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역사(삶의 내력)/제6장 조선시대와 태인

제 5절 암행어사와 태인

증보 태인지 2018. 5. 29. 11:37

5절 암행어사와 태인

 

 

1. 1717(숙종 43)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영복 - 정치란 거문고와 같아서

 

   어사 조영복이 전라우도 태인 땅에서 겪은 이야기. 어사 조영복은 강직하게 고을을 다스렸으나, 간활한 아전들의 비리를 끝까지 단속하지 못한 김상옥의 사연을 밝혀낸다.

 

   숙종 43년 봄.

   장날을 맞은 말목장터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끓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매월 숫자가 38로 끝나는 말목장날이면 인근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갖가지 물건을 사고팔며 정을 나누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장터 한켠에 말이 쉴 수 있는 마방까지 갖춘 탓에, 서산의 마방, 서울의 말죽거리 등과 함께 배들평(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말목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사노 한필, 역졸 두 명과 함께 장터에 들어선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영복은 인파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이 연신 두리번거렸다.

   "선달님, 여깁니다요!"

   장사꾼 차림으로 감나무 아래 앉아 다리를 쉬고 있던 서리 김삼열이 손을 흔들었다.

   ", 김서방! 조금 늦었네. 많이 기다렸는가?"

   '선달''김서방'은 세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약속된 호칭이었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달님, 점심은 드셨습니까? 저는 아직 식전입니다마는……."

   "우리도 아직 식전일세. 국밥이나 한 그릇 먹세 그려."

   국밥집으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김이 설설 오르는 국밥그릇을 제 앞으로 당기며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릇을 비운 조영복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거처는 정했는가?"

   ", 태인현(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산외리(山外里) 동곡(東谷) 마을이란 곳에 맞춤한 민가가 있습니다. 이삼일 묵어도 좋을 듯싶습니다."

   "잘 되었네. 남의 눈과 귀를 항시 조심하도록 하게."

   "."

   "태인현의 민심은 좀 어떠한가?"

   "칭송 일색입니다. 태인 현감을 비방하는 자는 여태까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작년에 태인현 아래쪽 아홉 개 면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답니다. 위쪽의 여덟 개 면은 그래도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라, 관아에서는 가을에 꿔 준 곡식을 받거나 재해 입은 논밭의 세금을 감면해 줄 때 위쪽과 아래쪽 면에 차등을 두었다고 합니다. 기민을 구제할 적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래쪽 면들은 더욱 신경을 써서 구제하여 집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위쪽 면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잘한 일이라 칭찬하였답니다. 다른 고을 수령들처럼 부유한 백성들에게 진휼곡을 강제로 뜯어내지도 않고, 차근차근 저축한 곡식으로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도록 명하니 고을의 부자나 가난한 백성이나 모두 입을 모아 칭송하고 있습니다."

   "……."

   ", 태인현에서는 먹고살 만한 가호에게서 으레 보리와 쌀 각각 한 말씩을 거둬서 고마청(雇馬廳)에서 쓰는 경비를 충당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매 호()가 내야 하는 보리에서 3, 쌀에서 2되를 줄여주었고, 금년에는 보리는 아예 받지 않고 관에서 보충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속목(虎贖木 : 호랑이 가죽 대신 바치는 포목.)을 돈으로 환산하여 백성들에게 매년 징수해 온 152냥도 관에서 따로 준비하여 상납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부민(富民)"들에게는 진휼곡(賑恤穀)을 강제로 징수하지 않았고, 또 돈과 포목을 지나치게 많이 배정하여 (곡물을) 무역하지도 않았고, 단지 남은 저축으로 이웃을 구제하도록 명하니, 온 고을이 칭송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으음, 과연 김상옥이군."

   고개를 끄덕이는 조영복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시는 분입니까?

   "사적으로 알지는 못하나 태인 현감 김상옥에 대해서는 더러 들은 바가 있다네. 젊은 사람이 꽤나 강직하고 똑똑하다고 칭찬들을 하더구먼."

 

   태인 현감 김상옥.

   사헌부 장령을 지낸 김호의 아들로, 20대 중반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곧바로 벼슬길에 오른 수재였다. 조영복보다 아홉 살 아래인 김상옥은 태인 현감으로 외지에 나갈 때까지 세자시강원의 사서와 문학, 지평·수찬·교리·장령 등을 역임하였으니, 김천 군수, 예천 군수를 지내다 한양에 돌아와 지평·장령을 지낸 조영복과 모르는 사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엄중한 임무를 띠고 내려온 조영복은 구태여 서리에게 자세한 내막을 알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허면 슬슬 나가볼까?"

   "동곡 마을로 가시겠습니까?"

   "아닐세. 자네는 역졸들을 데리고 동곡에 가 있게. 나는 태인 읍내에 잠시 들렀다 가겠네."

   "그러면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말목장터에서 김삼열 일행과 헤어진 조영복은 사노 한필과 함께 태인 읍내를 향해 떠났다. 조영복이 굳이 읍내에 나가 보려 하는 것은 잡다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번다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민심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태인에 도착한 조영복이 읍내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문고 소리를 따라 가 보니 멀리 피향정(披香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높다란 누정(樓亭)에 의관을 갖춘 양반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조영복은 순간, '이런 흉년에 하릴없이 기생 끼고 잔치판을 벌이는가?' 하는 생각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은 기생 잔치판도, 흐드러진 술판도 아니었다. 누정에 모여 앉은 사람 중에 두 명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고, 또 두 명은 붓글씨가 한창이요, 또 다른 한 명이 홀로 거문고를 타는데 그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조영복은 그 소리에 끌리듯 저도 모르게 누정으로 다가갔다. 따사로운 햇볕에 굳게 얼었던 얼음이 풀리는 듯, 사내가 타는 거문고 소리에 절로 마음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사내의 연주가 끝나자, 조영복은 감탄하여 말했다.

   "거문고 소리가 참으로 신비스럽군요! 옛날에 거문고를 잘 탄다던 호파(열자 제 5편 탕문에 나오는 거문고의 귀재.)의 거문고 소리가 바로 이와 같을까요?"

   초라한 차림의 길손이 인사도 없이 덥석 건네는 말이건만,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일찍이 호파가 거문고를 타면 새들이 날아와 춤을 추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놀아다 하니, 저의 하찮은 재주를 어찌 선인의 경지와 비교할 수 있겠는지요."

   그의 곁에서 붓을 놀리던 또 다른 사내가 자리를 내어 주며 말했다.

   "길손께서 바쁘지 않으시면 이 누정이 그리 비좁지는 아니하니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고맙습니다."

   누정에 오른 조영복은 탁 트인 사위를 둘러보며 내심 감탄해마지 않으면서도, 태인 양반들의 생각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뼈있는 말을 던졌다.

   "태인이 흉년을 당해 그저 시름겨운 고을인 줄로만 알았는데, 옛 법도와 풍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몹쓸 기근에 마음까지 잠식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조영복의 그 말에 바둑을 두던 늙수구레한 선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칭찬으로 하신 말씀만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이 고을의 실상이 그리 부끄럽진 않소이다. 현감이 비록 젊으나 선정의 의지가 충만하고, 고을 백성들 중에 굶주려 거리를 떠도는 자가 없으니 길손의 말씀대로 아직은 이 몹쓸 기근에 마음까지 피폐해지진 않은 듯합니다."

   선비의 말에 움찔한 조영복은 상체를 굽히며 말했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나 봅니다. 나쁜 뜻은 아니니 저의 무례를 과히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허허, 무례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거문고 소리에 이끌려 이 누정에 오신 것만으로도 두터운 인연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헌데, 제가 오늘 이 고을에 와서 이곳 현감의 칭찬만 수차례 들었습니다. 태인 현감이 정말 그렇게 강직하고 어진 분이신가요?"

   "과연 그렇습니다. 처음에 부임했을 땐 나이도 젊고 생김새도 날카로운 편이라, 사실 크게 마음을 놓진 못했었지요. 허나, 다스림에 일관성이 있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질어, 갈수록 믿음이 갑니다."

   그러나 그 순간 조영복은 거문고 타던 사내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거문고 사내는 조영복과 눈이 마주치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병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병통이라니요?"

   사내는 한 손으로 껴안고 있던 거문고를 다른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치란 것은 사실 이 거문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거문고와 같다니요?"

   "너무 조여도 안 되고, 너무 풀어놓아도 못쓰는 법입니다."

   바둑을 두던 선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의 그 거문고론이로구먼!"

   조영복은 무슨 말인지 몰라, 두 사내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거문고 사내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거문고 줄이 늘어지면 어떻겠습니까?"

   "소리가 나지 않겠지요."

   "줄이 너무 팽팽하면 어떻겠습니까?"

   "끊어집니다."

   "늘어짐과 팽팽함이 알맞으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맑은 소리가 두루 퍼지게 되겠지요."

   "정치도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거문고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바둑 두던 사내가 투덜거리며 조영복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 그 사람! 선문답하고 앉았네. 손님, 제가 이야기해 드릴 테니 저 사람 하는 말엔 신경 쓰지 마십시오.

   "? 예에……."

   "그러니까 태인 현감 김상옥은 들으신 대로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아주 강직하고 명쾌하게 정치를 했습니다. 각종 세금 정책이며 진휼 활동, 그리고 간교한 아전들을 적발해 내고 엄히 다스림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지요. 헌데 태인 관아에는 조한경(曹漢卿)이라고 아주 간교한 아전 하나가 있었습니다. 관아 창고를 제 집 안방 문 열 듯이 해 왔던 자인데, 이 자가 어찌나 교활하고 능수능란한지, 내려온 수령마다 두 손 두 발 다 들다시피 했었지요. 그러다가 임자를 만난 겁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조한경이의 사람됨이 어떤지 직감한 현감은 이 자의 버릇을 고쳐놓으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일전에 이 자가 어떤 부정 사건에 개입됐다는 증거를 포착한 뒤 그냥 불러다 매를 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조한경이가 보통 질긴 놈이 아니거든요. 몇날며칠 아무리 족쳐도 절대 안 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수십 장을 맞아 녹초가 되었으니 현감은 일단 조한경을 집으로 보냈지요. 그런데, 그만 장독이 퍼졌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겁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현감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지요. 그 뒤부터는 매사에 지나치게 경계하는 마음을 품어서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초기의 개혁 의지가 다소 흔들리는 듯한 모습입니다."

   바둑 두던 사내가 긴 이야기를 끝내자 조영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조영복은 태인 현감 김상옥을 비난하거나 비웃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듯하였다. 조영복 역시 젊은 나이에 외지에 나가, 느물느물하고 교활한 아전과 토호들에게 시달리며 열패감에 휩싸이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정치란 이 거문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너무 조여도 안 되고, 너무 풀어놓아도 못쓰는 법이지요.'

   조영복은 비로소 거문고 사내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어디 정치뿐이겠는가? 이 모든 인간사, 다난한 삶이 선사한 이 모든 천당과 지옥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어느덧 태인 현감 김상옥의 임기도 끝나간다 하니, 내일 밤에는 그와 함께 술을 한 잔 기울여도 좋으리라. 그런 생각에 젖어 있는 조영복의 귓전에 다시 봄날의 꿈같은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1)

 

 

2. 1808(순조8) 전라좌도 암행어사 이면승 서계(書啓)2)

 

   이면승이 전라좌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1808(순조 8)에 전라좌도의 무주, 담양, 순천, 능주, 금산 등지를 다녀와 이 서계를 바쳤으며, 각 추생지역의 전현직 수령들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올리고 있다.

 

   서계(書啓)

 

   무주 부사(茂朱府使) 이영수(李英秀)는 관아의 아전과 하인들이 가난한 백성들의 구실을 대납해 주고 자신의 집에서 일을 시켜서 오래 전부터 나쁜 폐단이 되어왔으나 친히 결세(結稅)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살피니 크게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화전(火田)의 세금을 집집마다 모두 거두어들이니 절로 잘못된 예가 되어 백성들은 농사를 지으려고도 하지 않는데 또한 납세(納稅)로 거두어 들였습니다. 창고를 관리하는 관리가 환곡을 빌려간 집에서 목화를 바치게 하고 서원(書員)이 황무지에서 고복(考卜)하여 세금을 거두는데도 (부사가) 유약하여 폐단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병이 있어서 간혹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어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안정헌(安廷?)은 늙었어도 기력이 쇠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다스림에 기운과 힘이 있습니다. 곡식의 빛깔이 검고 거친 것이 폐단이 된 것이 오래 되었으나 농간을 부리는 것을 살피고 원망함을 떠맡자 점차 정실(精實)한 곡식이 되었습니다. 묵은 포흠(逋欠)을 조사하여 징수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서리(胥吏)를 물리쳐서 계방(?: 아전들에게 몰래 뇌물을 주고 공역을 면제받으려는 것)을 혁파하자 황구첨정과 백골징포의 폐해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언(堤堰)에 함부로 농사짓는 일도 금하여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법을 지켜 어지럽지는 않으나 불법으로 소를 잡아먹고 대속(代贖)하여 내는 돈을 지나치게 거두니 백성들이 원망이 없지 않습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 임후상(任厚常)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고관(高官)으로 있다가 지방관으로 부임하였는데, 편안하고 간략하게 다스리며 백성을 성심으로 사랑하고 송사를 명쾌하게 판결하였습니다. 땅이 커서 폐단도 크니 늘 바로잡을 뜻은 있었으나 향임(鄕任)이 간사하고 아전들이 교활하여 위력으로 제압하는 힘이 조금 부족합니다. 환곡을 거두어 창고에 넣을 때 떨어지는 곡식들을 관아의 쓰임에 포함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옳지 못한 예가 되어 떨어진 곡식을 줍는다는 명목으로 창고를 관리하는 아전에게 곡식을 주게 되어 이에 끝없는 폐단이 되었으니 그럭저럭 관습을 따르고 잘못을 답습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능주 목사(綾州牧使) 조용진(趙用鎭)은 부임해 온 지가 반년(半年)이 되었는데 자애롭고 진실하게 백성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대동미(大同米)를 운반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지나치게 징수하여 폐해가 되고 있으나 예전에 비하면 줄여서 적게 해준 것으로 백성들에게 혜택이 됨이 적지 않습니다. 관아의 임시비(臨時費)를 충당하기 위해 군민(郡民)에게 거둔 돈과 곡식을 보관한 창고가 완전히 바닥이 나서 꾸어준 환자 곡식을 그 해에 받아들이지 않고 해마다 이자와 모곡만을 받아들이는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병적(兵籍)에 올라 있는 장정을 숨기고 올리지 않아 부역을 거듭 부담하게 되었다는 원망이 있습니다. 누적되어 온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성의는 매우 간절하나 서리들을 단속하는 정사에 있어서 강직하고 매서운 것이 부족합니다.

 

   운봉 현감(雲峰縣監) 신순(申純)은 백성을 대하는 것이 자애롭고 진실하여 다스림이 자상하고 근실합니다. 환곡(還穀)을 갚아 바치는 데에 뇌물을 주어 장부에서 빠진 집을 조사하여 수십 호()를 찾아내자 서리들의 농간이 점차 드러났습니다. 전세(田稅)로 내는 콩을 쌀로 대신하여 바친 자들에 대해 그 친척이나 관계자에 200냥을 물어내게 하여 백성들에게 돌려주자 자못 칭송하고 기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서리가 포흠(逋欠)한 전세(田稅)900여 포()가 되었으나 미처 깨달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사사로이 빌린 쌀이 거의 천 석()에 가까우니 잘못된 예를 답습함이 많습니다.

