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고려시대(高麗時代)와 태인
제 1절 고려(高麗)의 건국(建國)과 후삼국(後三國)의 통일(統一)
신라 후기에는 몰락한 중앙귀족(中央貴族)과 토착적인 촌주출신(村主出身),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세력(軍鎭勢力) 등이 지방호족(地方豪族)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농민반란(農民叛亂)을 배경으로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9세기 말 이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주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竹山)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양길(梁吉), 지금의 전라도지방의 견훤 등이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특히 그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것이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였다.
견훤은 원래 상주의 호족출신이었다. 신라의 작은 부대장 ‘비장(裨將)’이 되어 세력을 키우다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다시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 진격해 그곳을 근거로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으로 몰락한 가문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길의 부하가 되어 강원도 일대를 경략(經略)하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양길(梁吉)을 넘어뜨리고 송악(松嶽 개성)에서 자립해 901년에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에 신라와 함께 백제·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는 후백제·고려(후고구려)가 정립(定立)해 후삼국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는 진골왕족(眞骨王族)의 권력다툼에 휩싸여 경상도 일대만을 지배하는 상태였으나, 견훤과 궁예는 전제군주로서 전라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왕건은 본래 혈구진(穴口鎭)을 비롯한 해상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궁예의 휘하에서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 지역을 공략해 진도·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을 점령한 것은 그러한 해상활동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은 궁예와 같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구 신라에 대한 혁명적인 새 왕조 건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듬해 도읍지(都邑地)를 철원에서 그의 출신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그가 건국 초의 불안정한 시기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송악지방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신라는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후백제 침략으로 국운이 쇠퇴해 935년(경순왕 9) 고려에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것은 927년 견훤이 신라의 국도(國都)를 침략해 경애왕을 죽이고 노략질할 때, 왕건이 신라를 도와 견훤과 싸워준 친(親) 신라정책(新羅政策)이 주효(奏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전 왕조인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함으로써 정통왕조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후백제는 이미 934년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고려 태조 군에게 패배해 웅진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기는 타격을 받았다. 또한 이듬해 부자 사이의 불화로 견훤이 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한 내부적 분열을 틈타 태조는 936년 대군을 이끌고 신검의 군대를 선산에서 대파해 그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의 통일을 보게 되었다.
제 2절 집권 체제의 정비
1. 호족 통제정책
태조가 통일왕조를 이룩했으나 중앙의 통치력이 전국적으로 미치지 못하였다. 지방에는 반독립적인 호족들이 분립해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태조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이었다.
처음에는 호족세력을 회유해 자기 기반 안에 흡수하려 하였다. 미처 확고한 세력을 마련하지 못한 고려왕조로서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호족들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혼인정책(婚姻政策)을 썼다.
즉 태조는 정주 유씨(貞州柳氏)·평산 박씨(平山朴氏)·충주 유씨(忠州劉氏) 등 전국의 20여 호족들과의 정략적인 혼인을 하였다. 또한 호족들에게 왕씨성(王氏姓)을 주어 한 집안과 같은 관계를 맺은 것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호족세력의 통제에도 노력하였다. 우선 태봉의 관제를 답습해 여러 정치기구를 설치하고, 많은 호족을 중앙관리로 등용해 관료의 지위로 전환시켰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중앙통제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대신 지방호족들에게 호장·부호장 등의 향직을 주고 그 자제들을 뽑아 인질로 서울에 머무르게 하는 기인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개국공신이나 고관들에게 자기 출신지역의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임명하고 지방의 치안통제를 책임지는 사심관을 삼아 지방을 통제하였다. 태조가 호족들에게 관계(官階)를 수여하고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한 것도 지배질서 안에 편제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태조는 만년에 신하로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지어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두 책은 중앙관료와 지방호족들에게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일깨워 중앙집권화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또한 자손들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만들어 군주로서 지켜야 할 교훈을 남긴 것은 이에 대응한 것이라 하겠다.
2. 중앙 집권화 정책
호족들의 존재로 인해 불안정했던 왕권은 태조의 죽음과 함께 표면화되었다. 945년(혜종 2)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주(廣州)의 호족 ‘왕규(王規)의 난’이 일어났다.
두 딸을 태조의 15비와 16비로 들여놓은 왕규는 혜종(惠宗)의 두 아우 요(堯: 뒤의 정종)와 소(昭: 뒤의 광종)를 꺼려 혜종에게 거듭 상소했으나 듣지 않자 외손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다.
