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조선시대(朝鮮時代)와 태인
제 1절 조선(朝鮮)의 건국(建國)과 태인
1. 조선의 건국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고려 말기 나라 안팎의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개창(開創)되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밖으로는 원(元)에서 명(明朝)으로 중국의 왕조가 교체하는 국면이 전개되고, 안으로는 이에 대응하여 당시의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요동정벌(遼東征伐) 및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라는 획기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려시대는 건국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거란(契丹)․여진(女眞)․몽고(蒙古)․홍건적(紅巾賊)․왜구(倭寇)로 이어지는 대외관계의 복잡한 양상이 계속되었다. 대외관계로부터 초래되는 영향이 그대로 국내의 정치상황을 변모시켰다. 급기야 12세기에 이르러 약 40년에 걸친 대몽항쟁(對蒙抗爭)을 거쳐 몽고의 간섭을 1세기 정도 받는 동안 고려왕조의 국가기반은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다.
또한 왕명의 격하(格下)와 왕위 계승과정에 나타난 혼란상은 고려왕조(高麗王朝)의 국가로서의 체제유지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왕위 계승의 문제점은 무신집권기(武臣執權期)부터 비롯되었고, 몽고 간섭기(蒙古干涉期)에 이르러 비록 왕조로서의 독자성은 인정되었으나 ‘○조(祖)(또는․종(宗))’에서 ‘충(忠)․왕(王)’으로의 왕명 격하(格下)뿐만 아니라 몽고의 간섭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민왕대(恭愍王代)에 이르러 반원정책(反元政策)을 표방한 개혁정치가 실시되면서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도 신장되기 시작하였으나, 원(元)․명(明) 교체(交替)라는 대외관계의 또 다른 양상은 공민왕의 시해(弑害), 친원(親元)․친명(親明)을 둘러싼 신료들의 갈등,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를 중심으로 한 무인세력(武人勢力) 대두(擡頭) 등의 급변하는 정세에 직면하여 왕조교체(王朝交替)까지도 포함하는 다양한 국면이 이어졌다.
이러한 대외관계의 변화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충격을 당시의 집권세력은 정치세력의 교체를 포함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改革措置)를 단행하면서 대응해 갔다. 그리하여 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결탁에 의해 왕조교체가 이루어짐으로써, 대외관계의 영향이 그대로 국내 정치상황을 변화시키던 종래의 대외관계 설정 양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최대의 개혁조치인 대내적 세력교체(勢力交替)를 바탕으로 한 왕조교체를 이룩함으로써 한 단계 진전된 역사발전(歷史發展)을 이룩하였다.
요동정벌(遼東征伐)은 1388년(우왕, 禑王 14) 4월에 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요동정벌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를 가져온 결정적 사건이었다. 요동정벌은 직접적으로는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둘러싼 영토분쟁(領土紛爭)이었지만, 이로 인해 명과의 대외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수밖에 없는, 당시로서 강대국(强大國)과 약소국(弱小國)이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성을 동시에 내포한 사건이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6월에 반원정책을 표방한 이래 고려는 사실상 대명(對明) 중심의 외교관계를 지속해 왔다. 따라서 우왕(禑王) 대(代)에 이르러 명(明)과의 전면전을 뜻하는 요동정벌의 상황이 야기된 것은 사실 의외의 사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대명 중심의 외교관계가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명으로부터 다방면에 걸친 여러 가지 압력을 줄곧 받아왔다. 1368년(공민왕 17)에 명이 건국된 이래 공민왕의 갑작스런 시해와 우왕 책봉문제(冊封問題), 명 사신 살해사건, 사신 왕래의 순조로운 관계를 빌미로 명으로부터 제기된 막대한 양의 공물(貢物) 요구 등이 그것이었다. 이로부터 이른바 친원파와 친명파로 불리는 고려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관계가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는 1388년(우왕 14) 2월, 사신 설장수가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한 지역이었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도록 하라.”라는 명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면서 대두하였다. 최영 등의 집권세력은 사신을 파견하여 철령 이북지역의 헌납이 역사적으로 부당한 일임을 요청하면서, 또한 성을 수축하고 서북변방으로 장수를 파견하는 일련의 군사적 대비책을 통해 요동정벌을 준비하는 등 강․온 양면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요동정벌을 반대한 이자송(李子松)을 처형하면서 일전불사(一戰不辭)의 상황을 조성하였다.
마침내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정벌을 명령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 여름철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구가 그 틈을 노린다는 것,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리고 군사가 질병에 걸린다는 것 등의 ‘4불가론’을 제기하면서 반대하였다. 매우 타당성이 있는 반대 이유였으나 최영의 확고한 요동정벌 결의에 따라 8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曹敏修),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를 주축으로 한 요동정벌군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은 곧바로 평양을 출발하였다. 당시 병력은 좌우군 38,830명, 하인 11,634명, 말 21,682필로 구성되었다. 10만 대군이라 호칭하였으나 실제 전투 병력은 4만 명 정도였다.
요동정벌과 더불어 고려는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年號)를 폐지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원나라의 호복(胡服)을 다시 입도록 하였다. 홍무 연호를 폐지하면서 또 다른 연호를 표방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럴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요동정벌은 당시 고려로서는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그러나 요동정벌을 둘러싸고 양국 간의 전면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요동정벌군의 좌우군도통사는 ‘4불가론’의 현실적 견해를 바탕으로 회군(回軍)을 요청하였다. 거듭 회군을 요청하였으나 최영은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요동정벌의 현실적 어려움을 명분으로 전격적인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였다. 휘하 군사력 대부분이 요동정벌군에 편성되어 전력이 약화된 최영 측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이성계측은 회군에 성공하였다.
최영 등은 요동정벌을 감행하기 바로 직전에 우왕대의 정치주도세력이었던 이인임(李仁任) 등의 이른바 권문세족을 대거 처형하거나 유배에 처하였다. 요동정벌은 이러한 집권세력의 대대적인 교체라고 하는 내부적인 개혁을 수반한 전면전이었다. 당시 최영 등과 더불어 이들 권문세족(權門勢族)을 축출하는데 공조하면서 서서히 실권자로 등장하였던 이성계는 최영의 강경론과 달리 더 이상의 형벌을 그치고 모두를 포용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미 이들의 사후처리를 포함한 정국운영에 대해 다른 입장을 표명하였다. 위화도회군은 이성계의 군사적 견해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요동정벌 및 위화도회군은 대외적 억압과 충격을 대내적 집권세력의 교체를 포함한 개혁의 측면에서 대응해 간 이 시기 정치세력의 고충을 여실히 표출한 새로운 대외관계의 설정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위화도회군이 성공한 이후 이성계 등의 새로운 집권세력(執權勢力)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비리를 자행한 담당층만을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리의 구조적 요인인 토지제도(土地制度)를 어떠한 방향에서 정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대외적 억압과 충격이 그대로 국내 정치상황을 변화시키던 종래의 대외관계 설정 양상에서 벗어나, 대내적 세력교체와 개혁으로 적절히 대응해 간, 한 단계 진전된 고려 말기 대외관계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마침내 이성계 등은 고려 말에 초래된 엄청난 대외적 억압과 충격을 결과적으로 왕조교체라는 최대의 사건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집권세력(執權勢力)으로 등장하였다.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개경(開京)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새 왕조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새 왕조의 개창에 따라 즉위교서(卽位敎書)가 반포되었다. 이 교서는 국호는 그대로 고려라 하고 새 왕조의 통치방향을 18개항에 걸쳐 제시하고 있다. 또한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제도도 공포되었다. 국호는 즉위교서에서 ‘고려(高麗)’를 그대로 쓴다고 했으나 왕조개창(王朝開創)의 급격한 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조선(朝鮮)’, ‘화녕(和寧)’의 두 칭호 가운데 명나라의 뜻을 고려하여 1393년(태조 2) 2월에 조선으로 결정하였다. 조선은 단군(檀君)․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취한 것이고, 화령(和寧)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이었다.