 

   금산 군수(錦山郡守) 조영경(趙榮慶)은 창사(倉舍)를 새로 지어 노적(露積)하는 폐해를 사라지게 하였고,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는 부역을 없애니 부역을 줄인 은혜가 없지 않습니다. 관속(官屬 : 관아의 아전과 서리)들의 경우에 노자(路資)라는 명목을 만들어 지급하면서 환곡미에서 덜어낸 것이 120석입니다. 매년 거짓으로 밑천을 만들어놓고 잉곡(剩穀 : 稅穀이나 貸與穀 등을 징수할 때 생기는 보관상의 손실을 이유로 1석당 한 되씩을 첨가하여 징수하는 곡식)을 거두어 양식을 마련한 것은 일이 칭찬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스스로 법에 어긋나는 행위에 빠진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보리 470석과 콩 311석을 사사로이 모곡(耗穀 : 각 고을 창고에 저장한 양곡을 봄에 백성에게 대여하였다가 추수 후에 받아들이며 말[]이 축나거나 창고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10분의 1을 첨가하여 받는 곡식)에서 나누어 취하였습니다. 병인년(丙寅年)의 환곡 중에서 콩 255석과 벼 352석을 돈으로 바꾸어 사사로이 써버린 뒤에 봄에 바친 결전(結錢 : 토지세의 명목으로 바친 돈)으로 겉으로는 되갚아 본전에 채워놓은 것으로 해놓고, 여름에 군포(軍布)를 거둔 것을 가지고 봄에 쓴 결전(結錢)으로 납부하여 채우고, 위의 돈들은 가을에 돈을 거두는 것을 기다려 갚고, 또 그 잉여분을 취하니, 이것이 바로 윤회요리(輪回料理 : 축이 난 세금을 나중에 거둔 것으로 갚고 이자를 받아 본전에 충당시키는 탈세의 방법)의 술수입니다. 이 군()의 환곡(還穀)은 전에는 석()을 단위로 내어주었는데 지금은 말()을 단위로 내어주고 있고, 바치는 것은 대곡(大斛)을 단위로 하고 내어주는 것은 소두(小斗)를 단위로 하고 있으니 한 곡()을 내어줄 때마다 남는 것이 넉넉히 세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쌀 100석과 콩 150석과 벼 300석이 남는데 이것을 창고의 통상적인 예()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창고를 처음 열었을 때에 먼저 환곡의 원곡(元穀)에서 덜어내어 쓰고 봄이 된 뒤에 나누어줄 때 소두(小斗)로써 잉곡(剩穀)을 취하여 비로소 그 수를 충당하는데 이 한 조목은 비록 잘못된 것을 답습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창잉(倉剩 : 剩穀)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대부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보민(補民 : 백성를 돕는 것)이겠습니까. 관아의 돈 3,400냥은 바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장리(長利 : 곡식을 꾸어주고, 일년에 꾸어준 곡식의 절반을 받는 변리)로서 이자를 거두어 백성들의 부역을 방지하는 것인데 백성들의 필요에 따라 응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관청의 쓰임에 귀속시켰고, 상거래의 세금 중에서 나온 500냥과 결가(結價 : 토지 한 결에 대한 조세의 액수)에서 나온 것과 부가(浮價 : 주교사(舟橋司)에서 부교(浮橋)를 가설하는 데 드는 비용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 500냥을 또한 관청의 쓰임으로 귀속시켰으나 진상(進上)하며 가미(價米 : 물품ㆍ용역 등의 대가로 주는 미곡) 50석을 새로 거둔 것은 바로 도리어 민간에서 죽은 사람에게 매긴 세금으로 거둔 것입니다. 견마(牽馬)하는 인부들에게 나누어주는 돈은 군가(軍價 : 군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에 바치는 돈) 안에 고마청(雇馬廳 :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관청에서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에서 작성한 지출의 절목이 있으나 고마청의 쓰임으로 바친 나머지는 또한 사사로이 착복하였습니다.

   때문에 들어온 쌀 170석은 또 민간에서 규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징수한 것입니다. 창고에 남아 있는 쌀과 벼와 콩 중에 장부에 명목만 남아 있는 것이 합치면 377석입니다. 저축하여 둔 쌀 중에 쓰고 남아 있다는 50석 또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환곡미 3,400여 석과 벼 19,011석과 콩 1,528석을 모두 봉적(? : 물건을 거두어 받아들이고 곡식을 사들이는 일)할 때에 돈으로 환산하여 받아들여서 수령과 아전들이 물건을 요량하여 팔아먹는 밑천으로 삼아버리고, 분환(分還 : 환곡을 나누어주고 돌려받는 것)한 것을 기록한 장부에 실려 있는 명목에 따라 억지로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쌀을 받은 것은 겨우 1,300석뿐입니다. 농사를 지을 동안 먹을 식량이 끊어져서 원성이 그치지 않고 귀한 것을 천한 것으로 바꾸어 쌀이 간혹 벼가 되고 적은 것을 많은 것으로 바꾸어 벼가 간혹 콩이 되어버리니 마음대로 바꾸고 나누어 창고의 장부가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나누어줄 콩 1,000석과 나누어줄 쌀 500석을 청하여 얻고서는 애초에 환곡으로 나누어주지는 않고 빼돌린 세금으로 옮겨서 보충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법을 어긴 것이 이처럼 낭자하여 그저 전하는 말만 듣고 있을 수 없기에 행적을 드러내어 읍으로 들어가 부정으로 취득한 물품들의 실상을 조사하여 찾아내고 고을의 아전들을 엄히 다스렸습니다. 해당 수령은 두려워하고 반성할 것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분한 마음에 생긴 독기를 마음대로 부려 신이 고을의 경계를 벗어난 뒤에 읍내에서 5(五里)쯤에 있는 신이 일찍이 묵었던 객점(客店)의 주인을 잘못한 정사를 밀고한 사람으로 의심하여 악형을 많이 가하여 공고(工庫 : 工房 소관의 창고)에 가두어두고는 음식조차 넣어주지 못하게 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니 필경 본업을 잃고 떠돌아다니며 전주(全州) 근방에서 빌붙어 살면서 도로에서 울부짖으니 그것을 보면서 마음이 참담하였습니다. 평민들에게 잘못된 폐해를 입힌 것은 놓아두고 따지지 않더라도 임금의 명을 능멸한 것이니 그 죄가 얼마이겠습니까? 이러한 자를 놓아두신다면 군왕의 명이 베풀어질 곳이 없을 것이고, 암행어사의 암행이 닿을 곳이 없을 것이며, 대궐의 기강 또한 뒷날의 폐단에 이어질 것입니다. 탐욕스러워 법을 어기는 것들은 오히려 사소한 일에 속합니다.

 

   전 금산 군수(前錦山郡守) 유한기(兪漢紀)는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꺼리는 것이 없어서 백성들의 원망이 지금도 여전히 많습니다. 환곡을 돈으로 환산한 것으로 거두어 밑천으로 삼고, 양호(養戶 : 부자가 천민의 구실을 대납하여 公役을 면하게 하여, 자기 집에서 대신 부리는 民戶)의 민결(民結 : 백성들이 소유한 논밭의 結卜(면적 단위))에서 잉곡(剩穀)을 거두어 후임자들에게 도덕과 의리는 무시하고 이윤만을 추구하는 계기를 열어주었고, 백성에게 끝없는 폐해를 끼쳐 악행이 미친 곳은 지금도 소생하여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축을 기르는 목장에 출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서 끝내 스스로는 그 둘레를 베어내고 사사로이 쓰는 땔감으로 긁어모으면서 말하기를 법을 어기고 베어낸 것이라고 하며 그 모두를 백성을 부려서 옮겨 자신의 쓰임으로 채웠습니다. 또 이 군에서 사용하는 땔나무는 매 4(四結)마다 20속을 바치게 하는데 매속(每束)은 돈으로 환산하면 1(一錢)이 되어 백성이 오히려 많다고 여기거늘, 매속(每束)마다 일전을 보태어 바치게 하여 마침내 잘못된 예가 되었으니 백성이 삶을 지탱하고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관아의 앞산에 유선주(遊仙樓)를 짓고 그 아래에 연못을 파서 놀며 구경하는 장소로 만들었는데 오로지 백성들의 힘을 사용하면서도 매질하기를 낭자하게 하며 황구첨정과 백골징포를 원통해 하는 백성을 돌보지 않고 문지기에게 몽둥이를 들고 있게 하여 백성들의 탄원을 막으니 읍민들의 원성과 욕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세월이 오래 된 일이라 하여 따져 묻지 않으신다면 금산 백성들의 실정에 맞게 보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진안 현감(鎭安縣監) 이희찬(李羲贊)은 송사를 판결하는 것이 밝고 아전들을 단속함이 매우 엄정합니다. 환곡은 말[]로 바치는 것을 금하였고 봄에 땔감을 바칠 때에도 돈으로 환산한 값을 줄여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현의 빈 호구의 수가 거의 1,000호에 가깝기 때문에 대신 납부할 사람을 정하지 못한 군포(軍布)와 보충하여 납부하지 못한 조세를 면임(面任 : 면의 업무를 맡아 보는 사람)이 대신 납부하게 하여 잘못된 일을 없앤 공이 없지 않으나 면임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고 하면서 바꾸지 못한 것은 허물입니다. 수령의 쓰임과 화전세를 걷는 등과 궁궐에 바치는 물품의 양을 늘리는 등의 일은 잘못을 답습하는 잘못입니다.

 

   정읍 현감(井邑縣監) 윤택렬(尹宅烈)은 정읍을 도내(道內)에서 폐해가 가장 심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매 가구에 부가되는 공역(公役)으로 말하자면 팔도(八道) 어디에도 없는 구미(口米 : 인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쌀로 바치는 것)가 있어서 양반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옹알거리는 갓난아이와 예쁘장한 계집아이까지 납세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 포함시켜 놓았습니다. 이 법으로 탐학을 자행하는 이외에 민고(民庫)의 쓰임으로 거두어들이기를 인구수에 따라 지나치게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감영(監營)에 바치는 풀가루를 한 말 닷 되를 바치게 하여 돈으로 환산하여 열 냥을 내게 하고, 백지(白紙) 두 속()을 바치게 하여 돈으로는 두 냥을 바치게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끝내는 소용되는 돈 한 냥 7, 8전을 쌀 한 석으로 만들어 인구수에 따라 바치게 하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풀가루 한 말 닷 되를 돈으로 환산한 것이 넉넉히 쌀 여섯 석이 되어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해마다 더해져서 삶을 지탱하여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해당 아전이 훔쳐먹은 것이 아님이 없거늘 수령의 눈이 어두워 살펴서 깨닫지 못하고 금하여 단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정(軍政)으로 말하자면 거듭되는 부역을 견디지 못하여 백성들이 모두 남서(南西)의 두 방면으로 유리하여 흩어져 버리니 빈 가구수가 거의 반에 이릅니다. 병적에 이름만 올라 있는 장정의 명목 중에는 친척에게 징수할 곳도 없는 사람이 있고, 사색보(四色保 : 조선시대에 전라도 지방에 두었던 네 가지 보인으로 進上保軍器保官匠保紙物保를 이른다)의 쓸데없는 인원이 350명에 이르는데도 줄일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그것의 흠결이 있을 때 보충하려는 방법입니다. 환정(還政)으로 말하자면 아전이 환곡을 빌려간 것과 아전이 축을 낸 포흠(逋欠)을 거두어들인 것이 줄었습니다. 이른바 해당 감색(監色)이 밤에 창고를 열고 곡식의 빛깔을 살피지 않고 양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니, 오직 창고에 남아 있어야 할 쌀을 충당하여 납부하는 것만을 일삼아 쭉정이만 남은 곡식이 태반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납부한 곱고 흰쌀을 빛깔을 바꾸기를 꾀한 것이 되니 백성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심지어 이 읍이 어느 때에나 혁파될까라는 노래가 불려지고 있어서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을 미루어 알 수 있는데도 우유부단하고 게으르며 사리에 밝지 못하여 오로지 일을 맡아하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법을 어긴 것이 없다고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곡성 현감(谷城縣監) 이종명(李宗明)은 농사일을 독려하는 것을 부지런하여 전야(田野)를 순시함에 게으르지는 않으나 순시하는 일정을 지나치게 촉박하게 하여 살피지 못하는 때가 있어서 옥사에 갇혀 있는 무리들이 자신들이 무슨 죄냐고 반문하기도 하고 백성들의 소송이 간혹 여러 날 지체되어 간악하고 교활한 향리들이 틈을 타서 일을 처리하기도 합니다. 지난 겨울에 바쳐서 갚은 환곡을 돈으로 바꾸어 바칠 것을 과다하게 하여 바칠 것을 독책(督責)하는 일이 올 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본읍(本邑)의 빙정(氷丁)은 예전부터 폐단이 되었기 때문에 읍민들이 벼를 납부하여 그것에서 이자를 불려서 부역을 막고자 하였는데, 고마청(雇馬廳)에서 이것을 옮겨서 고마(雇馬)의 비용으로 충당하라고 했다며 또 내면(內面)의 장정들을 시켜 얼음을 캐게 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길에 가득합니다.

 

   구례 현감(求禮縣監) 김광호(金光浩)는 잘 다스려지기를 마음으로 간절하게 소원하여 정사의 잘못이나 흠을 나무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관수미(官需米 : 수령의 양식으로 충당되는 쌀)와 결역미(結役米 : 관청의 아전들에게 양식거리로 주는 쌀)를 번갈아 나아가 거둘 때 아전들이 장부에 농간을 부려 과도하게 징수하여 훔쳐먹는 행위가 이미 오랜 병폐가 되었습니다. 금년의 관수미(官需米)46석을 더 바치게 하고 결역미(結役米)168석을 더 바치게 하였는데, 조사하여 바로잡고 잘못을 답습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수령이 자신을 살찌우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그 아래의 관속(官屬)들이 농간을 부린 일이니 진실로 깨달아 살피지 못한 잘못은 있겠으나 임지에 이르러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 반드시 가혹하게 따질 것은 아닙니다.

 

   동복 현감(同福縣監) 송운재(宋雲載)는 부임하는 날[庶民望蘇之日 : 백성들이 좋은 목민관이 와서 자신들을 소생시켜 주기를 바라던 날]부터 잘못된 폐단을 깨끗이 없애겠다는 뜻이 있어서 임지에 온지 일년에 다스림을 근실하고 부지런히 하여 백성을 권면하여 흥기시키는 노력이 있었으나, 세금을 징수에서는 잘못된 전례를 답습한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화순 현감(和順縣監) 윤행철(尹行澈)은 부임해 온 처음에는 업무에 생소해하였으나 점차 단련되고 익숙해져서 폐단을 살피는 것이 상세하고 선비들을 격려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보리로 환곡을 징수할 때 농간을 부린 아전을 곤장으로 쳐서 병폐를 없애니 백성들이 환곡을 정밀하게 받아들인다는 칭송을 하였습니다.

 

   광양 현감(光陽縣監) 김종철(金宗喆)은 부임해 온 지 일년이 되었으나 어리석어 살펴서 깨닫는 바가 없고 읍의 크고 작은 일들을 오로지 아전들과 책객(冊客 : 지방 수령이 문서나 회계 따위의 일을 맡기기 위하여 데리고 다니는 사람)에게 맡겨놓고 총애하는 계집의 방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소()을 제기하면 풍헌관(風憲官 : 벼슬아치를 규찰하며 기율과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의 도장을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사정을 아뢸 수 있게 하였고,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좌수(座首 : 지방의 에 둔 鄕廳의 우두머리)가 지휘하는 것을 들은 연후라야 비로소 판결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뇌물을 바치는 문호를 크게 열어 백성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오직 창고의 곡식만을 마음에 두어 백성들에게 줄 환곡에 농간을 부리며 환곡을 나누어주는 것을 여러 차례 빠뜨리니 광양의 백성들만 유독 나쁘게 되었다는 말이 길거리에 시끄럽게 들리게 되었습니다.

