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역사(삶의 내력)/제4장 남북국시대와 태인

제 4장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와 태인(<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지지, 여지도서 영인본 첨부> 미완성

증보 태인지 2018. 2. 2. 15:03

4장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와 태인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와 동맹((羅唐 연합)을 맺은 신라는, 660년에 의자왕과 지배층의 향락 등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이 생겨 국력이 쇠퇴하던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던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에 의한 갈등까지 겹쳐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고,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보장왕 27)에 멸망하고 만다.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나라를 세운 지 705년 만이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676년에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買肖城)에서 격파하여 나·(羅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伎伐浦)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인 대동강(大同江) 이북과 만주(滿洲)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여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뒤이어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들어서면서 남북국시대가 형성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골품제와 더불어 신라의 17관등(官等)의 관료 체제가 확립된 것도 실제로는 삼국통일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최고의 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651(진덕왕 5)에 설치되고, 형률(刑律) 사무를 관장하는 이방부(理方府)의 규범 60여 조가 새로 정해졌다. 감찰 기관인 사정부(司正府)가 신설되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주·군에 외사정(外司正)을 두어 지방 관리의 감찰을 담당케 하였다.

   집사부는 품주(稟主)를 개편하여 만든 것인데, 품주는 국왕의 재정과 왕정의 기밀사무를 장악하고 있던 신라의 최고 관부였다.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待中)는 귀족적인 전통을 갖고 있는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과 함께 집행부의 수반(首班)으로서 중요한 지위였다. 집사부에는 1명의 중시(中侍) 밑에 2명의 시랑(侍郞: 典大等)2명의 낭중(郎中: 大舍), 2명의 원외랑(員外郞: 舍知), 20명의 랑(: )이 있었다.

   신라는 영토 확장에 따라 685(신문왕 5)에 지방통치조직의 기반이 된 9()()()을 설치하였고, 정치·군사상의 요지에는 5소경(五小京)을 두었다. 종래 전략상의 의의가 컸던 주의 장관인 군주(軍主)는 문무왕 때에는 총관(摠管)으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어 점차 지방 행정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9주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뒤에 새로이 편입된 지역을 포함하여 정비하였고, 이는 오늘날 도() 크기의 규모이며 삼국의 고지(告知)3개씩 균등하게 배치하였다.

   주 밑에는 군()을 두고 군 밑에 현()을 두어, 장관을 각기 태수(太守현령(縣令)이라 칭했다. 이들 지방 장관은 관계(官階)상으로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4-1> 삼국통일 후 9주와 군현수

州 名

主 治

(現地名)

郡 數

縣 數

原 名

景德王時

改稱名

三國史記

地理志

三國史記

景德王16年條

三國史記地理志

三國史記

景德王16年條

沙伐州

尙 州

尙 州

10

10

31

30

歃良州

良 州

梁 山

12

12

40

34

菁州

康 州

晋 州

11

11

30

27

漢山州

漢 州

廣 州

28

27

49

46

首若州

朔 州

春 川

12

11

26

27

河西州

溟 州

江 陵

9

9

26

25

熊川州

熊 州

公 州

13

13

29

29

完山州

全 州

全 州

10

10

31

31

武珍州

武 珍

光 州

15

14

43

44

120

117

305

293

 

   위에서 <4-1>에 예시한 9주에서 태인(大山郡)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전주(全州)이다. 이때 전주(全州)의 속군은 10(), 속현은 31(), 1소경(小京)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地理夫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10()대시산군(大尸山郡: 태인), 고부사리군(古沙夫里: 고부), 진례군(進禮郡, 충남 금산, 덕근군(德近郡: 충남 은진), 시산군(屎山郡: 임피), 벽골군(碧骨郡: 김제), 도실군(道實郡: 순창), 금마저군(金馬猪郡: 금마), 백해군(白海群: 장계), 임실군(任實郡: 임실)이고, 31()은 두이현(豆伊縣: 이서), 구지산현(仇知山縣: 금구), 고산현(高山縣: 고산), 정촌현(井村縣: 정읍), 빈굴현(賓屈縣: 신태인), 야서현(也西縣: 원평), 개화현(皆火縣: 부안), 흔량매현(欣良買縣: 부안), 상칠현(上漆縣: 흥덕), 두시이현(豆尸伊縣: 富利, 현 금산군 일대), 물거현(勿居縣: 용담), 적천현(赤川縣: 무주), 가지내현(加知乃縣: 은진), 지양소현(只良所縣: 여산), 지대지현(只代只縣: 완주), 감물가현(甘勿伽縣: 익산), 마서양현(馬西良縣: 옥구), 부부리현(夫夫里縣: 옥구), 두내산현(豆乃山縣: 만경), 수동산현(首冬山縣: 김제), 급리아현(及利阿縣: 이성), 무근현(武斤縣: 김제), 력평(礫城縣: 적성), 돌평현필(突坪縣畢: 순창), 소구형현(所九兄縣), 알야산현(閼也山縣: 익산), 우소제현(于召渚縣: 완주), 난진아현(難珍阿縣: 진안), 우평현(雨坪縣: 장수), 마돌현(馬突縣: 진안), 거기물현(居斯勿縣: 임실)이다.

 

   주()의 장관을 문무왕 때에는 군주(君主)로 부르다가 신문왕 때에는 총관(總管)으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하였는데, 이와 같은 명칭의 변화는 주 장관의 임무가 군사적인 것에서 점차 행정적인 성격으로 변화하여 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주 밑에는 군이 있어 태수(太守)가 이를 통치하고, 군 밑에는 현령(縣令)이 있었으며, 현은 다시 촌()()부곡(部曲) 등으로 구분되었다. 주의 총관으로부터 현령에 이르기까지는 경관(京官)이 임명되었지만, 하급관리나 촌주(村主)는 토착 호족으로 임명하였다.

