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삼국시대(三國時代)와 태인
제 1절 백제(百濟)의 건국(建國)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서남부에 위치하여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모두 678년의 역사를 가진 왕국이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 또는 추모왕(鄒牟王, 기원전 58년~기원전 19년 음력 9월)의 왕비인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년~기원전 6년)와 아들 비류(沸流)․온조(溫祚) 형제가 한반도 북쪽에서 부터 남하하여 형인 비류는 미추홀, 즉 지금의 인천에 정착하였고, 아우인 온조는 위례성(慰禮城), 즉 지금의 서울지역에 정착하여 각각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비류국은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미추홀의 지리적 특성상 활발한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온조(溫祚)의 십제국(十濟國)은 위례의 한강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한 높은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결국 온조의 나라가 더 강성해져 비류가 죽고 난 후 그 백성을 통합하여 백제가 건국된다.
본래 한반도의 중․서남부 지역에는 비류와 온조가 정착하기 이전부터 마한이라고 하는 54소국 연맹체가 있었지만, 백제는 마한 소국(馬韓小國)들과는 달리 선진 철기기술과 북방의 기마적 특성을 살려 마한 소국을 정복하고 통합하여 이 지역의 유일한 국가로 자리매김한다.
백제라는 나라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100개의 집단(집안)이 바다를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두 번째로 ‘100개의 나루터(항구, 선착장)를 가진 나라’라는 뜻과, 마지막으로 온조가 세운 나라 즉 십제국에서 비류가 죽고 비류의 나라를 통합하면서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는 의미에서 백제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어떤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 세 가지의 유래가 모두 백제의 해상왕국적(海上王國的)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백제는 일찍부터 아시아에서 중국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해상교류를 통해 두 나라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은 물론, 때로는 직접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동아시아의 해양 네트워크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해상왕국인 백제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 역시 수많은 섬과 리아스식 해안 그리고 내륙을 흐르는 강으로 구성되어 있어 ‘100개의 나루터가 있는 나라’라는 명칭의 유래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제 2절 한성 백제시대(漢城 百濟時代, BC 18년~AD 475년)
백제는 수도(王都)를 한성(漢城, 서울)에 두고 한반도의 가장 풍요로운 지역에 자리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져왔다. 그 결과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백제를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던 이는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75)이다. 『삼국사기』에는 그를 ‘체격과 용모가 빼어나고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왕위에 올라 한반도 북부지역과 중국의 동북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당시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큰 나라로 백제보다 3~4배 넓은 땅을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백제는 치양(현재의 황해도 배천으로 비정)전투에서 승리하고 평양성(현재의 평양)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마한의 남은 세력들을 백제에 편입시키고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가야에까지 진출하여 명실상부 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근초고왕은 한반도에서 백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대외적으로도 팽창하는데, 중국대륙에서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북중국이 혼란해진 상황을 틈타 요서(遼西)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요서진출에 관해서는 정복이냐 해상활동을 위한 거점의 확보냐 또는 사실무근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나, 진출 시기에 관해서는 백제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근초고왕 무렵이라는데 큰 이견은 없다. 전쟁에서의 승리뿐만이 아니라 근초고왕은 중국 동진, 일본열도의 왜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동북아시아 문화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백제의 이러한 전성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장수왕(長壽王)과 같은 걸출한 왕들이 배출되면서 백제는 위기를 맞게 되는데, 서기 475년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蓋鹵王)은 전사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은 한강 북쪽으로 철수하였으나,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곳을 왕도로 유지할 수는 없어, 결국 신라에 구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떠났다가 돌아온 문주(文周, 개로왕의 아들)가 남쪽의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겨 백제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500여 년의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바야흐로 웅진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 3절 웅진 백제시대(熊津 百濟時代, AD 475년~AD 538년)
