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기관(地方行政機關)과 태인 동헌(泰仁東軒)
지정현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지정년월일: 1976년 4월 3일
소 재 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451-9(정읍 동헌길 24)
시 대: 1816년(조선 순조16년) 중건, 1977년 보수공사
규 모: 정면 6칸, 측면 4칸, 팔작지붕
지방 읍치(邑治)의 관아는 국가적인 공무(公務)를 집행하기 위한 건물인데 이를 일반적으로 ‘공청(公廳)’이라고 한다. 그중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관아(地方官衙)의 정무(政務)인 군현(郡縣)의 행정(行政) 사법(司法)을 총괄(總括)하고 육방(六房) 관속(官屬)을 통솔하였던 중심건물이다. 수령(首領)의 살림채인 내아(內衙)와 지방 관리와 사신의 숙소로 사용된 객사(客舍), 수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위한 하급관속들의 청사(廳舍) 등으로 구성된다.
지방관아는 중앙에 담과 정문을 내어 각종 집무실과 창고를 두고 주변에는 객사․향교 등 부속건물을 둔다. 정문 안에 다시 담을 두르거나 행랑(行廊)으로 격리되고 협문(夾門)으로 통한다. 공간적으로 공적(公的) 공간인 동헌과 사적(私的) 공간인 내아가 공존(共存)하는 것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동헌(東軒)이라는 이름은 내아의 동쪽에 자리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외동헌이라고 하며, 고을 수령이 향리를 거느리고 현정(縣政)으로 마을의 공무를 집행하는 관아를 이르는 곳이라 하여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이라고도 했다. 동헌은 궁궐이나 사찰과 달리 화려하지 않고, 위엄 있는 단아한 건축으로 지어졌다.
내동헌은 내아(內衙, 오늘의 官舍) 또는 서헌(西軒)이라고 불리는 현감(縣監)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사택(私宅)이었다.
동헌의 구조와 크기는 군현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유사하다. 보통 정면 6~7칸, 측면 3~4칸 건물로 전체 평수는 40~50평 정도이다. 동쪽에 대청을 두고 서쪽에 온돌방과 다락을 둔다. 방의 앞에 툇마루1), 뒤에 누마루2)와 광을 낸다. 대체로 외아는 상류가옥의 사랑채, 내아는 안채구조와 비슷하다.
건물은 그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는데, 마을의 최고 권력기관인 관청이었던 동헌의 인상은 당연히 근엄하다. 위엄을 드러내고 권위를 보여주어야 했으므로 격식을 차려 지어졌다. 그래서 그 규모나 스타일, 분위기 등이 크고 무겁고 정확하다.
1896년경에 발간된 『태인읍지』를 보면 아사(衙舍: 동헌), 객사를 비롯하여 약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훈련청(訓練廳), 순교청(巡校廳), 서기청(書記廳), 통인청(通引廳), 사금청(使今廳), 사용청(使傭廳) 등의 많은 공청(公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현재는 태인 현감의 치소(治所)로 사용한 외동헌인 태인 동헌만이 남아 있다.3) 동헌은 1976년 문화재로 지정되며 부분 복원되었고, 2000년대 정읍시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2004년 주변 정비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1409년(태종 9) 인의현과 태산군을 병합하여 태인현으로 바꾸면서 태산군에 치소를 두었으나 인의현의 백성들이 동쪽에 떨어져 있는 태산읍에 왕래가 불편하여4) 1416년(태종 16) 8월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居山驛)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터가 좁고 누추하여 1418년(태종 18) 겨울 현감 오치선(吳致善)이 거산역 서쪽 현재의 위치를 살펴 다음 해 가을 비로소 후청(後聽)․동서침(東西寢)․남청(南廳)․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웠고, 1421년 여름에는 좌우랑(左右廊)․좌우마구(左右馬廐)․대문․고옥(庫屋)․향교․성전을 세웠다.5) 이로 미루어 현감 오치선이 새롭게 관아를 조성한 1418년 창건 연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6)
현존 건물은 1977년 보수공사 시 발견된 상량문으로 미루어 1816년(순조 16) 4월에 현감 김이회(金履會)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7), 조선 후기의 팔작집(八作家)으로 59㎡로, 한국에 지금 있는 동헌 가운데 원형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다수가 원형을 잃고 파괴되거나 전용되었다. 태인현의 관아 건물도 유사한 경우이지만, 다행히 동헌 건물은 초등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태인 동헌은 창호, 벽체 등 수장부(修粧部)의 변형은 있었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공포(栱包)의 양식이나 구조 등에 있어 개건 때인 19세기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따르고 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태인 동헌은 웅장하다. 운동장 같은 너른 마당에 저 멀리 높은 월대(月臺)8)와 기단 위에 앉은 동헌은 정면(正面)은 6칸(六間)이고, 측면은 4칸(四間) 규모인 ‘一’자형 평면으로 건물의 전․후면에 퇴를 두어 공간을 구성한 건평(建坪)이 45평이나 되는 큰 집이다. 정면에서 볼 때 전․후퇴를 제외한 중심부분에는 동측에서부터 대청 3칸, 방 2칸, 다락 1칸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으며, 다락의 하부는 다른 용도로 상용하지 않아 바닥 부분이 노출되어 떠있는 형태이다. 건물의 전면 퇴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후면 퇴의 동측부분 2개 칸은 대청(大廳)9)보다 단을 높여 누(樓)마루10)로 구성하였고 서측 3개 칸은 아궁이를 설치한 흙바닥의 공간으로 벽체를 두어 실(室)을 구획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은 개방하였고 양 측면과 배면에는 벽체나 창호를 설치하였는데, 배면 누마루와 아궁이 실 사이에 위치한 1개 칸은 비워져 있어 외부에서 바로 대청과 아궁이 실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청(大廳)은 3×2칸의 규모로 가운데 2개 기둥을 빼고 6칸을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면 툇마루와 후면 누마루로 마루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다. 온돌방은 대청에서 진입할 수 있고, 대청에 면한 방 2개 칸을 1개의 긴 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2개 칸은 기둥을 중심으로 창호를 설치하여 2개의 실을 나누고 있다. 서측의 다락은 뒤쪽 방에 문을 설치하여 출입하도록 하였다. 방과 대청 사이에는 각각 3짝 들문을 설치하여 필요시 대청 공간을 확장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태인 동헌의 평면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규모로, 8척(尺)을 기준으로 정면과 측면의 주간(柱間)11) 거리를 정하였고 각 면의 끝 칸은 7척을 기준 칸보다 좁게 구성하였다. 정면과 측면의 주간(柱間) 폭을 일정하게 하여 주요 부재들의 크기를 통일하고, 모서리 부분의 주간(柱間) 폭을 같게 하여 추녀를 걸기위한 외기도리(外機道里)12)를 따로 구성하지 않도록 하는 등 편리함을 고려한 평면 계획을 하였다. 공간 구성의 경우, 정면 6칸을 기준으로 동측 3칸에는 대청을, 서측 3칸에는 방과 다락을 두어 공간을 양분하였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후면 툇간에는 누마루와 아궁이 실을 두어 주 공간을 보조하고 있다.
기단(基壇)은 1993년과 2004년에 보수되었다. 1993년 이전의 태인 동헌은 태인 초등학교 교정내의 운동장과 교사 옆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 지형이 정비되지 않아 기단이 많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1993년 보수 공사에서는 전후면 레벨차치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 전면과 측면 일부에 석축을 쌓고 기단을 전면 해체 보수 한 후, 기단 주변으로 벽돌담장을 세워 건물에 대한 보호조치를 하였다. 2004년에는 건물의 전면 기단을 해체 보수하고 계단을 설치하는 등 주변 지형을 정비하였다. 현재 태인 동헌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지형에 자리하고 있어 전면 마당에 레벨차를 반영한 석축과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의 기단은 이러한 지형을 반영하여 정면이 높고 배면이 낮은 자연석 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부는 강회(剛灰)13)다짐으로 마감하였다.
기단(基壇)은 주로 화강석 파쇄석을 사용하여 자연석 줄 쌓기를 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옛 부재로 보이는 마모된 자연석이 사용되었다. 정면인 남측 면은 자연석을 3단으로 쌓았으며, 좌측면과 우측면의 기단은 배면 쪽이 높아지는 경사에 위치해 있어 전면은 3단으로, 후면은 2단으로 쌓았는데, 높이를 맞추기 위해 작은 돌을 가운데 끼워 넣어 3단으로 만든 부분도 보인다. 배면 기단은 동․서 양끝 부분은 2단으로, 가운데 부분은 1단으로 쌓았다. 기단 상부의 윗면과 측면은 강회다짐으로 마감하였데, 배면의 기단 상부가 토사로 높아진 상태에서 마감이 되어 전면과 레벨 차이가 300mm 정도로 크게 난다. 기단 전면에는 화강석 판석 진입로와 연계된 2단의 계단석이 설치되어 있고, 기단 상부에 디딤돌을 놓아 내부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였다. 건물 정면에 설치된 디딤돌은 계단보다 서측으로 한 칸 옆에 위치해 있어 온돌방 앞에 설치된 툇마루를 딛고 내부로 출입하도록 하였다.