   감영(監營)에 나누어주었다고 보고한 2,000석 외에 거짓으로 쌀 3,561석을 남겨놓았고 거짓으로 벼 977석을 남겨놓았는데, 그 안에서 사사로이 나누어준 쌀이 1,898석이고 벼가 432석이며, 각 창고의 관리들과 영주인(營主人)이 포흠한 쌀이 합치면 641석입니다. 1,020석과 벼 545석은 모두 팔아먹은 것이고, 그 중에 쌀 607석은 수령이 직접 팔아먹은 것입니다. 607석 중에서 300석은 방납세(防納稅) 150석을 뒤에 한 석을 환곡미 두 석으로 대신하여 가을에 환곡을 거둘 때 빈 숫자를 채우기로 하고 먼저 거두어서 쓴 것이고, 100석은 환곡미를 대여해 준 것이며, 207석은 모두 아전들이 눈독을 들여놓은 물건을 빼앗은 것으로 아전들이 고의로 창고의 곡식에서 빼놓은 것을 수령이 취하여 쓰고 거짓으로 있는 것처럼 기록한 것입니다. 아전과 서리배들은 농간을 부린 자취를 감추려고 쌀 1,111석과 벼 559석을 환곡으로 나누어준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나누어준 것을 기록한 장부를 작성하였습니다. 수령의 신분으로 비단 범법행위를 금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도리어 범법행위를 하여 거짓 문서를 작성하여 자신의 범법행위를 감추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너무도 해괴한 일입니다. 이처럼 불법을 저지른 부류들은 일각이라도 목민관의 반열에 둘 수 없어서 우선 봉고파직(封庫罷職 : 어사나 감사가 나쁜 정사를 행한 수령을 파직하고 官庫를 단단히 봉하여 잠그는 일)하였습니다.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의수(李義秀)는 백성을 사랑하기를 참되게 하고 송사를 판결하기를 공평하게 하였습니다. 관속(官屬)들이 마을에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여 기율(紀律)이 엄격하게 지켜지게 하였습니다. 환곡의 폐단이 이미 고치기 어려운 지경이었는데 사창(社倉 : 환곡을 보관해 두는 창고)에 바친 곡식과 아전들이 납부한 검고 거친 곡식을 모두 백성들의 집에 돌려주었습니다. 해창(海倉 : 바닷가에 있는 창고)에 보관한 선저미(船儲米 : 배를 만들거나 고치는 비용으로 쓰기 위하여 저축한 쌀)는 백성들이 납부한 곱고 알이 꽉 찬 곡식이었는데 모두 아전들이 셈하고 처리하는 데 맡기고 아전들의 농간을 살피지 못하자 백성들의 원망이 크게 일어나자 통영(統營 : 軍營의 이름으로 통제사가 있는 統制營)에서 벼 1,000석을 만들어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예전의 것들은 일의 이치로는 응당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하겠지만 이미 돈으로 바꾼 것을 아전들이 모두 삼켜버려서 마침내 1,000냥의 포흠(逋欠)이 되었지만 일찍이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가을이 이미 깊어 새 곡식이 나오게 되니 나누어줄 쌀이 950석이고 나누어줄 벼가 3,950석인데 모두 허가를 받아 나누어주었으나 3,000석을 아직 나누어주지 못하였는데, 그 곡식을 도정(搗精)하지도 못하였으니 나누어주자면 또 때를 넘기게 될 것이고 아전의 손에 일임하자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게 될 것이라서 그만두게 할 수 없으니 체직(遞職)시키시고 죄를 따지지는 마십시오.

 

   흥양 전 현감(興陽前縣監) 이계는 3년 동안 수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곱 번 좌수(座首)를 바꾸었고, 향임(鄕任)으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뇌물을 받지 않고는 잘못을 저지른 자를 봐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저지르고 수령이 눈감아 준 자들은 그 채무를 갚는 것입니다. 오직 백성들에게서 갈취하는 것만을 일삼아 고을의 풍기(風紀)가 크게 무너지고 백성들의 원성이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임기가 끝나서 교체되는 때에 좋은 벼슬에 임명해 줄 것을 부탁하며 뇌물로 바친 돈이 1,400냥에 이를 정도로 많아 탐욕스럽고 더럽다는 소리가 길거리를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병인년에 크게 기근이 들자 개인적으로 진휼(賑恤)한다고 하였으나, 진휼할 곡식으로 들어온 것이 돈으로 쳐서 1,150냥이 되는데 300냥은 순영(巡營 : 監營을 달리 부르는 말)에서 일정한 몫으로 떼어준 것이고, 그 밖에 800여 냥은 벼슬자리를 판 돈에서 나온 것이니 이른바 진휼은 또한 모양조차 갖추지 않은 것이라서 원성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성을 짓는다는 핑계를 만들어 부역을 대신하는 돈으로 1,450냥을 백성들에게서 거두었습니다. 감색(監色 : 監官色吏)들에게 일임시킨다면 함부로 훔쳐먹게 하는 것이니 필경에는 나머지 돈 235냥도 그들의 주머니에 들어갈 것입니다. 대동세를 바칠 때에 관아의 쌀로 메워서 바쳤는데 한 석을 환곡미 두 석으로 대신하는 방식으로 하여 고을에 나가 회수할 때 곱으로 쳐서 받는 높은 이자로 계산하여 남은 돈이 무려 480냥이 되고, 환곡미 150석을 무단으로 창고에서 빼내어 자신들의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이윤을 남긴 것이 이 두 가지 사항만이 아니니 비록 잘못된 예라고는 하지만 그 잘못은 결국 결역(結役)을 메워 바치고 창고의 곡식을 마음대로 주무른 사항에 속하는 것입니다. 수령의 양식을 거둘 때 쓰는 곡()24[]이나 들어갈 정도이니 이것은 더욱 다른 고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폐입니다. 그러므로 줄이고 깎아서 바로잡아 잘못된 습속을 막았습니다. 이 고을은 바닷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온갖 폐단이 모여드는 곳인데, 수령은 임금을 가까이에서만 모시다가 지방관으로 나와서 폐단을 고치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이 조금도 없고 오로지 가혹한 세금을 거둬 백성을 해치는 것만 일삼아 자신이 타매(唾罵)를 받는 치욕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미 교체되었다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낙안 군수(樂安郡守) 이보영(李普榮)은 백성을 다스림이 자애롭고 진실되며 일을 처리함에 본말을 종합하여 자세하게 밝혔습니다. 환곡과 세금을 바칠 때에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포구(浦口)의 백성들에게 전복(全鰒)을 캐게 한 부역은 예전부터 폐단이 있었는데 사들이는 수에 따라 가격을 정하여 매첩(每貼)의 가격을 첨부하니 자못 칭송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영저리(營邸吏 : 監營 안에 있으면서 감영과 각 고을 사이의 연락을 취하는 아전)가 부역에 대한 대가로 받는 쌀이 해마다 늘어나서 도()에서 가장 큰 폐단이 되었는데, 영저리가 감영에서 받고도 그 명목으로 각 고을에 와서 요구하는 것을 엄격한 말로 금지시키고 백성들에게서 더 거두지 못하게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이것에 힘입어 편안해져서 칭송함이 더욱 많아졌으니 치적(治積)이 숭상할 만합니다.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제화(李濟和)는 임지에 와서 주의를 기울여 들었으나 헐뜯거나 칭송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군수(前郡守) 권사억(權師億)은 이미 어사의 장계(狀啓)에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단하였으니 반드시 다시 죄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이 고을 아전들의 포흠(逋欠)이 도내(道內)에서 매우 심한 경우입니다. 때문에 미봉책으로 포흠한 자취를 가리려는 계획을 세워 거짓으로 환곡으로 나누어주었다고 하고 거짓 장부를 만들어 도장까지 받아서 둔 것이 쌀 8,229석과 벼 928석입니다. 감영(監營)에 나누어줄 쌀이라고 청하여 얻은 쌀 3,000석 중에 800여 석은 나누어주었으나 2,100여 석은 창고에 남겨두고 애초에 나누어줄 수 있는 곡식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라우도(全羅右道) 암행어사가 바로잡은 파양축(?揚縮 : 키로 곡식을 까부를 때 줄어드는 부분) 6,300여 석 이외의 포흠입니다. 포흠한 것을 조사하여 찾아낼 방법은 생각지 않고 거짓으로 환곡을 나누어준 장부를 만들고 또 나누어줄 쌀을 얻어 감추어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미 지극하게 이 고을에 고통을 주었습니다. 죽은 선비 박계상(朴桂相)의 처인 윤씨는 높은 벼슬을 지내온 사족(士族)이었습니다.

   박계상이 갑자년에 죽어 그 선산의 한 쪽에 장사를 지내었는데, 정묘년에 족인(族人)인 박영상(朴瑩相)이 그 아래에 몰래 장사를 지내었습니다. 산송(山訟)이 일어났고 돌려보낸 뒤 박씨의 소장에 두 무덤을 모두 파내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윤씨가 관아의 뜰에 들어가 얼굴을 드러내 놓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억울하다고 말하니, 이에 도리어 수령이 크게 화를 내며 여러 가지로 성을 내고 꾸짖고 노예들로 하여금 문 밖으로 끌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윤씨는 손과 팔이 더럽혀졌다고 스스로 그 팔을 깨물어 피가 옷과 소매를 물들일 정도였는데, 집으로 돌아온 저녁에 기어이 목숨이 다하였습니다. 그 치욕을 당하여 팔을 깨물고 기가 막혀 죽음에 이른 정황은 원근(遠近)의 고을에 떠들썩하게 전해져서 혀를 차고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그 당시 수령의 명령을 거행하였던 형리(刑吏)와 관의 노비들은 수령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 그들을 죽이려는 것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의 평범한 마음으로 말하자면 마땅히 놀라고 측은해하며 불쌍히 여기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후환이 있을 것을 걱정하여 감영(監營)에는 거짓으로 보고하고 칼을 뽑아 발악을 부리며 윤씨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으며 또 몰래 박가(朴家)의 집안사람에게 사주하여 글을 지어 올리게 했는데, 그 내용은 윤씨의 죽음은 바로 남편을 따라 죽은 것이지 능욕을 당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은 글이 자신에게 오면 뛰어난 절행(節行)을 허락함으로써 자신이 욕을 보여 죽음으로 내몬 자취를 가리려고 했지만, 비록 이렇게 하여 말을 만들어 내더라도 여러 사람의 이목은 가릴 수가 없고 여러 사람의 입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니,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지나도록 죽지 않다가 산송(山訟)이 벌어지자 그제야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것이 말이 될 수 있겠사옵니까? 윤씨의 죽음은 명백하게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 있는데도 감사(監司)는 조사하는 관리에게 맡겨버리고 조사하는 관리는 수령을 동정하여 수령의 편을 들었으니, 애초에 상세하게 조사하여 명백하게 밝히지 않아 끝내 말만 무성하여 헤아리기 어렵게 되어서 이른바 사안을 조사함에 마음의 자취는 가리기 어렵다는 것이니 죽은 여인의 원한은 일을 온당하게 처리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해당 수령이 부녀자를 핍박하여 죽게 한 것과 조사하는 관리가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 죄가 모두 가볍지 않으니 그대로 두지 마소서.

(이상은 추생읍(?)입니다.)

 

   감사(監司) 이조원(李肇源)은 명망과 실제가 모두 융성하고 치적을 칭송하는 소리가 현저하옵니다. 전라도 백성에게 거두는 조세가 많으면 쌀을 덜어내어 은혜를 베풀었고 위창(渭倉)이 회록(回祿)되면 곳간을 열어 다시 짓기도 하였습니다. 가분(加分)한 곡식에 대한 요청이 있으면 즉시 베풀어야 했으나 살피지 못하여 포흠을 덮어두었습니다. 농간을 부려 요리한 간악한 범인과 도축하는 백정들을 조사하여 이익이 됨직한 것만을 아뢰고 사사로이 돈을 받고 죄를 덮어주는 폐해를 저질렀습니다. 괴팍하고 깐깐하게 처리할 경우에는 좋은 점이 없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할 경우에는 너무 지나쳐서 오만한 서리(胥吏)들이 거리낌이 없게 되어 백성들이 간혹 해를 입게 되어 심지어 작전(作錢)의 잘못된 폐해마저 생겼습니다. 그 일을 별단에 열거하였으나 감사라는 직분이 매우 중대한 자리인지라 단지 그 대략만을 열거했습니다.

 

   병사(兵使) 오재중(吳載重)은 임지의 경계에 이르면서부터 주의를 기울여 탐문하였는데 이미 명성과 칭송이 있었습니다. 군민들이 그의 덕으로 적폐(積弊)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좌수사(左水使) 허명(許溟)이 임지에 부임해 온 이후로 정성을 다하여 열읍(列邑)을 단속하였고, 기율을 엄격히 세워 영속(營屬)들을 단속하여 포구의 주민들이 살기 편해졌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군민들을 애휼(愛恤)하여 부극(?)의 행정이 없고, 공적인 재물을 규범대로 잘 간수하여 농간을 부리거나 사적으로 유용하는 잘못이 없습니다. 행정에 조리가 있고 칭송과 치적이 볼 만합니다. 모환(牟還)할 때 외창(外倉)의 색리(色吏)가 여러 가구의 것을 빼내어 투식(偸食)한 것이 250여 석 남짓 됩니다. 비록 부임해 오기 전의 일이라고는 하나 모환을 거둘 때 죽은 사람에게까지 세금을 매기는 폐해가 있는데도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 될 것입니다.

 

   중군(中軍) 한탁모(韓鐸謨)는 막부(幕府)의 일이 적기 때문에 잘못한다거나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병영 우후(兵營虞候) 박형원(朴亨源)은 늙고 병들어 업무를 처리하기 어려워 문을 닫고 뒷방에 깊숙이 앉아 있습니다. 도둑을 근절시켜야 하는 임무를 일체 병영의 장교에게 맡겨서 평민들이 도둑으로 붙잡히는 폐해가 자주 일어나고 있는데도 도둑들은 뇌물을 주고 풀려나는 병폐를 일으켰습니다. 꾸짖는 것으로는 문책이 되기 어려우니 도둑을 다스리는 임무에서 제외시키소서.

 

   좌수영 우후(左水營虞候) 심능수(沈能壽)는 직책이 막부를 돕는 것이고 또 곧 임기가 차서 돌아갈 사람인지라 훼예(毁譽)에 대하여 특별히 논할 것이 없습니다.

 

   순천 영장(順天營將) 한사진(韓師鎭)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워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는 것이 없습니다. 도적을 염탐하기를 엄하게 하지 않아 근래에 도둑이 들끓는 근심이 많아졌습니다. 백성에게 내려주는 물건을 주지 않아 백성들은 이유도 없이 잃어버렸다는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도박이나 노름은 마땅히 엄격히 금해야 하거늘 크게 법을 어겼다는 명목을 내세워 사사로이 재물을 받고 죄를 덮어주며 받아 챙긴 돈이 464냥이나 됩니다. 심지어 군교(軍校)로 차출하는 것에도 정해진 뇌물의 가격을 정해 놓아 원망하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합니다. 그 탐학무도한 죄는 그대로 그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주 영장(全州營將) 남건구(南建九)는 새로 부임해 온 사람인지라 굳이 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상(以上)은 본도의 감사(監司)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중군(中軍)ㆍ우후(虞候)ㆍ영장(營將)에 관한 기록입니다.)

 