백제의 두 번째 왕도인 웅진(공주)은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공주를 끼고 흐르는 금강은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왕성인 웅진성으로 추정되는 공산성(公山城)은 산성으로서 평지성보다 견고하였다. 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금강의 수운 교통이었다. 백제가 비록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하였지만 그 장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기존 항로의 변경은 불가피하였지만 한성시기 한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해상활동은 웅진시기 금강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금강을 따라 번화한 포구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중국대륙과 일본을 잇는 국제항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진으로의 천도 후 백제는 잠시 동안의 정치적인 혼란이 불가피하였다. 유력한 귀족세력의 발호로 인해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고, 63년이라는 기간 동안 세 명의 왕이 유력귀족에 피살되는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24대 동성왕(東城王)과 25대 무령왕(武寧王)을 거치면서 백제는 내부적인 안정과 더불어 재도약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동성왕은 488, 490년 북중국의 북위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전쟁의 가부에 대해서는 요서진출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있으나, 사실이라면 백제는 이 시기에 또 다시 중국대륙으로 진출했다고 볼 수 있다. 동성왕을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남중국의 양(梁)으로부터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를 이기기 위해서는 백제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남중국의 양(梁), 한반도에서 동쪽으로 이웃한 신라, 일본열도의 왜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 반(反) 고구려 전선을 구축하였다. 백제는 그 중심국 역할을 자처하면서 고구려에 지혜롭게 대응하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 문화의 교류의 폭을 더욱 확대하였다. 무령왕대의 백제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를 갖추게 되었다. 백제인들은 타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의 반발과 거부감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뛰어난 장사꾼들이자 뱃사람들이며 또한 외교관들이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평탄하고 풍요로운 지역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 열등감이란 없었으며, 오히려 여유와 부드러움, 온화함이 백제인의 성품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도약시켰던 아버지 무령왕을 이어 왕이 된 26대 성왕은 매우 영리하고 백성의 사랑을 받는 왕이었다. 백제의 왕실은 안정을 되찾았으나 고구려에 잃어버린 고토(한강일대)를 되찾고 왕실의 위신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을 위하여 백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성왕은 백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천도를 결심하고, 웅진으로부터 금강을 따라 하류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인 사비(현재의 부여)에 신도시의 건설을 착수하여 백제의 마지막 수도를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새 수도 사비에서 백제의 새로운 꿈을 펼칠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제 4절 사비 백제시대(泗沘 百濟時代, AD 538년~AD 660년)
웅진 지역의 지리적 조건은 방어하기에 좋은 요충지이나 한 나라의 수도로서는 협소하였다. 이에 성왕(聖王)은 무령왕 대(代)에 이루어진 안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를 이루기 위해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 지역은 금강이 감돌아 방어에 유리하고 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리한 곳이었다. 사비(부여)로의 천도는 성왕의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과 성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비천도를 적극 지지한 세력으로는 사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세력인 사씨(沙氏)세력과 한성에서 남하해 온 목씨(木氏)세력 등이었다. 성왕은 사비에 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건축하고 부소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되는 나성(羅城)을 축조하였으며, 시가지는 방리제(方里制)에 입각해 정비한 후 538년(성왕 16)에 천도하였다.
