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방(湖南地方)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 일재(一齋) 이항(李恒)1) 1499(燕山君 5)~1576년(선조 9)
선생은 성주이씨(聖州李氏)로 자(字)는 항지(恒之), 호(號)는 일재(一齋) 또는 수일재(守一齋), 시호(詩號)는 문경(文敬)이다. 성주이씨는 고려 말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명문거족으로 이항은 이조년의 7대손이다. 1499년(燕山君 5)에 서울 신혼동(晨昏洞)에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인 아버지 이자영(李自英)과 소경전 참봉(昭敬殿 參奉 )인 최인우(崔仁遇)의 딸로 어머니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했다. 영월 신씨(辛氏: 辛伯粹의 女)와 혼인하였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친구들과 놀기를 즐겨하였으며 품성이 강직하고 호탕하며 날램과 용맹(勇猛)이 뛰어나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를 익혀 장차 무관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1526년(中宗 21) 백부 판서공(判書公) 이자견(李自堅)의 가르침에 스스로를 깨달아 학문에 뜻을 정하고 28세에 사서(四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527년에는 도봉산(道峰山) 망월암(望月庵)으로 들어가 학문탐구(學問探究)에 전력했다. 학문은 잠심력행(潛心力行)으로 구도하는데 그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잠심구도(潛心求道)를 위하여 전후좌우에 칼을 꽂아놓고 일사불란의 정신자세로 심신과 학문을 수련했다 한다. 선생은 반궁성의(反躬誠意)를 입덕(入德)의 근본으로 삼고 주경궁리(主敬窮理)를 수덕(修德)의 방법으로 삼았으며 항상 사서, 특히 『대학(大學)』을 평생사업으로 삼아 전일(專一) 두 글자에 주안을 두고 이 책을 통해 염약(斂約)의 공부에 힘썼다.2)
도봉산에서 10여 년 동안 혈심(血心)의 수업을 계속하다가 뜻한바 있어 1538년(中宗 33) 선생이 4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태인(泰仁) 분동(粉洞)으로 내려가,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며 김하서(金河西, 名 麟厚), 박송당(朴松堂, 名 英)을 찾아 종유(從遊)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장성(長城) 필암(筆巖, 現 長城郡 皇龍面)에서 출생하였으니 나이로 말하면 일재 선생 보다 11년이 낮았다. 장성(長城) 필암(筆巖)으로 김하서를 찾아 갔을 때의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지금도 그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재와 하서의 사이는 유달리 가까웠던 것이니 하서의 큰아들 종룡(從龍)이 일재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송당(松堂) 박 영(朴 英, 1471~1540)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니 경상도 선산(慶尙道 善山)에서 출생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자로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무예로 당세에 이름을 떨쳐 북방의 여진(女眞) 정벌에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 벼슬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선생은 선산까지 도보로 걸어서 찾아가 얼마동안을 지내다가 돌아왔으니 뜻이 서로 통하는바 있었던 것이다.
1539년 41세에 칠보산(七寶山, 분동 동쪽 약 10里)의 중턱에 자그마한 서재(書齋)를 세우고 이곳을 강학소(講學所)로 하였으며 일(一)자의 재액(齎額)을 붙이니 학자들이 이곳을 일재(一齋)라 일컫고 선생의 호로 호칭하게 되었으며 또는 수일재(守一齋)라고도 일컬었다. 일(一)자는 선생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학문의 철학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수일재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도 덕일(德一), 수일(守一)이라고 일(一)자를 붙여 불었던 것이다. 사정전(思政殿)의 명종대왕(明宗大王) 어전(御前)에서 선생은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에 근원하고 인심은 형기(形氣)에서 생(生)하는 까닭에 두 가지를 자세히 살핀다면 하나이니 하나를 지키는 것이 근본이다. (道心源於性命人心生於形氣故二者之間精察一守是爲允執其中也)’라고 하였다.