   진산 현감(珍山縣監) 이정규(李鼎圭)는 뜻이 크게 잘 다스려지게 함에 있어서 늙었어도 오히려 게으르지 않습니다. 인접한 고을에서 옮겨온 백성이 매우 많은데 은혜롭게 어루만지고 감싸서 자못 칭송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모환(牟還)할 때 창고를 열기 전에 미리 집전(執錢)을 준비하여 창고를 열게 되자 닷새 만에 원래대로 회복시키고 본색(本色)은 거두지 않았습니다. 모환을 다시 싣고 돌아가며 원망하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용담 현령(龍潭縣令) 임홍상(任弘常)은 정사를 행함이 백성들을 어렵게 만들지 않고, 송사를 처리함에 밝습니다. 이적(?)이 폐해가 되자 방색(防塞)을 주지 않았고, 중첩된 역이 많아도 바르게 처리하는 것에 유의하였습니다. 조금 흠이 있다면 너무 강단(剛斷)한 성격이라 간혹 인정을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수 현감(長水縣監) 박종민(朴宗民)은 다스림이 근면하고 질박하여 번거롭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아서 백성들은 잘못한다는 말이 없고 서리들도 편하다고 말합니다. 영곡(營穀)은 돈으로 바꾸어 고르게 나누어서 바치게 합니다. 다른 고을에서는 모두 그렇게 하고 있는데 유독 이 고을에서는 쌀을 다 팔고 난 뒤에야 민간에 본색을 내어주고 그것으로 납부하게 하니 폐해가 된 지 오래 되었으나 즉시 고쳐서 혁파하지 않는 것이 흠입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임병원(林秉遠)은 다스림이 노회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이롭게 함이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보다 먼저인 사람입니다. 사사로이 뇌물을 받고 죄를 덮어주는 것이 너무도 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심지어는 가난하여 바칠 뇌물을 마련하지 못하여 차라리 스스로 곤장을 맞고 유배 가기를 원하는 자를 혹독하게 여러 달을 가두어두어 마침내 뇌물을 바치게 하고서는 풀어주었습니다. 소가 병들어서 도축해도 된다는 증명서를 인근 고을에 팔고, 고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잘못을 덮어주는 대가로 정해진 기준에 따라 돈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사사로이 가분(加分)한 쌀이 5,906석인데, 올해 가분미(加分米) 2,000석을 환곡으로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모두 별환(別還)에 귀속시켰다고 감영(監營)에 보고하였습니다. 별환(別還)은 그 수가 5,000여 석에 이르는데, 별환 가운데 이른바 잘못된 전례에 따른 예하(預下) 또는 대하(貸下)가 있으니 비록 그것을 제하더라도 그 밖에 경주인(京主人)460석을, 영주인(營主人)1,230석을, 병영주인(兵營主人)360석을 관속(官屬)들이 500여 석을 어렵지 않게 꺼내 팔아 입본(立本)한 일이 있었으니 매우 놀랄 일입니다. 이 고을의 군정(軍政)은 도내에서 가장 문란하여 황구첨정(黃口添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일삼아 친족들을 침탈하니 폐해가 매우 큽니다. 영주인(營主人)이 순영(巡營)에 올리는 장계에 지보(持保)의 명색을 배로 부풀려 150명을 만들어놓고 영주인이 100명을, 경주인이 25, 병영주인이 15명으로 나누어 가지고 그들 자신이 베를 거두어 나누어 먹는 밑천으로 삼으니 온 고을에 소요(騷擾)가 생기고 백성의 원성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절목(節目)이 이미 효주(爻周)된 것이니, 혁파(革罷)하겠다는 뜻으로써 방방곡곡(坊坊曲曲) 일깨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음대로 환곡을 농간하여 거짓 인원수를 만들어낸 죄는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곡성(谷城)의 토반(土班)인 방복현(房福玄)이 남원부의 상놈 신천손(申千孫)에게 맞아서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이 있어서 관아에 고발이 들어오자 검시(檢屍)하고 말하기를 맞아서 생긴 상처와 손상된 부위가 없다고 하고는 상부에 다시 검시할 것을 청하지 않고 사람을 죽인 자와 몰래 합의하여 장례(葬禮)에 소용될 물건을 거두어서 피해자에게 주니, 방복현의 아내 박씨는 원수가 준 물건을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는 자리에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인 저잣거리에서 불사르고 흩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감영에 보고하는 발사(跋辭)에 박씨를 시체를 가지고 값을 흥정한다는 죄목을 덮어씌워 핍박하였습니다. 만약 박씨가 진정으로 이러한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돈을 흩어버리고 베를 불사를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또 어찌 이 고을 사또의 잘못된 판결에 원한을 옮겨 칼날을 품고 관아의 앞길에서 자갈을 입에 물고 자신의 몸을 마구 찌르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박씨의 모습을 보면 결코 이러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고을 경내가 이 일로 시끌벅적하게 되었는데 불쌍해하며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출두한 이후에 검시한 것을 기록한 문서를 가져와서 보니 옥사(獄事)를 처리한 사정이 의심스럽고 뚜렷하지 않은 점이 너무도 많아 맥락이 어그러지고 뒤섞인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습니다. 청색과 흑색의 반점들이 이 계절의 일기 때문에 어그러진 것이 있는데도 실제로는 도인(桃仁)과 소목(蘇木)을 따라서 기록하였을 뿐 그 어혈이 풀어지고 비틀려 꺾인 것을 묻지 않았으니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이미 저잣거리에서 싸우다가 발생한 일이라고 말하였으니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목격자가 없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거늘 단 한 사람도 추문(推問)하지 않았으니 또한 법예(法例)를 어긴 것입니다. 봄에 이미 판결하여 신천손을 방면시켜 주고는 박씨가 상경한 뒤에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시 가두어 괴이한 말을 지어내게 하여 사대부를 능욕(凌辱)하였다고 죄목을 만들어 유배를 보내었습니다. 애초에 만약 검시하는 날 평범하게 허락하였다면 뒷날 어찌 격렬하게 다투는 때에 겁을 내었겠습니까? 여러 옥안(獄案)을 살펴보고 민간의 백성들의 논의도 참고하여 보면 박씨의 하소연은 참으로 참담하고 불쌍하건만 슬퍼하고 공경하는 부인의 마음은 생각지 않고 흐리멍덩한 문서나 작성하고는 다시 검시할 것을 청하지도 않고 시체를 섣불리 내어주었으니 크게 법전을 어긴 것이라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앞의 말을 따르건 뒤의 말을 따르건 격렬하게 다투는 상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상세히 조사하여 처치하라는 판결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단지 고을 사또의 보고만을 믿고 조사할 관리조차 정하지 않은 것은 도신(道臣)의 잘못입니다. 설령 방가가 죽음에 이른 것이 두들겨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아는 상황일지라도 인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몸을 엄격하게 조사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자가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장차 약자로 하여금 원통함을 호소하여도 풀리지 못하게 하고, 강자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고도 벌을 면하는 것을 도모할 수 있게 되어 훗날 큰 병폐가 생기는 데에 크게 관련될 것이오니 다시 조사하여 엄격히 처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치성(閔致成)은 일을 처리함이 가지런하고 바르옵고, 송사를 처리함이 자상하고 밝습니다. 상납전은 해당 아전이 먼저 이익을 취하였고, 상번군(上番軍)에게 거두는 것은 좌수가 농간을 부려 끝내는 가난한 백성을 노략질하고 있사오니, 이 모두는 이 고을 폐단이거늘 반성 없이 따르며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습니다.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광헌(李光獻)은 이웃 고을에 있을 때부터 이미 명성과 치적이 현저하였습니다. 창고의 곡식을 포흠한 아전을 수사하였고, 농간을 부려 생긴 폐해를 근절시켰습니다. 돈을 주어 창고를 채우게 하여 백성들이 부역을 면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 환곡을 거둘 때 영작(營作)의 가격이 시중의 가격보다 많게 되니 부족한 수를 자비로 충당하였습니다. 새로 부임해 온 이후로 전날의 칭송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영저역(營邸役)의 가격이 해마다 첨가되어 늘어나서 크게 백성들의 폐해가 되자 그 장부를 불사르고 방색을 매기지 않았으며, 대동미의 태가를 바치게 하니 소속된 관리들이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라 특별히 빚이 탕감된 것이라서 크게 백성들의 우러름과 부합하게 되었습니다. 선비들에게 과제를 부과하여 근면하게 만들었고 아전들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니 온 고을이 편안하게 되어 칭예(稱譽)의 소리가 성대합니다. 전라도 전체를 살펴보건대 치적(治積)이 가장 좋습니다.

 

   창평 현감(昌平縣監) 이영장(李英章)은 일을 처리함에 정성을 다하고 재주와 슬기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송사를 처결함에는 공평하게 하고 사람을 쓰는 일은 투명하게 처리하였습니다. 백성의 수는 적고 곡식은 풍부하며 폐해가 되는 일이 이미 사라졌고 병폐가 발생할 것 같은 조짐조차 매우 상세히 살피고 있으니 거의 백성을 소생시키고 구원한다는 명망이 있습니다.

 

   옥과 현감(玉果縣監) 윤정진(尹定鎭)은 사람됨이 조용하고 단아하며 정무(政務)를 성실히 하여 자리에 있는 4년 동안 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였습니다. 작년 모환(牟還)과 추환(秋還) 때에 영작(營作)으로 짐작으로 정한 가격이 시가보다 높았는데 방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간에서 집전(執錢)한 것은 한결같이 시가를 따라서 고루 거두어들였고 영납(營納)의 부족한 부분은 끝내 스스로 비용을 만들어 충당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지나친 징수를 면하게 되어 칭송하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합니다.

   이 고을의 아전들이 쌀을 포흠하여 유용하던 것이 오랜 폐단이었으나 조사하여 바치게 하여 마침내 단 1석도 축난 곡식이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게 하는 일은 호남 전체의 근심이었는데, 미리 명령을 내려 10세 이전의 아이에게는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고을의 이안(吏案)에 올라 있는 아전은 모두 합쳐서 60여 명이었으나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빼버리고 다시 보충되어 충액되지 못하게 하여 지금은 20여 명으로 줄어 백성들이 매우 편안해하고 있습니다. 금성산성(金城山城)의 부역은 속읍(屬邑)의 백성들이 와서 일하게 하였으니 전례에 맞는 일이고, 곶간을 열어 품삯을 주었으니 한 사람의 백성도 번거롭지 않았습니다. 외진 마을부터 초검(初檢)의 행차에 둘러보았는데 수행하는 아전들을 단출하게 하고 양식을 지니고 가서 백성들의 마을을 어렵게 만들지 않으니 백성들은 안도하며 수령의 행차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살피는 정사를 펴면서 온갖 방법을 모두 다 동원하니 백성들은 부모의 사랑이라도 여기에 비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실질적인 모습이 여러 고을 가운데 가장 뛰어나옵니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건식(李健植)은 부임한 지 1년 만에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세곡(稅斛)을 바로잡아 백성에게 큰 혜택이 되게 하였습니다. 순영(巡營)으로부터 무미(貿米) 1,000석을 가져와 가작(加作)의 수를 충당하였고, 가전(價錢) 2,500냥 가운데 1,200냥은 곡식 매 석마다 25전씩 입본(立本)한 다음에 민간에 나누어주었고, 1,300냥은 아전들이 범하여 썼습니다. 무미(貿米)가 포흠되지는 않았으나 아전들을 금하여 단속하지 못하였으니, 강핵(剛核)의 정사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이주현(李周顯)3년 동안 자리에 있으면서 단 한 번의 선정(善政)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본가(本家)가 도내(道內)에 있어서 폐해가 매우 많았습니다. 다음 향임(鄕任)에 앉기를 바라는 자들이 수레에 재물을 싣고 와서 도로에서 서로 연이어져 바라볼 정도였으며, 향임(鄕任)을 교체한 것이 다섯 달 동안에 무려 13차례인데 모두 그 가격을 정해놓았으니 길가는 사람마다 비루하다고 침을 뱉었습니다. 세곡(稅斛)을 개조할 즈음에 영문(營門) 사람들에게 줄 정채(情債)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거둔 돈이 400여 냥이 되옵니다. 그런데도 또다시 이익을 탐하여 세곡(稅斛)을 개조하며 선인(船人)들에게 뇌물을 받았으면서도 도리어 예전보다 1()가 더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니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하였는데, 새로 부임해 온 수령을 감영(監營)에 올리는 글에서 세곡(稅斛)을 고쳤다고만 보고하였으니, 단지 농단을 부릴 술수만을 돌아볼 뿐 백성을 부탁받은 자로서의 마음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어찌 목민관이 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백성들간의 송사를 처결하면서는 뇌물을 받았고, 아문(衙門)의 노비의 품삯까지 받아 가로채었다고 하니 들을수록 더욱 놀라웠습니다. 재물을 탐하여 백성들에게서 긁어모은 죄는 이미 교체되었다고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평 현감(南平縣監) 김리완(金履完)은 다스림에 기력(氣力)을 숭상하여 아전들을 매우 엄하게 단속합니다. 모환(牟還)과 영작(營作)을 한결같이 시중의 가격에 따라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대할 때와 송사를 처리할 때 조금 평이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습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송지렴(宋知濂)은 임지에 오면서부터 주의를 기울여 들었으나 훼예(毁譽)의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 광주 목사(前光州牧使) 윤명렬(尹明烈)은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자리에 있다가 지방에 부임한 자인데 크게 주목할 만큼 잘한 정사가 없습니다. 청렴하고 깨끗하다는 명망(名望)에 부끄럽게 지나칠 정도로 사리사욕을 탐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총애하는 애첩과 간악한 아전들이 결탁하여 정사를 주물러서 심지어 뇌물을 1,000냥이나 받았고, 창색(倉色)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뇌물을 받은 것과 불법으로 소를 도축한 자들에게 받은 뇌물이 수천 냥에 이른다고 전하는 말이 자자합니다. 백성의 원망이 거세고 시끄러워지자 각 면()마다 5냥의 방역(防役)을 매기고는 이어서 그 돈을 나누어주어 백성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이 고을의 환정(還政)은 본디 폐해가 없어서 척문(尺文)도 없었으나, 근래 몇 년 동안에 농간으로 인한 폐해가 매우 많아져서 곡색(穀色)이 더욱 나빠지니 백성들이 삶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폐해가 되었습니다. 지난해 환곡을 받아들일 때의 일로 말씀드리자면 아전들이 포흠(逋欠)한 것을 감추어주려고 급하게 먼저 창고를 봉해버리니 환곡(還穀)이 도리어 크게 법례(法例)를 어기는 것이 되었습니다. 체직(遞職)되었다고 그 죄를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성 부사(長城府使) 서유승(徐有升)은 다스림이 백성을 어렵게 하지 않아 그의 덕을 칭송하는 목비(木碑)가 길에 서 있습니다. 산성(山城)을 지키는 병사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면서 곡()을 다 채우지 않았으니 완전하게 채워주지 않은 폐단이 있습니다.

 

   태인 현감(泰仁縣監) 한원리(韓元履)는 다스림이 매우 정교하고 자상하고 자기 자신을 단속하기를 청렴과 결백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색(防塞)과 영작(營作) 등에서 백성에게 혜택이 된 것이 적지 않습니다.

 

   금구 현령(金溝縣令) 홍혁(洪赫)은 백성을 다스리고 아전들을 통솔하는 데에 넉넉하여 조리(條理)가 있습니다. 민고(民庫)의 업무기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하고 쓰임새를 절약하여 부역을 동결시키니 바칠 것을 감해준 은혜가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값이 떨어진 전답의 조세를 예전의 것으로 꼬박꼬박 받아서 폐단이 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것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정술인(鄭述仁)은 부임해 온 지가 오래 되지 않았으나 칭송하는 소리가 이미 현저합니다. 처음에는 마치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게 보여서 아전들이 간혹 방자하게 굴었으나, 끝내는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하는 총명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이런 점 때문에 자라처럼 몸을 움츠리고 두려워하며 송사를 듣습니다. 병폐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오랜 폐단을 상세히 살피니 백성을 소생시키고 구원한다는 명망이 있습니다.

 

   여산 부사(礪山府使) 유석주(兪碩柱)는 부임해 온 초기에 병폐를 살피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여 백성의 수는 적은데 군정(軍丁)의 수는 많은 폐단을 고쳐 거의 백성을 소생시키고 구제하였습니다.

 

   오수 찰방(獒樹察訪) 김노충(金老忠)은 망아지를 부지런히 잘 기르고 병졸들을 어루만지는 은혜를 베풀고 있사오나, 아전들을 단속하기를 엄하게 하지 못하여 소속 역참(驛站)이 폐해를 입고 있습니다.

 

   벽사 찰방(碧沙察訪) 조정진(趙廷珍)은 말을 기르는 데에 잘못이 없고, 역참(驛站)의 병졸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삼례 찰방(參禮察訪) 윤덕년(尹德年)은 이미 크게 드러난 흠이 없어서 우선 가혹한 논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순천 감목관(順天監牧官) 최치간(崔致侃)은 잘못이나 잘한 것에 대한 말을 듣지 못하였으나, 목장의 백성들은 결역(結役)이 가장 무거워서 읍촌(邑村)에 사는 백성과 비교하면 더욱 그 처지가 가련합니다. 목장의 아전이 침탈하는 폐해가 생긴 것은 대개 감목관의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흥양 감목관(興陽監牧官) 이운영(李運英)은 문아(文雅)가 있다고 추대되는 사람으로서 일처리를 자상하고 부지런히 하며 가축을 기르는 데에도 매우 근면하고 적조(?? : 환곡)도 고르게 하였습니다. 목장에서 징수하는 세금은 원래 번거롭고 무거워서 마구 거둬들인다는 원망이 있으나 대개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방답 첨사(防踏僉使) 한재무(韓在懋)는 소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매우 엄하게 금하였는데도 포구(浦口)의 백성들이 원망함이 없습니다. 창고를 관리하는 아전이 환곡을 빼돌려 가난한 가구가 치우치게 받는 해를 입었습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무렵에 장부를 정리하였는데 진()의 관속(官屬)들이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들인 폐해가 있었습니다.

 

   사도 첨사(蛇渡僉使) 최언구(崔彦?)는 일처리를 상세하고 밝게 하여 군인들과 백성들이 그의 정사가 편하다고 칭합니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박경우(朴敬佑)는 진()의 병졸들이 원망하지 아니하고,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금령도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상은 본 도()의 연로(沿路)에서 조사한 수령ㆍ찰방ㆍ감목관ㆍ영장에 대한 글입니다.)