천도 후 성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제반 조처를 추진해나갔다. 우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전통성과 권위를 강화하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모시박사(毛詩博士)·강례박사(講禮博士) 등을 초빙하여 문화의 질을 높이고, 선진문물을 왜에 전수하였다. 그리고 중인도(中印度)로부터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 백제적 계율종(戒律宗)을 설립시키고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 교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중앙통치조직으로 좌평을 1품으로 하고 극우(剋虞)를 16품으로 하는 16관등제를 정비하고, 22부사제(部司制) 등 중앙의 중요 관청들을 설치하였다. 수도의 행정 조직은 5부(五部)로 나누고 각 부 아래에 5항(五巷)을 두는 5부-5항제로 완비하였으며, 지방은 전국을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郡)과 성(城: 현(縣))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편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22부가 정치운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五佐平制)는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천도로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突厥)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상류의 점령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히 고구려와 결탁한 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 신라의 이러한 돌발 행동으로 양국 사이의 화호(和好)관계는 깨지고, 이에 격분한 성왕은 원로대신인 기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여창(餘昌: 扶餘昌)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정벌에서 백제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성왕은 신라 복병(伏兵)에 의해 사로잡혀 전사함으로써 대패하였다. 이 패배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士卒) 3만여 명이 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에 나가 있던 왕자 여창(餘昌)도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관산성전투에서의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신라정벌을 반대하였던 기로(耆老) 혹은 노신(老臣)으로 대표되는 백제 유력귀족들은 위덕왕(威德王)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해나갔다. 이로써 사씨·연씨·해씨·진씨 등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표현되는 가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실권귀족들은 좌평의 정원을 5명에서 6명으로 확대하여 6좌평회의체(六佐平會議體)를 최고 귀족회의체로 만든 후 정치운영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위덕왕(威德王)은 567년(위덕왕 10)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사(陵寺)를 창건하고 여기에 사용할 도구의 하나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만들었다. 금동대향로는 성왕이 추구한 유교·불교·도교 삼교(三敎)의 공존과 상보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577년(위덕왕 207)에는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이는 위덕왕이 초기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왕권강화를 추구한 것을 보여준다. 법왕(法王)은 위덕왕대에 지어진 왕흥사를 국가적 차원의 사찰로 그 격을 높여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실권귀족들의 반대로 재위 2년으로 단명하였다. 이에 실권귀족들은 익산(益山)에서 마(薯)를 캐며 살던 몰락한 왕족 출신인 무왕(武王: 扶餘璋)을 옹립해 왕으로 삼았다. 무왕의 출자(出自)에 대해서『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지룡(池龍)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서동(薯童)으로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는 기록에서 몰락왕족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무왕은 귀족들의 정략적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하였다.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 백제와 신라가 빈번히 전쟁을 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결혼이 매우 설화적이라고 꼬집는 견해가 있다. 또 근래에 미륵사지서탑(彌勒寺址西塔)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나온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왕실과 왕실 사이의 결혼은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될 때 이루어진다는 점, 고대사회에서는 왕비가 동시에 2명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혼 시기는 신라 진평왕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청군표(請軍表)를 쓴 608년을 전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왕은 익산을 경영(經營)하여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은 후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무왕은 제석사(帝釋寺)를 만들고, 거대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무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겨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그의 익산천도 계획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신도(新都)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백제의 오방제도(五方制度)는 성왕대에서 무왕대에 걸쳐 완비된 것으로 다음의 <표 3-1>과 같다.
<표 3-1> 백제의 5방 | |||||
五方 |
方城 |
王都를 基準한 方位 및 距離 |
方城의 넓이 |
兵力 |
方城의 推定地 |
中方 |
古沙城 |
南 260里 |
方 150步 |
1,200名 |
全北 古阜 |
東方 |
得安城 |
東南 1里 |
方 1里 |
700~1,200名 |
忠南 恩津 |
西方 |
久地下城 |
南 360里 |
方 130步 |
700~1,200名 |
全南 求禮 |
南方 |
刀先城 |
西 350里 |
方 200步 |
700~1,200名 |
|
北方 |
熊津城 |
東北 60里 |
方 1里 半 |
700~1,200名 |
忠南 公州 |
※ 백제는 사비(泗沘: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 도읍한 뒤 관제를 정비, 지방을 5개의 방(方)으로 편제하였다. 방위에 따라 동방 득안성(得安城), 서방 도선성(刀先城, 혹은 力光城),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 혹은 卞城), 북방 웅진성(熊津城), 중방 고사성(古沙城)이다. 5방의 치소 중 북방 웅진성은 지금의 공주(公州)를 말하고 동방 득안성은 논산 근처로 추청되며, 서방·남방·중방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고사주(古沙州)가 다음 5개현을 거느렸다고 하였다.
古沙州(本百濟古沙夫里), 五縣
平倭縣(現 平橋, 扶安郡), 本古沙夫 村帶山縣, 本大戶山 辟城縣, 本辟骨 佐贊縣 本上杜?