초석(礎石)은 팔각형과 사각형의 초석이 사용되고 있다. 건물 정면과 배면 평주(平柱) 초석, 동측 면 1개소에 하부가 넓은 윗면이 좁은 팔각형의 초석이 설치되었으며, 고운정다듬14) 정도로 잘 가공되어 있다. 동측 면과 서측 면, 배면의 양쪽 우주(隅柱)15)초석에는 사각형의 초석이 쓰이고 있는데, 석재를 할석한 후 부분적으로 거친 정다듬 정도의 가공을 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정면과 배면에 팔각형 초석을 설치하였으며, 동측 면 첫 칸의 출입구 옆에도 팔각형의 초석을 설치하였다. 초석을 팔각형으로 공들여 치석(治石)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과거에는 마루 하부 부분을 고막이로 막지 않고 초석을 노출하였을 가능성도 보인다. 배면의 평주에도 팔각초석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현재와 같이 벽체를 설치하지 않고 정면과 대칭되도록 툇마루로 구성하였을 수 있으며, 이는 기둥의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현재 측면 일부와 배면 초석의 경우, 기단이 높아지면서 초석의 하부 부분이 묻혀 초석의 전체 높이는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가구 구성(架構構成)16)이 2고주(二高柱)17) 7량가(七樑家)18)이며, 고주 상부에 대량(大樑: 대들보)과 종량(宗樑)19)을 결구(結構)하고 전․후면에는 퇴량(退樑)20)을 설치하였다. 건물 동․서측 마지막 칸의 경우, 고주 열에는 도리방향의 퇴량을 설치하고 중앙 기둥에는 충량(衝樑)21)을 결구하였다. 건물 동측 충량의 뒷뿌리는 대량 하부에 결구(結構)하여 곡(曲)이 큰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서측 충량(衝樑)22)의 경우 고주 옆면에 맞춤하였다. 건물 모서리 부분의 양방향 주간(柱間) 크기가 같으므로 정방형으로 계획하여 추녀를 걸기 위한 외기도리를 따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중도리(中道里)23)와 대량의 짜임 부분으로 대신하였다. 측면 연목(椽木)24)을 대량의 상부에 걸었으므로, 양 끝에 위치한 대량의 경우 춤을 약간 작게 사용하였다.
정면 기단 상부에서 용마루25) 끝까지 건물의 전체 높이는 7,536mm 정도이다. 출목도리를 기준으로 한 건물의 기둥부와 지붕부의 비례는 1: 1.1~1.2 정도로 건물 상부가 큰 편이며, 7량가의 건물로 내부가 장중한 느낌을 준다.
기둥(柱)은 총 33본의 기둥이 있으며, 외진평주(外陣平柱)26)가 20본, 내진고주(內陣高柱)가 13본이다. 외부에 면한 기둥은 모두 평주(平柱)27)를 사용하였으며, 건물 내부 열에 고주(高柱)를 설치하였다. 건물의 전체 기둥 열 중 대청의 가운데 고주 2본을 감주(減柱)하였으며, 온돌방의 가운데 기중 1봉은 사각의 기둥을 설치하였다. 기둥은 대체로 모두 느티나무로 된 잘 다듬어진 민흘림의 원형 기둥으로 부분적으로 원하는 치수를 얻기 위해 나무의 형태를 살려 치목(治木)한 부재를 사용한 경우도 있다. 방의 중간에 위치한 기둥은 3방향으로 미서기 창호가 설치되어 있어 편의상 방형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평주(平柱)와 고주(高柱) 등 대부분의 기둥에 현재 쓰이지 않는 장부28) 구멍이나 결구부 등이 남아있다. 정면과 측면의 외부에 면한 기둥 안쪽에는 일제 강점기 때 학교 교사로 사용하기 위해 유리 창호를 설치하였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정면 고주 열에도 장부 구멍들이 남아있어 건물 내부에도 창호 등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배면의 외부 평주와 내부 고주에는 현대 대청 높이에 맞추어 마루 귀틀29)을 설치하였던 홈이 있어, 한때 배면에도 툇마루가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건물의 귀솟음30)을 주는 방법은 기둥의 길이나 초석의 높이를 상황에 맞추어 함께 조정한 것으로 보이며, 초석을 설치한 후 귀솟음 값을 계산하여 기둥 높이를 맞추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에 건물 초석까지 해체 보수를 한 기록은 없으므로, 귀솟음 값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기둥 기울기에 따른 건물의 변형과 지반의 상태 변화 등 여러 요소들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체로 볼 때, 기둥의 변위는 대체적으로 반시계 방향을 따르고 있으며, 주간(柱間) 거리 등과의 연계성은 보이지 않는다. 우주에서의 변위가 크지 않고 기울기의 방향도 건물 외부를 향하고 있는 등 일정하지 않아 현재 상태에서 안쏠림을 판단하기 어렵다.
창방(昌枋)31)은 외진 평주(平柱)의 상부에 결구되어 기둥 사이를 연결해주는 창방과, 고주 사이와 대량 위 동자주(童子柱)32) 사이에 결구된 창방, 종대공(宗大共)33) 사이에 결구된 뜬창방34)이 사용되고 있다. 창방은 건물의 도리 방향에 6본씩 각각 12본, 보 방향으로 4본씩 8본이 결구되어 총 20본이다. 창방은 장여(長欐)35)와 같은 폭을 사용하였으며, 너비는 100mm 내외이고, 춤은 210~216mm 정도이다. 창방의 너비와 춤의 비는 1: 1.97~2.18 사이로 춤이 너비에 비해 2배 정도 크다. 창방의 하부 면에는 창호를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정면 창방의 바깥 면에는 연한 녹색 칠이 되어 있다. 우주에서36) 창방 뺄목은 초익공(初翼工)37)의 형태로 귀공포를 이루고 있고, 고주 창방의 뺄목은 보머리와 장여 길이에 맞추어 직절(直截: 원기둥이나 각기둥 따위의 기둥체를 그 측면에 수직인 평면으로 자름.)하였다.
대량(大樑)은 전후면 고주(高柱) 상부에 5본이 설치되어 있다. 대량은 고주 상부에 놓인 주두(柱枓, 柱頭)38) 위에서 중도리 및 중도리 장여와 직각으로 결구되고 있으며, 보 하부에는 보아지39)를 설치하였다. 보머리의 크기는 380×200mm 정도로 폭이 넓고 약간 사절(斜截: 비스듬히 자름.)하였으며, 상부의 양쪽 면을 아래 부분이 굴려진 오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종량(宗樑)은 고주 대량 위의 동자주에 결구되어 상중도리(上中道里)40)를 받고 있으며, 총 5본이 쓰이고 있다. 종량이 결구된 동자주 사이의 간격은 약 1,960mm이며, 단면 크기는 270×300mm 정도이다. 종량의 상부와 하부 모서리는 둥글게 다듬었으며, 대체로 가운데 부분이 휘어져 올라가는 형태로 치목되어 있다. 보머리는 상부를 경사지게 깎고 직절하였으며, 하부에는 보아지를 설치하였다. 종량의 상부에는 하부가 넓은 사다리꼴 형태의 판대공(板臺工)41)을 설치하여 종도리(宗道里)42)와 종도리 장여, 뜬창방을 결구하였다.
충량(衝樑)은 동서 측면 칸 중앙의 평주에서 도리방향으로 내부를 가로지르는 충량이 2본 사용되고 있다. 건물 서측에 설치된 충량은 보머리 부분은 좌측면 가운데에 위치한 평주에 결구하고 뒷뿌리는 고주의 상부 몸체에 장부 맞춤하여 산지43)를 박아 고정하였다. 건물 동측에 설치된 충량의 뒷뿌리 결구의 경우, 대청 중간 부분에 고주가 없으므로 대량 하부에 직각방향으로 결구하는 방식을 구성하고 있다.