 

   감사(監司) 정만석(鄭晩錫)은 정성을 다하여 공무에 임하며 청렴하고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아전들이 포흠한 것을 조사하자 간악하고 교활한 행위가 조금 사라졌고 백성들의 폐해를 잘 살펴서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을 조금 줄어들게 하였습니다. 감영에 바치는 정전(情錢)을 엄격하게 금하고 고을에서 공적으로 사용되는 비용을 절약해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관내의 관속(官屬)들이 계방(?)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군정(軍政)에서 거듭 중첩하여 징수하는 폐해를 없앴습니다. 바야흐로 온 고을의 사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한 지역이 맑아지는 것을 개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군(中軍) 성범진(成範鎭)은 폐해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곤장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아전들과 장교들이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백성들의 원망하는 말이 있습니다.

 

   영장(營將) 구의화(具毅和)는 임지에 오면서부터 주의를 기울여 탐문하였으나 아직은 훼예(毁譽)에 관한 말이 없습니다.

 

   노성 현감(魯城縣監) 윤식(尹植)은 부임해 온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아전들은 익숙해하고 백성들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세(賦稅)를 여름이 지나도록 내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일률적으로 날짜를 정하여 받지 않고 여유를 주었으니 진쇄(振刷)의 정치를 기대할 만합니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조진익(趙鎭翼)은 정사가 매우 상세하고 명쾌하며 송사를 묵혀두며 지체시킴이 없습니다. 적조(?? : 환곡)를 매우 정밀하게 하여 가구의 수가 빠지는 폐단이 없게 하였고 장시(場市)에서는 그의 다스림이 공평하다고 일컫고 있으며 감세(減稅)의 은혜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연산 현감(連山縣監) 윤의동(尹毅東)은 봉적(?)을 이미 정밀하게 처리하여 은혜가 힘없는 백성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며, 송사를 결단함에도 명쾌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이웃 고을에까지 비등(飛騰)하고 있습니다.

 

   공주 판관(公州判官) 서흥보(徐興輔)는 부임해 온 지 오래 되지 않아 자상한 은혜가 이미 드러났으나, 집헌(執憲) 한 사람을 각 면에 더 두어 조종(操縱)의 권한을 주었는데 그 집헌이 침학하는 폐단이 있어 예전에 풍속의 단속하던 때보다 더 심하니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천안 군수(天安郡守) 임면호(林沔浩)는 문화(文華)의 재주에 바탕을 두어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밝게 처리합니다. 봉환(捧還)을 가장 정밀하게 처리하고 숨긴 것을 살피는 데에 매우 부지런합니다.

 

   직산 현감(稷山縣監) 한광연(韓光衍)은 정성으로써 백성을 감싸고 매우 부지런하게 공무를 집행하며 청렴함과 곧은 성품으로 일을 처리하여 칭송함이 고을의 경계를 넘어 다른 고을에까지 전해져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성환 찰방(成歡察訪) 김익사(金益?)는 임지에 도착한 이후로 백성들을 폐해에서 구할 것만을 유의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공충도(公忠道:忠淸道) 연로(沿路)의 감사ㆍ중군ㆍ영장ㆍ수령ㆍ찰방에 대한 기록입니다.)

 

   진위 현령(振威縣令) 박영수(朴榮壽)는 다스림을 조심스럽게 하고 부지런히 하여 송사를 듣고 처결함이 매우 상세하고 명쾌하고, 결역(結役)으로 거두는 쌀을 덜어주어 매우 칭송의 소리가 높습니다.

 

수원 판관(水原判官) 오경원(吳慶元)은 아전들을 엄하게 단속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억세고 강한 자는 억누르고 약한 자는 부축하여 도와주며, 송사를 처결함이 매우 명쾌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온 고을 경내에 가득합니다.

 

   과천 현감(果川縣監) 황기익(黃基翼)은 분조(?)를 이미 균등하게 하였고, 농사일을 감독하고 장려하는 것도 매우 부지런히 하며, 청렴하고 간이함으로 다스려 관아와 촌락이 모두 어려움이 없어서 거의 빈 거리나 쓸쓸한 고을까지도 다시 소생할 것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화 찰방(延華察訪) 박현범(朴顯範)은 마정(馬政)에는 비록 실수가 있으나 드러난 큰 잘못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은 경기(京畿) 연로(沿路)의 수령과 찰방에 대한 기록입니다.)3)

 

 

3. 1829(순조 29) 전라우도(全羅右道) 암행어사(暗行御史) 성수묵(成遂?)의 서달(書達)4)

 

   성수묵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1829(순조 29)에 전라우도의 장성, 전주, 나주, 익산, 고부, 영암 등지를 다녀와 이 서달(書達 : 왕세자에게 올리는 서계에 대한 다른 표현)을 바쳤으며, 각 추생지역의 전현직 수령들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올리고 있다.

 

   전라우도(全羅右道) 암행어사(暗行御史) 성수묵(成遂?)이 서달(書達 : 왕세자에게 올리는 서계에 대한 다른 표현) 및 별단(別單)을 올렸다.

 

서달(書達)

 

   감사(監司) 조인영(趙寅永)입니다. 자기를 규율함(律己)은 간결하고 신중했으며, 아랫사람을 다스림(御下)은 엄격하고 명확했습니다. 주진(?)을 조획(措劃)하자 기민(飢民)들은 믿고 생활했으며, 주현을 단속[彈壓]하자 장리(長吏 : 지방의 수령)들은 모두 저절로 격려[飭勵]되었습니다. 명성과 실제[望實]는 둘 다 대단했으며, 여론과 칭송도 대단했습니다. 도신(道臣)은 그 지체가 무거우므로 여기서는 단지 그 대강만을 기록했습니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박제안(朴齊顔)입니다. 성품이 본래 순후(醇厚 : 純正精粹)하여 정치는 강핵(剛核)하지 못했습니다. 남의 말을 들음이 한편으로 치우쳤기 때문에[聽偏] 간폐(?)를 살필 수 없었으며,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정령(政令)이 진작되지 못했습니다. 한가로울 때는 평안하고 조용하게 다스리는 데[恬靜之治] 방해되는 바가 없었으나, 복잡한 사무를 다스릴 때는 바로잡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미(餘米) 96석에 대해서는 본색(本色 : 田地에서 생산된 그대로의 것인 벼ㆍ보리ㆍ밀ㆍ콩 등)대로 취용(取用)하지도 않았으며, 또 상정가[詳定]로 작전(作錢 : 田稅를 받을 때 쌀, , 베 대신에 값을 쳐서 돈으로 내게 하는 일. 元作錢別作錢의 구별이 있음)하지도 않았습니다. 양맥(兩麥 : 보리와 밀)을 준절(準折 : 比準하여 정함)할 때는 높은 가격으로 받았기 때문에 합 537냥이었는데 취잉(取剩)한 것이 248냥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을 일러 해당 읍의 그릇된 관례라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논감(論勘 : 죄의 경중을 따져서 판정함)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같은 인습(因襲)이 있다니 매우 놀라웠습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조함영(趙咸永)입니다. 3년 동안 다스리며 한결같이 충분히 익혀 행했습니다. 뜻은 근면[勤孜]하고자 했으며, 부서(簿書)는 반드시 몸소 챙겼습니다. 정치는 조리가 있었으며, 사무는 막힘이 없었습니다. 토지를 조사하여 들에는 백징의 세[白徵之稅]를 면제했으며, 기근을 진휼하여 촌에는 부황 든 사람이 없었습니다. 민고(民庫)의 용도(用度)가 부족했으므로 환곡을 함부로 이용[?]하였는데, 그것이 16,000여 석에 이르렀으나 해마다 보고하지 않아 커다란 폐막이 되었습니다. 당해 목사는 공전(公錢)을 빌려와서 경가(輕價)로 작환(作還)하고(싼 가격 환곡으로 대부하고), 취잉(取剩)ㆍ보충[充報]했는데 2년 사이에 빚을 죄다 갚았기 때문에 올바른 형태의 조적[??之經法]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한 한 가지의 교구책[?之一政]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돈과 곡물을 내고 들일 때[錢穀斂散之際] 활리(猾吏)들이 몰래 간사한 짓을 하여 잔민(殘民)들이 모두 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경내에 원한과 탄식이 매우 많았습니다.

 

   장성 부사(長城府使) 김이진(金履?)입니다. 유소(儒素 : 儒家思相的品格德行)는 본색(本色)이었며, 자량(慈諒 : 慈愛誠信)은 통치규칙[治規]이었습니다. 5년 동안 재임[?]하며 한 가지로 생각한 것은 혹시 해지하지나 않을까[匪懈]’였습니다. , 성품의 관유(寬柔 : 寬緩和柔)함이 너무 과하여 정령(政令)은 요탈(撓奪 : 因外力影響而動搖改變決心)을 면하지 못했으며, 하리들에 대한 조속(操束)이 엄하지 못하여 간활(奸猾 : 奸詐狡猾的人)한 무리들이 두려워하는 데가 없었습니다. 환곡 중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還穀之未捧]이 과다한데다 농사는 겸황(?)을 당했는데도, 창고 문서에 농간을 부린 것[倉簿之作奸]이 낭자하니 빗질하여 조사[査櫛]하는 것 같은 치밀함에 흠이 있었음이 분명했습니다. 진자(賑資 : 진휼하는 데 쓰는 물자)인 환조(還租 : 환곡의 벼) 550석은 가수작전(加數作錢)하고 감가분급(減價分給)했으며, 잉전(剩錢) 275냥은 장()ㆍ곽() 등의 비용으로 입용(入用)했습니다. 진곡(賑穀)은 창대(倉貸)하여 썼는데 회감(會減 : 받을 것과 줄 것을 상쇄하여 회계 처리하는 것)외 기축(=?揚縮 : 곡식을 까불러서 그 양이 줄어듦)과 관비조(官備條) 627석령(石零)은 제반 쓸데없는 돈이었지만 매 석당 7()으로 분환(分還 : 환곡을 나누어줌)할 때 무취입고(貿取入庫 : 貿取 : 換取)하여 입본(立本)으로 삼았기 때문에 비록 사용(私用)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항법(恒法)에는 위배되었습니다.1)

 

   여산 부사(礪山府使) 안성연(安性淵)입니다. 성품은 자못 자량(慈諒)했으며, 정치도 안상(安詳 : 穩重)했습니다. 창오(?)를 수리[繕修]할 때는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세곡을 남봉(濫捧)할 때는 수향(首鄕 : 座首를 달리 이르는 말)들을 자주 배제시켰습니다[濫捧稅穀 則?汰首鄕]. 하지만 작년 농사는 초실(稍實 : 농작물이 조금 여묾) 정도 수준이었으나 민정(民情)이 황급(遑急)하여 오히려 참겸(? : 참혹한 흉년) 수준으로 변했으며, 초기(抄飢 : 기민을 가리는 일)와 구급(救急 : 급한 자를 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의향이 없어 사경(四境)을 모두 부황 들게 하여 중민(衆民)들의 원한과 탄식을 자아냈습니다. 재세(?)의 분환(分還)은 더욱이 농민의 종자와 식량[農民種粮之資]에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올 봄 도신(道臣)들이 교구(交龜 : 관원이 교대할 때 印信을 인수ㆍ인계하던 일. 그 인신의 꾸밈새가 거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르는 말)할 때 각청 공용(各廳公用)’이란 명목으로 삼반(三班 : 지방관아에 딸린 吏屬, 軍校, 官奴 등의 세 집단의 총칭)들이 주거나 받은 것이 거의 600여 석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영저(營邸)’들이 무슨 사사로운 안면이 있단 말입니까? 혹은 역가예하(役價 : 京邸吏, 營邸吏들에게 주는 보수. 預下 : 미리 내어주는 것)를 명목으로 내세우거나, 혹은 별환제급(別還 : 백성들이 사사로이 꾸어 쓴 환곡. 題給)을 핑계대었습니다.

   쌀[] 200, [] 760석의 가분을 청하여 얻은 후, 읍외 각창(邑外各倉)에서 일괄 취하여, 일시에 출급(出給)하기도 하고, 읍내에 쌓아두기도 하다가, 낭자하게 발매(發賣)했습니다. 원래 입본(立本)이 헐가[輕價]였기 때문에 취잉(取剩 : 잉여를 취함)은 거의 3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유리(由吏)가 여기에 결탁하여 전곡(錢穀)을 출납(出納)하며 관에는 범법에 관계되는 것이 없으므로 어찌 스스로 영판했겠습니까?[官無所犯 渠自營販]’라고 빙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청문의 의혹에 대해서는 밝혀내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聽聞駭惑 有難]. 이 때문에 호분(戶分)이 부족하여 민식(民食)이 더욱 더 어려워졌으므로 원성과 비방이 화살소리처럼 일어나 도로가 시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 죄가 환정(還政)에 관계되므로 그대로 놔두기는 어렵습니다.2)

 

   익산 군수(益山郡守) 이택현(李宅鉉)입니다. 부임[?]한 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은 드러나는 흠이 없었습니다.

(익산) 전 군수(前郡守) 권철(權徹)입니다. 그가 일을 잘 익힌 것은 여러 차례 상전을 내리고도 남음이 있었으며, 그의 치적(治績)은 십고(十考 : 벼슬아치의 성적을 매기는 등급의 하나. 京官은 각 의 장관이, 地方官監司, 해마다 두 번씩 그 근무 성적을 考査하여 상, , 하의 세 등급으로 나눌 때, 동일한 에 있는 사람이 다섯 해 동안 늘 상급의 성적을 얻었을 때의 일컬음)하여 보아도 내천(內遷 : 外職에서 內職京官職으로 轉任하는 일)에 해당되었습니다[綜鍊則屢典餘手 治績則十考內遷]. 재주는 전리(?: 治理)하고도 남음이 있어 활리(猾吏)들이 감히 무롱(舞弄 : 玩弄)할 수 없었으며, 정치는 무마(撫摩)를 우선시하여 소민(小民)들은 모두 선치’(善治)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말[小斗]을 고안하여 분적(? : 환곡을 냄)한 것으로 보아 초의(初意)는 방간(防奸)에서 나온 듯하지만, 끝내는 잉여를 취한다는 비방[取剩之謗]을 초래했습니다. (백성들이) 민전(民錢)을 거두어 비를 세워준 것으로 보아 여정(輿情 : 群情)의 거사(去思 : 地方士民對離職官吏的懷念)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혹 고을 사람들을 사주했다는 비난[嗾鄕之譏]도 있었습니다.