선생의 문명(文名)은 날로 떨쳐 원근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다. 이 무렵 1543년(中宗 38) 45세 되던 7월에 전라관찰사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칠보산으로 선생을 찾아왔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의 벼슬에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파에 밀려 귀양살이를 한 적도 있으며 다시 소환되어 병, 예조(兵, 禮曺)의 참판(參判)을 역임하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있다가 1543년 3월 전라감사(全羅監司)로 부임한 성리학자 이기도 한 인물이다. 선생의 문명(文名)을 전해들은 송감사는 부임한지 넉 달째인 7월 어느 날 칠보산 골짜기로 일재 선생을 예방한 것이다. 송감사는 일재선생 보다도 10여세의 연상이었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의 강론을 들은 송감사는 공무(公務)에 얽매어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돌아 갈 줄을 몰랐다. 그 오묘한 강론에 감탄하며 ‘선생의 학문은 장횡거(張橫渠, 名 載, 宋나라의 性理學者)에 지지 않는다.’하고 공경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세의 명유(名儒)로 성리학의 대가인 영남의 이언적(李彦迪, 光海 2 文廟配享)과 일재(一齋)선생을 운봉(雲峰)으로 초대하여 수일동안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영남의 이언적과 호남의 이 항(李 恒)선생을 견주어 보려는 속셈이었으리라. 전라관찰사 송인수는 일재선생을 호남의 인물로 조정에 천거했던 것이다.
1547년(明宗 2) 49세 때 보림정사(寶林精舍: 一齋書堂)를 고쳤고 태인 현감(泰仁縣監) 신 잠(申 潛)도 자주 찾아와 학문을 강론했으니 신잠 현감이 사학(四學)을 세우고 유학(儒學)을 진흥시킨 것은 일재선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관찰사와 현감은 오는 사람마다 선생을 찾아와 학문을 강론을 받았던 것이다.
1555년(明宗 10) 57세에는 수제자였던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이 19세에 나주에서 선생을 찾아올 때 그의 외조모가 멀리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김천일은 굳이 이항에게 배우려 했다는 일화는 선생의 학문적 명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1559년(明宗 14)인 61세에 당세의 명유석학(名儒碩學)으로 알려져 있는 김하서(金河西, 名 麟厚), 기고봉(奇高峰, 名 大升), 허초당(許草堂, 名 曄), 노소재(盧蘇齎, 名 守愼)와 종유하여 서로 왕래하며 기고봉과는 성리학의 태극설인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을 가지고 논쟁을 했고, 김하서와는 도기지분(道器之分)인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이르기까지 천인이기(天人理棄)의 학문을 강론했다. 송인수․이언적․기대승․김인후․노수신 등과 교육하며 학문을 가다듬은 이 시절은 이항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1560년(明宗 15) 62세 되던 정월에 기고봉과 다시 논쟁을 했고 이황에게 중재를 구했다.
1561년(명종 16)에는 노수신(盧守愼)에게 나정암(羅整庵)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너무 믿지 말라고 편지를 보냈다. 1562년에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나정암설을 가지고 논쟁했다.3)
이퇴계(李退溪)는 일재선생을 가리켜 호남 성리학의 비조(鼻祖)라 하였고 장유(張維, 號 溪谷, 인조 때의 名臣)는 ‘호남에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이 나옴으로써 비로소 문명의 고장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하였다. 선조(宣祖)때의 문신 허 엽(許 曄, 號 草堂)은 일찍이 명(明)나라의 서울 연경(燕京)에 갔을 때 조선에 현인군자(賢人君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고 묻자 이황(李滉, 號 退溪)과 이항(李恒)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인조(仁祖) 때의 문신 안방준(安邦俊)은 김하서(金河西), 이일재(李一齋), 기고봉(奇高峰)을 견주어 말했다. 김하서는 학문과 조행(操行)으로, 기고봉은 이론이 명쾌하기로, 또 이일재는 강의불굴(剛毅不屈)이 그 특징이라고 인물을 평했던 것이다.