2. 신도시(新都市) 태인(泰仁) 탄생
“태산군(泰山郡)과 인의현(仁義縣)을 통합하고 각 지명의 앞 글자를 따 태인현(泰仁縣)이라 명명하였다.”
백제 때 형성된 대시산군(大尸山郡)과 빈굴현(賓屈縣)이라는 이원적 행정체계가 조선 건국 후에는 하나로 통합되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태인(泰仁)’ 지명은 1409년(태종 9)에 고려시대 태산현(泰山縣, 太山縣)과 인의현(仁義縣)을 통합하고 각각의 이름의 앞 글자를 따 태인현(泰仁縣)이라 명명하였다.1)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태인(泰仁)에
“본조 태종 9년(1409) 기축에 두 현(태산군, 인의현)을 폐합(廢合)하여 태인(泰仁)으로 고쳤고” 라고 하는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이때 현의 치소는 옛 태산현에 그대로 두었으나, 그곳은 태인현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서쪽의 인의현 사람들이 왕래하는 데 큰 불편을 겪었다.2)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임내였던 능(綾)․나향(羅鄕)과 대곡(大谷)․개문(開門)․도전(桃田) 부곡은 조선 초기에 직촌(直村, 군현의 수령이 직접 통치하는 촌락)이 되었다.
태인현의 옛 치소는 현재의 칠보면 시산리로, 인의현의 옛 치소는 신태인읍 백산리로 추정되므로3) 그 거리는 거의 20km에 이른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1416년(태종 16) 8월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새로운 치소를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居山驛)이 있는 곳으로 옮겨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역(驛) 건물을 그대로 쓰다 보니 시설이 비좁고 누추하였다. 2년 후인 1418년(태종 18) 겨울 현감 오치선(吳致善)이 거산역의 객관이 있던 곳보다 서쪽에 새로운 관청을 지을 터를 잡고, 1419년(세종 1) 가을 비로소 후청(後聽)․동서침(東西寢)․남청(南廳)․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웠으며, 1421년(세종 3) 여름에는 현감(縣監) 안기(安起)가 좌우랑(左右廊)․좌우마구(左右馬廐)․대문․고옥(庫屋)․향교․성전(聖殿)을 세웠다.4) 이때 비로소 신도시로서의 태인현 읍치가 자리를 잡게 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세종은 즉위 후 1424년(세종 6) 변계량(卞季良)에게 지지(地誌) 및 주․부․군․현의 연혁을 찬진(撰進)하라고 하였다. 1425년에 『경상도지리지』가, 1432년에 나머지 7도의 지리지를 한데 모아서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이 지리지는 다시 정리되어 1454년(단종2) 『세종실록』 중에 지리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제148권에서 제155권에 실려 있는 전국 지리지(全國地理志)이다. 8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도 내용은 151권에 수록되어 있다. 전주부와 나주목, 남원도호부, 장흥도호부, 제주목 순서로 배치하였으며 각 고을의 연혁, 산천, 호구 수 등을 수록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조선 전기의 태인현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국역] 『세종실록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태인현 |
◎ 태인현(泰仁縣)
태산현(泰山縣)은 본래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는데, 신라에서 대산군(大山郡)으로 고쳤고, 인의현(仁義縣)은 본래 백제의 빈굴현(賓屈縣)이었는데, 일명 부성현(賦城縣)이라 한다. 신라에서 무성(武城)으로 고쳐서 태산군(太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에서 인의현으로 고쳤다. 모두 고부군의 임내(任內)로 삼아 태산군(泰山郡)으로써 감무(監務)를 겸하게 하였고, 현종(顯宗) 10년 기미에 나누어 두 현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9년 기축에 두 현을 합하여 태인(泰仁)으로 고쳤고, 16년 병신에 읍(邑)을 속역(屬驛) 거산(居山)으로 옮겼다. 옛 속향(屬鄕)이 3이니, 나향(羅鄕)·능향(綾鄕)·제견향(堤見鄕)이요, 부곡(部曲)이 2이니, 대곡(大谷)·개문(開門)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북쪽으로 금구(金溝)에 이르는데, 모두 13리 요, 서쪽으로 김제(金堤) 에 이르기 21리, 남쪽으로 순창(淳昌)에 이르기 37리 이다. 호수가 2백 47호요, 인구가 1천 5백 2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9명이요, 진군이 18명이요, 선군이 2백 47명이다. 태산(泰山)의 토성이 5이니, 박(朴)·시(柴)·허(許)·전(田)·경(景)이요, 인의(仁義)의 성이 5이니, 유(庾)·송(宋)·조(趙)·종(宗)·섭(葉)이요, 내접성(來接姓)이 3이니, 안(安) 서울에서 왔다. · 허(許) 태산에서 왔다. · 이(李) 고부에서 왔다. 어떤 본(本)에는 이 3성이 제견향(堤見鄕)에 속해 있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5천 3백 4결이다.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모시·왕골·닥나무이다. 토공(土貢)은 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족제비털·칠(漆)·대추·감·석류·지초(芝草)·인삼·죽순·자리·목화·꿀·밀[黃蠟]이요, 약재(藥材)는 녹각교(鹿角膠)·호라비좆뿌리·겨우살이풀뿌리·복신(茯神)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 현의 동쪽 수약동(水若洞)에 있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요, 현의 남쪽 부곡(釜谷) 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 역(驛)이 1이니, 거산(居山)이었다. 현의 남쪽에 있다. 잠실(蠶室)본조 태종(太宗) 16년 병신(丙申)에 비로소 옛 읍(邑)인 태산(泰山)에 두었는데, 딸린 노비가 30명이다. 한량(閑良)으로서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가려서 감독하게 한다. 【영인본】 5책 658면 【태백산사고본】 55책 151권 9장 A면 |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
동쪽으로 임실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39리, 남쪽으로 순창군(淳昌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48리, 서쪽으로 김제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북쪽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7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3리이다. 【건치연혁】 태산군(太山郡)은 본래 백제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때 태산으로 고쳤다. 태(太)는 태(泰)로도 통한다. 고려 때 고부군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공민왕 3년에 현 사람으로서 원나라 사신인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나라에 공이 있다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다. 인의현(仁義縣)은 본래 백제 빈굴현(賓屈縣)이었는데, 부성(賦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치어 태산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인의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태산감무에게 와서 겸하게 하였으며, 현종 10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9년에 또 합치어 한 고을로 만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을 거산역(居山驛)에 옮겼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대시산ㆍ태산ㆍ빈굴ㆍ무성ㆍ부성ㆍ인의. 【성씨】 본현 박(朴)ㆍ시(柴)ㆍ허(許)ㆍ전(田)ㆍ경(景). 인의(仁義) 유(庾)ㆍ송ㆍ조(趙)ㆍ종(宗)ㆍ섭(葉), 안(安) 서울. 허 태산(泰山). 이(李) 고부(古阜). 어떤 이는 이 세 성은 속성(屬姓)이라 한다. 김제에도 보인다. 능향(綾鄕) 경(景)ㆍ시(柴)ㆍ박. 나향(羅鄕) 경(慶). 대곡(大谷) 전(田). 【산천】 죽사산(竹寺山)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상두산(象頭山)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모악산(母岳山)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연지(蓮池) 객관 남쪽 1리에 있다. 견천(犬川)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상두산 북쪽에서 나와 이평(梨坪)에 이르러 남천(南川)과 합친다. 남천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상두산 남쪽에서 나와 이평에 이르러 정읍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동진으로 들어간다. 우항제(牛項堤)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죽전(竹箭)ㆍ숫돌[礪石] 모두 인의성 산에서 난다. 게[蟹]ㆍ감ㆍ석류ㆍ차ㆍ모시ㆍ꿀[蜂蜜]ㆍ생강. 