淳牟縣 本豆奈只
1. 백제시대와 태산현(泰山縣)
태산현(泰山縣)은 본래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 또는 太尸山顯)으로서, 그 고을 터가 현 칠보면 시산리에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잡지 지리지에 고사주(古沙州)는
“원래 고사부리(古沙夫里, 정읍 고부)로 5현(縣)을 거느렸는데 대산현(帶山縣, 정읍 칠보), 평왜현(平倭縣 現 平橋, 정읍 고부․부안군), 벽성현(辟城縣, 김제), 좌찬현(佐贊縣, 고창 흥덕), 순모현(淳牟縣, 김제 만경)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읍시에서 추진한 태인 오봉 농공단지 조성 사업 부지를 2010년 4월 28일부터 2011년 4월 14일까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발굴(시굴)조사한 청석유적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오봉리 241-1번지 일원에 해당하며, 과거에는 태산현, 흥천면 지역이었고, 유적은 호남고속도로 상행선 태인 나들목을 지나 전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의 산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사업부지 내의 청석유적 ‘나’지구에서 백제 사비기인 6C 중반 이후로 추정되는 석재를 이용한 고분을 축조한 백제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 2기가 확인되었다.1)
<그림 3-1> 유적 공중촬영(①조사지역, ②청석유적 가지구)
<그림 3-2> 청석유적 나지구(①공중촬영 ② 1호 횡혈식 석실분)
가. 1호 횡혈식 석실분
1호분은 청석유적 ‘나’지구 조사구역의 북서쪽 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며 해발 25~30m 사이 경사면에 조성되었다. 유구 주변에는 4․5호 토광묘(土壙墓)가 위치하고 있다. 2)<그림 3-2>
백제시대 것으로 보이는 장방형(長方形)의 평면 형태로 묘광을 조성한 후 판상석을 이용하여 벽석(壁石)이 지하에 묻히도록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남쪽 단벽 오른편에 연도(羨道)를 두고 있다.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직교되게 경사면을 따라 북동-남서(N58°E)로 두었다.
묘광(墓壙)은 풍화암반토를 거의 수직으로 파내어 마련하였으며, 평면 형태는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 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으로 규모는 길이 280cm, 너비 210cm, 깊이는 최대 깊이를 보이는 묘광의 북벽(北壁)을 기준으로 98cm 정도 남아있다.
석실(石室) 평면 형태는 장방형(長方形: 내각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을 띠며 규모는 석실의 내면을 기준으로 연도부를 제외하고 길이 253cm, 너비 108cm, 높이 82cm 내외로 판상석의 다듬어진 면을 내면으로 하여 축조하였다. 석실분 주위에서 개석으로 추정되는 석재 1매가 확인되었다.
벽석(壁石)의 축조방법을 살펴보면, 석실의 북면은 1매의 대형석대를 세웠고 양장벽(兩長壁)은 판상형 할석을 이용하였으며, 남벽(南壁)은 서장벽(西長壁)의 끝단에 직교하여 장방형의 판상석 1매를 세로 세워쌓기로 축조하고 입구를 오른편에 두었다.
석실의 바닥은 특별한 시설 없이 정지된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도(羨道)는 석실의 동벽(東壁)을 그대로 연장하여 동쪽에 편재(偏在)된 우편재(右偏在)이다. 연도에 석재 1매가 넘어져 있었는데 이 석재는 연도 입구를 막은 폐쇄석으로 보인다. 연도부의 규모는 길이 114cm, 너비 70cm, 높이 68cm 내외이다.