1566년(明宗 21) 5월 명종대왕(明宗大王)은 국내에서 경명행수(經明行修: 經書에 밝고 행실이 어진 學者)로 고명한 학자를 천거(薦擧)하라고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에 명령하니 이 때 천거된 인물은 이항, 전 참봉(前 參奉) 성 운(成 運), 전 별좌(前 別座) 한 수(韓 脩), 전 참봉(前 參奉) 남언경(南彦經), 전 참봉 임 훈(林 薰), 진사(進士) 김 범(金 範) 등 6인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모두 종6품(六品)의 직첩(職牒)을 내리고 9월에 네 사람에게 관직이 내렸으니, 장원(掌苑)에 한 수,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에 이 항, 지평현감(砥平縣監)에 남언경,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임훈을 각각 제수하고 명종대왕은 이들을 사정전(思政殿)에 초치하여 치국지도(治國之道)와 학문의 방법에 대하여 물었다. 그리고 선생은 의영고령(義盈庫令)에 승진시키고 10월에는 임천군수(林川郡守, 忠淸道)를 제수하고 특히 이엄(耳掩, 官服을 입을 때, 사모 밑에 쓰던 毛皮로 된 防寒具)을 하사했다.
1567년((宣祖 1) 70세되던 5월 신병으로 임천에서 사직하고 집에 돌아오니 조정에서 어의(御醫)를 보내어 시료하고 의빈경력(義賓經歷)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사옹원정(司饔院正)의 벼슬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신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1568년에 동곡(桐谷) 이조(李晁: 남명의 문인, 1530~1580)가 신은(新恩) 내알하였다.
1569년에 퇴계가 물러나기를 청하는 걸퇴(乞退箚)의 차자(子)에서 이항의 출처(出處)를 논하였다.
1572년에 고봉이 다녀갔고 1573년 75세에 왕이 불렀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1574년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사은소(謝恩疏)를 올려 사양하였고 7월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75년 9월 노령으로 병세가 위중하자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가 조정에 상주(上奏)하니 선조(宣祖)가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1576년(宣祖 9년) 6월 22일 태인 분동에서 서거하니 향년 77세였다. 조정에서는 전라관찰사에 명하여 8월에 칠보산 북쪽기슭의 아직동(娥織洞) 경좌원(庚坐原)에 후히 예장케 했다.
1577년(宣祖 10년, 丁丑) 5월 노수신의 묘갈명(墓碣銘)을 받았고 유림들의 발의로 칠보산 아래에 사당(祠堂: 北面 寶林里 笠店)을 세웠으며 1673년 8월 5세손 구암(龜菴) 이성익(李星益)이 유고를 수습하여 참판 이준구(李俊耈)가 간행하였다. 1684년 김하서(金河西)가 문묘(文廟)에 배향되자 일재(一齋)선생도 동시에 배향할 것을 영남의 유림들이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바 1685년(肅宗 11) 4월 남고서원(南皐書院)의 사액을 내리고 예조좌랑(禮曹佐郎)을 보내어 제사했다. 그리고 김천일(金千鎰)을 배향했다. 1749년 3월에 태인 분동에 유허비(유숙기(俞肅基) 찬(撰))를 세웠다. 1759년 속록이 완성되었고 1796년 이조참의겸성균관제주(吏曹參議兼成均館祭酒)에 추증되었다. 1854년 자헌대부이조참판서겸지의금부사(資憲大夫吏曹參判書兼知義禁府事)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추증되었다. 1865년(高宗 2, 乙丑) 문경(文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1884년(高宗 21, 甲申) 2월에 이르러 호남5선생(湖南五先生)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성균관(成均館)에서 건의했다. 5선생(五先生)은 일재(一齋) 이항(李恒), 미암(尾岩) 유희춘(柳希春: 金河西의 婿), 옥계(玉溪) 노진(盧禛), 사암(思庵) 박순(朴淳),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건의했으니 처음은 소수(疏首: 代表) 백몽수(白夢洙)를 비롯하여 8도의 유생들이요. 두 번째는 소수(疏首) 이계호(李啓鎬) 제소(製疏: 疏文作成者) 김학재(金學載: 鰲峰의 후손)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5선생은 모두 명․선(明․宣)조의 인물들로 이 가운데 이일재(李一齋), 유미암(柳尾岩), 노소재(盧蘇齎), 기고봉(奇高峰)은 교의가 두터웠던 것이다.