퇴량(退樑)은 정면과 배면에 퇴가 있는 건물로 전․후면에 각각 5본씩 설치되어 있으며, 양 측면 칸의 가운데 기둥을 제외한 앞뒤 고주 열에 각 2본씩, 4본의 퇴량이 쓰이고 있어 총 14본의 퇴량이 사용되었다. 퇴량은 외진 평주의 공포 상부에 머리 부분을 결구하고, 뒷뿌리 부분을 고주에 장부 맞춤한 후 산지를 꽂아 고정하였다. 현재 산지 촉이 유실되어 홈만 남은 부분이 많다. 퇴량의 너비는 고주보다 좁아 고주에 결구할 때 보의 폭을 줄이지 않았으며, 모서리 부분에서는 직각 방향으로 2본의 퇴량이 결구되고 있어 고주 몸체의 손실이 큰 편이다. 보머리는 충량과 같이 익공 상부에 결구되어 운공(雲工)44)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도리(道里)의 경우 종도리(宗道里)와 상중도리(上中道里), 중도리(中道里), 주심도리(柱心道里)45)로 가구를 구성하고 있으며, 외일출목(外一出目)46)으로 출목도리(出目道里)47)가 설치되어 있다. 도리는 모두 팔각형의 단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종도리와 중도리 사이의 거리는 2,440mm 정도로 8척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하중도리에서 주심도리까지의 거리는 2,135mm 정도로 7척인 것으로 판단된다. 각각의 도리 하부는 장여가 받치고, 주심도리는 도리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2단의 장여를 사용하였으며, 퇴량과 충량 상부와 도리 사이의 높이차가 있어, 정면과 좌측면에서는 상부의 장여와 도리를 올려 결구할 수 있도록 승두48)를 사용하고 있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 포(包)를 올리고 주간(柱間)에는 화반(花盤)49)을 1개씩 배치한 주심포(柱心包)50)계 익공(翼工) 건물이다. 공포는 일출목(一出目) 이익공(二翼工) 형태로 공포의 구성은 외1출목이고 내출목(內出目)51)은 없으며 내단은 보아지 형태이다. 전형적인 이익공계(二翼工係)의 짜임이나 재주두가 설치되지 않은 점이 다르다. 태인 동헌에서 사용된 공포는 그 위치에 따라 평주에 사용된 공포와 우주에 사용된 귀공포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평주 공포(平柱栱包)는 사면의 모서리 귀공포를 제외한 16조가 짜여 있다. 평주의 공포 짜임을 살펴보면 기둥 상부에 창방과 직교하여 초익공(初翼工)을 결구하였고, 초익공은 기둥 상면보다 높이 올라와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두고 그 위에 십자형 갈을 두어 이익공과 행공첨차(行工檐遮)52)를 직교하여 결구하였다. 이익공(二翼工)에는 주심으로부터 돌출시킨 출목을 구성하기 위해 출목첨차(出目檐遮)53)를 두었다. 주심에는 행공첨차와 동일한 춤을 지니는 장여를 두었으며, 출목선 상에는 출목첨차 위에 외목도리 받침장여(장여를 받침장여라고 함.)를 두었다. 주심첨차54)와 출목첨차의 단부에 놓인 이갈소로(-小櫨)55)의 내측 갈 위에 순각판(楯桷板)56)을 올려놓았다. 이익공 위에는 보를 설치하였고, 보머리는 익공과 같이 덩굴(唐草)문양으로 초각(峭刻)57)하였다. 외모도리는 보머리에, 주심도리는 보머리 위에 승두를 설치하여 올려놓았다. 주심도리와 외목도리의 출목 간격은 310mm 내외이다.
초익공과 이익공까지 외단의 초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앙서형(仰舌形)58)으로 초각하였다. 초익공에는 앙서 위와 아래에 꽃봉오리를 새겼으며, 이익공에는 앙서 아래에 꽃봉오리를 초각하였다. 내단은 초익공과 이익공을 연속된 초각을 한 보아지 형태의 부재가 보를 받고 있다. 내단의 형상은 정면과 우측면, 배면 서측의 경우 당초문(唐草紋)59)으로 초각한 보아지형인데 반하여, 이외의 경우 사절한 보아지형으로 차이가 있다. 이는 전자는 개방된 마루나 정면에 위치하지만 후자는 방 또는 아궁이가 위치한 공간 또는 배면에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우주(隅柱) 상부의 공포 짜임은 평주와는 차이가 있다. 우주 바깥부분의 창방 뺄목은 초익공 형태로 처리되어 짜이며, 이익공과 출목첨차는 각각 좌우대(左右隊)60)로 바뀌어 서로 직교하여 결구된다. 주심장여 뺄목은 외목도리 바깥으로 내밀어져 운공이 되고, 외목도리장여 뺄목은 간략하게 직절되어 있다. 귀공포의 45°방향으로는 귀한대(-限大)61)가 설치되었으며, 출목첨차가 직교되면서 귀한대가 결구되는 부분에는 사각형 접시 소로를 두었다.
익공(翼工)은 일출목 이익공의 짜임으로 초익공과 이익공의 익공체가 사용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익공은 앙서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초익공과 이익공은 덩굴무늬로 꽃봉오리 형상이 초각되었다. 익공 부재의 내단(內端)은 퇴량, 충량을 받치는 보아지 형태로, 외부로 드러난 부분에는 당초문양(唐草紋様)으로 초각을 하였으며 배면 혹은 방반자62)로 가리는 부분에는 초각 없이 직절(直切)하여 사용하였다.
공포는 이익공에 직교하여 주심 상에 행공첨차(行工檐遮)를, 외목 상에는 출목첨차(出目檐遮)를 설치하였다. 행공첨차는 옆면은 직절하고 하단은 비스듬히 둥글려 사절한 첨차를 사용하였고, 양옆의 소로 자리는 따내었다. 출목첨차 또한 행공첨차와 같이 옆면은 직적하고 하단을 비스듬히 둥글려 사절한 첨차를 사용하였다.
화반(花盤)은 기둥과 기둥 사이 창방 위에 한 개씩 놓여 있으며, 총 20개가 설치되어 있다. 화반은 한 장의 판재로 되어 있으며, 화반 상부에는 소로(小櫨)를 올려 장여를 받치도록 하였다. 그 형태에 따라 원형 화반과 방형 화반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 화반은 정면과 우측면, 배면 동쪽 2칸과 좌측면 북측 3칸에 설치되어 총 15개가 있으며, 이외의 주간(柱間)에는 5개의 방형 화반이 쓰이고 있다.
주두(柱枓)는 사용된 위치에 따라 평주(平柱) 주두와 우주(隅柱) 주두, 고주(高柱) 주두, 동자주(童子柱) 주두로 구분할 수 있다. 평주에 설치된 것은 총 16개이며, 우주 4개, 고주, 동자주에 각각 10개가 설치되었다. 굽의 형태는 모두 사절된 빗굽주두63)로서 굽 받침은 없다. 평주 주두의 형태는 상부에 사갈로 홈이 파여 있다. 우주 주두의 형태는 상부에 사갈로 홈이 파여 있고 귀한대가 지나는 45° 방향으로 갈을 냈다. 고주 주두의 형태는 평주 주두와 마찬가지로 상부에 사갈로 홈이 파여 있다. 동자주 주두는 주두 하부에 뜬창방이 기둥 상면 보다 높이 올라와 보아지와 함께 직교하여 결구되었고, 상부는 사갈로 홈을 파 상중도리 장여와 종량이 직교하여 짜여 있다.
소로(小櫨)는 평이갈소로, 사갈소로, 외옆갈 이갈소로, 양옆갈 이갈소로, 접시소로가 사용되었다. 형태는 주두와 마찬가지로 사각형이며 굽은 사절된 빗굽소로이다.
평이갈소로는 출목첨차의 양단부, 고주나 동자주, 종대공64) 사이의 뜬창방과 장여 사이 등에 사용되었다. 평이갈소로의 형태는 상부에 이갈로 홈이 파여 있다. 사갈소로는 출목첨차의 상․하부 중앙에서 초익공과 이익공과의 맞춤부에 각각 사용되었다. 사갈소로의 형태는 상부에 사갈로 홈이 파여 있다. 외옆갈 이갈소로는 주심첨차 상면 양단부에 사용되었다. 외옆갈 이갈소로의 형태는 상부에 이갈로 홈이 파여 있고 공포재가 짜일 수 있도록 옆갈 한쪽을 땄다. 양옆갈 이갈소로는 소로 양측면과 소로 윗면에 도리방향으로 갈이 파여져 있으며, 화반 윗면에 사용되었다. 접시소로는 귀포에서 귀한대와 출목첨차가 교차되는 지점에 위치한 소로로 우주에만 설치되어 있다. 크기는 다른 소로와 같으나 상면을 모두 따내어 높이의 차이가 있다.
처마는 연목 위에 부연(附椽)65)을 설치한 겹처마 형태로, 사면에 추녀와 사래를 설치하였다. 처마선은 추녀와 사래를 중심으로 처마 양끝이 휘어 나오고 휘어 오르면서 안허리곡(曲)66)과 앙곡(昻曲)67)을 형성한다. 종도리와 상중도리, 중도리, 처마도리 사이에 설치된 연목은 상연과 중연, 하연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인 동헌은 팔작(八作)지붕으로 사면에 연목과 부연을 설치한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추녀 양쪽으로는 선자연(扇子椽)을 걸었다. 연목 개수는 선자연68)을 포함하여 정면 60개, 배면 59개이고, 양 측면은 모두 각각 42개씩이다. 선자연은 추녀를 중심으로 양쪽 면에 각각 13개씩으로 구성되어 총 104개가 설치되어 있다. 선자연의 뒷뿌리 중심은 추녀와 중도리의 교차점에 두었다. 지방 동헌의 건물이지만 규모가 크고, 도리 간격이 넓어 선자연을 간단하게 처리하지 않고 정연한 틀에 맞추어 설치하였다.
