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선사시대(先史時代)와 태인(泰仁)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역사는 인류(人類)의 발자취를 말하는 것으로 오랜 역사,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이를 연구하는 학문분야를 가리킨다. 역사시대(歷史時代)는 역사의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문자로 기록되어 문헌상으로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역사를 말한다. 그 반대로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고, 고고학적(考古學的)인 방법, 가령 유물(遺物) 등을 사용해 알아낼 수 있는 시대를 선사시대(先史時代)라 한다.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중석기시대(中石器時代),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 즉 50만 년 전부터 서력기원(西曆紀元, 기원후) 전후로 한 시기까지를 의미한다. 역사시대는 서력기원 전후인 삼국시대 형성기(三韓時代, 原三國時代)부터 현재까지를 가리킨다.
제1절 선사시대(先史時代)와 태인
태인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으나, 이웃 영원면(元面) 후지리(後池里) 성지(成池)마을에서 구석기시대 돌날몸돌 1점이 지표에서 수습되어 일찍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2)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가 이웃지방인 부안, 익산 등지에서 발견되고 정읍지역 또한 저평한 구릉(丘陵)이 잘 발달해 있으며, 갱신세(更新世) 찰흙층이 넓게 분포하고 있어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면 강 유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찾아질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지석묘와 주거지 등이 조사되었다.
지석묘는 20개소 82기가 찾아졌으며, 이들 지석묘는 모두 군(群)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부면 만수리 지석묘군에서는 총 15기의 지석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이 중 4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주형지석(柱形支石)이 확인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주형지석을 갖춘 지석묘는 그 분포범위가 고창, 부안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3)
주거지는 1985년 정읍 보화리 백제석불입상(井邑普化里石佛立像) 주변에 대한 조사 당시 청동기시대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이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원형이고 중앙에는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松菊里形) 주거지로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로는 최초의 예라 할 수 있다. 그 외 산외면 화죽리와 정읍 송산동에서 유병식 석검(有柄式石劍)이 수습되었다. 또한 상평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독무덤이 조사되었다. 지석묘 등 무문토기가 확인된 유적이 고창, 부안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그것이 동진강, 만경강을 거쳐 내륙지방으로 확산된 사실로 미루어 이 지방에서도 이미 청동기시대에 초기 농경문화가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4)
최근에는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시행하는 부안~태인 간 도로 확․포장공사로 인하여 신태인읍 장수동유적 지표조사가 2000년에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지표조사 결과를 토대로 호남문화재연구원이 2003년 9월 16일부터 동년 10월 15일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5)
시굴조사 결과 장수동(長水洞) 유적(遺蹟)에서 주거지, 수혈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신용리Ⅰ 유적에서 수혈유구(竪穴遺構.구덩이), 주공(柱孔)과 신용리(新龍里)Ⅱ 유적에서 주공열(柱孔列) 등이 확인되어 2004년 9월 30일부터 2005년 4월 26일까지 약 210일간 조사가 이루어졌다.
장수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주거지 5기를 포함하여 원삼국시대 주거지 19기, 고려시대 석곽묘 2기, 수혈 6기, 조선시대 토광묘 70기, 옹관 등 총 103기가 확인되었다. 신용리Ⅰ 유적에서는 고려시대 토광묘 1기와 조선시대 토광묘 28기, 시대미상의 석곽 1기가 확인되었고, 신용리Ⅱ 유적에서는 구상유구 1기, 조선시대 토광묘 13기가 확인되었다.
<표 1-1> 신태인 장수동 유적 청동기 시대 주거지 현황 | |||||
유구 |
평면형태 |
규모(cm) 장축(단축)×깊이 |
주거지 내부시설 타원형구덩이 (cm)/장축 |
출토유물 |
비고 |
1호 |
원형 |
760(690)×76 |
140×80×36/동-서 |
무문토기편 |
소주공, 바닥 목탄흔, 민묘교란 |
2호 |
말각방형 |
580(440)×58 |
130×80×34/남-북 |
석촉․석도편․갈판 |
하단부 유실 |
3호 |
원형 |
500(464)×60 |
102×54×26/동-서 |
무문토기편․석검편․갈판 |
벽구시설, 벽주공 |
4호 |
원형 |
280(210)×8 |
|
경질토기편․연질토기편 |
바닥면, 주공 11 |
5호 |
원형 |
516(500)×8 |
106×60×18/동-서 |
무문토기편․석촉․석도편 |
민묘 3기 교란 |
출토 유물은 송국리형(松菊里型) 기형(器形)의 연질무문토기(軟質無文土器)가 주를 이루며, 석촉(石鏃), 석도(石刀), 판, 갈돌 등 석기류도 확인되었다. 주거지 내 출토 유물은 평저의 연질 무문토기가 주를 이루며 석검, 석도, 석착(石鑿, 돌끌), 연석(硯石) 등 석기류도 다양하게 확인이 되었다.