 

   고부 군수(古阜郡守) 정구용(鄭久容)입니다. 이임(?)한 지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은 시조(施措 : 采取措施)가 없었습니다. 이웃 고을에서 한 행적[隣績]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민망(民望 : 民衆的希望)은 바야흐로 대단했습니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건서(李健緖)입니다. 겉모습은 영리한 듯했지만, 속마음은 실제로 어리석었습니다. 정치는 밝게 판단하려 했지만, 실제 일은 혹 혼탁[昏謬]했습니다. 작은 은혜[小惠]를 팔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의 칭찬[蚩民之稱譽]이 없지는 않았으나, 크게 처하는 곳[大處]이 불명확[糊塗]했기 때문에 끝내는 식자의 비난[識者之疵毁]을 초래했습니다. 사악한 젊은 아이[妖童 : 邪惡的小子]에게 탐찰권[探察之權]을 맡겼기 때문에 반대로 간폐(?)를 열었으며, 먼 친척[: 遠房宗族]들이 뇌물의 길[賄賂之逕]을 매개했기 때문에 혹 자질구레한 비방을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누결(漏結) 20()을 해마다 부과하여 취용(取用)하고선 읍의 관례[邑例]라 핑계를 대는 것으로 보아 반복적인 오류를 벗어나기 어려운 듯했습니다. 환곡미[還米] 800석을 감가분급(減價分給)하고선 공용(公用)’이라 핑계를 대고는 있지만 그것은 자기가 사리를 취하는 행위[取剩之科]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김유헌(金裕憲)입니다. 대부(大夫)의 초정(初政 : 開始執政)이며, 문사(文士)의 확 트인 가슴[?: 開朗的胸懷]이었습니다. 창부(倉簿)에 대해서는 이미 허류(虛留 : 창고에 쌓인 물건이 없는 거짓 기록)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서리들의 간활이 많았지만, 도폐(島弊)에 대해서는 횡렴(橫斂)을 깊이 있게 살폈기 때문에 백성들은 장차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광) 전 군수(前郡守) 서유소(徐有素)입니다. 위망(位望 : 官位聲望)은 넉넉하여 탄압(彈壓)하고 남음이 있었으나, 재주[才猷 : 才能謀略]는 전리(?)하기에 부족했습니다. 활서(猾胥)들에게 방임[恣縱]하여 읍사(邑事)는 절로 문란해졌으며, 폐기(嬖妓)들에게 가리워져[蠱蔽] 관정(官政)은 청정함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관수미(官需米)의 감가(減價)는 시혜의 일단[施惠之一端]이었으나, 민고전(民庫錢)의 남용(濫用)은 횡렴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橫斂之衆怨]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자(賑資)는 장부상의 지적[雖無文簿上指摘]이 없었지만, 창곡(倉穀)은 결국 색리배(色吏輩)의 무롱(舞弄)을 초래했습니다. 재결(?)은 중요한 대정(大政)인데도, 전년(前年)에 남보(濫報)한 수가 324결령(結零)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분표(分俵 : 모든 물품을 나누어줌)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봉세(捧稅)하여 3분의 1 정퇴조(停退條)에 있는 쌀 471석령(石零)ㆍ돈 110냥령(兩零)을 제()했습니다. 도리(都吏)는 유리(由吏)에게 전급(傳給)하여 이미 납고(? : 관가의 다짐에 응함)를 받았으며, 유리(由吏)는 눈치를 채고 도망하여 사문(査問)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비록 유리의 투식[由吏之偸食]’이라고 말하지만 직접 살피지 않은 죄[不察之罪]가 있었으며, 집재성책(?成冊)ㆍ표재문서(?文書)를 일러 휴지(休紙)’라고 말하며 모두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증거를 숨겼다는 의심[掩跡之疑]을 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한응일(韓應一)입니다. 이임(?)에 대해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비방과 칭찬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진도) 전 군수(前郡守) 어재명(魚在溟)입니다. 3년 동안 섬을 다스리며[三載島治] 따로 드러나는 흠은 없었습니다. 농사철을 쉽게 놓쳐 촌부를 닥달하여 각()을 빌렸으며, 군폐가 고질화되자 관보(관의 보정)를 옮겨 군액을 뽑았습니다(채웠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부드럽고 정치가 해이했기 때문에 서리는 완고해지고 간리는 불어났습니다.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목원(李穆遠)입니다. 한벽(閑僻)한 읍에서 종합적이고 명확하게 다스렸습니다. 계방을 혁파하여 군안을 뽑았기 때문에 군액을 메울 수 있었으며, 창간을 조사하여 돈을 징수했기 때문에 서리들의 손아귀에서 거둘 수(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벼농사가 잘되었을 때 기민을 구휼하기 위해 강제로 나눈 것이 거의 1,000석을 넘었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 감영 창고의 조세와 부역이 거의 일경에 파다했습니다.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백성들[望治之民]은 이 때문에 원망했습니다.3)

 

   진산 군수(?山郡守) 박춘수(朴春壽)입니다. 벽읍(僻邑)으로 일거리가 적었으나, 실심(實心)으로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창고의 자물쇠[?]를 혹 느슨하게 해놓자 이간(吏奸)이 곧바로 적발(摘發)되었으며, 헌령(軒鈴 : 동헌의 방울)을 흔들어 호소하지 않는데도 민소(民訴)는 또한 막힘이 없었습니다. 환호(還戶)가 유망(流亡)하면 돈을 내어 대신 납부했으며[出錢替納], 궁민(窮民)이 굶주리면 연름(? : 공익을 위하여 벼슬아치들이 봉록의 한 부분을 덜어내어 보태는 일)하여 구휼[?]했습니다. 실혜(實惠)가 많아지자 여송(輿頌)이 파다(頗多)해졌습니다. 단 성품이 점점 유선(柔善)해져 갔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진작[振刷]이었습니다.

 

   김제 군수(金堤郡守) 조제화(趙濟和)입니다. 초정(初政)에 이미 폐막을 바루었으며, 잔민(殘民)들은 안도(安堵)했습니다.

(김제) 전 군수(前郡守) 정연시(鄭淵始)입니다. 2년 동안 거관(居官)했는데도 볼 만한 정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작년 겨울 환곡의 작전[還穀之作錢] 때는 이간(吏奸)을 살피지 않았으며, 올 봄 세선이 물에 빠졌을 때[稅船之?]는 백성들의 두터운 원망을 샀습니다. 이미 폄파(貶罷)되었기 때문에 가혹한 평가는 필요 없을 듯합니다.

 

   임피 현령(臨陂縣令) 정기식(鄭基植)입니다. 염간(恬簡 : 청렴하고 간솔함)으로 자지(自持 : 自己維持)했으며, 종상(綜詳 : 치밀하고 자세함)으로 다스렸습니다. 포흠을 징수하여[徵逋] 상정가[詳定之價]를 바로잡자 환민(還民)들이 그 혜택을 입었으며, 세를 받아[捧稅] 과람곡[過濫之斛]을 금하자 결호(結戶)들이 칭송했습니다. 일은 반드시 몸소 행했기 때문에 활리(猾吏)들은 농간을 부리는 폐습[?奸之習]을 끊어야 했으며, 정치는 어지럽지 않았기 때문에 합경(闔境)에는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만경 현령(萬頃縣令) 오정주(吳鼎周)입니다. 관에 도착한 지 오래 되지 않아 장부(臧否 : 品評)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만경) 전 현령(前縣令) 김진연(金晋淵)입니다. 4년 동안 잔국[四載殘局]에서 좋은 규칙[良規 : 好的規范准則]을 한결같이 적용했습니다. 몸가짐[持身]을 자못 청결히 하고자 하자 서리들도 꺼림을 알았으며, 다스림이 오로지 회보(懷保 : 安撫保護)를 숭상하자 백성들은 모두 칭송했습니다. 도폐(島弊)를 깊이 살펴 해물(海物)에는 특별히 관납(官納)을 면제했으며, 제방 수리를 잘 완성하여 수리(水利)가 농작(農作)으로 널리 미쳤습니다. 창고의 포흠[倉逋]을 추쇄하였으나 위령(威令)이 번거롭지는 않았으며, 촌락의 기근[村饑]을 구제하였으니 실정(實政)이 저절로 드러났습니다. 그가 떠난 후 그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으로 미뤄볼 때 그의 치적(治績)의 대강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금구 현령(金溝縣令) 조철영(趙徹永)입니다. 읍은 완국(完局 : 完事)이었으며, 정치도 양수(良手 : 高手)였습니다. 아랫사람을 단속할 때는 강맹(剛猛)을 다했으며, 아랫사람을 무마(撫摩)할 때는 자량(慈諒)을 겸했습니다. 순야(巡野)하여 과농(課農)했기 때문에 전()에는 진폐결[陳廢之結]이 없었으며, 계호(計戶)하여 분환(分還)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고르게 곡식을 받았습니다. 식전(殖錢)하여 군보의 정비[軍保之情費]를 막았으며, 제방을 쌓아 가문 해의 관개에 대비했는데 두 경우 모두 실정(實政)에 관계되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조치[施措 : 采取措施]가 너무 가혹했고, 부억(扶抑)이 너무 편중되었기 때문에 정치에 해가 되는 일[害政之事]이 없지 않았으며, 때로는 원망을 부르는 단초[招怨之端]를 두기도 했습니다.

 

   함열 현감(咸悅縣監) 홍기섭(洪耆燮)입니다. 폐국(弊局)에 새로 부임했지만, 뜻은 원치(願治 : 希望得到大治)를 절실히 원했습니다. 그가 잘한 점은 이미 자소(字小)에 드러났으나 힘써야 할 부분은 속습(束濕)이었습니다.

(함열) 전 현감(前縣監) 이택현(李宅鉉)입니다. 사람은 선량하지만, 정치는 두서가 없었습니다. 많은 자질구레한 비방은 이웃 읍에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잡객(雜客)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관문(官門)은 마치 시장터 같았습니다. 크고 작은 사송(詞訟 : 민사의 소송)은 모두 뇌물을 받는 길[納賄之逕]을 통해야만 했습니다. 서리와 향리들을 임과(? : 任官)할 때는[吏鄕任?4)] 돈을 받았다는 설[捧錢之說]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사공배(沙工輩)의 경우는 비단 읍민(邑民)일 뿐만 아니라 조속(漕屬)에 관계되어 그 신분은 차원(差員 : 差使員. 差使員 : 중요한 임무를 지워 파견하는 임시직)이므로 더욱 무휼(撫恤 : 撫慰救助)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세곡을 봉상할 때마다[稅穀捧上也] 제태하려는 의도[除汰之意 : 제태 : 벼슬이나 직무를 떼어 그만두게 함]를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가혹하게 침해하려는 계획[侵剝之計 : 侵害盤剝]도 몰래 세웠습니다. 송판(松板)은 곧 조선을 수리하거나 치장할 때 쓰는 물품[漕船修裝之物]인데 이것을 취용(取用)하고자 하여 그 한계가 없었습니다. 제반기용(諸般器用)을 무수하게 만들어내고선 세선(稅船)에 실어 한양의 부민 집[京第富民處]으로 수송(輸送)했습니다. 자질구레하게 징수한 물품[徵索之物]들은 전부 열거하기 어렵지만 그 중 강제로 빌린 돈 500냥은 더욱이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현(本縣)에는 유포배봉조(流逋排捧條 : 유포 : 관아의 물품을 유용하거나 써버림)’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일러 충포(充逋)’라고 합니다. 정해년(1827) 겨울 영문전(營門錢) 2,000냥ㆍ민고전(民庫錢) 800냥을 꾸어 와서는 혹 급전방세(給錢防稅), 혹 무미방납(貿米防納 : 무미 : 이익을 보고 팔려고 쌀을 몰아서 사들임. 또는 그 쌀)으로 잉여[零餘]를 취하였는데 이후 이 돈을 모두 방채(放債)로 삼아 매월 이자를 받았으며[逐月捧利] 이 이자를 돌려 다시 파급(派給)시켰습니다. 본전(本錢)은 무자년(1828) 가을에 나누어 갚았으며, 이전(利錢)은 도합 862냥이었는데 금년 여름 비로소 전분(錢分)ㆍ작환(作還 : 어떤 名色의 곡식을 환곡으로 작정하는 일)하였습니다. 방세(防稅)ㆍ방채(放債)는 이미 법외(法外)인데 재리상(財利上)의 염결(廉潔)에 대해 이미 믿음을 받지 못했으며, 여론[物論]은 간간이 의심ㆍ비방했으므로 그 형세가 반드시 이를 곳은 분명했습니다. 증명 가능한 인적(印蹟)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69냥령(兩零)은 근거가 없는 곳[無處]으로 하락(下落)하였고, 137냥은 관용(官用)으로 적실(的實)했습니다. 저치(儲置) 법의(法意)는 더욱 엄중하여 비록 공비(公費)를 지불[上下 : 치러주다. 관아에서 돈이나 물품을 내어주는 일]할 때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옛날의 곡식을 사용하고 새 곡식은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用舊而蓄新]. 신미(新米 : 햅쌀) 150석을 시가로 집전[時價執錢]하면 1,150냥인데 취용(取用)했습니다. 300냥은 매 석당 2냥씩 작환분급(作還分給)하여 입본이획[立本移劃5)之地]하였으니, 환색(換色 : 물건과 물건을 서로 바꿈)은 비단 공법(公法)에 크게 위반될 뿐만 아니라, 봉환(捧還)하기 전에는 이른바 항류(恒留 : 곡식을 쓰지 않고 늘 남겨두는 것)’도 허부(虛簿)에 귀속되어 버렸습니다. 관수전수(官需全數)는 양미(粮米 : 양식으로 쓰는 쌀)를 집전(執錢)했으며, 인조(隣租)를 무용(貿用 : 물건을 사서 씀)했으니 일의 체면은 더욱 어려워져 버렸습니다[官需全數 執錢粮米 貿用隣租 事面尤極苟難]. 그런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였기 때문에 환미(還米)를 대용(貸用)한 것이 50석이었으며, 매 석당 2냥으로 입본(立本)하였습니다. 환미작전조(還米作錢條) 400냥을 사공처(沙工處)에서 대출[貸下]했는데 환봉(還捧)할 때에는 입본취잉(立本取剩)한 것이 82냥이 되었습니다. 위태(位太 : 조세로 바치는 콩)는 본색으로 받아[本色捧上], 시가로 발매[時價發賣]하여, 경차인에게 계급하여 준 후[計給京差之後] 잉전(剩錢) 171냥을 아울러 취용(取用)했습니다. 환곡(還穀)은 이배의 작간[吏輩之作奸]으로 인해 잘 조사하지 못했으며, 읍촌의 미봉[邑村之未捧 : 돈이나 물건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함]은 끝내는 허감(虛勘)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장부의 회계[簿會]는 문란해졌고, 법의(法意)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가 이미 체치(遞置)되었다고 하여 그의 죄에 대해 논죄하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됩니다.

 

   부안 현감(扶安縣監) 이서(?)입니다. 염약(恬約)하게 자기를 유지[自持]했으며, 조용[安詳]하게 다스렸습니다. 실심(實心)을 잘 미루어 나갔기 때문에, 서리들이 기만과 눈가림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혁예(赫譽)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저절로 그의 인자한 구휼[字恤]을 믿었습니다.

 

   옥구 현감(沃溝縣監) 권용경(權用經)입니다. 이임(??)에 대해 귀를 기울여았더니 칭찬 소리가 벌써 들려왔습니다[??屬耳 譽已入聞]. 청송(聽訟)할 때는 부결(剖決 : 판결)이 명쾌하여 활서(猾胥)들이 감히 간사한 마음을 품지 못했으며, 봉적(? : 가을에 환곡을 받음)할 때는 약속(約束)을 우선하여 빈민(貧民)들이 모두 추령(?: 遵行法令)하고자 했습니다. 초정(初政)이 엄격함을 숭상하는 것으로 보아 완고한 풍속[頑俗]은 아마도 누그러질 듯했습니다.

 

   (옥구) 전 현감(前縣監) 허성(許晟)6)입니다. 사람됨이 본래 치밀했으며[綜密], 주치[做治 : 使天下太平]는 자못 조리(條理)가 있습니다. 주마간산[驟看]격으로 본다면 다스리는 재주[?理之才]를 실행하는 데 해 될 것이 없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보잘것없음[之態]을 감추기는 어려웠습니다. 진정(賑政)은 소를 잡아 밥을 먹일 정도로 그 풍족함이 대단했습니다[宰牛饋飯 極其豊備]. 격외의 사건[格外之物]에 대해서는 파급을 배순하고(두루 배정하고) 뜬 명예를 조득했기(낚시질하여 얻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칭송(稱訟)했습니다. 설진(設賑)한 초기에는 공사전곡(公私錢穀)을 혹 인용(引用)하기도 하고, 혹 늑봉(勒捧 :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바치게 함)하기도 하여 긁어모은 것이 거의 2,000냥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각 항의 용하(用下 : 잡용으로 쓸 돈이나 물품을 내어줌. 도는 그 돈이나 물품)를 자의적으로 과람(過濫)하게 했습니다. [] 290석과 돈[] 613냥에 대해서는 관비조(官備條)로 진부(賑簿)에 현록(懸錄)하여 고명시혜지계(沽名市惠之計 : 명예를 취하여 사사로이 남에게 혜택을 베푸는 계획)로 삼았습니다. 그 실제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기민(饑民)을 각순가록(各巡加錄)한 것이 합 1,820()이나, 조가록(租加錄)은 합 290()이며, 각종 전가록(各種錢加錄)은 합 570()이므로 이른바 관비(官備)’란 거짓 장부를 교묘하게 꾸미는 것[虛簿之粧撰 : 장찬. 사실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지어냄]에 지나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 구비된 전곡[其所辦之錢穀]을 가지고 실하된 수효[實下之數爻]를 비교해 보면 잉전(剩錢)260냥이었는데 응식물[應食]로 간주[看作]하여 마침내는 사용(私用)으로 귀결시켰습니다. 분진(굶주린 사람에게 물품을 나누어주어 구휼함)[分賑之穀]을 말로 취잉한 것[斗量取剩]이 합 13석인데 관청으로 이송하고선 작미(作米 : 田稅貢物로 징수하는 곡식을 쌀로 환산하여 정함)하여 양식을 보충했으며[充粮], 해당 서리[該吏 : 형리]가 납초(納招 : 納辭)할 때 다른 사람으로 그 죄를 대신하게 했습니다[令人代羞].

   본현(本縣)에는 다시 경작하게 된 토지로서 아직 보고되지 않은 논밭[還起未報之結]이 있는데, 해당 서리가 몰수하는 수단[該吏乾沒之資]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정해년(1827)ㆍ무자년(1828) 양년조(兩年條)를 합하면 40()인데 적발(摘發)이라 칭하며 아울러 취용(取用)했습니다.

