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조선왕조실록』 지킴이 태인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을 살면서 자기 나름대로 역사상에 빛나는 일을 하며 자기가 사는 사회, 민족 , 국가 그리고 세계 인류에 이바지 하고자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이룩되지 않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역사상 국난(國難)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구국(救國)에 앞장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그래서 우리는 애국자라 부르며 그 활동 내용도 정치, 외교, 국방,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귀중한 사료(史料)이며 국보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보존되어 후세(後世)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兵禍)가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뛰어난 선비의 우국충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92년(宣祖 25년) 4월 14일(陰曆)에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關伯 豐臣秀吉)은 15만(萬) 대군(大軍)으로 조선(朝鮮)을 침범(侵犯)하게 하였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수장(首長)으로 한 제일군(第一軍)은 부산진(釜山鎭)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4월 16일 동래부성(東萊府城), 양산(梁山)을 거쳐 밀양(密陽)으로 침략한 일본군은 서울을 향하여 북상(北上)했다. 4월 23일 성주사고(星州史庫)에 이어서 4월 28일 충주사고(忠州史庫)가 불에 탔다. 5월 2일에는 한양이 점령되었고, 일본군은 점령지를 분할 지배하는 전략으로 성주(星州)에서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영동(永同), 금산(錦山)으로 침입하였고 7월에는 호남의 곡창(穀倉)을 노리고 전주(全州)를 목표로 해서 금산에서 다시 용담(龍潭), 진안(鎭安)으로 침입했다.1) 그러나 운암(雲岩) 장곡(長谷)에 진을 치고 있던 의병장 양대박(梁大撲)에 의해 선봉이 무너진 일본군 제6진은 성주(星州), 선산(善山), 금천(金泉) 등지에 주둔하면서 남원(南原)을 거쳐 전주로 올라오려 했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宜寧)에서 곽재우 의병부대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 성주로 올라와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하는데 진안에서 전주 사이에 놓여 있는 가파른 웅치(熊峙: 곰치재)에서 8월 13일 (음력 7월 7일)에 김제군수 정담(鄭湛)·나주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함열 출신 의병장 황박(黃璞)이 정병(精兵)을 이끌고 격전(激戰)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8월 14일(음력 7월 8일)에 이치(梨峙: 배티재)에서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장군(權慄將軍)이 도병(道兵)을 영솔(領率)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이치격전에서는 일본군이 대패하여 결국 금산으로 물러나고 간신히 전주는 병화(兵火)를 피하고 명(明)나라 병사들이 전주성에 진주(進駐)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侵入)하여 장차 전주를 침략하고 전라도를 석권(席捲)하려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전주성(全州城)은 부윤(府尹)이 세상을 뜨고 통판(通判)은 전주의 군졸을 이끌고 강화(江華)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전주(全州)는 주인 없는 상황에서 피난 준비로 어수선했다.
이러한 혼란과 위기 상황 속에서 전주는 조선왕조의 선원대향(璿源大鄕, 조선 시대 왕실의 관향(貫鄕)인 전주(全州)를 높여서 일컫는 말)으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太祖)의 어용(御容, 肖像)과 태조 이래의 왕조실록이 있는 경기전(慶基殿)과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는 곳이기도 해서 비상이 걸렸다. 처음에는 실록을 사고의 마루 밑에 묻으려 했으나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으로부터 경상도 금산현에서 붙잡힌 일본군에게서 성주사고에서 약탈한 실록 두 장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방법을 바꾸었다.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광(李洸)은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 오희길(吳希吉)에게 실록을 보관할 장소를 찾아내라 명했고, 그는 위급 시 배로 피할 수 있는 ‘변산’과 깊은 산중인 ‘내장산’을 후보자로 고민하다 결국 내장산 은봉암(隱峰庵)에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전라감사는 이 일을 관리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학문과 지혜가 있는 선비를 널리 구했다. 이때 태인 선비 안의(64세)와 손홍록(56세)이 그 일에 자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해 6월 22일, 안의와 손홍록은 노비와 머슴 30 여 명을 동원하여 전주로 달려가서 전주사고에 소장되었던 서적을 내장산 은봉암(隱峰庵)으로 옮겼는데, 이때의 물동량을 보면 조선왕조『태조실록』에서 『명조실록』과 본조문기(本朝文記) 30여태(餘駄), 『삼국사』,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고려사』, 『동국사기』, 『동국사략』, 『동국통감』 등 20여태(餘駄)2)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중요한 사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총 1,322 책이 궤짝으로 따지면 약 60여 궤(櫃)(실록 47궤, 기타 13궤: 책 수로 따지면 실록 830책, 고려사 등 기타 전적이 538책 등) 분량이었다. 수십 마리의 말과 인원이 동원되어 서책을 싣고 5(?)일 동안 고생하여 이룬 결실이었다. 또한 7월 1일 진전(眞殿, 太祖 影幀)을 전주로부터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겼다.