석실 내부에서는 관못(棺釘) 32점이 출토되었는데 관못이 출토된 위치로 보아 피장자(被葬者)는 1인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3-3> 정읍시립박물관으로 이전 복원한 청석유적 나지구 1호 횡혈식 석실분
청석유적 ‘나’지구에서 조사된 1호 횡혈식 석실분은 네 벽이 잘 남아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2010년 10월 8일 개최한 1차 지도위원회의에서 이전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따라서 조사단은 정읍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이전 복원하는 것으로 정읍시와 협의를 하고 2011년 10월에 이전 복원을 하였다. <그림 3-3>
나. 2호 횡혈식 석실분
2호분은 청석유적 ‘나’지구 조사구역의 동쪽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며 해발 25~30m 사이 능선의 중하단부에서 확인되었다. 유구 주변에는 35~39호 토광묘 등이 밀집분포하고 있다.
석실분은 전면 제토(除土: 흙 고르기), 과정 중 묘광선(墓壙線, 무덤을 위해 땅을 판 자리의 윤곽)이 확인되어 조사되었는데 개석(蓋石)은 모두 유실되었고 벽석(壁石)의 일부만 남아있다.
2호분은 우편재 연도(羨道)를 가진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며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직교되게 경사면을 따라 북서-남동(N17°W)으로 두었다.
묘광(墓壙)은 풍화암반토를 거의 수직으로 파내어 마련하였으며, 평면 형태는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으로 규모는 길이 253cm, 넓이 186cm, 깊이는 최대 깊이를 보이는 묘광의 북벽을 기준으로 72cm 정도 남아있다.
석실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추정되며 규모는 석실의 내면을 기준으로 연도부를 제외하고 길이 248cm, 너비 108cm, 높이 82cm 이다. 남아있는 벽석으로 축조방법을 살펴보면, 단벽(短壁)인 북벽은 57×80cm 크기의 석재 1매가 무너져 넘어있는데 석재 2매를 세로세워쌓기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 양장벽은 60~70cm 크기의 석재들을 세로 세워쌓기로 축조하였다. 동장벽(東長壁) 벽석은 후대 토광묘 조성으로 일부 유실되고 3매가 남아있다.
연도부는 유실되었지만 벽석이 빠져나간 흔적으로 보아 우편대로 추정된다.
석실의 바닥은 특별한 시설 없이 정지된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2. 백제시대와 인의현(仁義縣)
인의현(仁義縣)은 백제 때 빈굴양(賓屈壤), 빈성(斌城), 부성(賦城) 등으로 불렸으며 그 고을 터가 현 신태인읍 백산리에 있었던 고을이었다.
인의현의 유적으로 보이는 통석리 유적에서는 괴석(怪石)으로 벽체를 축조하고 연도를 중앙에 시설한 사비 3식의 횡혈식 석실묘 2기가 조사되었다.
통석리 유적은 원평- 구간 국도 1호선 확․포장공사 구간에서 확인되었다.3) 유적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 산115와 계룡리 산87번지에 해당하며, 과거에는 인의현, 감산면(甘山面) 지역이었다. 발굴조사는 2003년 9월부터 약 1개월간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참여하여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석실묘 2기와 건물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석실묘는 구릉 정상에 남북방향으로 축조된 백제 말기의 횡혈식 석실묘이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고 연도는 중앙에 위치한다. 평면 형태와 후벽 형태를 기준으로 천장가구는 괴임식 또는 평사·말각조정(抹角藻井) 천장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의 사비 천도 이후 나타나는데 전북지방에서는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전역으로 확산된다. 이는 이 시기에 전북지방이 백제의 사비 천도 이후 중앙세력의 정치 문화가 지방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완전한 백제의 통치 편재에 들었음을 알려준다.