1887년에 속편을 완성하고 1868년(高宗 5, 戊辰) 조정에 의하여 훼철된 후 설단향사 해오다가 1898년(高宗光武 2, 戊戌) 유림들의 발의로 유허에 강수재(講修齎)를 세우고 매당(梅堂) 김점(金站)과 율정(栗亭) 김복억(金福億), 용암(龍巖) 김승서(金承緖)를 추배하고 1913년(癸丑)에 梅軒 소(蘇)선생을 추배했다.
이항이 이이(李珥)처럼 그 시대의 문제를 집대성한 것은 아니다. 이미 살펴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학문적 입장은 완결적․체계적이라기보다 자득적인 통찰에 근거한 문제 발견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이항의 세계 또는 인간관이 국부적 인식에 머물렀다는 것은 아니다. 다소 결과론적인 설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경향은 16세기 사림의 일반적인 성격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16세기 사림들은 다양한 학문경향을 섭취하고 한편으로 독자적인 이론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선사상사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항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제의식에 비교적 충실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청년시절 유협(遊俠)이라는 말을 들으며 보냈지만, 장년(長年) 이후에는 성실히 공부하여 나름의 사상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환은 권신(權臣)과 훈신(勳臣: 공신)이 정치를 혼탁하게 이끌어가는 상황에서 발생한 을묘(乙卯)․을사년(乙巳年)의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체득한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항이란 인물 자체가 시대의 산물이었다.
사서(四書)를 중시하는 그의 학문경향은 곧 당시 사림들이 지향했던 성리학과 일치하였고 사림정치의 정착과 그의 정치경력이 정확히 일치하는 점에서 그는 일반적인 사림의 반열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사상은 다소 성글기는 하지만 조선성리학을 완성하는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4)
학문적으로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실질적인 조종(祖宗), 퇴계 이황과 더불어 한국 성리학의 양대 산맥, 호남 유학/성리학의 조종/비조 등으로 평가되고, 호남 사림을 창도하였다.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는 먼저 이황․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의 사상적 기본 토대를 제공한 점,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낳게 한 중요한 사상적 동기를 제공했다는 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호남가단’의 문학적 전통 속에 ‘호남가단(湖南歌壇)’의 시가 전통 속에다가 어떤 이념적․사상적 깊이와 폭을 더해줌으로써, 이후 호남가단의 문학적 전통이 이념적․사상적으로 좀 더 수준 높은 지평으로 상승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호남지역의 정치 세력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다. 이것은 일재의 서원에 배향하기 위한 상소, 순국, 효행, 학행 등으로 인한 일재의 제자들의 사우 배향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일재 및 그의 문인 제자들이 서원․사우에 배향됨으로써 사회적으로는 일재의 사림이 호남지역의 도덕적 이념의 중심을 형성하게 되었다.