그 후 이도 안심이 되지 않자, 이들 사서는 7월 14일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졌다. 비래암은 내장산의 높고 험한 곳에 있는 암자였기 때문에 이쪽으로 모두 옮기고 9월 28일 진전을 용굴암으로부터 더욱 안전을 도모하여 험준(險峻)한 비래암으로 다시 옮겼고, 조정에서는 비로소 좌랑 신흠(佐郞 申欽)을 현지로 파견하여 어진과 실록을 확인하게 하였으니 신흠은 1593년 1월 20일 내장산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큰절에서 묵고 이튿날인 21일 비래암에 들러 어진과 실록을 봉심(奉審)했다. 그때에 시직(侍職)하고 있던 참봉(參奉) 유인(柳認)도 함께 종심(終審: 입회)했다.
다음 해 5월 28일 봉교(奉敎) 조존성(趙存性)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능지(陵誌)를 마쳤다. 이 일이 순조롭게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정재인(呈才人: 대궐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사람들로 구한말 몰락한 사당패와 함께 재인패로 발전했음.) 100여명과 승려 희묵(熙默)이 이끄는 승군, 무사 김홍무(金弘武)를 비롯하여 이름 없는 사당패들까지 동원된 점도 있었지만, 시골 선비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10)이 사재를 털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실록을 지켜낸 덕분이었다.
『임계기사(壬癸記事)』에 수록된 「수직상체일기(守直相遞日記)」는 실록을 지키면서 기록한 일종의 당직 근무일지다. 전주사고에서 내장산으로 옮긴 실록을 지키기 위해 안의와 손홍록이 교대로 수직한 내용들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다. 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지키는데 더 신경을 썼고 안의와 손홍록은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켰다고 한다.
옮겨진 실록은 370일 동안 내장산에 보존되었다. 그동안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수직한 일수가 53일, 안의 혼자 독직한 일수가 174일, 손홍록이 독직한 일수가 143일이었다. 합쳐보면 안의가 수직한 날은 총 227일, 손흥록이 수직한 날은 총 196일이 된다. 어진 보전의 책임이 있는 참봉(參奉)들의 경우, 한 사람도 수직하지 않은 날이 151일이나 된다. 이들이 수직한 장소는 은봉암이 아닌 태조의 어진을 모신 용굴암이었을 것이다. 당시 어진이 실록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참봉들의 임무가 어진의 보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록을 보존하는 일은 안의와 손홍록에게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무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외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내장사 승려들도 1년 동안 불침번을 서며 은봉암, 용굴암, 비래암에서 어진과 실록을 지켰다.
『조선왕조실록』과 진전을 배행한 것은 대개 임진 6월 23일부터 계사 7월 8일까지 모두 3백 70일이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 유인 등은 전주에 연락 차 가끔 왕래를 했기 때문에 내장산에 머무른 날은 안의나 손홍록 만큼 많지 않았다. 그들이 데리고 온 노비와 머슴들이 함께 있었으며, 산 아래에서는 내장산 승려들과 의병들까지 불침번을 섰다.