   경저리 역가미(京邸吏役價米 : 역가미 : 백성이 役價京邸吏 또는 營邸吏에게 주는 보수) 35석은 잡역미(雜役米 : 正賦 이외의 각종 夫役. 마땅히 해야 할 公役 밖의 갖가지 부역)로 차하[上下 : 치러주다]하는 것이 바로 이 읍의 읍례(邑例)였으나, 그가 거관(居官)한 지 2년 동안은 단지 10석만 차하[上下]했습니다. 그 나머지 25석은 수리(首吏 : 각 지방 관아의 수석 아전. 吏房衙前)들에게 분징(分徵 : 세금 따위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물림)되었습니다. 양세의 명색을 해당 경저리에게 출급해 줄 때[及兩稅色出給該邸] 응하(應下 : 마땅히 나가야 할 지출, 經常支出을 이른다)해야 하는 물품을 무단(無端)히 감수(減數)하기도 했으며, 간여(不干)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이와 같은 폐해를 끼쳤으므로 수령[]은 본질적으로 몰염치했으며, 서리[]는 실로 애처로웠습니다.

   읍산(邑山)의 소나무는 본래 당연히 금송되어야 했지만 속전(贖錢)이란 명목으로 2, 3냥 등 분등(分等)으로 남징(濫徵)되었기 때문에 읍내의 거민[邑底居民]들이 거의 모두 대상이 되었습니다.

   차역(差役 : 국가에서 부과하는 노역)할 때는 일자리의 좋고 나쁨[?之豊簿]7)ㆍ뇌물의 많고 적음[賂錢之多寡]에 관계 없이 오로지 괄취(括取 : 掠奪)만을 일삼았으므로 원망과 비방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미 체귀(遞歸 : 벼슬이 갈리어서 돌아가거나 돌아옴)되었다고는 하나 마땅히 견책(譴責)되어야 합니다.

 

   흥덕 현감(興德縣監) 김규집(金奎集)입니다. 읍은 작으나 폐해는 고질화되어 있었으며, 뜻은 부지런히 하고자 했으나 재주는 성글었습니다[邑小而?痼 志勤而才?]. 열 달[十朔] 동안 이임(?)했으나, 말할 만한 흠은 없었습니다. 삼정이 모두 병들어 있었으므로 힘써야 할 점은 교구책이 적절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습니다[三政俱病 勉在矯?之得宜].

 

   정읍 현감(井邑縣監) 이진원(李震遠)입니다. 간결한 지조[簡潔之操]로 다스림을 성실, 근면하게 했습니다. 야농(野農)이 혹시 게으르지 않을까를 권면하여 무더위를 무릅쓰고 몸소 도랑과 밭두둑에 나갔으며, 마을의 굴뚝에 불이 혹 꺼졌다면 점화하였는데 간간이 진순(賑巡)하며 양미(粮米)를 고르게 분배했습니다[口分]. 지난 겨울 산두(山豆)에 대해 견세(?) 조치를 취하자 그 조치의 타당성에 대한 치호(?)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올 봄 수미(需米 : 갖가지 수요에 따라 쓰이는 쌀)에 대해 감가(減價) 조치를 취하자 결민(結民 : 결전을 내는 백성)들이 어깨를 펴게 되었습니다. 치규(治規)가 확립되자 합경(闔境)이 편안해졌습니다.

 

   고창 현감(高敞縣監) 이유시(李惟時)입니다. 잔폐한 국면에서[?之局] 근면ㆍ성실하게 다스렸습니다[勤幹其治]. 이액(吏額 : 서리의 수)을 감하고 창포(倉逋)를 없앴기 때문에 조처(措處得)는 타당했으며, 세곡(稅穀)을 우선시하고 수미(需米)를 그 다음으로 했기 때문에 공과 사의 차례가 있었습니다. 송사에 임해서는 판결이 반드시 분명했으며, 표재(?)에 임해서는 파속(把束 : 논밭의 수확 및 과세단위. 量田尺 1척 평방 면적을 1, 101, 101, 1001)이 모두 균등했습니다. 진정(賑政) 부문에서는 초구(抄口 : 기구를 선정함)할 때부터 애당초 과도하게 빠뜨리지 않았으며, 분곡(分穀 : 곡식을 나눠줌)할 때 기양축[혹은 ?]8)을 강제로 추가해 주었습니다. 성심(誠心)으로 미루어 나갔으며, 잔름(?)도 기꺼이 희사했습니다. 실혜(實惠)가 최고로 많았기 때문에, 가난한 집들[?]이 모두 칭송했습니다.

 

   무장 현감(茂長縣監) 조병상(趙秉常)입니다. 염아(恬雅)함이 본색(本色)이었으며, 종명(綜明)함은 치규(治規)였습니다. 모환(牟還 : 모환곡)은 민분(民分)을 강제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애초에 흠축지포(欠縮之包)가 없었으며, 군안(軍案)은 이간(吏奸)을 자세히 조사했기 때문에 바로잡힐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초정(初政)이 이미 찰미(察眉 : 察看人的面容便知道實情)에 나타나 있으므로 눈을 닦고 주시해 보았더니 여정(輿情)의 기대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무장) 전 현감(前縣監) 서유찬(徐有贊)입니다. 근신 반열[邇班)에서 지방 수령으로 나갔으므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을 도모하는 정성이 배가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다스리며 하나의 기록할 만한 업적도 쌓지 않았습니다.

   환곡은 경가(輕價)로 대봉(代捧 : 다른 것으로 대신하여 바치는 일)하여 허수로 마감한 것[虛勘之數]이 여전히 많았으며, 군안(軍案)은 부정(浮丁 : 들떠 있는 장정)을 열록(列錄)하여 억울한 징수라는 폐단[寃徵之?]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정해년(1827) 환전(還錢) 700냥에 대해 범용(犯用 : 남에게서 맡아 관리하는 것을 허락 없이 마음대로 써버림)하며 분급(分給)하지 않고선 관청여재당초조(官廳餘在當推條)가 있다고 핑계를 대며 쌀 50석ㆍ벼 900석을 해당 서리에게[該吏名下] 강제로 영하여 이록(移錄)하게 했는데 일년이 지나자 이것이 포흠(逋欠)이 되었습니다.

   무자년(1828) 환전(還錢) 중에서도 400냥을 취용(取用)하고선 체등(遞等 : 임기를 마치고 가다)하기 전에 구관쇄가당봉조(舊官刷價當捧條)라고 핑계를 대며 벼 570여 석을 각 민등처(各民等處)로 허분(虛分)으로 이시(移施 : 돈이나 물품을 다른 용도로 잠시 돌려씀)했는데 가을이 되면 수봉(收捧 : 빌려준 돈이나 외상값 따위를 거두어들임)하려 했습니다.

   전결(田結)은 전년에 남보한 재결[前年濫報之?]130결령(結零)이었는데 그 중 40결은 이배의 투식[吏輩之偸食]에 귀속되었으며, 23결은 진자의 첨보[賑資之添補]에 귀속되었습니다. 그 나머지 67결은 비록 재민(?)에게 추가로 지급[?]했다고는 말했으나 실표결[實俵之結]을 가지고 획급수[劃下之數]를 비교하면 잉여(剩餘)는 오히려 58결령이나 되어 그것의 귀속처가 불분명해졌습니다[歸屬無處].

   진정(賑政)은 초기(抄饑) 단계부터 정실(精實)할 수 없었으며, 궤죽(饋粥)거리도 혹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명실(名實)은 상부하지 않았으며, 혜택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기민(饑民) 300()를 가보(加報)한 것에 대해서는 영사(營査 : 감영의 조사)가 이미 밝혔으며, 진곡(賑穀) 400석을 허록(虛錄)한 것에 대해서는 창부(倉簿 : 창고의 물품을 적은 장부)가 있어 증명해 주었습니다. 각곡 창대(各穀倉貸)는 합하여 5,313석령(石零)이지만 기양축은 2,196석령(石零)이나 됨으로 비록 곡품의 추열함[穀品之?] 때문이라고말을 하지만 실은 진정의 장부가 혼탁해졌기[賑簿之淆濫]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입본(立本)할 때는 매 석당 7전으로 감가분급(減價分給)하였으므로 재세(?) 환민(還民)의 칭원(稱怨)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른바 자비전(自備錢)’이란 모두 곡부상 농간ㆍ취잉하여 수효를 거짓으로 늘린 것[穀簿上 ?弄取剩 虛張數爻]’이지만 실제로는 애초에 첨가된 것[添助之物]이 없었습니다. 권분(勸分 : 고을 수령이 각 고을의 사창에서 백성에게 꾸어주었던 곡식을 가을에 받아들이는 것)의 경우 지금 첨사[今僉使] 박이형(朴履亨)의 원납외(願納外)에 경내에 논밭이 있는 경우[境內之稍有食根者] 혹 보진(補賑 : 돈이나 곡식을 내어 진휼하는 데 보탬)으로 독촉하거나, 혹 매향(賣鄕)으로 꾀었는데 많게는 100냥에서부터 적게는 10냥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수합(收合)한 것이 거의 4,000냥에 가까웠습니다. 그 중 1,600냥은 간간이 조령(朝令)으로 통한 것이므로, 비록 환급(還給)’이라고 말하더라도, 중간에 몰수[乾沒]되어 유지되기 어렵거나, 아니면 반드시 없어질 것이므로 일경이 시끄러워지고, 뭇 입들이 떠들게 되었습니다[中間乾沒 難保必無 則一境騷擾 衆口喧藉].

   이배를 차임[吏輩差任]하는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명년의 자리[明年之?]의 경우엔 미리 앞서서 특차해 버렸기 때문에[前期特差]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방[物議之譏謗]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칠리지향(七吏之鄕)의 경우 혐의를 무릅쓰고 승격을 허락하여 관정의 과실[官政之疵累]을 저절로 초래하고야 말았으므로 이미 체직되었다고 하여 논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유사(攸司)에게 영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십시오.

 

   무안 현감(務安縣監) 심계석(沈啓錫)입니다. 2년 동안 재관[?]하며 일념으로 공사를 받들었습니다. 문화(文華 : 文章的 華采)를 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선비들[多士]이 학문을 일으키는 정치[興學之治]를 희망했으며, 자량(慈諒 : 慈愛誠信)으로 구제했기 때문에 소민(小民)들은 인자하게 구휼하는 정치[字恤之政]를 칭송했습니다. 군부(軍簿)의 궐액(闕額)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사하자는 의론[査括之議]이 발생했으며, 창곡(倉穀)의 허부(?)가 과도하게 많았으므로 정봉할 수 있는 대책[精捧之策]에 대해 마땅히 많은 시간이 할애되어야 했습니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한원식(韓元植)입니다. 잔국(殘局)에 새로 부임했는데, 도치(圖治 : 想辦法把國家治好)에 온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계방(?)을 극파(?)하여 요역(繇役)이 불균등한 폐단을 제거했으며, 이교(吏校)를 엄속(嚴束 : 엄히 단속)하여 여리 주구의 폐습[閭里誅求之習 : 誅求 : 强制征收]을 금했습니다.

 

   (해남) 전 현감(前縣監) 유유인(柳幼麟)입니다. 성품이 자량(慈諒)하였기 때문에, 정치는 강명(剛明)하지 못했습니다. 성심(誠深)으로 봉공(奉公)하였기 때문에 잘 다스리고 싶어하는 마음[願治之心]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재주가 적은 이[?]에게 서리 자리를 주었기 때문에[作吏 : 擔任官職], 오히려 비방을 취하는 단초[取謗之端]가 많았습니다. 온갖 관정[凡百官政]을 처리할 때는 폐객의 지휘[弊客之指揮]를 편청(偏聽)했으며, 온갖 공화[近萬公貨]를 관리할 때는 활서의 투롱[猾胥之偸弄]에 일임(一任)했습니다. 200석 세납미(稅納米)에 대해 개창하여 독봉하지 않았기 때문에[未開倉而督捧] 스스로 백성의 원망을 초래했으며, 50석 가분모(加分耗 : 환곡의 加分 부분에서 받아들인 耗穀)에 대해 장부를 조사하여 적발해 냈다지만[雖査簿而摘發] 마침내는 관용(官用)으로 귀속시켰습니다.

 

   용안 현감(龍安縣監) 서홍병(徐弘秉)입니다. 편소한 읍[偏小之邑]에서 근신(謹愼 : 言行愼重小心)하게 정치를 했습니다. 민속(民俗)은 농사를 편안히 여겼으며[自安於稼穡], 관정(官政)은 비난과 칭송이 엿보이지 않았습니다[未著於毁譽].

 

   함평 현감(咸平縣監) 이광룡(李光龍)입니다. 이임 초[?任之初]이지만 정치에는 볼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政有可觀]. 창고의 오류[倉謬]를 답습하지 않아 백성들의 칭송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와 같은 마음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고폐(?)를 바로잡을 수 있을 듯했습니다.

 

   (함평) 전 현감(前縣監) 이재학(李在鶴)입니다. 근신의 반열에서 분우(分憂)하여 외직으로 나가 성실하게 도보(圖報)를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폐국(弊局)에서 정치를 하면서도 손은 마음을 따르지 않았습니다[手不從心]. 삼정(三政)이 이미 고질화되어 하루아침에 바로잡기는 어려웠으나[雖難一朝之矯?], 2년 동안 부질없이 노력하여 오히려 각종 제도의 해이만을 초래했습니다. 관용(官用)에는 거의 한도가 없었기 때문에 유리(由吏 : 이방 아전)가 채무를 떠안고 어쩔 줄을 몰라했으며[抱債], 창고의 농간[倉奸]을 조찰(照察)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민들은 자루를 들고 빈손으로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객의 말만을 들어 자질구레한 비방이 절로 이르렀으며, 기민을 구제할 때는 실질적인 혜택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백성들의 원망이 대단했습니다.

 

   태인 현감(泰仁縣監) 서호순(徐灝淳)입니다. 마음가짐[持心]은 순각(淳慤 : 敦厚誠實)하며, 주치(做治)는 옹용(雍容 : 儀態溫文大方)했습니다. 삼정(三政)에는 본래부터 폐단이 적었기 때문에 부첩(簿牒 : 簿籍文書)이 어지럽지 않았으며, 일경(一境)도 모두 안도(安堵)했기 때문에 관민(官民)이 서로 믿었습니다.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 덧붙이는 비용에 대한 걱정[耗費之患]이 없었으며, 표재(?)할 때는 서리들이 투롱하는 폐습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대동목(大同木)을 돈으로 대신 받았는데, 이 가격을 시가[時直]와 비교해 보면, 그 과람(過濫)함이 너무 심해 비록 해당 읍의 그릇된 관례라고는 하지만 크게는 결호의 고질적인 폐막[大是結戶之痼?]으로 이미 뭇 사람들의 원망이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바로잡아야만 했습니다.

 

   고산 현감(高山縣監) 이유탁(李惟鐸)입니다. 성품은 유선(柔善)하고, 나이도 많았습니다[衰耗]. 정령(政令)의 진작[振發]에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믿는 것은 산읍의 한벽함이었습니다. 사송(詞訟)은 반드시 자방(諮訪 : 咨詢訪問)을 기다려야 했으나, 우선은 처음으로 수령이 된 생소함[初手之生?]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할 듯했습니다.

 

   삼례 찰방(參禮察訪) 이협심(?)입니다. 우폐(郵弊)를 자못 바로잡으려 했으나, 마정(馬政)은 실로 대부분 피열(疲劣)했습니다.

 

   청암 찰방(靑巖察訪) 최치보(崔致輔)입니다. 사람은 본디 질박했으며, 정치도 근면[勤孜]했습니다. 잔우(殘郵)는 절참(絶站)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실심(實心)은 그의 봉공(奉公)을 증명했습니다.

 

   제원 찰방(濟原察訪) 전도해(全道海)입니다. 마음은 이미 근외(謹畏 : 謹小愼微)했으며, 정치도 자량(慈諒 : 성신자애)했습니다. 일기(馹騎 : 驛馬)에 궐액이 없으므로, 우졸(郵卒)들이 칭송했습니다.

(이상은 본도(本道) 감사(監司)ㆍ수령(守令)ㆍ찰방(察訪) 입니다.)

 

   병사(兵使) 이존경(李存敬)입니다. 몸가짐[持身]이 본디 스스로 염약(恬約)하여 군오(軍伍)들이 외경[畏憚]했습니다. 다스림[爲治]이 매번 근면[勤勵]하고자 하여 군무[戎務]가 회복[修擧]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성품이 자못 집착적이었는데, 이것이 그의 단점이었습니다.