교육적으로는 일재와 그의 제자들이 호남지역의 서원․사우들을 크게 점유함으로써 호남지역의 교육적 정체성 및 지향성의 기반이 되었다.5)
1866년(高宗 5) 서원 철폐령(撤廢令)으로 남고서원(南皐書院)이 헐리우게 되었는데 이해 3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변이 일어났다. 어느 날 서원의 고목(古木)위에는 난데없이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있었다. 마을 안이 발칵 뒤집혔으며 마을 사람들은 얼씬은 못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이 호랑이는 나무에서 내려와 한번 웅크리고는 펄쩍 뛰더니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불길한 조짐이라고 수군댔다. 그런데 이날 조정에서 남고서원(南皐書院)을 철훼하라는 영을 받고 관리가 마을에 내려왔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또한 일재선생의 도덕으로 산군(山君)이 감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1803년(仁祖 3, 癸亥) 일재(一齋) 선생의 본관(本貫)인 경상도(慶尙道) 성주(星州)의 안산서원(安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칠보산의 일재서당은 근세에 와서 불자(佛子)의 수도처가 되어 보림사(寶林寺)가 되었다. 지금 보림사에는 근래에 세운 불전인 극락전(極樂殿)이 있고 대하(臺下)에 요사(寮舍)가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일재서당의 유물(遺物)이 아닌가 한다.
이항은 이기(理氣)를 논함에 이(理)와 기(氣),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일체라고 하는 ‘이기일체설(理氣一體說, 理氣一物說, 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저술로는 『유집(遺集: 一齋集)』1권만이 전할 뿐이지만 선생의 뛰어남은 독실한 실천에 있었다.
『문인록』에 의하면 급문제현(及門諸賢)이 42명에 달했는데 김천일(金千鎰)과 김제민(金霽閔), 황진(黃 進), 변사정(邊士貞),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은 학행이 뛰어나고 왜란 때 관군 또는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백광홍(白光弘)은 시문으로 큰 이름을 남겼다.
일재가 후학들에게 열심히 배워 도를 얻도록 노력하라는 가르침은 다음 두시에 잘 나타나 있다.
先生嘗作歌 講業之暇 使諸生歌之 以爲勤勉與起之資
歌曰
誰云泰山高
自是天下山
登登復登登
自可到上頭
人旣不自登
每言泰山高
(선생이 일찍이 노래를 지어 학문을 강습하고 남은 겨를에 틈틈이 제자들에게 학문 의용을 고취시키고 힘써 권장하려는 자료로 이 노래 부르게 하였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이 ‘태산가’가 일재 이항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 근거는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이 1747년에 쓴 『고가신번이십구장(古歌新飜二十九章)』에 한문으로 싣고 일재가 지은 노래로 전해진다고 했고, 남고서원의 주련(柱聯)에도 한시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 1759년 추간한 『일재선생집속록(一齋先生集續錄)』‘유사(遺事)’에 실려 전한다. 이 시의 주제는 ‘학문하는 사람이 수행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는 뜻이고, 똑같은 주제로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었다.
시김군영정(示金君永貞)
욕관홍수수창해(欲觀洪水須滄海)
여견명구상태산(如見名區上泰山)
대장불위폐승흑(大匠不爲廢繩黑)
통명성학량비난(通明聖學諒非難)
홍수를 보고자 하면 모름지기 창해가 필요하고, 이름난 곳을 볼 것 같으면 태산에 올라가야지. 이름난 장인은 먹줄을 놓지 아니하는 법, 성학(聖學)을 통하여 밝히는 일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네.
일재 선생은 제자들에게 『대학』을 위주로 공부하기를 권하였는데, 대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면 도의 요체에 접근하고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선생의 학문을 권면하는 정신이 「태산가」와 「시김군영정」에 잘 담겨있다.