<그림 > 임계기사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593년(선조 26) 7월에 전주부윤 이정암(李廷馣)이 의외의 변에 대비하기 위해 어진과 실록을 행재소에 이안할 것을 요청했고, 그리하여 7월 9일 해주에 있던 선조의 명에 따라 정읍 현감 유탁(柳濯)의 주도 아래 북상길에 오르게 되어 정읍현으로 운반되었다. 이어 7월 11일에 경기전 참봉 여정구와 이도길, 그리고 안의와 손홍록은 배행차사원(陪行差使員)이 되어 정읍현감과 함께 실록을 배송한 후 8월 8일에 강서현(江西縣)에서 의주행궁(行宮)으로 왕을 찾아가 중흥육책(中興六策)의 시무책(時務策)을 올리기도 했다.
7월 11일 정읍을 떠난 일행은 태인현(泰仁縣)을 지나 도보로 부평까지 올라가서 배를 타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그때가 7월 24일이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을 동원한 것은 안의와 손홍록 이었으며, 노비와 머슴들 30 여명이 짐을 지고 그들을 따랐다. 이들은 강화에서도 실록을 지켰으나 안의는 병이 나서 귀가하였다.
1593년 6월, 전라도로 진격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던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7월에 일본군은 구례를 거쳐 남원까지 진격했다. 이제 내장산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전라감사는 실록을 옮길 것을 주청했다. 이리하여 실록은 아산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해로로 해주로 이송되었다. 해주에서 실록은 3년 동안 보관되었다. 그리고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 태조 어용과 제지 등을 함께 옮겼다.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전주 경기전(慶基殿, 1592년 6월 18일)에서 내장산 은봉암으로 이안 (移安, 6월 22일) – 정읍현(차사원 정읍현감 유탁이 선왕 어용과 실록을 정읍현으로 모셔옴, 1593년 7월 9일) – 정읍현(井邑縣, 10일)에 머무름 – 태인현(11일) 유숙(留宿) – 전주부(全州府) 이성(伊城)의 폐현(廢縣, 12일) 유숙 - 익산(益山)의 금마현(金馬縣, 13일) 유숙 – 익산(益山)의 용안현(龍安縣, 14일) 유숙 - (백마강을 건너) – 부여현(扶餘縣)의 임천군(林川郡, 15일) 유숙 – 부여현(扶餘縣)의 은산역(銀山驛, 16일) 유숙 – 청양군(靑陽郡) 정산현(定山縣)의 정산역(定山驛, 17일) 유숙 – 온양군 (溫陽郡, 18일) 유숙 – 아산현(牙山縣, 19일)의 객사(客舍)에서 어용과 실록이 함께 유숙하고 20일 아산 행재소를 출발 – 수원 가소을 오지리 (加所乙 五地理, 20일) 유숙 – 남양 다발리(多發里, 21일 ) 유숙 – 인천 비도 오이리(毘徒 五伊里, 22일) 유숙 – 부평부내(富平府內, 23일) 유숙 – 강화부내(江華府內, 24일) 유숙3) – 잉위봉(仍爲奉, 25일) 유숙 - 해주목 행재소(海州牧 行在所) – 강화도(1995년 10월 24일에 춘추관이 역대 실록을 해주로부터 강화도로 이안할 것을 청하였고 이에 따라 11월 18일 이전에 강화로 이안)로 옮겨짐 – 안주(安州, 1597년 1월 21일에 강화도를 출발하여)를 경유하여 – 묘향산 보현사 별전(妙香山 普賢寺 別殿, 9월)에 안치 – 영변부(寧邊府, 1601년 1월 13일에 보현사 별전에서 이안 결정 후 곧바로 이안) - 이로부터 2년 후인 1603년 5월 19일 강화도로 이안하고 동년 8월부터 실록을 순차(順次)에 따라 한성으로 가져다가 인출(印出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1606년(宣祖 39) 4월에 인출이 완료되었다.”
이 행로는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왕조실록(王朝實錄)이 옮겨간 길이다.