【궁실】 객관 정곤의 기(記)에,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과 인의 두 고을인데, 우리 조정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에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옛 객관을 현의 객관으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오치선(吳致善)이 이어 와서 드디어 옛 객관의 서쪽에 지세를 살피고, 기해년 가을에 비로소 후청(後廳)ㆍ동서침(東西寢)ㆍ남청(南廳)ㆍ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신축년 여름에 안기(安起)가 오공(吳公)의 뜻을 이어받아 좌우랑(左右廊)ㆍ좌우마구[左右廐]ㆍ대문ㆍ고옥(庫屋)ㆍ향교ㆍ성전(聖殿)을 더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하였다. 【누정】 함담정(菡萏亭) 객관 동쪽에 있다. ○ 현감 장우규(張友奎)가 세웠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신증』 향학당(鄕學堂)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정언정극인(丁克仁)이 처음에 사삿집 서당으로 설치하였는데, 후에 현 사람 송세림(宋世琳)이 그 제도를 확장하여 강당을 세웠고, 동서쪽에 재사(齋舍)가 있는데, 항상 학도들을 모아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역원】 거산역(居山驛)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정어원(鼎魚院)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태거원(泰居院)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왕륜원(王輪院)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신증』 【교량】 태거교(泰居橋)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불우】 용장사(龍藏寺) 운주산(雲住山)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이인(異人)이 일찍 석장(錫杖: 중들의 지팡이) 걸어 두고, 용혈(龍穴)에서 명수(冥修)를 부쳤네. 삼명(三明)을 다 깨달은 후 이범(二梵)은 거의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렀다. 아침 범종(梵鍾)은 묵중하게 귀머거리 깨우치고, 저녁 등은 길이 고요함을 깨뜨리네. 번뇌의 기틀 정상(淨想)에서 달아나고, 뛰어난 경치 깊이 찾는 데에서 따라온다. 자리 떨치니 부채 잡기 게으르고, 화로 안으니 가죽옷 벗고 싶네. 월랑(月廊)에는 죽고(粥鼓: 식사 시간 때 치는 북이다)가 울리는데, 풍탑(風榻)에는 차병이 출렁인다. 문득 여악(廬嶽) 도연명(陶淵明)의 정취를 가지고, 섬계(剡溪) 왕자유(王子猷)와 같이 행동한다. 동구(洞口)에서는 누가 서로 보내 주나, 오직 골짜기로 나오는 회오리바람뿐이다.” 하였다. 영천사(靈泉寺)ㆍ흥룡사(興龍寺) 모두 모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인의폐현 지금 치소의 서쪽 10리에 있다. 고태산(古泰山)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대곡부곡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개문부곡(開門部曲)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도전부곡(桃田部曲)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능향(綾鄕)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나향(羅鄕)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명환】 신라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으로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인물】 고려 전원균(田元均) 고사(古事)를 널리 알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벼슬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우거】 본조 정극인 처음에 상사(上舍: 진사)로서 태학(太學)에서 유학하였는데, 사람들이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을 닦았다고 칭찬하였다. 문종조에 은거하고 있던 그를 천거하여 불러다가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을 제수하였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고,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효자】 본조 허중민(許仲民) 어머니는 나이가 75세였는데, 밤에는 중민의 작은 딸을 안고 잤다. 그러다가 집에 불이 나니 중민이 불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나와 죽음을 겨우 면하였는데, 딸은 불에 타서 죽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특별히 제용직장(濟用直長)을 제수하였다. 『신증』 박윤근(朴允斤) 아버지가 악질을 앓는데, 윤근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손가락을 잘라 국에 타서 먹이니 병이 곧 나았다. 이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웠다. 경례손(景禮孫) 아버지가 일찍이 물에 빠졌는데 뛰어 들어가서 구하였으므로 아버지는 죽음을 면하였고, 예손은 힘이 다하여 마침내 빠져 죽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열녀】 본조 임씨(林氏) 밤에 그 집에 불이 났는데, 시어머니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임씨가 업고 나와 화를 면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 윤회(尹淮)의 서(序)에, “우리나라의 건국은 도당씨(陶唐氏 요(堯) 임금을 말함)와 나란하고, 주(周) 나라에 미쳐서는 기자(箕子)께서 봉강(封疆)을 받았으니, 인현(仁賢)의 덕화는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깊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열성(列聖)이 서로 이으시어 교화를 밝히시고 풍속을 후하게 하셨으니, 가정에서는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고, 사람들은 사랑과 공경을 돈독히 하여 아무리 못난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일지라도 향할 곳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구고 임씨(九皐林氏)는 전의부정(典醫副正) 영순(英順)의 딸인데, 한 고을의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15세가 되어 현재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 박조(朴慥)에게 시집갔는데, 시어머니 전씨(田氏)를 섬겨 부인의 도를 다하였다. 건문(建文) 신사년 봄에 박군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임씨 홀로 태인현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3월 10일 밤중에 집에 불이 났다. 사람들은 모두 창황히 놀라면서 자신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오직 시어머니만은 늙고 병들어 잠자리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임씨가 급히 뛰어 들어가서 시어머니를 안고 나오다가 섬돌에 부딪쳐 쓰러졌는데, 바람에 불기운이 성하자 자기 몸으로 시어머니를 덮어, 머리가 그슬리고 등이 데어 문드러졌다. 건장한 종이 그 의리에 감동되어 뛰어들어서 불을 막으면서 업고 나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고, 의부(義婦)라는 호를 주니, 조정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시를 지어 읊고 노래하여 이미 축(軸)이 가득하였다. 하루는 나의 동년(同年) 친구 유순도(庾順道)가 그 축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졸문(拙文)으로 서문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임씨는 한 사람의 부인일 뿐이다. 학문의 힘과 연마한 공부는 없었지만, 특별히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므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속에 쌓였고, 남편을 잘 섬겼으므로 보고 느껴 온 바가 본래 있었다. 때문에 창졸간에 일을 당하여도 한 생각이 나온 바가 과단성 있어 막을 수 없어서, 뜨거운 불속에 뛰어들어 다만 시어머니를 구하는 것만 급히 생각하고, 일찍이 자기 몸의 위태롭고 또 죽을 것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비록 천성의 진실에서 근본된 것이지만, 어찌 우리 성조(聖朝)의 은택으로 길러서 풍화를 가다듬게 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내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기꺼이 말하여, 후세에 글을 쓰는 자에게 상고함이 있도록 한다.” 하였다. |
[국역]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