 

   수사(水使) 윤재탁(尹載鐸)입니다. 사람이 이미 우매[?]했으며, 정치도 태만[怠弛]했습니다. 전선(戰船) 둔개(芚盖)는 모두 삼루(?)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있었으며, 해도(海島) 송금(松禁)은 오히려 침어(侵漁)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9) (부하들을) 폄출할 때 교만함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막패(幕裨)의 비방을 샀으며,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시목(柴木)을 운반하였기 때문에 진부(津夫)의 원망을 가져왔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공장(工匠)이 쉬지 못하도록 일을 시켰는데, 병기를 수리하고자 하는 정당한 의도가 아니었으며, 종일토록 술[麴蘖]에 곯아 떨어져 있었으므로 영무(營務)를 스스로 번잡[?]하게 만들었습니다.10) 한두 개의 잘한 정치[惠政]는 비록 근외(謹畏)하는 의도에서 나오긴 했지만, 18()을 통할(統轄)하는 것은 그 책임이 너무 막중합니다(18진을 통할하는 임무를 그가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문장임).

 

   중군(中軍) 김종록(金宗祿)입니다. 직책이 한직인 좌막이므로[職閑佐幕], 평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無事可評].

 

   수우후(水虞候) 김진(?)입니다. 그가 처한 막료직은 본래 일이 적으므로, 득실(得失)을 깊게 평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전주 영장(全州營將) 권호(權灝)입니다. 이룬 업적[踐歷 : 經歷, 履歷, 閱歷]도 많고, 기형(?)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나주 영장(羅州營將) 이환경(李煥庚)입니다. 사람은 치밀[精詳]했으며, 정치도 근면[勤幹]했습니다. 명확하게 기형(?)하여 촌리(村里)에는 도둑에 대한 걱정[竊發之患]이 없었으며, 엄격하게 조속(操束)하여 교예(校隸)들이 횡활(橫猾)할 폐습은 없었습니다.

 

   법성 첨사(法聖僉使) 허집(許楫)입니다. 신예(新譽)가 이미 분년(分年 : 區別年歲)에 나타났으므로, 장래에 올 효과는 봉세에서 기대됩니다.[新譽已著於分年 來效可期於捧稅].

 

   (법성) 전 첨사(前僉使) 한도유(韓道裕)입니다. 조운을 운영할 때는 사재를 엄금했으므로[領漕而嚴禁私載], 이미 봉직하려는 정성[奉職之誠]을 다한 것이며, 기민을 구휼할 때는 민조를 멀리서 취했으므로[賑饑而遠貿民租]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可見畏法之心].

 

   군산 첨사(?山僉使) 박시회(朴蓍會)입니다. 염정(恬靜 : 恬淡安靜)하게 자수(自守 : 自堅其操守)했으므로, 군민(軍民)들이 모두 편안했습니다.

 

   (군산) 전 첨사(前僉使) 손수원(孫綏遠)입니다. 진폐(鎭弊) 부문에서는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절실했으며, 세곡(稅穀) 부문에서는 정밀하게 받아들인다는 칭송이 점점 늘어갔습니다.

 

   고군산 첨사(?山僉使) 백치언(白致彦)입니다. 마음은 보답하고자 하는 뜻을 지녔으며, 정치는 가난한 이에 대한 구휼을 우선시했습니다. 진졸(鎭卒)과 도민(島民)들은 이 때문에 칭송했습니다.

 

   임치 첨사(臨淄僉使) 이효증(李孝曾)입니다. 도방(到防)한 지 오래 되지 않았으므로, 소문에 들리는 정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재황(?: 荒年)이 최심(最甚)했기 때문에, 백성을 어루만지고 구휼하는 데에 근면했습니다.

 

   위도 첨사(蝟島僉使) 최봉기(崔鳳紀)입니다. 진무(鎭務)는 이미 근면했으며, 해폐(海弊)는 마땅히 살폈습니다.

 

   임자도 첨사(荏子島僉使) 강이중(姜彛中)입니다. 진무(鎭務) 부문에서는 공사를 받드는 정성[奉公之誠]을 다했으며, 진사(賑事) 부문에서는 백성을 구휼하는 정치[恤民之政]를 다했습니다.

 

   남도포 만호(南桃浦萬戶) 남성갑(南聖甲)입니다. 사람이 자못 똑똑했으므로, 일진(一鎭)을 담당할 만했습니다.

 

   금갑도 만호(金甲島萬戶) 장계흥(張繼興)입니다. 도방(到防)에 대해 귀기울여 보았으나, 칭찬과 흠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금갑도) 전 만호(前萬戶) 김흥철(金興喆)입니다. 3년 동안 승장(乘障 : 登城守衛 : 혹은 군사적 요충지에 부임하다로 해석 가능함)하며 일심(一心) 봉직(奉職)했습니다. 돈을 불려 상을 주었으므로[殖錢分賞] 진교(鎭校)들이 활쏘기 기술[弓矢之藝]을 겨루었으며, 자기 월급을 보태어 폐단을 방지했으므로[??] 도민(島民)들이 회탄의 부역[灰炭之役]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습니다. 실혜(實惠)가 이미 분명하기 때문에 모두들 그의 경체(徑遞 : 벼슬의 임기가 차기 전에 다른 벼슬로 갈리어 감)를 아쉬워했습니다.

 

   어란 만호(於蘭萬戶) 김진혁(金鎭赫)입니다. 가을에 쌀을 받아들이고 봄에 쌀을 베푸는 것[??]이 모두 진의 칭송[鎭譽]을 받고 있었습니다.

 

   목포 만호(木浦萬戶) 최창국(崔昌國)입니다. 사람이 외신(畏愼)하여 본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농사가 우선은 겸황(?)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무마(撫摩)에 힘을 써야 했습니다.

 

   다경포 만호(多慶浦萬戶) 이상은(李尙殷)입니다. (포구에 처음으로 부인한) 신도(新到)이므로 소문이 없었습니다.

 

   검모포 만호(黔毛浦萬戶) 문신희(文信曦)입니다. 관노를 감하여 쇄포방법[刷逋之方 : 쇄포 : 벼슬아치가 사사로이 소비한 官金을 보충함]을 강구했으며, 역말을 팔아 빈민 구휼의 자료[?貧之資]를 보충했습니다.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뜻은 가상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진 만호(梨津萬戶) 천의순(千懿淳)입니다. 환곡 부분에서는 간리의 투롱[奸吏之偸弄]을 살피지 못했으며, 송정(松政) 부분에서는 매번 활민의 범작[猾民之犯斫]이 많았습니다. 직책은 미미[卑微]하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경계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도 만호(智島萬戶) 이관익(李寬益)입니다. 과사(課射)하여 진교(鎭校)를 격려[激勸]했으며, 분진(分賑)하자 토졸(土卒)이 칭송(稱訟)했습니다.

 

   입암 별장(笠巖別將) 조정욱(趙鼎煜)입니다. 송금(松禁)이 비록 엄했지만, 민원(民怨)을 마땅히 잘 살폈습니다.

 

   격포 별장(格浦別將) 임행린(林行麟)입니다. 분적(?)은 이미 균등했으며, 금송(禁松)도 역시 자못 성실했습니다.

 

   위봉 별장(威鳳別將) 박윤풍(朴潤豊)입니다. 딱히 논할 만한 칭찬이나 비방이 별로 없었습니다[別無毁譽之可論].

 

   남고 별장(南固別將) 장문택(張文澤)입니다. 사람이 본디 근간(勤幹:勤勉干練)하였기 때문에, 일장(一障)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나주 감목관(羅州監牧官) 김영박(金永璞)입니다. 이임한 지가 오래 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행한 정무(政務)는 논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진도 감목관(?島監牧官) 박중원(朴重源)입니다. 목전(牧田 : 목장 밭)에 대한 남세(濫稅)라는 숙폐(宿弊)를 잘 제거했습니다.

(이상은 본도 병사(兵使)ㆍ수우후(水虞侯)ㆍ영우후(營虞侯)ㆍ영장(營將)ㆍ변장(邊將)ㆍ감목관(監牧官)입니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정재용(鄭在容)입니다. 문호를 잘 단속하여 잡객(雜客)을 통과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사촉(私囑)이 행해지지 못했으며, 장세(場稅)는 포인(?)에게 환부(還付 : 도로 돌려줌)했기 때문에 유규(謬規 : 그릇된 규정이나 법규)가 통혁(痛革)되었습니다.

 

   노성 현감(魯城縣監) 홍주(洪疇)입니다. 이임(?: 出任職官)한 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치(做治 : 作治)에 대한 소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환곡을 정봉(精捧 : 정밀하게 받아들이다)하였는데, 이 때문에 칭송이 있었습니다.

 

   공주 판관(公州判官) 민정현(閔靖顯)입니다.11) 성적(聲績 : 聲譽功績)은 기현(畿縣)에 일찍이 드러났으며, 치효(治效)는 남주(南州 : 泛指南方地區)에서 기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한이 지난 세금을 거두었으나, 백성을 시끄럽게 하는 폐단[擾民之?]은 없었습니다.

 

   천안 군수(天安郡守) 서병순(徐秉淳)입니다. 정치는 스스로 관인(寬平 : 寬仁公平)했으며, 백성들은 번요(煩擾 : 번거롭고 요란스러움)하지 않았습니다. 봉세(捧稅 : 세금을 바치거나 받아들임)ㆍ분환(分還 : 환곡을 나누어 줌)에 대해서는 성예(聲譽 : 名譽)가 실로 많았습니다.

 

   직산 현감(稷山縣監) 정재기(鄭在淇)입니다. (제가 직산을 지날 때는) 그가 아직 부임하기 전이었습니다[未赴任].

 

   성환 찰방(成歡察訪) 우석구(禹錫龜)입니다. 그가 이임한 지 겨우 달을 넘기는 정도이므로 정치에서 들리는 소문이 없었습니다.(이상은 공충도(公忠道)의 연로(沿路) 수령(守令)ㆍ찰방(察訪)입니다.)

 

   진위 현령(振威縣令) 윤행린(尹行麟)입니다. (제가 진위를 지날 때는) 그가 아직 부임하기 전이었습니다[未赴任].

 

   수원 판관(水原判官) 윤경렬(尹慶烈)입니다. 첨정(簽丁 : 장정을 군적에 올려 기록함. 또는 그 장정)할 때는 서리들이 사사로운 장부[私簿]를 만들지 못하도록 했으며, 봉환(捧還)할 때는 백성들이 여곡(餘穀)을 갖도록 했습니다. 다스린 지 6개월 만에 일경(一境)이 모두 칭송했습니다.

 

   영화 찰방(迎華察訪) 성헌증(成憲曾)입니다. 새로 부임하여 조처(措處)가 적절했기 때문에, 많은 우졸(郵卒)들이 칭송했습니다.

 

   과천 현감(果川縣監) 민치록(閔致祿)입니다. 공로(孔路 : 大路, 大道)의 잔국(殘局)에 부임하여 매우 부지런하게[勤勵 : 勤勞奮勉]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객이 많다는 폐단[客多之弊]도 혹 있었습니다.

(이상은 경기(京畿) 연로(沿路)의 수령(守令)ㆍ찰방(察訪)입니다.)5)

 

 

   4) 미스터리로 남은 암행어사의 죽음

 

   1763(영조 39) 호남 암행어사 홍양한(洪亮漢)

 

   어사 홍양한이 전북 정읍 땅에서 겪은 일. 어사 홍양한은 출두를 앞두고 객점에서 급사한다. 유력한 용의자를 붙잡아 심문하지만 어사의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재쟁쟁쟁쟁쟁!!!

   영조 39년 겨울. 능행(陵幸 : 실제로 능으로 행차하던 당시에 격쟁이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하던 임금의 행차가 멈춰 섰다.

   “이건 무슨 소리인가!”

   어가(御駕 : 임금의 가마)를 타고 가던 임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군가 격쟁(擊錚)을 하고 있는 듯하옵니다!”

   “격쟁? 그 자를 이리 데리고 오너라!”

   임금 앞에 당도한 것은 나이 젊은 한 선비였다.

   “어인 일로 임금의 행차를 막으려 드는고?”

   땅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선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제 아비의 원수를 갚아주소서!!”

   선비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흘러나왔다.

   “원수?”

   놀란 임금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사헌부 지평(持平 : 사헌부의 정5품 관리)으로 일하던 호남어사 홍양한이 태인 현(전북 정읍의 한 면)에 도착한 것은 영조 394월 초. 어사로 임명받은 지 한 달 만이었다. 태인에 도착하자마자 수하들을 풀어 염탐시킨 바, 어렵지 않게 고을 아전의 포흠(逋欠 : 관아의 물품을 개인 용도로 사사로이 써버리는 일)에 관한 첩보가 올라왔다.

포흠은 지방 고을의 공공재정을 잠식하였고, 그를 충당하기 위하여 과외수취가 행해지게 만드는 주원인이었다.

   “횡령한 곡식이 많게는 수천 석이나 된다고 합니다!”

   은밀히 추적한 결과였다.

   “이제 내일이면 출두할 것이다. 모두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도록!”

 

   다음 날 점심 때 괴이한 사건이 벌어졌다. 홍 어사 일행이 출두를 앞두고 한 여점(旅店)에 모여 밥을 먹을 때였다. 어사는 입맛이 없는지 국밥 몇 숟가락을 뜨고 상을 물리라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방에서 어억!’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일행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쓰러진 어사는 이미 절명의 순간을 넘기고 있었다.

   사건이 있던 시각, 방안에는 어사와 그가 신임하여 특별히 중방(中房 : 지난날, 지방 수령(守令)을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던 사람)으로 데리고 다니던 김석준이 있었다. 김석준은 어사 일행이 법석을 떠는 와중에도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는 또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해 4월 말. 대사간 한사직이 왕에게 홍양한에 관한 일을 아뢰었다.

   “출두에 임박해 갑자기 죽었으므로, 그의 사인을 두고 독살이라는 의심이 급격히 퍼지고 있습니다. 어사가 데리고 간 서리를 형조에 잡아 가두어 조사하고, 여점 주인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히 문초케 하소서.”

   그러나 서리와 그 밖의 인물들에게서는 아무런 혐의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사는 단지 국밥 몇 숟갈을 먹었을 뿐이고, 남은 밥은 겸인들이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모진 문초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자백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오래지 않아 모두 석방되었다.

 

   “네가 바로 홍양한의 아들이란 말이냐?”

   격쟁의 이유를 들은 임금이 측은한 눈길로 홍낙교를 바라보았다. 홍낙교는 사건 직후부터 아비의 미심쩍은 죽음을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추적을 거듭하여 왔다. 그 결과 사건 당시 아버지와 함께 방에 머물던 인물이 김석준이며, 사건이 있은 뒤 그가 홀연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죄가 없다면 도타(? : 도망하여 몸을 피함.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제 아비를 죽인 원흉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원하옵건대 그를 법사에 회부하여 아비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홍낙교의 청을 받아들인 임금은 김석준을 잡아들여 엄히 문초하게 했다. 그러나 김석준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심한 고문을 수반한 문초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를 범인으로 인정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그 아들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오나, 김석준 또한 이 나라의 백성임에 틀림없습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은 이상 그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들의 입장은 그러했다. 그 의견에 틀린 바가 없었으므로 임금으로서도 더 이상은 김석준을 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홍낙교가 또다시 격쟁하였다. 홍낙교를 동정하던 임금이 재차 조사를 명하였으나 이번에도 끝내 죄를 밝혀낼 수 없었다. 아들은 피맺힌 절규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심증만을 가지고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아들의 비통한 마음을 어루만지기로 결심한) 임금이 명하였다.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버리고 먼저 돌아온 김석준의 행위는 마땅히 죄를 줄만한 것이다. 그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 자기 죄를 돌아보게 하라!”

 

   이로써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아니, 마무리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홍양한은 평소 급서에 이를만한 지병을 앓고 있었던가?

   당년 44.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보아 적지 않은 나이. 그러나 암행어사에 임명된 관리의 육신이 그토록 허약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왜 독살됐다는 소문은 그토록 낭자했던 것일까?

   왜 아전이나 김석준의 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걸까?

   어사의 신임을 받아 그를 수행하던 중방이 상전의 죽음을 보고도 그냥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다. 그래서 홍양한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6)

 

-------------------------------------

 

1)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2) 일성록.

3)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4) 일성록.

5)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6)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