통석리 고분의 또 다른 특징으로 추가장(追加葬) 풍습을 들 수 있다. 1호 묘의 경우 문주석(門柱石)과 폐쇄석(閉鎖石)이 해체되어 묘도(墓道)에 쌓여 있는 점과 2호 묘의 관못 출토상태로 미루어 2개 이상의 관이 놓여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점으로 추가장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간단한 착장유물 이외에는 부장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를 사회제도 정비에서 비롯된 새로운 장제 즉 박장(薄葬)이 이루어진 결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통석리 유적의 석실묘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사이 정읍 북부 지역에서 백제세력의 영향을 받는 집단에 의해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주변의 동일시기의 유적과 관련지어 정읍북부지역의 백제말기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제 5절 백제 흥복운동(興復運動)과 태인
삼국시대 말기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특히 미묘하였다. 백제는 처음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의 남진세력과 대항하였으나 오히려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점령당하여 남천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웅진(公州)에 도읍을 옮긴 다음부터는 원교근공(遠交近攻)정책을 써서 일본 및 중국남조세력과 친교를 맺고 그 돌파구를 신라 본토와 가야판도의 침략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동안 성왕이 고리산성(古利山城: 沃川) 싸움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오랜 꿈을 버리지 않아 642년(의자왕 2)에 신라서변 40여 성을 점령하고, 대야성(大耶城-陜川)을 공략, 낙동강 변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압독(押督-慶山)까지 후퇴하게 된 신라는 그 열세를 돌이키기 위해 김유신(金庾信) 등 옛 가야세력과 단합하여 국력을 다지는 한편, 밖으로는 중원의 신흥 통일세력인 당고종(唐高宗)을 선동하여 백제의 협공을 실현시켰다.
이리하여 660년(의자왕 20) 7월, 나․당연합군은 백제 왕도를 함락시켰으나 귀실복신(鬼室福信)등 백제유족들은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 豊璋王)을 받들고 줄기찬 항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들은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을 2대 근거지로 하여 일본의 구원을 얻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장기에 걸쳐 가장 줄기차게 처절한 조국 재흥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한 후 만 3년 동안을 버티면서 한때는 당군이 유진(留陣)하고 있는 사비성(扶餘)을 포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신라는 두량이서(豆良伊城: 周留城의 이명)의 진공에 전력투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663년(문무왕 3)에는 재차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어 주류성(周留城) 총공세에 나서게 된다.
이해 8월 하순 주류성 어구인 백강구에서 나·당연합군과 백제·왜동맹군 사이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고, 4백여 척의 일본선단이 무너지자 대세는 기울어 9월 7일 드디어 주류성도 함락되고 백제유민들은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1. 제 1차 나․당군 왕도공략작전
당에 대한 구원요청이 실현되자 무열왕(武烈王)은 김유신 등과 더불어 5월 26일 경주를 출발하였는데, 앞서 21일에 왕자 법민(法敏, 후의 文武王)으로 하여금 덕물도(德物島: 德積島)에 나아가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을 출영하게 하였다.
이때 정방은 오는 7월 10일 백제남방에서 신라군과 합류하여 왕도를 무찌르기로 하자고 말하였다.
신라군은 7월 9일 황산들(黃山原: 連山)에서 계백(階伯)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을 대파하였는데, 정방은 기벌포(伎伐浦)에서 백제군을 만나 크게 부수고, 유신(庾信) 등 신라군이 뒤늦게 도착한 것을 꾸짖었다.
12일에 당군은 왕도(王都)를 포위하고 18일에는 드디어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2. 두량이성(豆良伊城) 진공작전
백제는 불의에 왕도가 함락되었으나 지방에 흩어져 있는 세력은 건재하였다.
귀실복신(鬼室福信), 승 도침(道琛)등은 이러한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곳곳에서 나․당군에 저항하며 조국흥복투쟁을 전개하였다.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들여 임존, 주류(豆良伊)의 두 성을 근거지로 크게 기세를 떨쳐 마침내 사비(泗沘: 지금의 부여)성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유인원(劉仁願)의 당군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당에서는 재차 유인궤(劉仁軌)를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로 임명하고 병력을 수습하여 당군의 구원에 나섰으나 목표는 두량이성의 진공에 있었다. 두량이성은 『삼국사기』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와『당서』에는 주류(周留)로 되어 있다. 이 두량이성 진공은 명분이 사비성 구원에 있었다.
신라본기(新羅本紀)를 보면,
“… 태종(태종)8년춘 2월에 백제잔병이 사비성에 내공하자, …
백제군이 신라군의 군진이 미처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이를 급습하니 신라군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다.