[국역] 대동지지(大東地志) |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 동촌(東村) 처음이 3리, 끝이 20리. 남촌(南村)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서촌(西村)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북촌(北村)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옹지(甕池) 동쪽으로 처음이 4리, 끝이 15리. 고현내(古縣內)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산내(山內)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70리. 산외(山外)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인곡(仁谷)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 감산(甘山)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사곡(沙谷)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 은기동(銀器洞) 서북쪽으로 처음이 17리, 끝이 30리. 용산(龍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거산(居山) 남쪽으로 끝이 10리. 흥천(興天)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 ○ 나향(羅鄕)은 서쪽으로 10리, 능향(陵鄕)은 동쪽으로 10리, 도전부곡(桃田部曲)은 동쪽으로 30리, 개문부곡(開門部曲)은 동쪽으로 40리, 대곡부곡(大谷部曲)은 동쪽으로 25리이다. 【성지】 인의고현성(仁義古縣城) 흙으로 쌓았던 유적이 있다. 【창고】 창(倉) 3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고현내면(古縣內面)에 있다. 산창(山倉) 남쪽으로 60리, 장성(長城)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있다. 【교량】 태거교(泰居橋) 남쪽으로 5리. 장탄교(長灘橋) 남쪽으로 5리, 모두 남천(南川) 하류이다. 호천교(虎川橋) 북쪽으로 5리, 호천 하류이다. 【토산】 닥종이[楮]ㆍ옻[漆]ㆍ뽕[桑]ㆍ게[蟹]. 【누정】 청현루(聽絃樓)ㆍ진남루(鎭南樓)ㆍ파향정(坡香亭)ㆍ관덕정(觀德亭). 【서원】 남고서원(南皐書院) 선조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이항(李恒) 자는 항지(恒之)이고, 호는 일제(一齊)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벼슬은 장악원정(掌樂院正)이다. 김천일(金千鎰) 진주 편에 있다. 무성서원(武城書院) 광해조 을묘년에 세우고 숙종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최치원 문묘 조에 있다. 신라 때 태산태수(太山太守)였다. 신잠(申潛) 자는 원량(元亮)이며, 호는 영천자(靈川子)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벼슬은 상주 목사(尙州牧使)였다. 정극인(丁克仁) 자는 가택(可宅)이고,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며,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벼슬은 정언이었는데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추증하였다. 송세림(宋世琳) 자는 헌중(獻仲)이고, 호는 눌암(訥庵)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벼슬은 교리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지리지 151 전라도 전주부 태인현조를 보면 태인에는 희성(稀姓)인 ‘종(宗)’씨(氏)와 ‘섭(葉)’씨(氏)도 한때 있었다. <표 6-1> 1789년 태인면수와 리5) 17개 면(面), 160개 리(里) 조선 초 태산현과 인의현 통합 이후 지방관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나, 1895(고종 32)년 지방관제의 변경에 따라 종래의 팔도관찰제(八道觀察制)를 폐지하고 전국 군현의 명칭을 군(郡)으로 통일하였다. 그리고 관명을 군수로 통칭했다. 이때 태인현은 군(郡)으로 승격되어 태인군(泰仁郡)이 되었으며 전국을 23개의 부(府)로 개편하면서 태인군은 전주부(全州府), 태인군(泰仁郡)이 되었다.6) 3.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태인 의병(義兵) 호남 지방에 사림(士林)의 문화가 꽃을 피우던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국가적으로 큰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선조 25)에 왜(倭)가 조선을 침략하여 7여 년 동안 전쟁을 겪게 되는데, 순식간에 거의 전 국토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국가 존망의 위기에 달하였다. 이때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이 호남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기 항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가 전라도로부터 조달됨으로써 임진왜란 극복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사회 경제적으로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터가 된 조선은 막대한 인력과 재정의 손실을 입었을 뿐더러,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농토가 황폐화되어 생산력의 큰 감소를 가져왔으며, 토지대장의 상실로 조세나 요역(徭役)7)의 징발이 어려워 재정이 고갈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전주사고를 제외한 3대 사고가 불타, 많은 서적이 없어지고 불국사·경복궁 등도 불에 타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또한 사회의 모순이 폭발하여 봉건왕조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천민이 양민이 되고 서얼(庶孼)도 관직을 얻는 등 신분제도도 흔들려갔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17만여 명의 육군과 3, 4만 명의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부산으로 침입했다. 부산 첨사(僉使) 정발(鄭撥),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등이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조선 조정은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을 차례로 파견해 일본군을 막도록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신립은 충주에서 각각 패배했다. 그 결과 불과 보름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국왕과 관료들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했다. 한양을 돌파한 후 5월 27일에 개경에 이어 6월 13일 평양까지도 함락시켰다. 또 다른 부대도 함경도까지 북상하여 근왕병(勤王兵)의 모집을 위해 함경도에 파견된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생포했다. 국왕 및 조정이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피난을 거듭하자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근왕병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고, 왕의 피난길을 막고 욕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며, 백성들은 궁궐(宮闕)과 형조(刑曹)에 불을 지르고 노비문서를 없애버렸다. 그러나 수전(水戰)의 상황은 달랐다.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의 해전에서 잇달아 일본수군(日本水軍)을 격파(擊破)함으로써 일본군의 해상보급로(海上補給路)를 차단(遮斷)하고 호남지방(湖南地方)을 보호하여 곡창지대(穀倉地帶)를 보존(保存)할 수 있었다. 또한 관군이 패배하자 각지에서는 스스로 고장을 지키고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들은 유격전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군량보급을 차단하여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경상도에서는 곽재우(郭再祐)가 궐기한 이래, 정인홍(鄭仁弘)·손인갑(孫仁甲)·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충청도에서는 조헌(趙憲)이 거느린 의병부대가 승려인 영규(靈圭)의 의병부대와 힘을 합해 청주를 탈환하고 금산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전라도에서는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김덕령(金德齡) 등이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까지 진격했으며, 경기의 홍계남(洪季男), 황해도의 임중량(林仲良)·차은진(車殷軫)·김진수(金進壽)·김만수(金萬壽)·황하수(黃河水),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등도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 西山大師)과 유정(惟政: 松雲大師)도 각각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승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이 같은 의병의 항전 및 수군의 승리에 힘을 입은 관군도 점차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전개했다. 1592년 9월에 경상도 의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관군은 경주성을 탈환했으며, 1592년 10월에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하는 관군(官軍) 및 의병의 연합부대는 전라도에 침입하려는 일본군을 진주성에서 크게 격파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의병장의 활동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호남지방의 대표적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활동이었다. 호남지방에서는 초기부터 의병이 조직되었다. 