1592년 안의와 손홍록이 전주에서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길 때 그들의 나이는 각각 64세와 56세였다. 안의는 강화에서 돌아온 뒤 3년 만인 1596년(宣祖 29) 9월 13일 6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597년 화의판(和議判)이 결렬되어 일본군이 다시 남해로부터 친입해오자 손홍록은 안의와 가동장정(家僮壯丁) 30여명을 이끌고 아산현으로 달려가 한춘(韓春)과 더불어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이때 안의는 노령(老齡)에 신병(身病)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안의와 헤어진 손홍록은 1597년 1월 21일 수복(守僕), 한춘(韓春)과 더불어 어진을 짊어지고 강화부를 출발하여 뱃길로 자령도(自翎島)와 광엄도(廣嚴島)를 경유한 다음 청천강을 거슬러 올라가 안주(安州)에 도착한 후 어진을 객사(客舍)에 권안(權按)했다.4) 그 때에 해주목(海州牧)에 이관되었던 실록도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후 5년 만에 다시 한 장소에서 재회(再會)하게 되었다. 안주에 머물고 있던 손홍록은 지방 고노(古老)들의 의견을 좇아 한춘과 더불어 영변(寧邊)에 들어가서 실록과 어진을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 별전에 봉안하고 보현사 승려들과 윤번(輪番) 수직했다 .
1598년(宣祖 31) 일본군이 철퇴(撤退)하니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으나 태조어용(太祖御容)과 왕조실록(王朝實錄)은 오직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만이 묘향산(妙香山)에서 보존된 것이다. 태조(太祖)에서 명종(明宗)에 이르기까지의 200여년 동안의 역사기록을 보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양공의 공(公)에 의한 것이다.
이들은 충청도 검찰사(檢察使) 이산보(李山甫)의 장계(狀啓)로 1593 년 8월 23일 선조로부터 안의는 선교랑(宣敎郞) 활인서(活人署) 별제 (別提, 종6품), 손홍록은 선무랑(宣務郞)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 종6품)로 제수 받았다. 1595년 2월 모일에 별가(別加)로 손홍록을 선교랑 귀후서(歸厚署) 별제(別提)에 제수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녹봉도 없는 명목만 있는 벼슬이었다.
안의와 손홍록은 당대 호남지역 대학자였던 태인 사람인 일재(一齋) 이항(李恒)에게서 동문수학한 제자들이었다.
안의는 장남으로 1529년(中宗 24) 12월 6일에 태인현(泰仁縣) 동촌면(東村面) 백천리(柏川里: 현 옹동면(瓮東面) 매정리(梅井里) 척천(尺川)에서 태어났고, 첫 이름은 충렬(忠烈),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 선조(先朝)로써 고려대(高麗代)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안우(安祐), 병조판서를 지낸 현(顯)과 사종의(士宗) 후손이며, 중추곡문형(中樞曲文衡)으로 단종(端宗)이 선위(禪位)되자 태인에 내려와서 우거(寓居)하게 된 대제학 안지(安止)의 손자였다. 천성이 영민하였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랐으나 일재의 문하에서 절의(節義)와 학행(學行)으로 중망(衆望)을 모았으며 스스로 팔물잠(八勿箴; 物妄言 勿暴怒 勿흉酒 勿荒色 勿惰祀 勿문祀 勿소族 物爲奸)을 지어 행하니 호를 물재(勿齋)라 하였던 것이다.
1592년(宣祖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손홍록(孫弘祿)과 함께 의곡도유사(義穀都有司)와 의곡계운장(義穀繼運將)이 되어 1593년 9월에 백미 500섬, 목화 400근, 세목 1필, 흰 명주 1필, 장지 20권을 모으고 스스로 백미 202섬 2두, 목화 100을 출연하여 그 안에 백미 338곡(斛) 7두 (斗), 목화 500근, 흰 명주 1필, 세목 1필, 장지 20권을 전라도 다른 곳의 의곡이 옮겨지기 전에 먼저 용만(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어 국용(國用)에 대비하게 하고, 나머지는 나누어 고경명(高敬命)․최경희(崔慶禧)․민여운(閔汝雲) 등 여러 의병장의 군진에 보내 군수에 충당케 하였다. 스스로 집에서 의병과 군기를 많이 갖추었으며, 집에 있던 사내종 3명씩을 고경명, 최경회 대장에게 보내고 사내종 2명은 민여운 대장에게 보내 적을 죽이는 공을 세우게 하였다. 1605년(宣祖38) 호성선무(扈聖宣武) 이등훈(二等勳)에 록(錄)했다.