출토 양상은 주거지 상면의 중앙부에 밀집하여 확인되며, 3호와 5호의 경우 단면 완만한 ‘U’자형으로 주거지 중앙부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형태이다. 주거지 상면에서 바닥면까지 확인되는 유물은 시기 차이가 거의 없는 동일한 유물의 조합양상을 보이며, 대부분 편(片)들로 유물의 퇴적양상으로 미루어 퇴적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지 않고, 주거지가 폐기된 이후 일정 기간 퇴적을 이룬 뒤에 폐기장과 같은 성격으로 유물의 퇴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장수동 유적지는 평면형태가 원형이고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소위 송국리형 주거지로 분류된다.
장수동 유적에서 조사된 원삼국시대 주거지는 모두 19기이다.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에 남-북 방향으로 길게 열을 지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계이며 일부 부정형도 보인다. 내부시설로는 노지(爐趾), 주공(柱孔), 소주공(小柱孔) 등이 확인되며 일부 주거지에서는 주거지 내외에 직경 1m 이내의 소형수혈(小形竪穴)을 갖추고 있다. 노지는 부뚜막식이 확인된 7․9․15호의 경우, 점토로 방형․‘ㄷ’자형으로 구조물을 만들고 내부에 장난형 토기(長卵形土器) 또는 발형 토기(鉢形土器)를 엎어서 솥 받침으로 사용하였고, 바닥 굴광(掘壙)과 솥 받침만 확인되는 1․2․11․12․17호주거지 역시 원상태는 앞의 구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1-1> 장수동 청동기시대 주거지 전경
주공은 4주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중심주공에 보조주공을 시설한 예도 확인되고 있다. 유물은 적갈색 연질 토기가 주를 이루며, 장란형 토기, 발형 토기, 호형 토기(壺形土器), 파수부발(把手附鉢)), 파수부 시루(把手附甑), 회정색 경질의 대부환, 회청색(灰靑色) 경질 토기편 등이며, 일부 주거지 내에서 토제, 석제방추차(石製紡錘車)도 출토되었다. 장수동 유적 인근의 삼국시대 주거지 유적으로는 고부 관청리, 정읍 신월리 유적 등이 있으며, 주거지의 구조는 유사하나 출토유물에 있어서는 장수동유적이 선행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부안, 고창 등 서해안 일대에서 조사된 기원 후 3세기 대(代) 주거구조와 같은 맥락으로 판단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내 채취 시료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대체로 BC 865~615의 연대 눈금 맞춤 결과를 보여주며, 원삼국시대 주거지 내부 채취 시료는 AD 110~230라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정우면 우산리 망담(望潭)마을 유적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추진하는 호남고속철도(4-2공구) 건설공사로 인하여 2010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인 2011년 8월 31일까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 옹관묘․주거지․구 각 1기씩이 조사되었다. 청동기 주거지는 장방형의 형태로서 내부에 노지와 벽구(壁溝)가 보이고 있으며, 단사선문(短斜線文) 토기가 출토되었는바, 이러한 특징은 호남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주거지에서 확인되고 있어 망담유적의 주거지 역시 청동기시대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2>
<그림 1-2> 장수동 청동기시대 1호 주거지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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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柳在泳, 『전북전래지명총람』 (민음사, 1993), 177~210. 『한국지명총람』 12 전북편 하 (한글학회, 1981), 『정읍시사』, 『정읍군사』 등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2) “정읍-신태인 2공구 도로공사 구간내 문화유적지표조사 보고서” (재단법인 호남문화재연구원, 2002)
3) “정읍-신태인(1공구) 도로건설구간 만수리지석묘군 문화유적 발굴조사 및 이전복원 지도위원회의 자료” (호남문화재연구원, 2008)
4)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東軒』 第5號 (전라북도․정읍시, 2012) 43.
5) “부안-신태인 도로확포장공사구간내 정읍 장수동․신용리유적” (재단법인 호남문화재연구원, 200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