연목(椽木)69)은 정면과 배면에는 상연과 중연, 하연을 사용하여 3단으로 구성하였고, 측면에는 하연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측면 양통을 넓게 하여 대량과 종량, 퇴량을 설치하였으며, 출목도리, 처마도리, 하중도리, 상중도리 및 종도리를 사용하여 7량가를 구성하고 있다. 2단의 연목을 설치하였을 경우 상중도리는 하중도리와 종도리 사이에서 단연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데 비해, 이 건물에서는 약간 욱어지는 기와 곡(曲)을 만들도록 높이가 설정되어 있다. 부재 길이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2단의 연목을 구성하였을 때 하단의 연목 길이가 너무 길어지는 문제점이 있으므로 중연의 사용은 건물 규모에 있어 필요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종도리와 상중도리 사이에 상연이, 상중도리와 하중도리 사이에는 중연이, 하중도리와 처마도리 사이에는 하연이 설치되어 있다.
선자연(扇子椽)의 치목 형태는 연목과 동일하다. 다만 배면의 동측, 즉 추녀의 배면 부분 선자연에는 갈모산방(-帽散枋)70) 상부에 선자 뒷뿌리 모양으로 판재를 잘라 덧대었다. 이는 가지런한 선자연으로 보이기 위한 장치로 판단되는데, 부실한 시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연(附椽)개수는 연목의 개수와 동일하여 총 203개이다. 부연은 각부연이 사용되었고, 마구리는 상단보다 하단이 좁아지는 역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지만 하단과의 너비 차이는 미미하다. 연목과 같이 마구리71) 방향으로 하단을 조금 가늘게 훑어 깎아 끝걷기73)를 하였으며, 마구리는 사절되어 있다.
처마 내밀기는 출목도리 장여의 외부 면에서부터 연목과 부연 상단부까지의 거리를 실측한 값이다. 처마내밀기의 평균값에 대한 검토는 값의 편차가 위치와 상관없이 크게 나타나고 있어 제외하였으며, 부분적으로 변위가 많이 발생하여 평고대 선이 춤을 추듯 휘어져 있다. 지붕 노후화에 따른 변형인지, 부실한 시공 때문인지는 차후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안허리곡(曲)은 건물 규모에 비해 비교적 완만한 곡선을 보이나 4면 모두 많이 흐트러져 있는 상태이며, 앙곡(昻曲) 역시 북동쪽 모서리의 추녀 부분에 처짐이 있어 부분적으로 변형이 발생하였다. 처마의 앙곡의 형태는 정면과 배면의 경우 중심부분 10여 개 정도의 연목을 수평으로 설치하고, 평연에서부터 레벨차를 주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측면의 경우, 평연과 선자연에 모두 레벨차를 주어 수평인 부분 없이 전체가 곡선을 이루도록 하였다.
처마는 연목과 부연을 설치한 겹처마로 각 모서리분에 추녀와 사래가 각각 4본씩 설치되어 있다. 추녀와 사래의 마구리는 사절하였고,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보인다. 볼접기나 게눈각 등 여타의 장식 없이 치목하였으며, 마구리 쪽으로 하부면의 바닥을 훑어 깎는 부분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추녀의 마구리 크기는 4곳이 모두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래의 마구리 크기는 추녀보다 다소 작아 상․하부 폭이 거의 차이가 없다. 일반적으로 사래와 추녀의 폭을 비슷한 크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태인 동헌의 경우 사래 폭이 추녀보다 35~47mm 정도 좁게 되어 있다. 주심도리의 중심에서부터 추녀 끝단까지의 수평 거리를 측정한 추녀 내밀기는 배면이 정면보다 작은 값을 보이며, 사래 내밀기의 경우 배면이 더 큰 값을 가녀 전체 내밀기 거리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추녀는 갈모산방(-帽散枋)에 턱을 내어 그 상부에 끼워 설치되어 있다. 갈모산방은 각 면 양측 모서리의 출목도리와 주심도리 위에 설치되어 총 16개가 있다. 출목도리 상부에 설치된 갈모산방의 춤이 정면과 배면보다 다소 높다. 추녀 좌우면의 갈모산방 높이 역시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추녀의 뒤틀림 등에 의해 변형이 생긴 후 이에 맞추어 부재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추녀 양측 면에 설치된 갈모산방의 길이 차이보다 처마 한 면의 양끝 부분에서 현격한 길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갈모산방의 길이가 다양하게 사용된 것은 앙곡과 함께 살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팔작지붕으로 양측면에 합각(合閣)73)을 구성하였다. 합각은 박공널(牔栱-)74)의 人자 형태로 맞대어 걸고, 상부의 홈에 목기연(木只椽)75)을 설치하여 내림마루76)를 지지하도록 하였다. 박공널이 맞대어지는 부분에는 지네철이 설치되어 있다. 박공널 사이의 합각벽(合閣壁)77)은 강회로 미장 마감되어 있고, 수키와(夫瓦, 牡瓦) 78)두 개를 붙여 원형으로 만든 세 개의 환풍구가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우측면과 좌측면 합각의 전체 형태는 같으나, 좌측면이 우측면보다 합각의 크기가 더 크며 설치된 목기연 수도 2개가 더 많다. 중심 목기연의 레벨은 비슷하나 너새의 높이가 좌측면이 200mm 정도 낮게 설치되어 있다. 합각의 크기와 레벨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좌측면의 합각 위치가 처마 쪽으로 더 내밀어져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공널 상부의 목기연은 우측면에 17개, 좌측면에 19개가 설치되었는데, 박공널이 만나는 중앙 상부에 하나가 놓이고 양측으로 대칭되도록 설치되어 있다. 좌측면의 박공널이 우측면보다 길기 때문에 박공널마다 1개씩 목기연이 더 설치되었다. 목기연 사이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고 편차가 있다. 목기연 내밀기는 평균 100mm 정도이다. 목기연의 마구리는 좌우측면이 같지 않고 차이가 있다. 우측면의 목기연 마구리는 역사다리꼴 형태이다. 좌측면의 목기연 마구리는 사다리꼴 형태를 보여 일반적인 형태와 다르다. 일부 역사다리꼴을 보이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상․하부의 너비가 같거나 하부가 약간 더 넓은 형태이다.
지붕은 양측면에 합각을 구성한 팔작지붕 형태로 용마루와 4개의 내림마루, 4개의 추녀마루79)로 지붕마루80)를 구성하고 있다. 용마루는 착고(着固)81), 부고(付高)82)와 5단의 적새83)로 구성되어 있고, 내림마루와 추녀마루는 착고 위 적새가 3단씩이다. 용마루 끝은 머거불84)로 수키와 1개를 옆으로 세워 쌓았으며, 그 위에는 망와(望瓦)가 설치되어 있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도 망와85)를 설치하였으며, 바닥기와 끝선은 수막새(夫莫斯, 唐瓦)86)와 암막새(女瓦, 平瓦)87)로 마감하였다. 망와의 크기와 문양이 다양하고, 막새도 여러 가지 문양이 섞여 사용되고 있다.
바닥기와는 단면의 중간 부분이 우거지는 곡선을 이루고 있다. 정면 중앙 부분의 처마 레벨이 낮고, 배면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시작점은 차이가 나지만 용마루의 위치는 맞추어 설치하였다. 처마의 레벨과 양측면 합각의 크기가 달라 지붕 크기에 편차가 있다.
용마루는 중앙을 중심으로 양끝이 휘어 오르는 자연스러운 곡선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는 12,993mm이다. 용마루 길이를 결정하는 한 요소인 박공널은 측면 주심에서 박공널 내부 면까지의 거리가 안쪽으로 들어온 지점에 위치해 있다. 용마루의 중앙부의 레벨이 가장 낮아, 중앙을 중심으로 양끝이 휘어져 올라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림마루는 착고를 세우고 암기와88) 3단을 쌓은 후, 수키와 적새를 올렸으며, 내림마루의 단면 높이는 330~360mm 정도이다.
추녀마루의 길이는 위치에 따라 길이차가 큰 편이다. 내림마루의 길이와 상관관계가 있어 내림마루가 길면 추녀마루가 짧고, 내림마루가 짧으면 추녀마루가 길다.
기와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다. 하지만 망와 하부의 강회 몰탈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고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 정비가 필요하다.
지붕에 사용된 기와의 종류는 암기와, 수키와, 암막새, 수막새, 착고, 부고, 그리고 추녀마루와 내림마루 끝에 사용된 망와 등이다. 막새는 여러 문양의 기와가 섞여 쓰이고 있다. 현재 바닥기와는 한식기와 중와가 설치되어 있으며, 구(舊)기와는 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의 적새 등에 쓰이고 있다.
태인 동헌에는 4가지 종류의 망와가 쓰이고 있다. 건물 용마루의 양끝에는 쌍룡문 망와가 설치되어 있고 가장 최근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망와에 비해 양각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의 대부분에 설치된 망와에는 용마루와 마찬가지로 쌍용이 표현되어 있는데, 가운데 부분에 ‘吉吉’자가 양각되어 있다. 이 형태는 용마루 망와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약간 더 뾰족한 형태이다. 내림마루 일부에는 구(舊)기와인 귀목문(鬼目文)89)을 새긴 망와가 사용되고 있다.