묘는 옹동면(瓮東面) 수락동(水落洞) 자좌(子坐)에 있다.5)
손홍록은 둘째 아들로 1537년(中宗 32) 2월 6일에 태인현 고현내면(古縣內面) 삼리(三里)(현 칠보면(七寶面) 시산리(詩山里) 삼리(三里)에서 출생하였고, 1610년(광해 3) 12월 25일 향년(享年) 74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자는 경안(景安), 호는 한계(寒溪)이며, 본관은 밀양(密城)이다.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지낸 비장(比長: 연산조(燕山朝)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 절식사(絶食死)한 충신)의 증손자이자 한림(翰林) 벼슬을 지낸 숙노(叔老)의 아들이다. 12세 때 이항(李恒) 문하에서 도학(道學)과 문장을 연마했다. 임란 당시 안의와 함께 의곡계운장(義穀繼運將)이 되어 사방에 격문을 띄우고 의곡과 재물을 모아 행재소와 의병장 면여운의 진에 보내기도 하였다. 실록(實錄)과 어진(御眞)을 구출하여 민족사에 빛나는 공훈(功勳)을 세우고 전쟁이 끝난 뒤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향리(鄕里) 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애석하게 여기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권했으나 그는 정색하여 ‘국난(國難)에 신자(臣子)로써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6)라는 말로 이를 거절하고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토교육에 전념했다. 묘는 태인 부곡서옹 해좌원 (泰仁釜谷西甕亥坐原: 현재 칠보면 반곡리)에 있다 .
1876년(肅宗 2) 남천사(籃川祠; 정읍시칠보면 시산리)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1392 ~1863)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총 1,893권, 888책으로 편찬하여 기록한 편년체로 쓰인 공식 국가기록물이다. 실록은 1,187책 6,400만 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면수에서 세계 제일에 해당된다. 또 동아시아 대부분의 실록이 필사본으로 되어 있으나 금속활자나 목활자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편찬내용을 후손들이 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어서 엄정한 역사기록을 할 수 있었다는 점 또한 특기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없는 사관의 평가가 담겨 있으며 중국의 25 사나 실록보다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한 것은 이성계가 태종 8년(1408)에 죽자 그 이듬해 8월에 태종이 하륜에게 『태조실록』 편찬을 명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어 『정종실록』, 『태종실록』 은 1423년(세종 5) 11월부터 편찬이 시작되었다. 이같이 조선건국 초기의 태조 · 정종 · 태종의 3대 실록은 처음 각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에, 1부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사고에 간직했다.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를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星州)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여 각각 1부씩 분장하였다.
『세종실록』 이 후로는 각왕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활자로 인쇄하여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의 네 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춘추관․충주․성주 사고는 불에 타서 소실되고 전주사고 본만 남게 되니 우리의 소중한 역사실록이 일본에 의해서 손실된다.
다행히도 전주사고본 (태조∼명종까지의 13대 실록)은 태인에 살고 있던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錄) 등이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서 병화를 면하여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7월에 의정부가 인계 받아 해주로 운반하였다가 다시 1596년(선조 29)에 강화도로, 1599년(선조 32)에 다시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선조 39) 3월까지, 13대 실록을 다시 3부 씩 출판하였고 최종 교정본과 병화를 면한 전주사고 원본 실록을 합쳐서 5부를 만들었다.
이들 실록은 다시 춘추관을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 경북 봉화군(奉化郡)의 태백산(太白山), 평북(平北) 영변군(寧邊郡)의 묘향산(妙香山), 강원도 평창군(平昌郡)의 오대산(五臺山)에 각각 1부씩 보관시켰다.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에는 선조(宣祖) 때 출판된 신인본을 보관하고 마니산에는 원본인 전주사고 실록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시켰다. 1617년(광해군 9)에 편찬된 선조실록도 이와 같이 하였다.