 

 

1절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태산현(泰山縣)

 

   태산현이란 지명의 유래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景德王 16)에 비롯된 것이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는 옛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땅에 각각 3개주를 두고, 특별자치구로 5소경(小京)을 두어 95소경제도를 완성하였다. 이때 9주 밑에 117193현을 두면서 이전의 지명을 고쳐 대시산( 大尸山)을 대산군(大山郡)으로 개칭, 빈굴양(賓屈壤)은 빈성(斌城)으로 개칭, 정촌현(井村縣)은 정읍현(井邑縣)으로 개칭하여 야서현(野西縣, 현 김제시 금산면 일대)과 더불어 대산군의 영현(領縣) 되어 세 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최치원이 신분적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890년 외직을 청()해 태수(太守)로 나간 곳 중 하나가 이곳 대산군이다.1)

   『삼국사기지리지에 대산군(大山郡)은 본시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 태산군(泰山郡)이니 영현이 셋이다.”라고 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태산군(泰山郡)은 본래 백제 대시산군이었는데, 신라 때 태산(太山)으로 고쳤다. ()는 태()로도 통한다.”라고 하여 태산이란 명칭이 이미 신라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동국여지지( 領縣), 여지도서(輿地圖書)등 이후의 지리지에 그대로 반복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지지, 여지도서 영인본 첨부>

 

   이 때 전주도독부(全州都督府) 관내 군으로 인의현·빈성현·아서현(野西縣정읍현을 관장(管掌)하였다.

유적은 정읍시에서 추진한 태인오봉농공단지 조성사업부지 내의 청석유적에서 확인되었고 남북국시대 석곽묘 6기가 조사되었다.

   2010428일부터 2011414일까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발굴(시굴)조사한 청석유적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오봉리 241-1번지 일원에 해당하며, 과거에는 태산현, 흥천면 지역이었다.

 

<그림 4-1> 청석유적 가지구 석곽묘 조사 후 근경(1, 4호 유물출토상태)

 

청석유적 지구 4기와 지구 2기 등 모두 6기의 석곽묘가 조사되었다. 2), 3)<그림 4-1>

   능선의 중하단부와 말단부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구에서 조사된 석곽묘는 벽석 일부만 남아있다. ‘지구에서는 능선 말단주에 4기가 분포하는데 등고선과 직교된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고 있으며, 개석(蓋石)은 완전히 유실되었다.

   이 중에서 4호 석곽묘는 규모가 작은 편으로 벽석은 1단만 남아있고 장벽은 대형석재 2매를 가로세워 쌓기 하였다.

   석곽묘 내부바닥에는 1728cm 내외의 편평한 할석 5매를 놓아 바닥보다 높여 관대(棺臺)를 마련하였다.

   북벽과 인접한 바닥에서 편구병(偏求甁) 1점과 회청색경질 뚜껑() 1점이 출토되었다.

 

   병은 회황색을 띠는 연질로 동체부가 편구형이고, 저부는 평저이다. 동체부 중단부에서 최대경을 이루며 경부는 짧고 구연부(口緣部)가 외반(外反)된 형태이다. 충남 아산 장재리 안강골유적 1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상 유사하다. 그러나 안강골유적의 출토품은 회색경질토기이며, 구연부가 반구형이고 경부가 약간 긴 형태이다.

 

<그림 4-2> 뚜껑통일신라4호 횡구식석곽묘높이 5.7cm

 

   뚜껑은 개신부의 중앙부에 낮은 환형의 꼭지를 부착하였으며 상단부에는 2조의 침선(沈線)이 돌아간다. 이와 유사한 유물은 전주 중인동유적 1호 석곽묘에서 함께 출토된 뚜껑이 있다. 또 진안 평지리 유적 2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유개합A의 뚜껑과 유사하다. 이러한 공반유물을 살펴보면 중인동 1호 석곽묘에서는 대부완(臺附碗)과 병이 부장되었고, 평지리 2호에서는 뚜껑과 세트로 8조의 유개합(有蓋盒)과 편구호(扁球壺), 대부완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는 모두 전형적인 통일신라양식으로 각종 인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따라서 출토유물과 공반유물을 통해 볼 때 청석유적 지구의 석곽묘는 남북국시대 말기로 편년(編年)되어진다. <그림 4-2>

   ‘지구에서는 2기의 석곽묘가 조사되었으며, 규모는 소형으로 벽석 일부만 남아있다.

 

 

2절 남북국시대의 인의현(仁義縣)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경덕왕 16) 때 빈성(斌城), 무성(武城)이라 개칭하여 대산군의 영현(嶺縣)이 되었다. 이때 정촌현(井村縣)은 정읍이라 개칭되어 태산군(泰山郡)에 속하게 되고, 고려시대 다시 고부군에 속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빈성현(斌城縣)은 본시 백제의 빈굴현(賓屈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의 인의현(仁義縣)이다.”라고 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본래 백제의 빈굴현(賓屈縣)부성현(賦城縣)이라고도 함으로,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무성(武城)으로 고쳐 대산군(大山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들어 지금 이름으로 바꾸고 내속시켰으며 대산감무(大山監務)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다.”4)

 

<그림 4-3> 국역 고려사 / 고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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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17(전라북도정읍시, 2012), 59.

2) 정읍 청석청학유적”, 발굴 그리고 기록, 100105.

3) 정읍 청석왕림청학유적, 정읍 태인 오봉농공단지조성사업부지내 발굴(정밀)조사

4) 국역 고려사고려사 고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