수막새는 4가지 종류가 사용되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기와는 12잎을 새긴 연화문 수막새로 보인다. 이것의 원형으로 보이는 연화문 수막새가 한 가지 더 있는데, 연화잎이 둥글고 조금 더 작은 크기로 새겨져 있으며, 잎들의 사이 간격이 좁고 평면적이다. 두 연화문 모두 연화 주변으로 당초넝쿨이 둘러싸고 있다. 또 다른 문양의 연화문은 막새면을 연화잎이 가득 채우고 있는 형태로 중앙에 수술을 강조하여 새겨 넣었다. 나머지는 막새를 보충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무궁화 문양의 막새로 지붕의 일부에 사용되고 있다.
암막새는 3가지 종류가 쓰였다. 앞서 12잎 연화문 수막새와 짝을 이루는 문양으로 12잎의 연화를 2송이 새겨 넣은 후 주변을 당초 덩굴로 장식하고 있는 형태의 것이다. 암막새도 구와와 신와가 모두 사용되고 있다. 무궁화문 수막새와 같은 무궁화문 암막새 역시 일부에 쓰이고 있다.
고주 사이 벽체에는 가로 방향의 인방(引枋)90)과 세로방향의 문선(門線)91)과 벽선(壁線)92)이 설치되어 있다. 온돌방의 남측과 동측의 상부 벽에는 창호의 상인방(上引枋)93)과 고주 창방 사이에 가로로 인방을 보냈으며, 그 사이에 각각 2개씩의 세로 벽선을 세우고 하부 면에는 주선을 설치하였다. 온돌방 벽체 상부의 가로 인방은 내부 천정 반자를 지지해주는 부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방 사이는 재사벽(再砂壁)94) 미장 바름으로 마감되어 있다. 아궁이 실이 위치한 배면 서측면의 고주 사이에는 주선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2개씩 세로 벽선을 세웠다. 아궁이 실의 고주와 배면 평주 사이에는 퇴량 하부에 중인방보다 약간 높은 레벨로 가로 인방을 설치하여 기둥 사이를 잡아주고 있다. 배면 서측의 외부 벽체에는 살창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중방(中枋)95) 위치를 달리하여 입면에 변화를 주었다.
세창살이 설치된 방의 남측면과 동측면 2칸의 경우, 상인방을 설치하고 하부에 머름96)을 두었으며, 문선을 세워 문얼굴을 만들었다. 누마루에 설치된 들창97)의 경우, 하부에 머름을 두고 문선을 세우고 창방이 상인방 역할을 하도록 문얼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 서측 다락의 입면에는 하인방과 창방 사이에 문선과 벽선을 세우고 들창을 달았다. 외부에서 볼 때 떠있는 다락 하부 부분의 안쪽 벽체는 고주 사이의 벽체 상부와 같이 하인방과 주선을 세우고 2개씩 세로 벽선을 세웠다.
마루는 대청과 정면의 툇마루, 배면의 누마루, 다락의 바닥에 설치되어 있으며, 모두 우물마루98)이다. 대청의 우물마루는 보방향으로 전후 고주에 장귀틀(長-)99)을 건너지르고, 장귀틀과 기둥 사이에 도리 방향으로 동귀틀100)을 대어 마루널 6중을 깔았다.
정면 평주 기둥 사이에는 여모중방(廉隅中枋)101)을 걸고, 여모귀틀102)을 설치하였는데, 여모중방의 높이를 마루 바닥면보다 약간 높게 하여 턱이 지도록 하였다. 전면의 툇마루는 정면 평주와 고주 사이에 장귀틀을 걸고, 장귀틀 사이로 동귀틀을 설치하여 마루널(抹樓板)103) 3줄을 깔았다. 툇마루의 서측 한 칸은 마루를 높여 단을 주었는데, 단이 높아지는 평주와 고주 사이 장귀틀의 단면의 크기는 다른 부분보다 폭이 좁다. 단이 높은 툇마루 앞쪽 우주의 여모중방 위로는 홈이 있어 난간이나 하방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툇마루의 높이에 약간 차이를 주어 공간의 쓰임에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없다.
배면 툇간의 동측에 위치한 누마루의 경우, 두 단의 머름을 설치하여 대청 바닥면보다 높은 위치에 우물마루를 가설하였다. 우물마루의 구성은 전면 툇마루와 같으며, 장귀틀의 단면의 크기는 동귀틀보다 폭이 더 좁다. 누마루의 기둥 하부에는 현재 대청 높이에 귀틀을 걸었던 흔적이 남아있어 과거에는 이곳에 전면과 같이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누마루가 발을 딛을 수 있는 다른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도록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이곳의 용도를 변경하였던 시점의 공간 구성 역시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누마루 서측편의 비어있는 한 칸의 기둥면에는 여모중방 상부 위치에 장부 구멍 흔적이 있어, 대청과 누마루 사이에 중간 단계의 마루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추측하게 한다.
서측 다락의 경우, 서측 평주와 고주 사이에 도리 방향으로 장귀틀을 건너지르고 보 방향으로 동귀틀을 설치하여 귀틀의 방향이 다른 마루들과 다르다.
태인 동헌의 경우, 각 칸의 주칸 거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아 우물마루를 가설하면서 한 칸에 각각 3줄씩의 마루널을 구성하였다. 귀틀의 크기는 주칸이 조금 더 넓고 중간에 고주가 없는 대청마루의 부재를 툇마루나 누마루에 비해 더 크게 사용하였다. 마루청판의 두께는 45mm 정도이다. 마루 바닥면을 같은 높이로 설치하지 않고, 전면 툇마루의 서측 한 칸과 배면 누마루의 높이를 달리하여 공간 구성에 변화를 주었는데, 과거 이러한 요소들을 계획하였을 때의 원형의 모습이나 공간의 용도 등은 확실치 않아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창호(窓戶) 중 문은 온돌방 부분과 아궁이실의 출입문에 사용되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2개 칸에는 각각 3짝 분합문(分閤門)104)을 설치하여, 필요시 문을 들어 올려 공간을 확장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분합문은 정자살(井字살)105) 불발기문106)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장 우물반자틀107)에는 문을 걸 수 있도록 들쇠가 걸려있다. 방 사이에는 각각 3짝의 미서기문을 설치하였는데, 대청에 면한 방은 2칸을 하나의 실로 사용하고 있고, 그 옆의 서측 방은 둘로 나뉘어 있으며, 아랫방 벽에는 다락문이 설치되어 있다. 미서기문은 정자살로 되어 있으며, 한 짝의 폭은 710mm 내외 값을 갖는다. 현재 한쪽 면만 창호지로 마감한 곳이 있어 방 내부 쪽에 창살이 드러나 있다. 다락문은 사각의 문울거미(門-)108)를 짜고 내부에 3개의 가로 살을 설치한 후 겉면에 널판을 대고 방 쪽은 창호지로 마감하였다.
건물 서측 면 아궁이 실의 출입구는 부엌문에 쓰이는 판장문(板牆門)109)이 설치되었다. 판문 한 짝은 널판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곳에 가로 띠장110)을 설치하였다.
창은 세살(細箭) 분합창(分閤窓)111)과 빗살교창(交箭窓)112) 형태의 들창(-窓)113), 세로살창인 봉창(封窓)114)이 설치되어 있다.
온돌방의 전면 2칸과 대청의 동측별 2칸에는 각각 3짝의 세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다. 세살창의 하단 부분에는 낮은 궁판이 있으며,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였다.
누마루 외부 북측 모서리 칸이 다락 서측의 2개 칸에는 들창이 설치되어 있다. 누마루에 설치된 들창의 너비가 각각 다른 이유는 주칸 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건물 배면 서측에 위치한 아궁이실의 외부 벽 2곳에는 45° 각도로 살을 세운 봉창을 환기창으로 두었다.