12일에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내둔하여 36일 동안 두량이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4월 19일에 철수하여 본국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군의 기습을 만나 싸웠으나 패퇴하였다. 이 싸움에서 사상자는 많지 않았지만 병계(兵械), 치중(輜重) 등을 적잖게 빼앗기고 말았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글에 나오는 지명을 보면 중로, 고사비성(古泗比城), 빈골양(賓骨壤), 각산(角山)과 가소천(加召川), 가시혜진(加尸兮津) 등이다.
다음 빈골양(賓骨壤)은 백제의 빈굴(賓屈)현으로서 지금의 정읍, 태인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 국력을 기울인 두량이성 진공작전의 실패에 충격을 받아 6월에 죽게 되고, 왕자 법민(法敏)이 왕위를 잇게 된다.
결국 두량이성 진공작전의 실패는 또 다시 당군을 끌어들여, 2년 후에 재차 나·당 연합군의 힘으로써 주류성 총공작전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3. 제 2차 나․당군 주류성 총공작전
주류성 총공작전은 사비성이 함락된 지 4년 만인 663년(문무왕 3) 7월 17일부터 시작하여 9월 7일 주류성 함락까지를 기간으로 한다.
문무왕은 김유신 등을 거느리고 웅진(熊津)에 도착, 당장 손인사(孫仁師), 유인궤(劉仁軌) 등과 작전협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가림성(加林城: 林川)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부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유인궤는 “병법이란 실을 피하고 허를 찌르는 것인데, 가림성은 험고하므로 공격한다면 군사를 상하게 되고 포위하게 되면 시일만 끌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근거지이므로 이를 떨어뜨리기만 한다면 다른 성은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손인사(孫仁師), 유인원(劉仁願)은 문무왕과 함께 육군을 거느리고 진격하고 유인궤, 두삽, 왕자였던 부여융(扶餘隆, 615년~682년, 백제 의자왕의 아들) 등은 수군과 양선을 이끌고 웅진강을 빠져나와 백강으로 향하였다. 이 백강전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당군과 육로로 진격한 신라군은 백제 최후의 아성인 주류성(周留城)의 총공격에 나서게 된다.
주류성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부(古阜)의 서방에 있고, 기벌포, 백강, 곧 동진반도(東津半島)와 동진강구(東津江口)의 남쪽에 위치한다.
4. 백제유민 일본 망명로
이리하여 주류성 싸움은 마지막 백제의병과 일본군의 패배로 끝나게 되어 만 3년여에 걸친 재흥의 꿈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서기』에는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 땅으로 망명하는 경위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글은 백제 측을 국인 또는 국민이라 하고 왜국 측은 일본군장, 일본선사 등으로 부르고 있어 백제인의 손으로 쓰인 수기를 일본정사에 그대로 수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류성도 무너졌으니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도다. 백제의 이름도 오늘로서 다 하였으니, 어찌 다시 고향 땅을 밟으리오. 다만 데례성에 나아가서 일본 군장들과 만나 다시 일어날 기회를 서로 의논함이 좋겠다.”