이에 혜종은 불의의 변을 두려워해 사람을 의심하고, 갑사(甲士)로 신변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즉위 2년 만에 병으로 죽자, 서경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한 요(堯)가 왕규를 제거하고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왕권의 불안정은 계속되었고, 정종은 이들 도전세력을 제거하는데 힘쓰는 한편 그들의 세력기반인 개경을 벗어나기 위해 서경천도를 추진했으나, 갑자기 병으로 죽음으로써 그의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고려의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는 광종 때부터였다. 광종은 즉위 후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무마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해 기반을 세우고 서서히 호족세력의 억제 수단을 마련하였다.
우선 956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호족들의 많은 노비가 해방되어 그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약화되었고, 반면 양인을 확보하게 되어 국가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958년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해 신진관리를 채용하였다. 이로써 개국공신 계열의 훈신이 타격을 받고, 대신 새 관료를 밑받침으로 한 왕권의 강화를 보게 되었다.
이어 960년 백관공복(百官公服)이 제정되어 모든 관리의 복색을 계급에 따라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계층의 편제는 왕권확립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호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광종은 숙청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960년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 개국공신 계열을 죽이고 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광덕(光德)·준풍(峻豊) 등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과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 했으며,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데도 나타난다. 이러한 시책에 의해 건국 초의 불안정한 왕권이 안정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전되었다.
제 3절 고려 귀족사회의 제도
1. 중앙의 정치제도
고려의 중앙 정치제도는 성종 때 마련된 삼성육부(三省六部)의 정부조직을 기간(基幹)으로 하였다. 이전까지는 궁예의 관제를 답습해 광평성(廣評省)·내봉성(內奉省)·순군부(徇軍部)·병부(兵府)를 기간으로 한 정치제도를 실시했으나, 집권체제가 확립된 성종 때 비로소 당나라 제도에 따른 삼성체제(三省體制)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정치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송나라 제도와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가 섞여 있었다.
삼성육부는 당나라 제도를, 중추원·삼사(三司)는 송나라 제도를 채용한 것이다. 반면 도병마사·식목도감(式目都監)은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정치제도는 세 계통으로 구성되어 독특한 정치체제와 권력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기구의 중심이 된 것은 삼성육부의 조직이었다. 삼성은 원래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을 말하지만,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라는 단일 기구를 이루고 최고정무기관으로 재부(宰府)라 일컫게 되었으며,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수상이 되었다.
중서문하성의 관원은 2품 이상의 재신(宰臣 省宰·宰相)과 3품 이하의 성랑(省郎 郎舍·諫官)으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백관을 통솔하고 국가정책을 의논․결정하는 일을 보았고, 성랑은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서경(署經)의 임무를 맡았다.
상서성은 같은 삼성의 하나이지만 실제는 중서문하성에서 결정된 정책을 실행하는 실무기관에 불과했고, 그 장관인 복야(僕射)의 지위도 낮았다. 상서성에는 육부가 예속되어 각각 국무를 분담했는데, 이·병·호·형·예·공의 순서로 고려의 독자적인 구성이었다.
육부에는 각각 정 3품의 상서(尙書)가 장관이 되었지만, 수상은 이부, 아상(亞相 二宰)은 병부 등 재신이 육부의 판사가 되었다. 이것도 상서성이 중서문하성에 예속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나라의 육부는 각기 사사(四司)의 속사(屬司)가 달려 모두 24사의 조직을 이루고 있었으나, 고려의 육부는 각각 단사(單司)의 간단한 조직이었다. 다만 이부에 고공사(考功司), 형부에 도관(都官) 등 두 속사가 있을 따름이었다.
중서문하성과 함께 고려의 중요한 정치기구는 중추원이었다. 중추원은 중서문하성의 재부에 대해 추부(樞府)라고 불려, 함께 재추 또는 양부의 이름을 가지는 권력기구를 이루었다. 중추원의 관원도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2품 이상의 추밀(樞密, 즉 樞臣)이 군기(軍機)를 관장했고, 3품의 승선(承宣)은 왕명을 출납하는 비서 기능을 가졌다.
고려의 양대 정치기구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양부 재추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하고 결정하는 합좌기구(合坐機構)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었다.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국방·군사 관계를 관장했고,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격식 문제를 다루는 회의기관이었다.