태인 동헌은 1978년에 건물의 복원 공사를 진행하면서 일제 강점기 때 설치하였던 외부면의 유리창을 제거하고 창호를 복원하였다. 당시 공사를 진행하면서 건물 좌측면을 제외한 대부분을 해체하여 기둥과 마루 널의 결구부분, 중방의 위치, 회벽의 자국 등을 조사한 후 복원 설계를 하였으며, 전문 위원의 고증을 거쳐 시공하였다. 현재 보이는 대부분의 창호는 그 당시 새로 복원된 것이며, 이중 온돌방 내부의 미서기문과 세살분합문의 일부는 1993년 새로 보수 된 것이다. <표 6-3>
<표 6-3> 태인 동헌 건물 개요 | |||
구 분 |
내 용 |
구 분 |
내 용 |
평 면 |
정면 6칸 × 측면 4칸 |
대 공 |
판대공 |
바닥 면적 |
128.68㎡ |
처 마 |
겹처마 |
가 구 |
2고주 7량가 |
지 붕 |
팔작지붕 |
기 당 |
화강석 기단 (정면, 양측면: 3벌대, 배면: 1벌대) |
기 와 |
중와 |
주 초 석 |
팔각 초석, 사각 초석 |
내부 바닥 |
대청: 우물마루, 방: 온돌 바닥 |
기 둥 |
원기둥 |
벽 체 |
외엮은 회벽 마감 |
공포 양식 |
1출목 이익공 |
창 호 |
정자살 불발기 분합문, 정자살 미서기문, 판문, 분합창, 들창, 봉창 |
도 리 |
팔각도리 |
천 장 |
마루: 우물천장, 연등천장, 방: 치반자 |
<그림 6-1> 청녕헌 편액(扁額)
동헌에는 지방의 수령이 추구해야 할 유교적 이념을 담은 집이름[堂號]을 새긴 편액을 걸었는데, 태인 동헌에는 청녕헌(淸寧軒)이라는 편액(扁額)으로 “상지십육년병자계하서(上之十六年丙子季夏書)”, “풍고거사(楓皐居士) 김조순인(金祖淳印)”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태인 동헌이 중건된 해인 1816년(순조 16, 丙子) 여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림 6-1> 청녕(淸寧)은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로 “석지득일자 천득일이청 지득일이녕(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예로부터 하나의 근본이 있으니 하늘은 그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그 하나를 얻어 편안하다는 뜻이다.)” 즉,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려지는 모양을 뜻한다. 그래서 ‘청녕헌(淸寧軒)’은 ‘고을을 맑고 편안하도록 다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 내용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보살피고자 하는 유교적 사상을 담고 있다. 동일한 이름을 가진 동헌으로는 충북 충주목의 청녕헌(淸寧軒)이 있으며, 그 밖에 양민당(養民堂, 곡성), 청녕각(淸寧閣) 등이 있다. 이 글을 쓴 이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4대손으로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이다.115) 본관 안동. 자 사원(士源). 호 풍고(楓皐). 시호 충문(忠文). 초명 낙순(洛淳).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규장각대교를 거쳐 1792년(정조 16)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직각(直閣)·이조참의(吏曹參議)·승지(承旨)·총융사(摠戎使)·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때부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조(正祖)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가 작고하자 어린 순조(純祖)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 정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풍고집』이 있다. 김조순은 호남의 유서 깊은 태인에 동헌이 새로 세워지자 청녕헌이라는 글씨를 남김으로써 백성의 안녕을 생각하는 자신의 본심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동헌(東軒)을 지은 도편수(都片手)는 전주 선화당(宣化堂: 監司의 執務處로 지금의 道廳)을 지은 거장(巨匠) 승려 두징(僧 斗澄)이었는데, 현감은 그 유명한 도편수를 고른 것이다. 때문인지 태인 동헌은 중건된 지 2백여 년이 지났지만 현재에도 사람들은 태인 동헌을 명품 한옥으로 꼽는다.116) (制度鞏固하고 규모가 정교하여 木造建物로는 旣往에 있어서 보기드문 것이다. 28수(宿)를 응(應)하여 입주(立柱)가 28이라 한다.)117)
잘생긴 집을 얻고 싶어하는 현감의 소망을 도편수가 모를 리 없다. 그는 천 냥(千 兩)으로 동헌을 지어야 한다는 현감(縣監)의 말에 쾌히 승낙한다. 그리고 터를 닦고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올린다. 이미 천 냥은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는 천 냥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고, 현감은 좀 어이없지만 짓다 말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돈을 마련한다. 대들보가 올라가고 서까래가 얹히고 기와가 덮인다. 또다시 천 냥이 바닥났다. 천 냥이 더 있어야겠다고 하자 현감은 막 모양새를 갖춘 집에 마지막 단장을 할 수 있도록 돈을 구해준다. 아궁이를 들이고 벽을 치고 띠살문과 넉살문 창과 살창 등이 붙고 담이 둘러지고 대문이 달린다. 드디어 완성되었다. 도편수도 현감도 흡족했다. 처음부터 삼천 냥이 든다고 하면 동헌(東軒)을 짓지 않을 것이므로, 목수가 자신의 절묘한 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거짓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헌 안을 둘러보면 도편수의 솜씨와 감각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치밀하게 계산된 아기자기한 공간 구성으로 동헌은 스스로 자족할 수 있는 완결된 저만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바깥에서 보면 그냥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저마다 독특한 공간의 구성이나 쓰임새, 장식 등이 내밀해져서 그 탁월한 공간 감각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문득 신잠 현감이야말로 태인 동헌처럼 그윽한 공간을 마음에 지닌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인현 지도(泰仁縣 地圖)』에 의하면 동헌(東軒) 앞에 연못이 있었는데, 1977년 동헌을 보수하면서 연못을 메우고 축소하여 담장을 만들었다. 복원에의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태인 동헌의 모습이 잘 묘사된 지도로 『1872년 지방도』의 태인현 지도가 있다. 이는 흥선 대원군 집권 후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며 대응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읍지와 함께 편찬된 지도로 전국 각 군현과 관방을 그린 것이다. 1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제작되고 이전 지도를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못하나 대축적 낱장지도로 구성되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는 관아를 아사(衙舍)라 표기하였다.
<그림 6-2> 태인현 아사(衙舍), 『1872년 지방도』
<그림 6-3> 태인현 읍치 일대, 『비변사인방안지도』
지도상에 관아는 3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중심에 위치한 전각이 동헌으로 추정된다.
상대적으로 높은 기단 위에 정면 4칸의 건물이 서 있으며, 기둥은 붉은색으로 단청이 되어 있다. 동헌의 정면으로는 2층의 누각과 6방의 관청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으며, 뒤쪽에는 내아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다. 건물의 모습이 현재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있으나, 건물의 배치 등이 자세히 묘사된 지도는 없어 가치가 있으며, 추후 발굴조사 등을 통해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 『비변사인방안지도』, 『광여도』를 비롯한 여타 지도에서는 내아와 동헌 2동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6-2, 3>
1914년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동헌은 한일합병(韓日合倂)으로 군청(郡廳)으로 사용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태인군(泰仁郡)을 정읍군(井邑郡)으로 통합하면서 빈집으로 남아 있다가, 동년 9월 객사의 자리에 태인 초등학교(당시 泰仁 尋常小學校, 심상소학교)가 세워지면서118) 동헌(東軒)이 학교의 경내(境內)로 들어가게 되어 한때 교실(敎室)로 사용되었다.
<그림 6-4> 태인 동헌(정읍군지, 1936년판 영인본, 화보, 청녕헌)
<그림 6-5> 태인 동헌 전면 기둥의 창호 흔적 당시 모습은 1936년 경 태인 동헌 전경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눈에 띄게 다른 점은 건물의 외부에 유리 창호를 설치하였다는 점이다. 건물의 출입은 좌측 세 번째 칸에 목조 계단을 놓아 들어가게 되어 있다. 교사로 사용되었으므로 외관뿐만 아니라 실내 공간도 변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6-4, 5> 후면 툇간부분의 고주와 평주 기둥에는 귀틀을 결구하였던 흔적이 남아있고, 기둥에 장부 홈들이 있어 과거 실의 구성이 현재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청 배면 쪽 2칸의 누마루는 대청에 비해 단을 높이 올려 설치하여 계단 등 보조 시설 없이 쉽게 올라갈 수 없다. 배면의 아궁이 실과 입구로 비어있는 한 칸의 공간 역시, 용도에 비해 다소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실의 짜임새가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 어떤 목적으로 공간 구성이 변화해왔는지 자세한 부분을 알 수 없으므로, 원형 여부 역시 판단하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전라북도교육위원회(全羅北道敎育委員會)에 의하여 헐리게 될 위기도 있었으나 주민의 건의(建議)로 다행히 위기를 벗어났으며, 1976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7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은 1978년 보수공사를 통해서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공사 전 <그림 6-6, 7>을 보면 중인방 아래는 재사벽으로 마감하였고 상부에는 유리창을 설치하였다. 당시 복원설계 설명서의 복원 기준을 보면 ‘현존 건물의 좌측 벽면의 해체를 제외한 전체 기둥, 마루널 접합부분, 중방(中枋)의 위치, 회벽 때의 자국 등을 참조하였다.’119)고 되어 있지만, 구체적 설명은 되어 있지 않다.
