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성씨와 인물(삶의 주체)/태인의 인물

자선사업에 힘쓴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증보 태인지 2020. 7. 20. 09:52

자선사업에 힘쓴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박잉걸 선생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자는 여웅(汝雄), 호는 모은(慕隱)이니 뒤에 이름을 종원(宗元)으로 개명하였으며 1676(肅宗 2)에 만엽(萬葉)의 아들로 현재의 칠보면 백암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학업을 닦아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여 학문이 심오하였으며 또 부모에 대한 효도가 지극했을 뿐 아니라 선영을 위하는 정성이 남달리 돈독했다.

부모의 산소 명당을 구하기 위하여 칠보산(七寶山)에 들어가 산신에 백일기도를 올렸다. 목욕재계하고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 예로부터 산중의 왕으로 일컬은 영물인 이 호랑이는 은근히 옆으로 다가와 선생의 옷자락을 물어 당기는 것이었다. 호랑이의 뜻을 알아챈 모은(慕隱) 선생은 호랑이를 따라 한참 산속을 헤져 나갔다. 태자봉(太子峯)의 서쪽 어느 지점에 다다른 호랑이는 걸음을 멈추고 땅을 파 헤쳤다. 어찌된 일인지 땅속에서는 가죽이 벗겨 진 짐승이 한 마리 나왔다. 그리고 호랑이는 어느새 간 곳이 없이 사라졌다. 정신을 가다듬은 선생은 이곳이야말로 산신이 정해주는 명당이라 믿고 선친의 유해를 안장했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 싸리재(杻峴: 칠보면)의 모은 선생의 부친묘소이다. 선생은 효행으로 명정(命旌)이 내리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 中樞府事)의 직을 제수했다.

만년에는 자선사업으로 그 덕성(德聲)이 더욱 떨치게 되었다. 험한 고갯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 행려(行旅)에 덕을 쌓았고 굶주리는 사람들에 밥과 옷을 주었으며 또 태인 고을의 육방(六房)에 많은 토지를 바쳐 아리(衙吏)들로 하여금 민폐를 없애게 했다.

기록으로는 전하는바 없으나 이렇게 많은 자선을 베풀게 된 동기의 일화가 있다.

선생은 나이 70에 이르러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몸통에 비늘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근의 이름 있는 명의를 불러 약을 썼으나 이렇다 할 효험이 없었다.

1745(英祖 21) 초가을이었다.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 진상굴(山內面 梅竹里 中里)을 찾아 가느라 말을 타고 굴치재(屈峙峙: 七寶山內菱橋)를 한참 오르고 있었다. 백암리(白岩里)에서 진상굴로 가는 길이 두 갈래 있으니 하나는 행단(杏壇)을 거쳐 구절치(九節峙)를 넘는 길이요, 하나는 반곡(盤谷) 골짜기로 하여 굴치(屈峙)를 넘는 길이었다. 선생은 고개 중턱에 이르러 여느 때와 같이 한참 쉬고 있었는데 때마침 재에서 백발노승이 내려오고 있었다. 노승과 맞부딪치게 된 선생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그야말로 선옹(仙翁)과 같은 노승에게서 일찍이 사람을 대할 때 느낀 적이 없는 화기를 느꼈다. 필시 도를 깨우친 도승이로구나!’ 스스로 느끼는 순간 이때 도승 역시 모은 선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도승이 입을 열어 선생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감 신액(身厄)을 너무 걱정 마시오.”

모은 선생도 이 말을 듣고 도승에게 말했다.

도승은 좋은 비방을 이 사람에게 일러 주시오.”

중생에 적전을 하시오. 우선 이 험한 길을 닦으시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잿길을 내려갔다. 그 후 도승을 다시 만나 볼일이 없었다. 모은 선생은 깨달았다. 이것이 산신령의 계시라고 지성이면 감천이라 가던 길을 되돌아서서 백암리(白岩里)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로부터 중생을 건지는 자선사업을 하게 되었다.

1745(英祖 21) 가을 선생은 추수를 마치고 먼저 구절치 잿길을 닦았다. 지금 구절치 잿마루에는 불망비(不忘碑)가 서있다.