이 밖에 중요한 관부로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 탄핵하는 어사대(御史臺)가 있었다. 어사대는 중서문하성의 성랑과 함께 대간(臺諫) 또는 성대(省臺)라고 불려 국왕을 시종해 언관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특히 대간은 서경의 권한이 있어 왕권의 전제성을 규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정치제도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으로 되어 왕권에 유리하였다. 특히 육부가 국왕에게 직접 상주하는 제도는 국왕으로 하여금 정부기구를 통할하는 권한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양부 재추에게 집중되고, 이들 재추는 문벌귀족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대간의 간언·서경도 이들 귀족관리들의 커다란 권한이었다. 이것은 고려의 정치제도가 국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의 조화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지방행정제도와 태인
지방제도는 군현제도를 기간으로 해서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건국 초기에는 지방에 수령이 파견되지 못하고 호족들의 자치에 일임되고 있었는데, 성종 때 지방관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한 것은 983년 12목의 설치를 시초로 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개폐를 거듭하다가 1018년 지방제도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전국에 약 5백 개의 군현이 존재했지만, 모두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전기에 수령이 파견된 주현(主縣)이 130개인 반면, 그렇지 않은 속현은 374개나 되었다. 이들 속현들은 수령이 설치된 주현에 예속되어 중앙의 간접 지배를 받는 행정조직을 이루었다. 즉, 중앙정부에서 여러 군현 중 외관이 파견된 주현에 직첩(直牒)하는 행정체계를 이루고, 이들 주현이 속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현의 수가 많아 이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가 곤란했으므로, 몇 개의 큰 군현을 계수관(界首官)으로 삼아 중간기구의 기능을 띠게 하였다. 즉, 14개가 되는 경(京)·도호부(都護府)·목(牧)이 계수관으로서 관내의 일반 군현을 통할해 향공(鄕貢)의 진상이나 외옥수(外獄囚)의 추검 등을 맡게 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군현이라 하지만 고려의 군현제는 계수관과 일반 주현, 그리고 속현의 누층적(累層的)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속현에 대한 외관의 증파로 주현의 수가 많아지자, 지금까지의 계수관에 의한 허술한 군현통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 중기부터는 계수관에 대신해 중앙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기구로 5도(五道)·양계(兩界)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즉, 북부지방에는 양계, 남부지방에는 5도를 설치하고, 양계에는 병마사(兵馬使)를, 5도에는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해 도내의 군현을 통할하는 상부행정구획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중간기구가 지역에 따라 양계·5도로 구분되고, 다시 경기는 개성부(開城府)에 의해 통치되는 등, 전국을 삼원적인 지배 양식으로 차이를 두었다는 점은 속현의 광범한 존재와 함께 고려 지방제도의 미숙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군현에는 그곳 지방출신이 호장·부호장 등 향리에 임명되어 수령 밑에서 직접 백성을 다스렸다. 향리는 주현뿐 아니라 외관이 없는 속현이나 부곡에도 설치되었다. 원래 호족출신인 향리는 조세·부역·소송 등 행정사무를 맡았으므로, 비록 수령의 보좌역이지만 실권은 커서 백성을 침탈하는 등 폐단이 많았다.
이에 향리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그 지방 출신의 중앙 고관을 사심관으로 임명해 향리를 통제하게 하고, 또 그들 향리 자제를 기인으로 삼아 상경, 숙위(宿衛)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향리는 지방호족의 지위에서 점차 하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주를 비롯한 오늘날의 전라도 북부 지역은 대체로 후백제와 고려의 대결 과정에서 끝까지 항전했던 지역에 해당된다. 태인 지역도 후백제의 주요 영역으로서 태조 왕건의 후백제 지역에 대한 통제정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왕건은 통일 후인 19년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후백제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였으며, 태조 23년에는 군현개편을 통하여 후백제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차령이남 공주강 밖의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내릴 정도로 후백제 세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아니하였다.
광종 2년에는 안남도호부를 전주에서 고부로 옮기게 되는데, 이는 고부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부가 안남도호부로서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것은 고려가 거란의 공격을 받았던 성종에서 현종 연간이었으며, 안남도호부의 기능이 없어진 것은 고려의 지방제도가 정비된 뒤였음을 알 수 있다.
