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데 채소는 눈에 안차”
이영규 기자

▲ 태인면의 중심인 저자거리를 가득 메우고도 부족했다는 '도깨비시장'. 하지만 지금은 할머니 몇 분이 그 '이름'만을 지키고 있다. ⓒ 김태성 기자
정읍 태인장을 찾는다.
동학농민혁명이 태동한 역사의 현장, 조선 중기 목조 건축양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보물 제289호 피향정을 장터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곳, 전국 면 단위에서는 유일하게 ‘새벽 도깨비시장’이 열린다는 곳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발동해서다.
“옛날에는 칠보·옹동 사람들도 다 여그로 왔어”
새벽 5시. 도깨비시장의 부산한 움직임이 태인의 아침을 열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면소재지는 조용하기만 하다. 시장이 열린다는‘저자거리’를 찾았지만 역시 조용하다. 20∼30분 면소재지 구경을 한 뒤 되돌아오니 비로소 움직임이 눈에 띈다.
시장 생활만 30년을 했다는 서순자(57)씨.
“음마, 머 볼 것이 있다고 꼭두새벽에 여그를 찾았다요? 얘기는 옳게 들었는디 지금은 아니요. 옛날에야 요 근처가 꽉 찼제. 칠보·옹동 사람들도 다 여그로 왔어. 초상이 나믄 음식재료 장만은 다 저자거리서 했어.”
지금은 추석 전날에나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단다.
잠시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할머니’들이 하나 둘 자리를 편다.
시래기에 호박잎, 고춧잎, 밥에 얹어 먹을 팥 그리고 단감과 은행을 가지고 나온 이진숙(65) 할머니, 젓에 넣어 삭히면 맛이 최고라는 ‘젓고추’와 시래기를 가지고 나온 이희숙(67) 할머니, 쪄서도 먹고 무쳐서도 먹을 수 있다는 ‘연한 고추’와 고구마 줄기를 펼쳐 놓은 김학림(70) 할머니, 텃밭에서 키웠다는 무와 대파 쪽파 상추 토란대를 내놓은 송문순(61) 아주머니, 아침거리를 준비하러 나온 아주머니들을 겨냥해 옷을 들고 나와 길 건너편 보도에 자리잡은 오귀례(64·신태인읍) 아주머니….
그리고 오일장 준비를 위해 겸사겸사 문을 연 몇몇 가게들.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면 단위에서 열린다는 ‘태인 새벽 도깨비시장’의 전부다.
아침 6시, 하나 둘 사람들이 몰리면서 허전함을 메운다. 길 건너에 살고 있는 김진순(86) 할머니는 도깨비시장 사람들과 대화로 하루를 시작한다.
“고르고 말 것이 뭐 있어. 여그 오는 사람들은 다 믿어도 돼. 나쁜 것 갖고 나오믄 안되지. 다음에 무슨 낯으로 나올 거여.”
아침 7시, 열리는가 싶더니 파장이다. 도깨비시장답게 도깨비같이 문을 열고 도깨비같이 장을 파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앉은 지 20여 분만에 떨이를 하고 오귀례씨에게 건너가 옷을 고르고 있는 김학림 할머니.
“나는 싸게 팔았는디 여그는 비싸네.”
아침나절 김 할머니의 수입은 1만8000원. 1만5000원 하는 옷을 만지작만지작 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김 할머니의 상황은 그래도 나은 편. 다듬고 씻고 온갖 정성을 다 들였지만 절반 정도밖에 팔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접는다.
호남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만든 태인장의 아픔
허탈한 속을 채울 겸 500m를 이동해 태인장 인근 국밥집을 찾는다. 도깨비시장이 활기를 띠고 태인장에 사람이 북적일 때면 흔하디 흔한 것이 국밥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침나절 유일하게 문을 연 ‘터미널 국밥집’의 노오순(60)씨.
“철도가 신태인으로 남서부터는 큰 물건들이 그리 몰리고 태인으로 누가 오간디. 그래도 한동안은 괜찮았어. 철도만 없지 여그가 그래도 교통의 요지요. 정읍에서 부안으로 인근 옹동으로 칠보로 사통팔달 못 가는 곳이 없었응께. 근디 인자는 고속도로 타고 다니제 신작로 따라 누가 다니요. 다니는 사람이 없응께 장도 쪼그라들제.”