이렇게 탄식한 그들은 침복기성(枕服岐城)에 머물러 있는 처자들에게 우국지심[憂國之心]을 알리게 하고 11일 모데를 나서서 13일 데례성에 당도, 24일에 일본선사가 도착하자 다음 날 일본을 향하여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망명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사를 가르치고 배울 때, 소정방 13만 대군의 일격에 의해서 백제는 멸망한 것으로 속단하기 쉽다. 그러나 백제유민들은 부여풍(夫餘豊)을 받들고, 이곳 주류성을 근거로 하는 전북지방을 무대로 만 3년여에 걸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광복재흥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더구나 최후의 백강 주류성 결전에 있어서는 나․당 연합군과 제․일 동맹군이 수륙 양면에서 대결했던 동양 최대 규모의 국제적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이 결전이 있은 지 13년 만인 676년(문무왕 16) 11월, 사찬시득의 신라 수군과 설인귀가 이끄는 당 수군 사이의 대결 역시 기벌포에서 벌어져, 대소 22전 끝에 4,000여명의 당군이 죽고 신라가 최후의 승리를 거둠으로서 민족통일의 과업이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당나라의 대군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힘에 겨워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인 원산만∼대동강구 이북의 땅은 포기하고 말았으니, 이는 우리 민족상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그 뒤로부터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 국한된 작은 나라로 전락되어 1,000여 년 동안 대국의 세력 앞에 사대주의로 연명해 온 비운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
백제는 비록 대국 앞에 넘어졌으나 그 문화는 일본에 건너간 망명 집단에 의해서 개화하였고, 그 피와 더불어 문화적 전통을 이은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주요 지도세력으로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다.
제 6절 웅진도독부와 태인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는 660년(의자왕 20)에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백제의 옛 영토에 도독부 직할의 13현과 지방 7주를 설치한 ‘행정 관청’으로, 5도독부의 하나이다. 지금의 공주 지방에 웅진도독부를 설치, 도독으로 왕문도(王文度)를 임명하여 백제의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후에는 5도독을 없애고 통할케 하다가 665년 백제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당과의 화친 맹약을 하였다. 그러다가 677년(문무왕 17) 신라가 이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백제고토를 탈환하였다.
1. 고사주(古四州) - 고사주의 원래 이름은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 5현을 관할했다.
2. 평왜현(平倭縣) - 원래 이름은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 지금의 정읍시내.
3. 대산현(帶山縣) - 원래 대시산군(大尸山郡). 나중에 태인현(泰仁縣)이 되었다.
4. 벽성현(辟城縣) - 원래 벽골(辟骨)이라 불린 김제시.
5. 좌찬현(佐贊縣) - 원래 상두(上杜), 신라시대 상질현(尙質縣)인 고창군 흥덕면.
6. 순모현(淳牟縣) - 원래 두내지현(豆乃知縣), 신라시대 만경현(萬頃縣)인 김제시 만경면.
663년(풍왕 3)4) 당나라 치하에서 대시산을 대산현(帶山縣)으로 개칭하여 고사주(古四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778에 안정복(安鼎福)이 발행한 동사강목(東史綱目 ) 부록 3권 중 하권의 웅진도독부고(熊津都督府考) 에
" … 중략
○ 고사주(古泗州)본시 고사부리(古沙夫里)이다. 의 5현은 다음과 같다.
평왜현(平倭縣)본시 고사부촌(古沙夫村)인데, 백제지에는 고사부리(古沙夫里)로 되어 있다. 지금의 고부(古阜)
이다.
ㆍ대산현(帶山縣)본시 대시산(大尸山)인데 지금의 태인(泰仁)이다.
ㆍ벽성현(辟城縣)본시 벽골(辟骨)인데 지금의 김제(金堤)이다.
ㆍ좌찬현(佐贊縣) 본시 상두(上杜)인데 백제지에는 상칠현(上漆縣)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흥덕(興德)이 아마 이것인 듯하다.
ㆍ순모현(淳牟縣)본시 두내지(豆奈只)인데, 백제지에는 두내산(豆乃山)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만경(萬頃)이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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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읍 청석․청학유적”, 『발굴 그리고 기록』(재단법인 전주문화유산연구원, 2014. 6.), 100~105.
2) 『정읍 청석․왕림․청학유적, 정읍 태인 오봉농공단지조성사업부지내 발굴(정밀)조사』, 『전주문화유산연구원 학술총서 』 제3책 (재단법인 전주문화유산연구원, 2012)
3) 金建洙, 崔미노, 『원평-금구간 도로확․포장공사구간내 정읍 통석리 유적』 (재단법인 호남문화재연구원, 2004), 39.
4) 조선의 역사가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백제의 마지막 임금을 의자왕이 아닌 그의 아들 풍왕, 재위 661~663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