일재 이항은 조선 성리학의 발달과 임진왜란 극복에 큰 영향을 끼친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대학자였다.(이상섭)6)
일재 이항 관련 문집의 발간 사항
서 명 |
간행자 |
간행년 |
판 종 |
책 권 |
소 장 처 |
비 고 |
一齋集 (초간본) |
이준구 (李俊耈) |
1673 |
목판본 |
1권 1책 (57장) |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
이성익(李星益) 유고 수집 |
一齋集 (중간본) |
이 수 (李 邃) |
1759 |
목판본 |
원집 1권, 속록 합1책 |
서울대 규장각, 전주대, 전남대, 단국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세대 등 |
|
一齋集 |
이동협 (李東莢) |
1887 |
목활자 (전주) |
1권 1책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동국대, 전주대 등 |
|
一齋集 |
이풍렬 (李豊烈) |
1936 |
연활자본(鉛活字本: 정읍) |
4권 2책 |
국립중앙도서관, 전북대, 전주대, 원광대,장서각, 고려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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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재 이항 유허비(一齋李恒遺墟碑)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이항을 기려 세운 비석으로, 1538년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서 태인의 분동마을로 내려와 1576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약 38년간 사시던 곳인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 분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일재 이항(李恒 1499∼1576)의 자취를 알리기 위해 성주이씨 문중에서 세운 유허비(遺墟碑)로, 담장으로 둘러쳐진 비각(碑閣) 안에 보호되어 있다. 비의 전면에는 ‘일제선생유허지묘(一齋先生遺墟之碑)’라 새겨져 있다. 『일재집(一齋集)』에 실려있는 유허비후식(遺墟碑後識)을 1749년 3월에 유숙기(俞肅基)가 쓴 점으로 보아 유허비는 1749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허비 앞에 커다란 입석이 세워져 있다. 이 입석은 당시 선생이 칠보산 근처에 보림정사(寶林精舍)를 세워 학문을 닦았는데 공부를 하다 밤늦게 돌아올 때 냇가를 건너 마중 나온 부인의 옷이 젖지 않도록 놓은 징검다리 바위돌 이었다고 한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는 선생이 칠보산 용추봉의 바위를 뽑아 냇가로 던진 것이라고도 한다. 원래의 위치는 마을에서 동쪽으로 1km 떨어진 냇가에 있었으나 1960년경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일재 선생 강마소(講磨所)
태인 분동에 내려 온 일재 이항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했던 장소를 가리기 위해 1881년(高宗 19) 그의 후손과 유림이 바위에 ‘문경공일재선생강마소(文敬公一齋先生講磨所)’라 새겼다고 한다. 강마소는 현재 정읍시 북면 보림리 보림사 내에 있다.
남고서원
유적․유물편 참조
일재 선생 묘소
일재 이항은 1499년에 태어나서 1576년 6월 22일에 태인 분동 집에서 78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부음을 들은 선조는 부의를 하고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장례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칠보산 줄기로 뻗어 내린 곳인 북면 보림리 아직곡(娥織谷)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소의 좌측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다. 묘갈명은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쓴 것으로 『일재집(一齋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선생의 묘소 우측에는 선생의 부인인 영월 신씨의 묘소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보산재(寶山齋)
일재 이항의 묘소를 관리하고 시재 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으로 선생의 묘소 앞쪽 약 5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보산재 앞에는 일재선생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은 동각 김영한(金寗漢: 1878․1950)이 지었다.
이항 필서간(筆書簡)
국적 >시대 |
한국 >조선(朝鮮) |
재질 |
지 >기타(其他) |
크기 |
세로 28.9 가로 39.6 |
용도 · 기능 |
문화예술 >문헌 >서간류 >서간류(書簡類) |
소장처 |
국립순천대학교 박물관 |
유물번호 |
순천대(순천대) 208368-000 |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 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이항(李恒 1499~1576)의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일찍이 무예를 익히다가 30세에 이르러 학문을 시작,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태인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성리학에 전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발전시킴으로써 중기의 대학자가 되었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글은 명경행수(明經行修)하는 선비로 추천되어 임천군수에 봉직하기 전 해인 1565(명종20)년 6월 6일에 형님에게 보낸 편지이다.
소식을 듣고 골몰한 나머지 병이 들어 아이들이라도 보내 찾아가 뵈려했지만 아직 못하고 있다며 민망함을 표한 후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이어 최근에 조카를 만나 자세한 얘기 들었으며, 고달픈 일이 많아 우선 예측은 못하지만 심부름꾼이라도 보내서 문후를 드리겠다고 전하며, 자신은 딸아이의 묵은 병으로 늘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정을 적었다.