조일전쟁(朝日戰爭) 시기의 의병운동(義兵運動)은 일차적으로 사림들의 학연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침략을 직접 당하지 않은 호남지방(湖南地方)의 의병(義兵)이었다. 16세기에 활동한 호남지방(湖南地方)의 사족(士族)들은 인맥과 학연에서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김굉필(金宏弼)·최부(崔溥)·송흠(宋欽)·박상(朴祥)·이항(李恒)을 중심으로 학문전수(學文傳授) 관계(關係)가 형성(形成)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서 이항은 기묘(己卯)·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禍)를 입은 사람들과 교유(交遊)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화를 피하여 전북 정읍의 태인에 은거하면서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서인(西人)이었던 김천일(金千鎰) 등이었다. 의병장 김천일은 호남지방의 재지사족(在地士族)8)이었다.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로 할아버지는 주부 윤손(潤孫)이고, 1537년 전남 나주군에서 진사(進士) 언침(彦琛)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持平) 때에 소를 올려 시폐를 적극 논란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 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懽)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한편, 공주에서 조헌(趙憲)과 호서(湖西) 지방 의병에 관해 협의하고는 곧 수원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와 또 호서 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8월 전라병사에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강화도에 진을 옮긴 뒤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해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해 전투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양천(陽川) 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했고 매일같이 강화 연안의 적군을 공격했으며,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 한편, 전라병사·경기수사·충청병사, 추의병장(秋義兵將) 우성전(禹性傳) 등의 관군 및 의병과 합세해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일본군의 원릉(圓陵) 도굴 행위도 막아 이를 봉위(奉慰)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명·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해 구휼하였다. 전투에서도 경기수사·충청수사와 함께 선유봉(仙遊峯) 및 사현전투(沙峴戰鬪)에서 다수의 적을 참살(慘殺), 생포하고 2월에는 권율(權慄)의 행주산성 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해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전투에서 400여 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임에도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 외에도 민여운(閔汝雲, ?~1593년)은 조선의 의병장(義兵將),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종(龍從), 구손(龜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贊成) 제인(齊仁)이다. 음보(蔭補)로 두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 주부(主簿)로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태인(泰仁)에서 정윤근(鄭允謹)과 함께 향병(鄕兵) 200여 인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어 스스로 비의장(飛義將)이라 불렀다. 의병을 이끌고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함안 등지에서 적을 맞아 싸워 전과를 올렸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휘하 의병 300여 인을 이끌고 참가해 크게 활약하였다. 이 싸움에서 10여 군데나 창검을 맞고 왼손이 잘리고 오른손이 부러졌는데도 장사들을 독려하면서 성을 사수하기 7일째 되던 날 성을 순시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김복억(金福億)은 태인현(泰仁縣) 고현내(古縣內)에서 태어났다. 개국공신(開國功臣)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이며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재종제(再從弟) 군자직장(軍資直長) 김후진(金後進: 遠慕堂), 계제(季弟) 주부(主簿) 김경억(金慶億), 재종질(再從姪) 별제(別提) 월봉(月峯) 김대립(金大立), 김여백(金如白: 遠慕堂의 큰아들), 이수일(李守一: 李一齊의 큰아들),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등과 같이 의병(義兵)과 의곡(義穀)을 모집하여 진중(陣中)에 보냈다. 김후진(金後進, 1540∼1620)은 회련(懷鍊)의 후손이며,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귀(李貴)가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모집하자 이에 참여, 이듬해 장정 100여 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가서 선조를 배알한 다음 곡식을 모아 뱃길로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바쳤고, 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에게도 군량을 보냈다. 4. 박필현(朴弼顯)의 난(亂) 1728년(영조 4)의 무신란(戊申亂)은 달리 이인좌의 난이라고 불리지만 기실 소론 강경파와 남인에 의한 주도로 충청ㆍ전라ㆍ경상도를 중심으로 발발하였다. 곧 정권에서 거세된 세력이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하여 일으켰던 것이다. 이 반란은 전국적인 내란의 성격을 띠고 있던 만큼, 실제 거병지역과 반란 주도인물에 따라 경상도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의 난, 전라도는 박필현(朴弼顯)의 난, 충청도는 이인좌(李麟佐)의 난 등으로 불리고 있다. 박필현 모반 사건의 원인은 1717년(숙종 43)의 정유독대(丁酉獨對)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이균(후에 경종)이 워낙 병약한 점[워낙 몸이 병약체(病弱體)일 뿐만 아니라 생식불능(生殖不能)의 불구자(不具者) … 이것을 기질(奇疾) 혹은 불가형현지질(不可形顯之疾)이라고 표현했다. … ]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이명(李頤命)과 독대하여 연잉군(延礽君, 후에 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숙종(肅宗) 임금 사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의 경종(景宗) 임금이 즉위하였으나 경종은 병약한데다가 후사(後嗣)까지 없었다. 이에 따라 왕통을 이을 수 있는 숙종의 혈통으로는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숙빈 최씨가 세간에 불미스러운 물의가 있다고 하여 당시 소론파(小論派)에서 후계로 삼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의 노론파(老論派)에 의하여 연잉군이 왕세자로 책봉(冊封)되었고, 경종은 세제(世弟)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의 교지(敎旨)까지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론측에서는 이광좌(李光佐)․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진유(李眞儒) 등이 중심이 되어 노론파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하여 김창집 등이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을 시켜 왕을 시해할 음모를 꾀하고 있다고 자백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 세칭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참형에 처하고, 노론파를 조정에서 축출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721년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이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英祖)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신임사화가 목호룡이 조작한 무고임이 탄로 나면서 김일경․이진유 등이 참형에 처해지고, 박필몽이 제주로 유배되는 등 소론이 일망타진되고 노론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참변을 겪고 난 뒤 민심은 자못 불안에 빠졌다. 그런데 이른바 흉서사건(凶書事件)이 더욱 세상을 놀라게 했다. 1727년(英祖 3) 12월 12일 전주(全州) 장터에 괴이한 방문(榜文)이 나붙었다. 방문의 요지는 ‘임금 영조는 이씨왕조(李氏王朝)의 혈통이 아니므로 정통을 맞아 들여야 한다.’9)는 것이다. 대역무도(大逆無道)한 방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흉서(凶書)라 했다.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는 지체 없이 흉서를 그대로 조정에 봉진(封進)하니 조정에서는 이 흉서를 불사르고 흉서를 전달한 전라감사 역시 천청(天聽)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로 물의를 자아냈다. 또 이틀 후인 14일에는 남원(南原) 장터에 전주의 것과 같은 방문이 나붙었다. 