 지낸 당시 현감(1682-1683년 재임) 동강(東崗) 조상우(趙相愚 1640 인조18∼1718 숙종44)가 돌로쌓고 유상대비(碑)를 세우고  광주(廣州) 출신으로 소론의 거두 중 한 사람 부제학(副提學) 우재(迂齋) 조지겸(趙持兼 1639~1685)이 비문을 지었다.

태인 유상대의 비기(泰仁流觴臺碑記)에서 "관아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이 매번 여기에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하며 일소(逸少)의 고사를 흉내 냈다고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전한다.....다시 1천여 년이 지나서 또 자직(子直)을 만나 증수(增修)하고 표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일을 행할 적임자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르겠다마는, 앞으로 자직의 뒤를 이어서 증수할 적임자가 또 누가 될는지."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1백년이 지나는 동안 유상대비는 홍수에 유실되었으나 조상우(趙相愚)의 후손 1774년(정조 18) 현감(縣監) 조항진(趙恒鎭)이 부임해 태인고을에서는 현감 조상우가 치적(治績)을 남기고 선인(先人)들의 유업인 유상대를 복구하고 1797년(정조 21)에 태인향교 만화루(萬化樓)를 세운 치적도 있다.

이후 누대와 비석이 매몰되어 옛날의 흔적을 알 수 없게 됨을 개탄한 현지 인사들이 1919년에 그 자리에 다시 정자를 건립하였으니, 그 정자가 지금의 감운정(感雲亭)이다.

일대에 살았던 한정(閑亭) 김약회(金若晦)후손 김신채(金愼采 1665 헌종6년 1733 영조9)가 유상대 중수일에 들려 읊은 시(流觴臺重修日 偶吟)가  그의 문집 남계집(藍溪集)에 이렇게 읊으며 감회를 나타냈다.

 

오랜 세월 황량한 누대(樓臺)에는
잡초만 무성하였고,

유상곡수(流觴曲水)하던 옛 자취는 모두 슬픔을 안고 있었네.

중수(重修)한 오늘에야 안색(顔色)이 펴지니,
학사(學士)들의 노닐던 넋들이 갑자기 다시 온 것 같네.
千古荒臺蕪草菜 流觴舊跡摠堪哀 重修今日增顔色 學士遊魂倘復來

그러나 이때 세웠든 유상대비는 유실되어 폐허로 내려오다가 1919년 유림(儒林)들이 그 유지(遺址)에 고운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감운정(感雲亭)을 세웠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병조판서·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1833년(순조33)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1834(순조34) 7월 보름날에 쓴 교인 계원필경집서(校印桂苑筆耕集序)에  "계사년(1833, 순조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홍공(洪公)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얼른 교정을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陜川郡)의 가야사(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유구는 특히 농학에 기여한 바가 컸으며 35세에 순창군수로 있을 때 내려진,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綸音)이 있어 이때 그는 도 단위로 농학자를 한 사람씩 두어 각기 그 지방의 농업기술을 조사·연구하여 보고하게 한 뒤, 그것을 토대로 내각에서 전국적인 농서로 정리·편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국내 농서와 중국 문헌 등 800여 종을 참조하여 만년에 조선 후기 최대의 농서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완성한다. 또한 1834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는 구황작물인 고구마를 널리 보급하여 흉년을 당한 농민을 구휼하기 위해 종저보(種藷譜)를 편찬·보급하기도 하는 업적을 남긴다.


이곳에는 이산해(李山海)·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과 함께 ‘8문장’이라고 불리었던 이순인(李純仁 1543 중종38-1592 선조25) 등 그 무수한 문인묵객들의 속트림이 이어갔다.

二十年前向此遊 重來又値古臺秋 沙邊綺席靑燈亂 海外行車白髮愁
把酒自驚時序晩 題詩還戀水雲幽 應知勝會傳村巷 姓字千年不盡流

현재의 고운 최선생 유상대 유적지비(崔先生 流觴台 遺蹟之碑)를 1970년 추당 김인기(秋堂 金鱗基) 등 지방유림들이 세우면서 유상대(流觴臺)의 그 기나긴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고시(古詩)에 “사는 나이 백 년도 채우지 못하는데, 언제나 천 년의 시름 품고 있도다. 낮은 짧고 밤이 긴 것이 괴로우니, 촛불을 손에 잡고 노닐지 않을쏜가.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晝短苦夜長 何不秉燭' 했다.'

장자가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듣는다.無聽耳聽以心" 했다. 정자가 그러하다.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는 이유다.
문화.오인교  2017년03월08일 12시40분 한국매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