轉聞 華?由還 而汨沒病憂 未謀進敍 一?探候 亦此稽逋 ?嘆之餘 仰鬱良深 卽日?炎蒸人 伏惟起居勝相 仰慰且溯 不任區區 頃對族侄 細聞陵所靜閑 洛痘快廓 爲從者深賀萬萬 還朝果在何間 未前丕擬一進 而苦多纏? 姑未預卜日期 先此替?以候耳 女息宿症 近無更肆之苦耶 每每貽憂心切不安 餘萬適擾忙不宣 伏惟兄下照 謹候上狀
乙丑六月六日 弟 恒 頓首
<기타참조>
"편지-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 순천대박물관, 2003.
참고문헌
편지-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 순천대박물관, 2003.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출처e뮤지엄 한국의 문화유산을 수집·보관하여 일반인에게 전시하고, 유적·유물 등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설립된 박물관
제공처 국립중앙박물관http://www.museum.go.kr/ 국립중앙박물관
일재 이항 선조님과 관련된 전설 /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조화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1499년(燕山 5年) 서울 신혼동(晨昏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강직하고 호탕한 가운데 용력(勇力)이 뛰어나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관으로 큰 뜻을 이루려 하였다.
그런데, 27세 되던 해 백부(伯父) 판서공(判書公)의 교훈을 받아 학문에 깊은 뜻을 두었다. 사서(四書)를 공부하는데 그의 정신이 어찌나 강인했던지 칼을 옆에 꽂아놓고 정신일도하에 공부했다고 한다.
일재의 흥미로운 일화 몇 가지가 전설로 피어올라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 일재가 태인면 태서리 분동(泰西里 粉洞)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일재는 그 당시 몇 날을 두고, 공부하기에 알맞은 좋은 터를 하나 잡아 서당(書堂)을 지어 보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따뜻하고 청명한 날인데 붓을 들고 상념에 빠져 있었다. 일재는 갑자기 붓을 들고 그 붓대를 손으로 통겨버렸다. 퉁긴 붓은 손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 북면 보림리 입점(笠店)부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다.
그 뒤 일재는 그 자리가 서당으로서 좋은 자리임을 말해 왔는데 1576년(宣祖 9年)일재가 돌아가자 그 이듬해인 1577년 그 자리에 남고서원(南皐書院)이 세워졌다.
이 서원이 세워지자 즉시 일재(一齋) 이항(李恒),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두 분을 배향(配享 : 功臣이나 학덕이 높은 분의 神主를 모시는 일)했다.
그 후 효종(孝宗)때부터 사액(賜額 : 임금이 祠堂, 書院, 樓門 등에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을 상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685년(肅宗 11年) 4월에 남고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871년 (高宗 8年) 조령(朝令)에 의하여 이 서원은 철거되었는데 그 뒤 설단(設壇)하여 다시 향사(享祀)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철거 명령을 받았을 때의 일이었다. 이때 많은 주민들과 자손들이 철거 명령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를 같이하여 밤이 깊으면 칠보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남고서원 주변을 돌면서 슬피 우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며칠 밤을 서럽게 울면서 바위를 발톱으로 긁었는데 그 자국이 상당히 패었으며 또 흙을 발톱으로 파헤쳐 큰 웅덩이를 이루었다 한다. 이 지점은 남고서원에서 500m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해 들은 어떤 주민이 호랑이가 파 놓은 웅덩이는 좋은 명당이라 하여 이곳에 묘를 써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고서원이 있는 마을이 보림리 입점(寶林里 笠店) 부락인데 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고 그 정자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위 두 개가 서 있다. 해방 전만 하여도 바위가 서 있던 곳은 산이었는데 지금은 논두렁에서 있다.
큰 바위는 어미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어미바위(지상높이 약 3m, 둘레 2.6m)의 모양은 꼭 사람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머리 모양이 여인상을 닮았다.