이뿐만 아니라 전라도에서는 잇따라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것은 담양부(潭陽府)의 화약고 실화사건(失火事件)인데 원인불명의 화재로 화약 16봉(1봉 15근)이 폭발되었다고 감영에 보고해 왔다. 이로 말미암아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은 파직 되었다. 또 부안 변산(扶安 邊山)에서는 도적들이 치성하여 사찰의 승도들을 몰아내고 공공연하게 백주에 약탈을 자행하는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간원(諫院)의 진언에 따라 전주영장(全州營將) 전순원(全舜元)을 파직하는 동시에 부안 군읍의 수재(守宰: 郡守, 縣監)들을 무관으로 교체토록 했다. 1728년 1월 11일에는 서울의 서소문(西小門) 밖에 전주․남원의 것과 똑같은 방문이 나붙었다. 지난해부터 있어온 흉서사건이 이제는 서울 복판까지 침입해 왔으니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 해서 육조(六曹) 삼부(三府)가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서는 이 봉서범을 체포 혹은 고발하는 자에게는 이품직(二品職)과 천금상을 주는 현상을 내렸다. 그리고 포도대장을 경질하여 봉서범을 체포하라는 독촉하는 교지까지 내렸지만 정범(正犯)은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3월 1일 전주에 내려온 포교가 임피(臨陂) 어느 주점에서 이세용(李世龍)이라는 용의자를 서울로 데려다 국문(鞫問)을 하려 하니 혀를 끊고 고문에 불응했다. 결국 이세용은 참형되었지만 정범여부는 가려내지 못했다. 이인좌·박필현·이유익(李有翼) 등 정권에서 배제된 유력 가문의 후손들은 1728년(영조 4) 3월 영조에 반대하여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을 추대하며 정국을 주도하고자 정변을 개시하였는데, 여러 지역에서 동조자가 일어나 큰 규모의 병란으로 전환되었다. 박필현(朴弼顯, 金昌集의 妻姪)은 1680년(숙종 4)에 출생하였다. 1723년(경종 3)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임명되었으나 1725년에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으로부터 간신의 아들이라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낙향하였다. 1726년 이인좌(李麟佐)가 상주로 이주했을 때 그와 만나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반란의 뜻을 품었다. 그리고 묵동(墨洞)에 있는 서제(庶弟) 만호(萬戶)의 집에서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및 호남의 한세홍(韓世弘)과 자주 모여 구체적인 거사를 수립하였다. 1727년에 다시 사간원으로부터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종하였으며, 정호(鄭澔)를 참소하여 유배시켰다는 등의 죄목으로 필우(弼禹)·필기(弼夔)·필룡(弼龍)과 함께 4형제 모두 탄핵을 받았다. 1728년(영조 4) 3월 15일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역모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고, 청주에서는 이인좌의 반란군이 충청병사(忠淸兵使) 이봉상(李鳳祥), 청주영장(淸州營將) 남연년(南延年), 군관(軍官) 홍림(洪霖)을 죽이고 청주감영(淸州監營)을 함락하면서 무신란이 발발하였다.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大元帥)라 칭하며 경종의 위패(位牌)를 설치해 조석(朝夕)으로 곡배(曲拜)하는 등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웠다. 3월 24일에 북상하던 이인좌군은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병조판서(兵曹判書)였던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참패했고, 청주성의 신천영(申天永)은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 등에 의해 상당성(上黨城)에서 궤멸되었다. 또 경상도 안음현감(安陰縣監) 정희량군(鄭希亮軍)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지역을 넘어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고 무주(茂朱) 접경까지 진출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박필현은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주모자로 무장(茂長)에 귀양살이 와 있는 그의 종형 박필몽(朴弼夢)과 모반(謀叛)을 의논하고 군사를 일으키고자 태인 현감에 차임(差任)되기를 도모했으며, 부임한 후에는 몰래 담양 부사(潭陽府使) 심유현(沈維賢)과 함께 모의하였다. 정부는 내부자 색출을 위한 친국(親鞫)을 열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반란군이 경기도 양성으로 집결하면서 관군의 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지방 수령 중에 반란군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을 해임하기 시작하였다. 3월 16일에 박필현은 태인 현감에서 해임되었지만 신임현감이 도임하지 않아 아직 머무르고 있었고 3월 17일과 18일 태인 천총(泰仁千摠) 김흡(金潝)에게 청주의 반란군을 토벌할 근왕병(勤王兵: 임금 곁을 호위하는 병사)을 모집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전령을 보내 관내의 병마(兵馬)를 징발하고 관속(官屬)을 단속하여 각 면(面)에 한량(閑良)으로 있던 자들을 별군관(別軍官)으로 삼고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3월 20일 박필현은 태인 읍(邑)의 장터 가장자리에 결진(結陣)하였다가, 이튿날 다시 남루(南樓) 밑으로 진을 옮겼다. ‘국가에 환란(患亂)이 있으니 마땅히 근왕(勤王)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계속 머무르고 있는 형편으로 군사를 동원해 훈련한지 이미 4∼5일이 지난 상태였다.10) 이 시기 박필현은 태인에서 군사 소집과 함께 동조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필몽이 유배된 무장의 현감 김몽좌(金夢佐)는 변란이 일어나자 박필현이 있는 태인에 직접 찾아와 의논을 나누고 돌아갔으며, 전주영장 이경지는 전주에 머무르고 있던 박필몽의 아들 박사관의 집에 가서 모의를 하면서 박필현에게 서찰을 건네고 있었다. 또한 3월 19일에 청주성의 적장이 정돌시에게 서찰을 내어주면서, 전라감영(全羅監營)에 전하도록 하였다.11) 박필현이 군사를 동원해 훈련한지 이미 4∼5일이 지난 상황에서, 마침 금오랑(金吾郞)이 지나가다 관문(官門) 밖 주막을 거쳐 가자 군중(軍中)에서 말을 잘못 전하기를, “태인 현감을 붙잡으러 의금부 도사(都事)가 이르렀다는 소문과 함께 새로 임명된 관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태인의 관군은 동요하고 있었다. 박필현은 관군의 동요를 막기 위해 그날(3월 20일)로 반란군을 토벌한다는 명목 아래 박사관(朴師寬, 박필몽의 아들)을 부장(副將)으로 하고 천총(千摠) 김흡(金洽), 별군관(別軍官) 유방언(劉邦彦), 군관(軍官) 이장욱(李長郁) 등을 불러 청주의 역적이 가짜 의금부 도사를 보낸 것임을 공표하고, 전주(全州)로 진격하였다. 3월 21일 전주로 진격하던 박필현은 김제 금구(金溝)에 이르러 큰길을 버리고 귀산(龜山)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군관(軍官) 이장욱(李長郁)에게 봉서(封書)를 주며 전주진영(全州鎭營)으로 가게 하였다. 이때까지 박필현은 전주진영에서 ‘근왕(勤王)하러 올라간다.’고 하면 반드시 의심치 않고 문을 열어 줄 것이다.12)고 말할 정도로 상황을 낙관적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는 전주에 거주하던 박사관을 매개로 하여 전라감사 정사효, 전주영장 이경지와 내응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21일 밤이 되어 전주 성문 밖에 이른 이장욱이 수문장에게 문을 열도록 하였으나 불응하였고, 전라감사 정사효는 오히려 영장 이경지와 판관 이석인(李錫仁)으로 하여금 성문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13) 결국 태인 군사의 행렬이 삼천(三川)에 이르러 이장욱이 서간을 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게 되면서 전주성과의 내응이 실패하였다. 박필현이 출발에 앞서 군복으로 몸을 감추고 그 어머니에 인견(人見)하니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가히 병조판서(兵曹判書)감이로다. 부디 새 임금을 잘 섬길지어다.”하고 치하했다 한다. 전주성 내응의 실패 원인은 전주 판관 이석인, 전주 좌수 오진형(吳辰亨)이 천총 이주연(李周衍) 등이 정사효, 이경지 등과 박사관의 관계를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오진형은 무신란이 발생하면서 정사효가 전주의 군사를 동원하자, 조성에서 명령이 없는데 단지 영관(營關)에서만 백성을 동원하여 징병하는 것을 옳지 않다며 불응하였다. 이주연은 판관 이석인을 따라 서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박필몽의 아들 박사관이 성문 밖에서 이경지와 밤을 틈타 서로 연락하는 모습을 보고 의심하여 조사하였으며, 박필현의 서찰이 전해지지 못하게 활을 쏘아 이장욱을 쫒아냈다.14) 전주성과의 내응이 실패하면서 태인의 군사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박필현이 청주로 군사를 향하게 하려고 칼을 뽑는 엄포에도 불구하고15), 천총 김흡과 유방언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의 행렬 이탈과 함께 지휘체계가 무너지면서 곧 일반 병사들도 모두 궤주하였다. 박필현은 단지 가속(家屬)·동복(童僕)만을 데리고 말을 몰아 도망해 새벽녘에 건지산(乾止山) 아래에 도착하여 밥을 지어 먹었다. 감영(監營)의 영리(營吏) 김성건(金聲健)이란 자가 박필현이 쉬고 있는 곳을 알고는 감사에게 고하니, 정사효는 좋아하지 않았다. 