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고대(古代)와 태인
제 1절 고조선(古朝鮮)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古朝鮮)’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朝鮮)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한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1)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 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 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 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 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 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流移民集團)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 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온 힘을 다해서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임둔·현도·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법(八條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제 2절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와 태인
말 그대로 원초기의 삼국시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래 문헌사학에서는 이 시기를 삼한시대(三韓時代) 또는 부족국가시대로 불렀고, 고고학계에서는 김해시대(金海時代) 또는 초기철기시대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들 용어들은 이후 삼국의 체제정비와 일원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게 됨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의 하나로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원삼국시대 개념이 제기되었다.
이 시대에는 청동기의 실용성이 소멸되고 철제도구가 널리 보급되어, 이전에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사용되던 시기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이에 따라 발달된 철제 농기구를 바탕으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을 뿐 아니라 철과 철기 등을 낙랑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여 교역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원삼국시대의 농업은 삼한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많이 행해졌고 가옥 내부의 난방방식은 바닥 한편에 양 벽과 뚜껑을 평편한 돌 또는 흙판으로 조립해 터널식으로 설치하거나, 아니면 평편한 돌을 1m 정도의 타원형으로 편 뒤 그 위에 진흙을 덮고 한쪽에 바람막이 돌을 세워놓는 형태의 화덕이 사용되었다. 묘제(墓制)는 원삼국시대 초기에 독무덤과 덧널무덤(木棺墓)이 크게 유행하였으나, 후기에는 덧널무덤이 발전하였다.
이 시기는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대략 300년경까지 해당되며 선사시대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시대(歷史時代)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기간이다. 이때 한반도 남쪽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분립되어 있었다. 『삼국지(三國志)나 『후한서(後漢書)』 등의 중국문헌에 따르면 원삼국시대 경기 이남지역에는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한(馬韓) 54국은 오늘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지역에, 진한(辰韓) 12국은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 변한(弁韓) 12국은 경상도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배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제일 큰 세력은 마한인데 대국(大國)은 1만여 가구에서 소국(小國)은 수천 가구로 이루어졌으며 합하면 10여만 호(戶)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한․변한은 대국(大國)이 4~5천 가구였고, 소국(小國)은 6~7백 가구였으며, 합하면 모두 4~5여만 호(戶)였다. 그러나 이들 소국들 가운데 그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태인 지역은 마한에 속해 있었으며, 어느 소국에 속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전라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전라북도 부안군, 태인면 지역으로 지반국(支半國)으로 비정(比定)하기도 한다. 지반국(支半國)은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견지하면서 토착세력의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3세기 이후로는 다른 소국들이 복속될 때 백제에 정복되었다. 마한 54국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정인보의 설2), 이병도의 설3)과 천관우의 설4)이 있는데, 이를 태인과 관련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표 2-1>
<표 2-1> 마한 소국의 태인의 위치 비정(比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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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명(國 名) |
위 치 비 정 | |
지반국 |
支半國 |
정인보 - 전북 부안, 천관우 - 전북 부안, 태인 |
일리국 |
一離國 |
정인보 - 전남 화순(능주) 천관우 - 전북 부안, 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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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던 54개 소국의 하나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전라도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장의 영도 아래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 3세기 후반까지 존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
불미국 |
不彌國 |
정인보 - 충북 단양, 불리국, 이병도 - 전남 나주군, 천관우 - 전북 부안 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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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파로미(巴老彌)라고 표기한 것을 근거로 할 때, 664년 당나라가 백제에 구획한 주·현(州縣) 가운데 대방주(帶方州)의 속현인 포현현(布賢縣)을 파로미라고 했다. 즉 파로미는 ‘발라(發羅)’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를 지칭한다. 백제 때는 발라군, 통일신라 때는 경덕왕이 금산(錦山)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시대 때는 나주목(羅州牧)이 되었다. 이 소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
대석삭 |
大石索 |
이병도 - 경기, 신채호 - 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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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의 대신, 대부례(大夫禮)라고 합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大夫)는 관직이고, 예(禮)가 이름이라고 보고들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인보, 『朝鮮史硏究』
3)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박영사, 1976), 262~266.
4) 천관우, “마한제국(馬韓諸國)의 위치시론(位置試論)”, 『동양학 』9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