아들바위(지상높이 약 1.5m, 둘레 2m)의 모양은 몸체는 둥그스름하나 위쪽은 뾰족한 편이다. 두 바위의 간격은 3m 를 유지하고 서 있다.
일재 이항(李恒)선생이 학문을 크게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힘과 재주가 놀라웠다 한다.
얼마나 힘이 세었을까? 보림사(寶林寺) 뒤편 칠보산 용추봉에 올라 바위를 뽑아 던져버렸는데 그 바위 두 개가 바로 어미바위와 아들바위다.
약 2km를 쏘아 버렸으니 겁난다는 말밖엔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 다음 또 하나의 바위를 던져 버렸는데 그 바위는 수십 리를 날아가 태인면 태서리 분동(泰仁面 泰西里 粉洞)마을 앞 냇가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다.
일재가 힘과 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칠보산 용추봉에서 한 번 뛰면 꼭 어미바위 옆에 척척 떨어졌고, 거기서 다시 힘을 내어 태인 쪽으로 뛰면은 태서리 분동마을 냇가에 던져둔 바위 앞에 내려지곤 했다 한다. 그리고 뛸 때에는 용추봉에서 나막신을 꼭 신고서 뛰었다니 조화(造化)무궁이라 할 수밖에 더 있는가?
그러니까 어미바위와 아들바위는 일재가 뛸 수 있는 종점의 표석(標石)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재의 높은 학문의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학자들의 출입이 많았다 한다. 학자의 출입이 많으므로 그들이 갓을 썼기 때문에 그 어미바위를 중심으로 하여 입점마을에 갓시장이 섰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입점(笠店) 혹은 관동(冠洞)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던져진 분동 마을의 바위는 던져진 이유가 다른데 있었다.
그때 일재는 태인 분동에서 둘째 부인과 생활하고 있었다. 일재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을 경우에는 그 부인이 꼭 마중을 나갔는데 마중을 나가자면 분동 앞에 있는 냇가를 건너야만 했다. 냇가를 건널 때는 부인의 옷자락이 꼭 물에 젖어 그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일재는 다리를 놓으려고 바위를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바위로 징검다리를 놓아 치마가 젖는 일이 없이 마중을 나갔다 한다. 그런데, 일제때 근방에서는 처음으로 경지(耕地)정리를 하면서 냇가가 없어지는 통에 주민들과 자손들에 의해 그 바위는 옮겨졌다. 자손들의 뜻에 따라 그 바위는 분동마을에 있는 일재의 유허비(遺墟碑) 옆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재는 축지법(縮地法)을 썼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하고 흥미롭다.
아침에는 경성(京城)에서 일을 보고 저녁이면 벌써 태인 분동마을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한다. 생각할수록 도술이 궁금하다.
1539년(中宗 34年) 칠보산 아래 서재를 세우고 강학소를 운영했는데 항상 일자(一字)의 액자를 붙여 놓아 세인들이 이 서재를 일재라 불렀다 한다.
한번은 사정전(思政殿)의 명종대왕 어전(御前)에서 학문을 논하는데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에 근원하고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에서 나오는 까닭에 두 가지를 자세히 살핀다면 하나이니 하나를 지키는 것이 근본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아들의 이름도 덕일(德一), 수일(守一)이라고 일자(一字)를 붙였고, 일재를 수일재(守一齋)라고도 불렀다.
1566년(明宗 12년) 5월 명종대왕은 국내에서 이조(吏曹), 예조(禮曹)에 명하여 경명행수(經明行修)로 고명한 학자를 천거하라하니 그 천거된 인물 중 한사람이 바로 일재였다.
1566년(明宗 8年) 일재의 병세가 위독하고 심각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까지 했으나 끝내 1576년 6월 22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정에서는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 명하여 크게 예우(禮遇)하는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
일재 선생이 가신지 오래지만 지금도 선생의 높은 학덕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과 자손들은 그 분의 조화무궁한 일화도 많이도 기억하며 남고서원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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