김성건이 죄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세 번씩이나 들어와 고하자, 정사효가 비로소 영장(營將) 이경지(李慶祉)를 불러 상황을 이야기하니, 이경지는 병을 핑계대어 가서 박필현을 붙잡지 않고 그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다.16) 이후 박필현의 처는 고산(高山)에서 의병 김성제(金聖濟)에게 잡혔다. 이때 박필몽은 무장(茂長)에서 청주의 난이 일어나자 도승지(都承旨)의 하령이라 하고 사칭하여 무장현의 군들을 이끌고 박필현군으로 향하려 했으나 아장(亞將) 김상채(金尙彩)가 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겨우 부하 20여 명을 거느리고 3월 22일 밤 간신히 무장을 출발 다음날 태인에 도착했으나 이미 일이 실패로 돌아간 때였다. 또 부안에서는 김종수(金宗守: 進士), 박창한(朴昌漢: 進士), 고응량(高應良), 성득하(成得夏) 형제가 모집한 병사들도 고부 평교(平橋)에서 이틀을 진을 치고 나주(羅州) 나두동(羅斗冬)의 사위인 진주목사 신후삼(愼後三)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태인과 나주의 군사가 오지 않자 그대로 해산되었다. 박필현은 아들 박사관(朴師寬)과 가속(家屬)들 몇 명만을 거느리고 고산을 거쳐 4월 7일 경상도 상주(尙州)의 촌가(村家)에 숨었는데, 파총(把摠) 박동형(朴東亨)이 그 부자의 관(冠)에 입식(笠飾)한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의심하여 이를 상주(尙州) 영장(營將) 한속(韓㻋)에게 고하였고, 한속이 장교(將校)를 내어 붙잡았다. 한속은 병위(兵威)를 크게 베풀고 박필현을 잡아들이니 박필현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과연 의거(義擧)하였다. 너처럼 용렬한 자가 어찌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을 알겠느냐? 근래에 서북풍(西北風)이 연달아 부니 하늘의 뜻을 볼 수가 있다. 생각건대, 우리의 맹주(盟主) 이사성(李思晟)이 이미 거병하여 서울을 함락하였을 것인데, 일개 영장의 군사가 어떻게 온 나라의 군사를 당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함창 현감(咸昌縣監) 이현도(李顯道)가 자리에 있다가 서로 돌아보고는 실색(失色)하며 군졸로 하여금 결박하게 하여 장차 참하려고 하니, 박필현이 상변(上變)할 일이 있다며 지필(紙筆)을 요구했다. 한속이 아전에게 주라고 명하니, 박필현이 칼(枷)위에다 썼는데, 처음 줄에는 ‘상변서(上變書)’란 세 자를 쓰고, 가운데 행에다 쓰기를, “금일의 사대부(士大夫)는 문관(文官)· 남행(南行) ·무관(武官)·남인(南人)·소북(小北)·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동시에 거의하여 평안 병사 이사성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아 난적(亂賊)을 토멸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려 했다.” 하고, 끝 행에는 ‘박필현(朴弼顯)’이란 세 자를 쓰고, 크게 외치기를, “내가 이미 상변하였으니, 너희 무리가 어찌 감히 나를 마음대로 죽이겠는가? 급히 서울로 올려 보내라.”17) 하였다. 한속이 재촉하여 그 자리에서 아들 사제와 함께 3월 26일 참수(斬首)되어18) 서울에서 효수(梟首)되었다. 필몽 부자는 태인에서 고부로 도망하여 흥덕(興德)을 거쳐 부안의 죽도(竹島)에 피신하여 아들 박사침(朴師沈), 종 명금(鳴金)과 함께 섬 가운데 있는 대숲 속으로 도망쳐 숨어 있다가 무장현 장교(將校) 손익도(孫益道)에 피체(被逮)되어19) 4월 6일 서울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하여 현수(懸首)하고 진중(陣中) 효시(梟示)했고, 필현의 형 필섭(弼燮, 鎭安縣令), 필우(弼禹, 槐山 郡守), 아우 필룡(弼龍), 서재(庶弟), 필충(弼忠), 필호(弼虎)는 물론 동성(同姓) 8촌(寸), 남성(男性) 6촌에 이르기까지 참형(斬刑), 원도유배(遠島流配), 절도위노(絶島爲奴: 종이 되는것) 등의 형(刑)이 내렸다. 이로써 박필현의 형제들이 모두 참형을 당했다. 이밖에 전라관찰사 정사효(鄭思孝), 전 담양부사 심유현(沈維賢), 정읍현감 목중형(睦重衡), 순천부사 박태삼(朴泰三)20), 고산현감 박한량(朴亮漢: 심유현의 외숙), 무장현감 김몽좌(金夢佐), 부안현감 이문표(李文標) 등이 모역죄(謀逆罪)로 참형(斬刑) 혹은 유배되었다. 연루자들이 인정전(仁政殿) 친국(親鞫)에서 밝혀진 흉서(凶書)사건은 박필현이 방문(榜文)을 작성하여 감산면(甘山面) 사람 송하(宋賀)의 오촌조카[五寸姪]가 썼고, 전주(全州) 방문(榜文)은 송하(宋夏)21)가, 남원(南原) 방문(榜文)은 경상도 거창(居昌)의 정탁(鄭倬)이란 사람이 붙였다. 그리고 거사의 재정비용은 나주(羅州)의 나만치(羅晩致, 一名 元禮), 만서(晩瑞, 進士), 만규(晩揆) 등 세 형제가 부담하였는데 만서의 아들 숭곤(崇坤)이 이인좌의 매부(妹夫)였다. 담양부(潭陽府)의 화약고(火藥庫) 실화사건(失火事件)은 부사 심유현이 반란의 준비를 위하여 화약 16봉(封)을 서울의 포도대장 남태징(南泰徵)과 이유익(李有翼)에게 빼내고 허위로 상계(上啓)한 것이었다. 외방기병(外方起兵)과 경중내응(京中內應)이라는 무신란의 계획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한 전라지역에서 군사행동이 실패한 원인은 전라도 무신란이 관군 동원의 형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충청도의 이인좌․경상도의 정희량 같은 이들은 향촌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일반민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필현은 지방관리로 수령 휘하의 군사권은 치안유지권 정도이고 속오군(束伍軍)의 징병 등은 향소(鄕所)를 통해 영장(營將)에게 권한이 귀속되어 있었으며, 감영(監營) 등의 아병(牙兵) 등도 각 고을의 장교 등을 통해 감영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22) 박필현은 군사권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박필현의 군사통제권은 겨우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로 그가 5일 동안 소집한 군사도 8초(哨)23)정도에 머물렀다. 한편 고부에서의 반란군의 모임이 그대로 해산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경종 독살설과 영조의 적통성에 대한 문제는 일반민들에게 별다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4) 난후 조정에서는 안음현(安陰縣: 뒤에 安義縣)은 폐현(廢縣)시켰으나 태인현은 아무런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한편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숙빈 최씨의 고향은 전라도 태인(泰仁)으로,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태인 현감 박필현(朴弼顯)도 가담하여 태인현이 폐현될 위기에 처했으나, 영조가 어머니의 고향이라 하여 관대히 넘어갔다고 한다. 또한 숙빈 최씨의 이름은 ‘복순’이며 어려서 가족이 전염병으로 모두 죽고 고아가 되었는데, 나주목사(羅州牧使) 일행을 만나 목사(牧使)의 부인이자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척인 민씨가 거두었으므로, 훗날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가 궁인이 되었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영조 임금의 생모가 태인 최사령의 딸 최숙빈이어서 관대히 봐준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아 받아들이기 어렵다.25) 박필현은 180년 지난 1908년(순종 1) 3월 25일에 복관되었다.26) 무신란(戊申亂)은 당시 영조와 집권 노론층의 패쇄적 인사정책과 정치보복의 강화, 형정·민정의 실패에 따라서 발생한 사족층(士族層)·잔반(殘班)·향임층(鄕任層)·하층민(下層民)의 연대투쟁이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 이후의 결속력 약화, 경중세력(京中勢力)의 취약성, 지도세력 부재와 이중거사계획의 판단착오, 주도층의 오판, 분리적 탈퇴 등으로 실패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1727년 정미환국으로 재기용되었던 완소(緩少, 온건파 소론) 계열이 약화되었고, 노론은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무신란의 발생 원인을 노론 세력만으로 구성했던 폐쇄적 인사정책 때문인 것으로 보고, 노론강경파보다는 노(小)·소(老)간의 조정과 병용책을 주장한 노론 온건파 중심의 탕평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영조 즉위 초부터 주창되어온 탕평책의 실시는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 1) ‘○竝全羅道泰山ㆍ仁義爲泰仁縣、咸豐ㆍ牟平爲咸平縣、龍安ㆍ咸悅爲安悅縣’, 『朝鮮王朝實錄』 太宗 17卷, 9年(1409 己丑 / 명 영락(永樂) 7年) 1月 18日(辛酉) 6번 째 기사, 전라도의 여러 고을을 합하여 태인현·함평현·안열현으로 만들다.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3장 B면, 【영인본】 1책 471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국역 조선왕조실록』 전라도 태산(泰山)과 인의(仁義)를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으로 만들고, 함풍(咸豐)과 모평(牟平)을 합하여 함평현(咸平縣)으로 만들고, 용안(龍安)과 함열(咸悅)을 합하여 안열현(安悅縣)으로 만들었다. 2) 이정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궁실조 「객관」(한국고전변역원, 1969), 506. 3) 『정읍시사』 상권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46~47 4) 이정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궁실조 「객관」(한국고전변역원, 1969), 507. 5) 호구총수(戶口總數)』(1789, 정조 13) 6) 『井邑市史』 상권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393~394.