<그림 6-6> 정면, 측면
<그림 6-7> 우측면, 뒷면, 좌측면 다음의 상량문(上樑文)은 1977년 지붕 보수(補修)공사 때 나타난 것이다. 청녕헌(淸寧軒) 상량기(上樑記) 숭정기원후사 병자 사월 십오일 갑자 사시 입주 동월 이십일 기사 인시 상량 지현 김이회 좌수 송치 력행수 서유갑 집사 최진홍 호장 시명두 이방 송태열 감관동지 송인환 색리 송민기 송윤권 송영노 이령 이도복 임지태 최개하 도편수 승 두징 부편수 이동량 승 관신 서여언 승 묘신 덕찬 쾌영 승희 양득용 이성태 송명동 신정용 김여원 김탄 실 윤만근 손인위 박춘득 주영득 조춘화 천만일 송중이 허 강 석 수. 서백암 서종득 서효봉 최만득 야 장. 신일억 서천년 양일명 김산중 서도문
<그림 6-8> 태인동헌 배치도120)
< 조선시대 태인동헌 근처 지도>121) 2000년대 정읍시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2004년에는 외삼문, 협문, 막돌담장, 기단 및 계단 해체 보수, 자연석 석축 및 토 석담 설치, 경내포장 및 조경공사 등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림 6-8> 태인 동헌은 사면이 막돌담장으로 둘러싸인 1,646㎡의 대지에 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대지는 북측으로 약한 경사가 있는 구릉지를 두고 남향을 하고 있으며, 동헌 건물 역시 지세에 맞추어 남향을 하고 있다. 건물의 북측과 동서측면에는 경사에 따라 1~1.5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로 담장을 둘렀다. 태인동헌의 주 진입은 남측에 위치한 6m폭의 도로(동헌로)에서 외삼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대문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1,200㎡ 규모의 너른 마당이 있는데, 마당의 중심에 0.7m 높이의 화강석 석축이 있어 2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바닥에는 태인 동헌과 외삼문, 협문으로 이어지는 화강석 판석으로 마감한 관람로를 깔았다. 서측 담장에는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협문이 있다. 태인 동헌의 전체 배치에 있어서도, 전면에 넓은 마당을 두고 삼문과 협문을 설치한 지금의 배치는 『1872년 지방도』(그림 6-2)에서 보이는 배치나 일반적인 동헌의 배치 구성과 차이가 있다. 발굴 등 복원을 위한 선행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재의 배치는 고증을 통한 결과보다는 관람의 편의와 현상의 유지를 위한 조치로 보이며 이는 향후 종합정비계획의 수립을 통해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122) <그림 6-8> 1. 유각교(留脚橋) 태인면(泰仁面) 태성리(泰成里) 청녕헌(淸寧軒) 앞에 있으니, 260여년전(1936년 기준)에 박잉걸이 가설(架設)한 석교(石橋)이다.123) -------------------------------------------------------------------- 1) [건축] 방과 마당 사이에 있는 좁은 마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 [건축]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東軒』 第5號 (2012), 72. 4) ‘鄭坤記...治古泰山偏在東隅 故仁義之民往來病焉...’, 『新增東國輿地勝覽』 제 34권 태인현 궁실조 「객관」
崇禎紀元後四 丙子 四月 十五日 甲子 巳時 立柱 同月 二十日 巳巳 寅時 上樑 知縣 金履會 座首 送致 行首 徐有甲 執事 崔鎭洪 戶長 柴命斗 吏房 宋泰悅 監官同知 宋寅煥 色吏 宋民祺. 宋潤權. 宋永老 吏令 李道福. 林之泰. 崔介下
都片手 僧 斗澄 副片手 李東良 僧 寬信 徐汝彦 僧 妙信 德贊 快永 勝喜 梁得用 李成太 宋命東 申正用 金汝元 金呑實 尹萬根 孫仁渭 朴春得 朱永得 趙春化 千晩日 宋仲伊 許 江
石手. 徐白岩 徐宗得 崔晩得
冶匠. 申日億 徐千年 梁一明 金山重 徐道文
5) 이정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궁실조 「토산」(한국고전변역원, 1969), 507.
6)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東軒』 第5號 (2012), 47.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는 중종 때 신잠(申潛, 1491~1554)이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치세를 칭송하여 세운 선정비(善政碑), 그의 문집인 영천집(靈川集) 등에서 동헌을 세웠다는 기록을 볼 수 없어 검토가 필요하다.” 재인용.
7) 『井邑郡誌』 (정읍군, 1984), 141.
8)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의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
9) [건축] 전통 가옥에서, 방과 방 사이 나 방 앞을 지면으로부터 높이 떨어지게 하여 널빤지를 길고 평평하게 깐 공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0) [건축]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1)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
12) 충량 또는 동자주 위에서 저울대처럼 양쪽으로 벌려 허공에 뜬 측면 중도리.
13) [화학] 석회석을 가열해서 만든 흰 가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4) 석재 가공 마감법의 하나로, 정으로 쪼아 조밀한 흔적을 내어서 평탄한 거친면으로 만드는 것인데 조밀의 정도에 따라 거친정다듬, 중정다듬, 고운정다듬 등 세 가지 공법이 있다. 토목용어사전.
15) [건축] 건물의 모퉁이에 세운 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6) [한국 건축] 기둥이나 공포 위에 얹혀 내부공간을 형성하는 구조나 구조물의 총칭. 브리태니커.
17) [건축] 주로 대청마루의 한가운데에 다른 기둥보다 높게 세운 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8) [한국 건축] 일반적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도리의 수에 따라 3량가·5량가·7량가·9량가 등으로 가구의 형식을 구분하는데, 이는 도리의 수에 따라 가구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브리태니커.
19) 종량(宗樑)→ 마룻보. 문화콘텐츠닷컴 용어사전.
20) [건축] 툇기둥과 안기둥에 건너질러 얹힌 짧은 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1) 지붕구조를 받는 수평재(水平材)인 보를 구성하는 구조물의 하나. 브리태니커.
22) [건축] 한옥(韓屋)에서, 옆에 선 기둥머리에서 들보를 향해 건 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3) [건축] 처마 도리와 마룻도리의 사이에 놓여 서까래를 받치는 굵은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4) [건축] 지붕 판을 만들고 추녀를 구성하는 가늘고 긴 각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5) 용마루가 지붕의 양면 즉, 앞면과 뒷면이 만나는 곳을 마감한 부분.
26) 정면과 측면이 협칸 이상의 규모를 가질 때 외부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열을 외진(外陣)이라고 하 고, 그 기둥 열을 외진주(外陣柱)라고 한다. 또한 안쪽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열을 내진(內陣)이라 고 하고, 그 기둥 열을 내진주(內陣柱)라고 한다. 문화콘텐츠닷컴 용어사전.
27) [건축] 크기나 모양이 같은, 건물 외각에 세워진 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8) [건축] 두 재목을 이을 때 한쪽 재목의 끝을 다른 한쪽의 구멍에 맞추기 위하여 가늘게 만든 부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9) [건축] 마루를 놓을 때, 굵은 나무를 가로세로 짜 놓는 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0) [건축] 건물의 귀기둥을 가운데 기둥보다 조금 높게 꾸미는 것. 귀기둥이 가운데 기둥보다 높으므 로 추녀의 선이 활꼴을 그리며 귀가 치솟는 모양을 한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1) [건축] 기둥과 기둥의 위에 가로질러 화반이나 공포 따위를 받치는 굵은 나무. 한자를 빌어 ‘昌枋/ 昌防’이라고 적기도 한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2) [건축] 들보나 툇마루, 난간 따위에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3) [건축] 마룻보 위에 마루를 받쳐 세운 동자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4) [건축] 동자기둥이나 마룻보 위에 마루를 받쳐 세운 기둥에 끼워 얹은 창방.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5) [건축] 도리를 받치고 있는, 길고 모가 나 있는 나무로 장혀라고 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6) [건축] 도리의 끝이 기둥을 뚫고 내민 부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7) [건축] 창방에 직교(直交)하여 보를 받치는, 한 개의 쇠서를 내고 화초 무늬를 새긴 공포. 또는 그 부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8) [건축] 기둥머리를 장식하며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도록 짜여진 넓적하고 네모난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9) [건축] 기둥머리나 대접받침에 끼워 들보의 짜임새를 보태고 채워서 튼튼하게 만드는 짧은 철재나 목재. 고려대학 교 민족문화연구원.
40) [건축] 여러 개의 중도리를 걸을 때에 맨 위쪽에 있는 중도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1) 대들보(大樑)·종보(宗樑) 등의 보 위에 놓여 그 상부의 보나 도리를 받쳐주는 부재로 한옥 구조물의 하나. 토막나무 를 중첩하여 쌓아올린 것으로 그 형태는 사다리꼴이며 조각을 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
42) [건축] 용마루의 밑에 서까래가 얹히게 된 도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3) [건축] 재목 따위를 맞붙여 이어 짬을 만들 때, 짬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박는 굵은 나무못.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4) [건축] 이익공(二翼工)에서 화반(花盤)의 윗부분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받치는 구름 모양의 목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5) [건축] 기둥과 기둥의 중심선 위를 건너질러 서까래를 받치는 굵은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6) [건축] 도리를 받치고 있는 공포에서, 기둥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돌출된 첫 번째 출목.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7) 주심도리에서 바깥쪽으로 내밀어 걸린도리(=외목도리).
48) 도리가 장여위에 놓일 때 부재가 기울거나 구름을 막아주는 부재.
49) [건축] 초방 위에 장여를 받치기 위하여 끼우는 널조각. 화분이나 사자, 연꽃 따위를 그린다. 브리태니커.
50) 처마의 무게를 고루 나누어서 받도록, 기둥머리 바로 위에 여러 개의 나무쪽을 짜 맞추어 올린 구조. 태인 동헌은 기둥을 중심으로 하여 쇠서가 있다.