태인 사람들에게 신태인이라는 이름은 아쉬움이다. 조선 후기만 해도 전라도 지역 최고의 군(郡)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일제 강점기 호남선 철도가 신태인을 지나가면서 세력을 잃기 시작, 1914년 이후 면(面)으로 바뀐 곳이 바로 태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전주에서 정읍을 연결하는 국도 1호선과 김제에서 칠보를 연결하는 국도 30호선이 여전히 태인의 중심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 예전부터 내려오던 태인장이 1965년 장옥의 형태를 갖추면서 새롭게 단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위세를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모든 상황은 바뀌고 말았다.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된 1972년부터 1978년 이후 태인이 갖고 있는 힘은 김제로 정읍으로, 멀리는 광주·전주로 흩어져 나갔다.
사람이 없어지면 오일장도 힘을 잃는 법. 아침을 먹고 일터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줄어들면서 도깨비시장과 태인장은 크게 위축된다.
“사람이 없다고 물건까지 나쁜 것은 아니여”
1278평에 불과한 장터, 어느 곳에서도 장터 전체를 살필 수 있을 만큼 좁은 장터엔 9시를 넘기면서 하나 둘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난다. 하지만 1997년 많은 돈을 들여 새로 지었다는 장옥 곳곳은 여전히 셔터가 내려진 상태.
40년 넘게 찐빵만을 만들어 왔다는 김순례(78) 할머니.
“오는 사람들마다 내 사진 찍어간디. 근다고 해서 태인장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글고 본게 항상 사진을 같이 찍었던 대장간도 없어져 부렀네.”
할머니와 함께 태인장을 지켜왔던 대장간이 사라진 지 벌써 5년째란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오일장 사진에서 빠지지 않는 ‘튀밥집’을 찾았지만 먼지를 뒤집어쓴 기계만 있을 뿐 개점휴업 상태다.
“옛날에는 정말 나래비를 섰네. 여그서 벌어갔고 자식들 다 갈쳤는디. 내 옆자리가 생선장사 자린디 요새는 장사가 안된다고 나오도 안해, 손님이 있어야 재미를 갖고 나오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기다려 보지만 오전 10시가 다 되도록 태인장은 조용하다.
“시기를 잘 못 택했어. 나락 비고 탈곡흘라고 사람들이 안나올 때여. 올라믄 음력 8월에 와봐. 그 때는 태인장도 도깨비 장도 쪼끔 괜찮을 것잉게.”
허전함을 뒤로하고 태인장을 뜬다.
머뭇거리는 발길을 김이순(71) 할머니가 붙잡는다.
“태인장이 작아졌어도 싱싱한 야채는 넘쳐 나는 곳이여. 봐봐 배추에 갓에, 열무, 파, 고구마, 토란…. 여그 있는 것 다 내 텃밭에서 생산흔 것이여. 사람이 없다고 물건까지 안좋은 것은 아닝께. 조용흔디 와서 좋은 물건 사가라고 해야제.”
큼지막한 단감 하나를 내민다.
“먹어 봐 태인사람이 주는 것이여. 태인 왔응게 정성은 먹고 가야제.”

“예나 지금이나 정성으로 준비”, 터줏대감 이진숙 할머니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문을 여는 곳이 태인면 저자거리의 ‘도깨비시장’이다.
가장 싱싱한 채소를 가장 싼 값에 살 수 있는 곳. 한번 이 곳 물건에 익숙해지면 다른 곳 채소는 눈에 차지 않을 만큼 싱싱함을 자랑한다.
그 도깨비시장의 보이지 않는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이진숙(65) 할머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할머니의 도깨비시장 준비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지난 10월15일 할머니가 가지고 나온 품목은 10여 가지. 시래기에서부터 고춧잎, 그리고 은행에서 단감까지.
오늘은 특별상품으로 밥 위에 얹어 먹을 팥을 준비했다.
“어제 저녁에 준비를 다 해 놓고 새벽 나오기 전에 전부 깠어. 조금이라도 싱싱해야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콩나물도 다 질러서 오고, 시골 할머니들이 이것 저것 갖고 옹게 우리가 봐도 구경흘 것이 많았는디.”
