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당(城隍堂) 및 단(壇)
성황사 현의 서쪽 4리에 있다.1)
성황사(城隍祠)
관아의 서쪽 4 리에 있다.2)
태인면(泰仁面) 태성리(泰成里) 성황산(城隍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곳은 당우(堂宇)를 건설(建設)하였다. 거금(距今) 390여년전에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현감(縣監)으로 부임(赴任)하여 거산(居山)에 있는 읍(邑)을 이곳으로 이전(移轉)하고 치적(治績)이 대행(大行)하였음으로 읍인(邑人)이 그를 사모(思慕)하여 당우(堂宇)를 건설(建設)하고 선생(先生) 부처(夫妻)와 자녀(子女)의 초상(肖像)을 건설(建設)하고 삭망(朔望) 마다 관속(官屬)이 지성치제(至誠致祭)하며 새로이 임직(任職)을 당(當)했거나 소원(所願)하는 바 있으면 여기에 기도(祈禱)하였고 당시 리방(吏房)이 국세(國稅)를 경성(京城)에 조운(漕運)할 때는 필(必)히 여기에 치제(致祭)하여 중강(中江)의 풍파우(風波又)는 피적(被賊)의 예방(豫防)을 원(願)하였으니 이 제사(祭祀)를 속칭(俗稱) ‘연신(延神)맞이’라 하였다. 1894년(甲午) 11월 27일(양력 12월 23일)에 관군(官軍)과 동학군(東學軍)이 부근(附近)에서 격전(激戰)할 당시(當時) 당우(堂宇)가 총화(銃火)에 소부(夫燒)하였는데 초상(肖像)만은 다행히 면화(免禍)하여 당직(堂直, 당집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의 협실(挾室)에 묻혀 더니 11년 후 1905년(甲辰)에 군수(郡守) 손병호(孫秉浩)가 그 부인(夫人의 몽조(夢兆, 꿈자리)를 들어 당우(堂宇)를 중건(重建)하여 초상(肖像)을 이안(移安)하였고 거금(距今) 60년전(1936년 기준)에 고(故) 김우섭(金禹燮)씨의 주장하(主張下)에 지역유지(地域有志)가 협력(協力)하여 중건(重建)하였다. 일설(一說)에 의(依)하면 박필현(朴弼顯)이 이민(吏民)과 협동(協同)하여 반란(叛亂)을 일으켜다가 전주성(全州城)에 서 멸망(滅亡)함에 이민(吏民)이 그 비참(悲慘)함을 동정(同情)하여 설당치제(設堂致祭)하며 국법(國法)을 모피(謀避, 어떤 일 따위로부터 꾀를 써서 벗어남 )하여 영천(靈川) 신잠(申潛)의 초상(肖像)이라 가탁(假托, 빙자하다. 중국어 사전)하였다 하니 미지숙시(未知孰是, 올바른 것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
주(註) 어떤 군현(郡縣)을 물론(勿論)하고 읍(邑)의 주산(主山)을 성황산(城隍山)이라하며 산정(山頂)에는 필(必)히 성황단(城隍壇)이라는 제단(祭壇)를 세우고 성황신(城隍神)을 안위(安慰)하여 춘추(春秋)에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이니 군(郡), 현(縣) 내의 질병(疾病)과 재앙(災殃)을 예방하게 하는 것이다.3)
성황단((城隍壇)
태인면 태창리 성황산 정상에 있었고 지금은 없다.
주(註) 단의 넓이는 사방(四方) 2장(丈)5촌(寸), 높이는(高) 3척(尺) 4촌(寸)으로 된 것인데 춘분(春分), 추분(秋分) 상무일(上戊日)에 토지신(土地)과 곡물신(穀物神)께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이니 요컨대 토지(土地)와 곡물(穀物)은 오인생활상대본(吾人生活上大本)이어서 옛날에 각 군현(郡縣)에서 중대(重大)한 제전(祭典)을 하는 것이다.4)
사직단(社稷壇)5). 사(社)는 동편에 있고 직(稷)은 서편에 있다. 단의 너비는 각기 5장(丈), 높이는 3척 6촌이고, 사방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고, 오색의 흙6)으로 쌓는다. 예감(瘞埳)7)은 둘인데, 각기 두 단의 북쪽 계단[子陛]의 북편에 있으며, 남쪽으로 나오는 계단이 있고, 사방의 너비와 깊이는 물건을 넣을 수 있도록 한다. 제일(祭日)은 중춘(仲春 : 음력 2월)과 중추(仲秋 : 음력 8월)의 상무일(上戊日)8) 및 납일(臘日)9)이다.10)
-----------------------------------
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태인현.
2) 변승주 역주, 『여지도서(輿地圖書)』46 전라도 Ⅲ (디자인 흐름, 2009), 101.
3)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45∼46.
4) 梁昌成...[等編], 『泰仁誌』(1965), 79.
5) 사직단 : 국토지주(國土之主 : 토지신)인 사(社)와 오곡지장(五穀之長 : 곡식의 신)인 직(稷)에 대해 제사하는 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사직의 주인인 국왕이 국가와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특히 고려 성종은 10년(991) 윤2월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문물제도의 정비를 통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할 목적에서 사직과 함께 원구·태묘 등 국가적 예제를 시행하였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의 황도개경』, 창작과 비평사, 2002. 79·129~130쪽.
6) 오색의 흙 : 『서경(書經)』의 주서(周書)에는 “제후가 주(周)나라에서 명령을 받아 대사(大社)를 나라 안에 세운다. 그 유(壝)의 동쪽은 청토(靑土), 남쪽은 적토(赤土), 서쪽은 백토(白土), 북쪽은 흑토(黑土), 중앙은 황토(黃土)를 중첩하여 쌓는다. 장차 제후를 세우게 되면 그 방면의 흙을 파서 황토(黃土)로 싸고 흰 띠로 감싸서 토봉(土封)을 만든다.”고 하였다.
7) 예감 : 단묘(壇廟)의 제사에 쓰이는 희생(犧牲)의 털과 피를 감추는 구덩이, 또는 제례 뒤에 폐백과 축판을 묻는 구덩이를 말한다.
8) 상무일 : 상무(上戊)라고도 하며, 그 달의 첫 번째 무일(戊日)을 말한다. 무일은 일진의 지지(地支)가 무(戊)가 되는 날을 의미한다.
9) 납일 : 고려시대 대한(大寒)을 전후하여 가까운 진일(辰日)로 하다가 동지(冬至)로부터 세 번째의 술일(戌日)로 바꾸었으며, 조선시대에서는 동지 이후 세 번째의 미일(未日)로 하였다. 신라시대에서는 12월 인일(寅日)로, 중국에서는 세 번째 술일(戌日) 또는 진일(辰日) 등으로 삼았다. 납일은 섣달 하순경으로 나라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납향(臘享)이라 했다.
10) [네이버 지식백과] 사직[社稷] (국역 고려사: 지, 2011. 10. 20., 경인문화사)
'제3편 문화유적(삶의 자취) > 태인의 단묘(壇廟)'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성묘(關聖廟) (0) | 2018.05.30 |
---|---|
문묘(文廟) (0) | 2018.05.30 |
사직단(社稷壇) (0) | 2018.05.30 |
애련당(愛蓮堂) (0) | 2018.05.30 |
여단(厲壇) (0) | 2018.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