51) [건축] 공포에서 안쪽으로 내밀어진, 기둥의 중심에서 벗어나 도리를 받치는 나무토막.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52) [건축] 주심포(柱心包)에서, 외목도리와 장여를 받친 첨차(檐遮).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53) 출목첨차 (出目檐遮): 주심첨차를 경계로 내외 첨차의 총칭
54) 첨차는 주두 또는 소로에 얹혀 도리방향 또는 그와 직교되는 방향으로 십자맞춤을 하는 부재로서 크기에 따라 소첨차와 대첨차로 구분되며, 놓이는 위치에 따라 주심첨차·행공첨차·출목첨차 등으로 구분된다. 브리태니커.
55) 갈이 두 개인 소로.
56) [건축] 첨차 위쪽에서 장여 사이를 막아 댄 널빤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57) [미술] 평평한 면에 무늬나 모양이 도드라지게 새기는 조형 기법. 또는 그렇게 새긴 조각(彫刻). 한국어 위키백과
58) [건축] 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받침. 브리태니커.
59) 여러 가지 덩굴풀이 꼬여서 뻗어 나가는 모양을 그린 무늬.
60) [건축] 귀한대의 좌우에 짜이는 촛가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1) [건축] 건물 모퉁이에 세운 기둥 위의 제공(諸貢)에 45도 각도로 얹은 살미. 브리태니커.
62) [건축] 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가리어 만든 구조물. 실내의 윗부분을 아름답게 꾸미며, 각종 배선(配線)이나 배관을 감추고, 소리, 열, 기류를 차단 또는 흡수하며, 빛이나 소리를 반사하여 실내 환경을 좋게 하기 위해 만든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3) 주두의 굽이 단순히 비스듬하게 만들어진 주두. 평굽주두라고 합니다.
64) [건축] 마룻보 위에 마루를 받쳐 세운 동자기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5) [건축]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 처마 끝을 보기 좋게 위로 들어 올려 모양이 나게 한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6) 한옥의 처마는 앞에서 봤을 때 양쪽 끝이 약간 위로 올라가는 곡선(앙곡)으로 처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처마 아래에서 지붕을 봤을 때는 건물 중앙보다 귀 부분의 처마 끝이 더 앞쪽으로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곡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7) [건축] 끝이 번쩍 들린 추녀. 또는 그런 곡선.
68) [건축] 추녀 좌우에 부챗살 모양으로 배치해 선자추녀를 이루는 서까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9) [건축] 지붕 판을 만들고 추녀를 구성하는 가늘고 긴 각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0) [건축] 추녀 곁의 도리 위에 서까래를 걸기 위하여 붙이는 삼각형 모양의 나뭇조각. 추녀 쪽으로 는 두껍게 깎고 서까래 쪽으로는 얇게 깎아 도리 위에 얹는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1) 목재나 상자 따위의 양쪽 머리에 있는 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2) [건축] 서까래 끝을 훑어 깎는 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3) 팔작지붕의 박공머리에 생긴 삼각형의 공간으로, 박공 아래에 벽체를 설치한 것.
74) [건축] 박공지붕의 양쪽 끝 면에 ‘ㅅ’ 자 모양으로 붙인 널빤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5) 합각벽 처마에 설치되는 짧고 각진 서까래. [건축] 박공의 머리에 건 짧은 서까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6) 내림마루는 용마루에서 옆면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는 부분.
77) [건축] 박공지붕 측면의 삼각형으로 된 벽.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8) [건축] 두 암키와 사이를 엎어 잇는 기와. 모양이 대나무 통을 반 가른 것처럼 생겼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9) [건축] 추녀의 바로 위에 기와를 여러 겹으로 쌓아올린 등성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0) [건축] 지붕 가운데 부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평 마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1) 적새 밑의 기왓골을 막는 수키와. 기와를 지붕에 이을 때 맨 위의 연결부분에는 공간이 생기게 되 고 이를 막기 위해 착고라는 기와를 사용한다.
82) [건축] 기와집 용마루의 양쪽으로 끼우는 수키와 위에 이중으로 얹는 수키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3) [건축] 기와집의 지붕마루에 암키와를 여러 겹으로 포개어 쌓는 것.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4) 지붕마루의 끝 마구리를 수키와를 옆으로 세우거나 세로로 세워 막은 것.
85) [건축] 용마루의 끝에 끼어 그 마구리를 장식하는 암막새.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6) [건축] 수키와의 끝에 달린 부분. 빗물이 흘러내리는 면이 있어서 스며들지 않게 한다. 암막새라 불리는 내 림새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암키와에 드림새를 달아 만든 것.
87) [건축] 암키와로 된 막새라는 뜻으로, ‘내림새’를 이르는 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8) [건축] 지붕의 고랑이 되도록 젖혀 놓은 기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9) 귀신 눈 같은 귀목문(鬼目文).
90) [건축]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출입문이나 창 따위의 아래위에 가로놓여 벽을 지탱해 주는 나무나 돌. 브리태니커.
91) [건축] 문짝을 지탱하기 위해 만든 벽선(壁線).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2) [건축] 기둥에 붙여 세우는 네모진 굵은 나무. 벽 속에서는 인방과 중방을 버티고 문에서는 문짝을 고정한다.
93) [건축] 창이나 문의 위쪽에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4) 초벌 벽(초벽=맞벽)이 충분히 말라서 다 갈라지고 나면 재벌 벽을 바르는데 이 때 주재료가 모래와 마사토여서 모래벽이라는 의미로 사벽이라고 한다(재사벽). 석회가 귀한 시절에는 사벽이 마감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5) [건축] 벽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6) [건축]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랫중방에 모양을 내기 위하여 대는 널조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7) [건축] 벽의 위쪽에, 위로 들어 올려 열도록 만든 작은 창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8) [건축] 짧은 널빤지를 마루의 귀틀에 끼워서 ‘井’ 자 모양으로 만든 마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9) [건축] 우물마루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길게 건너질러 동귀틀을 받고 마루널이 끼이게 되는 굵은 나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00) [건축] 마루의 장귀틀과 장귀틀 사이에 가로로 걸쳐서 마루에 깔아 놓은 널조각을 끼는 짧은 귀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01) 대청 앞 마루 바닥에 댄 하인방으로 이것은 대개 분합문을 들이기 위한 인방이어서 여모귀틀 위에 올라타는 경우가 많음.
102) 마루의 제일 바깥쪽의 틀로 면 귀틀이라고도 함.
103) 마루에 깔아 대는 널. 한 옆의 홈을 파고 다른 옆을 혀를 내어 물리게 함. 문화콘텐츠닷컴.
104) [건축] 대청마루 앞으로 한 칸에 네 짝씩 드리는 긴 창살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05) ‘井’ 자 모양으로 짠 문살.
106) 빛을 차단할 목적으로 안팎으로 종이를 두껍게 바른 문의 일부에 팔모형태의 문살을 짜고 창호지를 발라 그 부분 만 은은한 확산광의 빛이 들게 한 것을 불발기라 하고, 불발기가 있는 창호를 불발기문이라 함.
107) [건축] 틀을 ‘井’ 자 모양으로 짜고, 네모진 구멍에 넓은 널빤지를 덮은 반자가 있는 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08) [건축] 문짝을 달기 위해 네모지게 만든 틀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09) 널빤지로 만들어 달아 놓은 문. 브리태니커
110) 수평으로 댄 부재.
111) 분합은 외벽에 설치되는 두 짝 이상의 창호를 말하며, 세 살(띠살)은 창울거미에 가는 세로 살을 촘촘히 박고, 띠처 럼 가로 살을 위, 가운데, 아래로 나누어 짜 넣은 형식의 들창 등에 널리 쓰인 출입문.
112) 살대를 45°, 135°로 서로 빗겨 교차되게 짠 형식으로 마름모무늬가 정자살을 모로 뉘인 모양으로 짜 맞추어 만든 창문으로 문틀의 위쪽에 고정식으로 꾸며진 채광창.
113) [건축] 벽의 위쪽에, 위로 들어 올려 열도록 하여 작대기로 고이도록 만든 작은 창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14) [건축] 벽에 작은 구멍을 내고 창틀이 없이 안쪽에서 종이를 발라서 봉한 창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15) 『정읍 선비의 길을 걷다』(정읍시․정읍문화원, 2009), 98.
116) 『동진강』 (사단법인 정읍예총, 2012), 140.
117)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42.
118) 註 舊韓國時代에 郡, 縣의 行政, 司法을 通察하며 六房官屬을 統制하는 官衙이었다. 內外東軒이 있으니 內東軒은 內衙라 稱하여 守令의 家族이 居住하고 外東軒은 守令의 執務處이더니 1907년(隆熙 元年, 丁未)에 地方制度가 변경되어 東軒을 郡廳이라 稱하였다.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44.
119) 태인 동헌 보수공사 설계 설명서(「태인 동헌 보수공사」, 문화재관리국 유형문화재과, 1978, 국가기록원 소장)
120)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東軒』 第5號 (전라북도․정읍시, 2012), 73.
121) 『井州·井邑 鄕土史蹟資料輯』 (井邑文化院, 1987. 11. 10.), 30.
122)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東軒』 第5號 (전라북도․정읍시, 2012), 174~175.
123)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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