7) [역사] 예전에, 정남(丁男)에게 부과되던 역(役)의 하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각종 공사 등에 백성의 노동력을 대가 없이 썼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8) 조선시대 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을 일컫는 말. 넓은 의미에서는 흔히 양반을 가리킨다. 브리테니커.
9) ○諫院…, 近來扶安邊山, 賊徒多竊據。 白晝設帳幕, 大行侵掠, 而邊山有大刹, 賊徒招寺僧言曰: ‘三冬不可外處, 汝等姑爲借寺。’ 僧徒畏怯, 莫敢誰何, 皆涕泣散去。…, 而全州營將全舜元, …上命罷職。 又請扶安近邑倅, 以武臣擇差。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英祖 13卷, 3年(1727 丁未 / 청 옹정(雍正) 5年) 10月 20日(壬寅) 11번째 기사
10) 『영조실록』 권17, 4년 3월 25일(을해).
11) 앞의 책, 4년 4월 4일(정해).
12) 『영조실록』 권16, 4년 3월 25일(을해).
13) 앞의 책, 4년 3월 25일(을해).
14) 한편 무신란이 발생한 2년 뒤에, 경술년 저주 사건으로 심문을 받던 박도창(朴道昌)은 무신란의 실패 원인에 대해 정사효를 지목했다. 즉 전라감사 정사효는 마치 알지 못했던 것처럼 행동하면서 자기가 박필현과 서로 내통한 일을 미리 수문장에게 알려 주었더라면 일이 성사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윤선,「영조 6년(경술년)모반 사건의 내용과 그 성격」,『조선시대사학보』42, 2007, 226. 재인용.
15) 『영조실록』 권17, 4년 4월 1일(신사).
16) ‘○泰仁縣監朴弼顯擧兵叛, 到全州 三川, 軍潰走。 弼顯陰鷙凶悖, 與逆鏡, 結爲死生之交。 及其伏法, 深懷怨國之心, 交結嶺南失志之輩, 詬天罵日, 潛圖不軌。 時, 其從兄弼夢竄茂長, 欲與同議擧兵, 圖差泰仁, 赴任之後, 密與潭陽府使沈維賢, 合謀。 淸州變出後十九日, 稱以勤王, 調發境內兵馬, 團束官屬, 三日操練, 陣于官門。 弼顯以戎服, 入見其母, 母曰: “吾兒之象, 可作兵曹判書, 善事新君也。” 動兵後, 欲待弼夢之來, 推爲大將, 因向京師, 而弼夢不至。 適過去金吾郞, 歷官門外酒幕, 軍中訛言以爲, 拿來都事至矣。 轉相煽動, 軍情大擾。 弼顯慮軍潰, 卽日離發由金山寺嶺, 夜到全州 三川。 監司鄭思孝, 亦與弼顯同謀, 約日興兵, 而性本狡黠, 知朝廷有備, 欲爲觀望之計, 閉門不納。 千摠知事不濟, 鳴金退軍, 軍兵一時驚潰。 弼顯只與家屬、僮僕, 拍馬而走, 黎明到乾止山下, 炊飯而食。 監營營吏金聲健者, 知弼顯休憩處, 告于監司, 思孝不肯。 聲健恐罪及己, 三入而告, 思孝始招營將李慶祉言狀, 慶祉托病不肯往捕弼顯, 任其逸去’, 『朝鮮王朝實錄』 英祖 16卷, 4年(1728 戊申 / 청 옹정(雍正) 6年) 3月 25日(乙亥) 4번째 기사, 박필현이 반란을 꾀하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26장 B면, 【영인본】 42책 26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17) ‘○慶尙道 尙州鎭, 捕斬亡命賊朴弼顯。 弼顯與其子師濟, 亡命匿尙州村裏, 把摠李東亨(朴東亨)見其父子冠, 有笠飾痕, 疑之, 告于營將韓㻋, 㻋發將校捕捉。 弼顯旣見捉, 㻋大陳兵威, 拿入弼顯, 弼顯瞋目大
叱曰: “吾果擧義。 汝以庸夫, 何知天意人事乎? 近來西北風連吹, 天意可見。 吾之盟主李思晟想已擧兵陷京, 一營將之兵, 何以當擧國之衆乎?” 時, 咸昌縣監李顯道在座, 相顧失色, 令軍卒結縛, 將斬之, 弼顯稱以上變, 索紙筆。 㻋命吏與之, 弼顯乃於枷上書之, 初行書上變書三字, 中行書曰: “今日士大夫, 毋論文、南、武、南人、小北、少論, 同時擧義, 以平安兵使李思晟, 推爲盟主, 討亂賊安宗社。” 末行以朴弼顯三字書之, 大喝曰: “吾旣上變, 汝輩何敢擅殺? 急送京師。” 㻋促令行刑, 懸其父子首級於旗竿, 以變書報監司, 以聞于朝’, 『朝鮮王朝實錄』 英祖 16卷, 4年(1728 戊申 / 청 옹정(雍正) 6年) 3月 26日(丙子) 13번째 기사, 박필현을 잡아 참하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34장 A면, 【영인본】 42책 30면,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18) 『영조실록』권16, 4년 3월 26일(병자).
19) 『영조실록』권16, 4년 3월 29일(기묘).
20) 필몽에게 서간을 전하러 가던 아리(衙吏)가 박필현을 만나 자가 말[馬]을 바꾸어 주었다 해서 유배되었다.
21) 12세에 황산사(黃山寺?)에 들어가 수도하여 세칭 요술지사(妖術之士)로 알려졌다.
22) 이종범,「1728년 무신란의 성격」, 『조선 후기 민중 사회의 성장』한국사36, 국사편찬위원회, 1997, 209.
23) 예전의 군대 편제의 하나, 약 백 명으로 한초를 이룸.
24) 유한선, “영조4년 戊申亂과 전라도 의병-『湖南節義錄』분석을 중심으로-” (2010. 1.), 1~11.
25) 하태규, “고려․조선시대 정읍의 역사”, 『정읍(井邑)』(국립전주박물관․정읍시, 2006), 196~197.
26) ‘內閣總理大臣李完用、法部大臣趙重應以 “欽奉上年十一月十八日詔勅, 罪籍中有罪名者蕩滌案經議後, 開錄【李東讓、…、朴弼顯、…、沈維賢、…、朴弼禹、…、鄭思孝、…、朴弼龍、朴弼虎, 已上合一百五十三名】 上奏。” 允之。’. 純宗 2卷, 1年(1908 戊申 / 대한 융희(隆熙) 2年) 3月 25日(陽曆) 4번째 기사, 이동양 등 153명의 죄명을 벗겨 주다. 【원본】 3책 2권 9장 B면, 【영인본】 3책 511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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