통훈대부 박공잉걸치도선시불망비(通訓大夫 朴公仍傑治道善施不忘碑) 乾隆十年(英祖211745) 乙丑冬

또 다음해 이른 봄에는 구절치 재의 길을 닦았다. 구절치재의 공사는 1746(英祖 22)에 있었고 20년이 지나서 또 1767(英祖 43) 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도 당시의 공사흔적이 곳곳에서 눈에 뜨인다. 현재 굴치재 중간쯤 올라가서 왼쪽 암벽에는 태인현(泰仁縣)에서 새긴 치도비(治道碑)와 수도비(修道碑) 기록이 있다.

 

칠보 구절치 불망비

 

사인(士人) 박공(朴公) 잉걸수도비(仍傑修道碑) 영조사십삼정해삼월(英祖四十參丁亥三月)(1767) 태인현(泰仁縣) ()”

모은(慕隱) 박공(朴公) 잉걸수도비(仍傑修道碑) 영조이십삼병인삼월(英祖二十參丙寅三月)(1746)”

그리고 태인의 대각교(大脚橋) 다리를 놓았다.(年代未詳) 대각교는 원래 태거교(泰居橋: 新增東國輿地勝覽)로 태인 남천(南川: 泰仁川)에 있으니 전주감영에서 남도(南道)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매년 여름철에 홍수가 한번 지나가면 태거교 다리는 떠내려가 행인의 불편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인 고을에서는 태거교를 관리하는 문제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선생은 태거교를 석주(石柱)로 교각(橋脚)을 바쳐 장대석(長大石)으로 큰 다리를 놓으니 아무리 홍수가 나도 다리는 완전했다. 이런 연류로 대각교란 이름은 큰 다리[大脚]라는 뜻으로 통칭하여 대각교라 불려졌다.

또 태인현아(泰仁縣衙)로 들어가는 유각교(留脚橋: 泰仁初等學校 入口)라는 석교(石橋)도 가설했다.

모은 선생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옷을 주었으니 그 덕성(德聲)은 더욱 떨쳤다. 정읍에서 칠보로 가는 길가에 백암초등학교에 이르니 이곳을 속칭 걸치기라 일컬어 온다. 선생은 매년 춘궁기가 되면 대문을 열어 놓고 없는 사람들에게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제공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길가에 막()을 치고 거기에다 옷과 신발을 걸어 놓고 가난한 사람이면 언제 누구든지 가져다 입고 신을 수 있도록 항상 걸어 놓으니 가난한 사람들은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바꾸어 신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걸치기(傑置岐)라 하여 지금까지 불러 오고 있는 것이다. 1986년 이곳에 모은 박동잉걸선생유적비(朴公仍傑先生遺蹟碑)가 세워졌다. 또 모은 선생은 석탄사(石灘寺)를 중건했다. 석탄사(七寶面 盤谷里)는 임진정유의 난에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는데 150여년을 지나서 이를 중건하였다.

모은 선생의 졸년(卒年)이 그 족보에도 기재외어 있지 않아 향수(享壽)를 헤아릴 수 없으나 굴치(屈峙)의 수도비(修道碑)는 역년(曆年)으로 헤아린다면 1676(肅宗 2) 출생이니 90 상수(上壽)를 누린 것으로 추측된다. 모은 선생은 당세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후세에 또한 많은 화제로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죽은 후 전설 같은 이야기 한토막이 전해오는데 선생은 죽은 후에 중국의 황태자(皇太子)로 태어났다 한다.

어느 황태자가 탄생한지 반년이 되도록 왼손의 손바닥을 펴지 않고 쥐고 있었다. 이상히 여겨 강제로 손을 펴 보니 손바닥에 조선 박잉걸 환생(朝鮮 朴仍傑 還生)’ 일곱 자가 역력히 쓰여 있었다 한다.

묘는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칠보산 선영하 갑좌(井邑市 七寶面 水淸里 七寶山 先塋下 甲坐)에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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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고장 傳統文化』 (정읍군청공보실, 1983. 11. 9.), 111~113.

   崔玄植, 新編 井州井邑 人物誌(1983. 10. 8.), 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