1624년(인조 2) 이 괄의 난으로 춘추관에 소장되었던 실록은 소실되었으며 1633년(인조 11)에는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은 불길하매 묘향산 사고를 적상산(赤裳山)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마니산 실록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크게 파손되었으나, 1660년(현종 1)에 다시 보수했고 마니산사고는 1678년(숙종 4)에 강화도의 정족산(鼎足山)에 신설한 사고로 이전되었다. 그리고서 인조 이 후의 실록은 4부를 인쇄하여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간직하였고 조선조 말기까지 계속 보관하여 왔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와 함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옮겨져 종친부 (宗親府) 건물에 보관되었고 적상산본은 창덕궁(昌德宮)에 있는 장서각에 보관되었다.
또 오대산 본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으로 이전되었으나 1923 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소실되었는데 이중에 27책이 서울대도서관으로 이전되어 보관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 이관되었던 정족산 본과 태백산본은 1929년에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도서관(京城帝國大圖書館)에 이관되어 보관되었다 .
적상산본은 1946년의 도난 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평양의 김일성 종합대학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규장각에 현존하는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당시 병화를 모면한 전주사고의 본입니다. 이는 그 후 강화의 마니산사고를 거쳐 정족산사고에 간직되어 온 원본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이후에 전주사고본에 바탕으로 하여 새로 찍은 3본 중에 봉화 태백산 사고에 간직되어 온 신인본과, 또 그 때의 교정본으로서 오대산사고에 간직되어 온 것의 잔존 분과 파지로 존치되어 온 것을 장책한 잔여분에 해당한 것으로서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
국보 제151-1 호로 지정된 정족산본은 1181책으로 『문종실록』 권 11과 『성종실록』 권 70. 71. 80. 132. 133이 결락되었다.
국보 제151-2 호로 지정된 태백산본은 848책으로 『문종실록』의 권 11 만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1985년 3월 22일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되었다.
국보 제151-3 호로 지정된 오대산본의 잔여본 27책으로서. 잔여본 27책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동경제국대에 이관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그중 일부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중종실록』 중종 2년 5월에서 17년까지의 20책과 또 『선조실록』 선조 16년 1월에서 26년까지의 7책 분이다.
국보 제151-4 호로 지정된 잔존 분 21책으로 이 책은 유래를 밝힐 수 없는 실록의 낱장으로 정종부터 광해군 때까지의 총 558엽의 낱장이 오랫동안 규장각에 파지상태로 남아 있다가 1972년 6월 21책으로 장책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왕조실록』 총 책수는 2,077책이다 .
오늘 우리가 조선전기의 역사를 쓰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이 두 사람 덕분이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사라졌을 것이고, 이 원본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빛을 보게 된 『조선왕조실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세계만방에 한껏 뽐낼 수 도 없었을 것이다.
1676년 (숙종 2)에 창건된 정읍 칠보면 남천서원(藍川書院)에 배향 (配享)되었고 고종 때 훼철(毁撤)되어 현재는 칠보 남천사라는 작은 사당에 모셔져 있다. 그들의 이름은 여기에서만 기억되고 있다. 안의와 손홍록, 그리고 그들을 도와 천 리 길을 걸어 실록을 날랐던 노비와 머슴들,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지킨 이들이다.7) 이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사료의 중요성, 기록의 힘을 일찍 깨달은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는 것이 곧 후손된 도리이고, 민족사를 보존하는 길이며, 기록문화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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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井州 ․井邑 鄕土人物選輯』(정읍문화원, 1983), 54.~57.
2) 태(駄): 바리. 마소의 등에 가득 실은 짐을 세는 단위. 금년금회만천태(今年金繪滿千駄) <許衡: 원나라 학자>. 『봉안어용사적』.
3) 이용찬,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초기 피난과정”, 『정읍학』창간호 (정읍학연구회, 2014), 193.
4) 장세균, 『조선왕조실록과 안의(安義), 손홍록(孫弘錄)』(신아출판사, 2012. 3. 1.) 117~125.
5) 『新編 井邑 人物誌』(정읍문화원, 2007. 2. 25), 136.
6) 趙炳喜, 『完山 고을의 脈搏』(韓國藝總 全州支部, 1994.), 59.
7) 이성무,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동방미디어,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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