오늘 개시는 좋았다. 호박을 몇 개 가지고 나왔더니 인근에서 가게를 하는 서순자씨가 “호박이 주인을 닮았네”라는 농을 던지며 전부를 사간 것. 하지만 그것으로 오늘 장사는 끝이다.
옆에 있던 김학림 할머니는 고구마줄기와 토란대를 순식간에 팔아 치웠는데….
특별히 준비한 만큼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던 팥은 봉지에 담긴 그대로 남아 있다.
아침 7시.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떠 혼자 남았지만 물건은 그대로다.
“떨이 흐믄 한 2만원 된디. 오늘은 안되네. 누가 단감이라도 가겨가믄 좋을 것인디. 요거 한 바구리에 3000원이여.”
도깨비가 이미 떠나 버렸을 만큼 날이 밝았지만 이진숙 할머니의 좌판은 처음 그대로다.
“건물 말짱흔 것 볼라고 오는 사람 있능가?”
‘현대화’가 ‘활성화’는 아니다
재래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가 바로 ‘현대화’다.
녹이 슬어 빗물이 새는 장옥을 현대식 건물로 바꾸고 진입로를 근사하게 포장, 사람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목표 아래 오일장 곳곳에서 현대화 작업이 진행중이다.
태인장은 다른 장에 비해 ‘재래식 시장 현대화 작업’의 혜택을 일찍 본 곳 가운데 하나다. 아직 계획조차 수립되지 않은 곳이 허다하지만 태인장 현대화 작업은 지난 97년 마무리됐다.
비를 맞지 않고도 장을 볼 수 있도록 장옥 전체에 햇빛이 들어오는 지붕을 설치하고 24개 점포도 말끔이 정비를 마쳤다.
하지만 현대화가 활성화를 이룬 것은 아니다.
“장옥을 개축한 뒤로 상당한 기대를 했는디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많은 돈 들여 해 준 사람들한테는 고맙지만 요래 갖고는 활성화가 어려워.”
시장 상인들은 건물 현대화 작업이 보다 치밀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장옥을 일렬로 세우고 통로를 만들었는디, 원래 장터라는 것은 빡빡흐믄 안되는 것이여. 특히 어두운 것은 질색을 흐지. 어쩐지 막힌 느낌이 들고 답답흔게 사람이 안들어 오제.”
문이 닫히거나 좌판이 펼쳐지지 않은 장옥들 가운데 상당수가 멀쩡한 자리를 두고 다시 거리로 나선 이유다.
“건물 현대화는 절반이여. 머신가 사람을 불러 올 수 있는 재미가 있어야제. 물건도 사고 구경도 흐고 그러자고 오일장에 오는 것인디. 건물 말짱흔 것 볼라고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겄소”
상인들은 태인장 활성화의 첫걸음이 장옥 현대화라면 두 번째 걸음은 태인장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상품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장 인근에 있는 피향정과 연꽃으로 유명한 연못, 태인향교 등 몇몇 유적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도깨비시장’을 한데 묶을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침체 상태에 있는 태인장을 활성화하지는 것이다.

▲ 40년 동안 찐빵을 만들며 태인장을 지켜온 김순례(78) 할머니. ⓒ 김태성 기자
취재 후기
오일장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추억의 장소? 지역 특산품을 한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관광상품매장? 하지만 허전하다. 얘기 하나하나 틀린 구석이 없지만 공허함을 지울 수 없다.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구경꾼’의 시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일장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그들은 절박하다고 얘기한다.
오일장은 혈관이었다. 비록 ‘수요’와 ‘공급’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동원하기엔 어색한 규모지만 그 속엔 농촌경제의 가장 밑바닥을 받쳐주는 힘이 있었다. 농산물을 팔아 ‘돈을 사고’, 그 돈은 다시 궁핍하지만 ‘당당한’ 농민들의 삶을 지켜왔다.
오일장이 없어진다는 것은 ‘농촌경제’의 한 축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오일장이 없어진다는 것은 수백 년 동안‘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고단한 삶을 지켜 온 ‘촌사람’들만의 ‘경제행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요놈의 장이 없어지믄 내가 어디로 가겄소. 쌀 팔고 배추 팔아서 이것저것 바꾸고 했는디 장이 없어지믄 다 안돼. 우리가 요 것을 짊어지고 도매시장으로 갈 꺼여 어쩔 거여?”
기사출력 2004-11-24 17:20:52 ⓒ 전라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