951년(광종 2)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 지방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이 때 전주목(全州牧)에 속하였다. 995년(성종 14) 고려에서 처음으로 도제를 실시하였는데, 전주․영주․순주․마주 등의 주현을 포함하는 강남도(江南道)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이르러 지방제도의 골격이 갖추어지게 되는데, 강남도와 해양도(海陽道)가 합해져서 비로소 전라도(全羅道)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표 5-1>
<표 5-1> 성종(成宗) 14년 각 도주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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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도 |
12주 관찰사 |
소관주․현의 수 |
관내도(關內道-경기․황해) |
양주(楊州)․광주(廣州) |
29주 82현 |
중원도(中原道-충청북도) |
충주(忠州)․청주(淸州) |
12주 42현 |
하남도(河南道-충청남도) |
공주(公州) |
11주 34현 |
강남도(江南道-전라북도) |
전주(全州) |
9주 49현 |
영남도(嶺南道-경상남도 일부) |
상주(尙州) |
12주 48현 |
영동도(嶺東道-경상남도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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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 49현 |
산남도(山南道-경상남도 일부) |
진주(晋州) |
10주 37현 |
해양도(海陽道-전라남도) |
나주(羅州)․승주(昇州) |
14주 62현 |
삭방도(朔方道-강원도 및 함경남도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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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62현 |
패서도(浿西道-평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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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 4현 7진(鎭) |
가. 고려(高麗)시대의 태산현(泰山縣)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잠시 고부군(古阜郡)에 속하였다가, 936년(태조 19)에는 이르러 영주(瀛州, 옛 고부) 관찰사의 속현으로 감무(監務)를 두어 인의현을 겸임하게 하였다.
감무(監務)는 고려가 처음으로 시행한 제도이며, 처음에는 임시로 지방에 파견한 관원(官員)이었으나 뒤에 상설(常設)관원으로 제도화하였다. 그러니까 감무는 지역이 아주 협소하고 인구가 희소한 고을에 배치하는 현감(縣監)보다 하위(下位) 기능의 관원이었던 것이다.
1018년(현종 9) 안남도호부를 전주로 다시 옮기고 고부군으로 환원되었다.
1019년(현종 10) 두 현을 나누어 태산·인의현에 각각 감무가 설치되고, 정읍군을 고부군으로 환원시켰다.
“본래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에 들어 내속시켰다. 뒤에 감무를 두고 인의현(仁義縣)까지 겸임하게 했다. 1019년(현종 10)에 대산과 인의에 각기 따로 감무를 두었다. 1354년(공민왕 3)에 이 고을 사람으로서 원나라 사신으로 온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본국에 공을 세웠다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다.”1)
1354년(공민왕, 恭愍王 3) 때 대산군에 감무관(監務官)을 두어 태산(泰山)으로 고쳐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인의현을 편입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고려에 원병을 청하는 원나라의 사신으로 태산현인(泰山賢人)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2)가 몽고에 들어가 활동하다 본국인 고려에 돌아오자 그 공으로 태산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정읍시에서 추진한 태인 오봉 농공단지 조성사업부지 내에서 확인된 청석유적 ‘다’지구에서 고려시대 유적으로 보이는 건물지(建物址) 3기가 조사되었다.
2010년 4월 28일부터 2011년 4월 14일까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발굴(시굴)조사한 청석유적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오봉리 241-1번지 일원에 해당하며, 과거에는 태산현, 흥천면 지역이었다.
청석유적 ‘다’지구에서 건물지에서 출토된 기와류를 보면 암․수키와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막새류 및 특수기와는 출토되지 않았다. 출토된 기와의 수량은 수키와 44점, 암키와 67점으로 모두 111점이다.3), 4) 그러나 박리가 심해 그중에서 37점만을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분석결과 모두 규격화되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 문양인 집선문(集線文)은 14세기부터 등장하게 되는 문양이며, 청해파문(靑海波文)과 함께 출토되었다. 제작기법상에서도 정형화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 수키와는 토수기와(수키와의 꼬리부분에 언강이라는 물림턱이 있는 수키와)와 미구기와(수키와 뒤 뿌리 외경이 앞쪽 내경보다 작아 겹쳐 이을 수 있도록 만든 기와)가 공존하지만 미구기와의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타날 규격에 있어서는 암․수키와 모두 규격화되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상문은 일부만 확인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앙 횡대를 기준으로 상하 우상문이 배치되어 있는데 중앙 ×형태로 구획된 문양 안에는 ‘仝山’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와 동문양의 기와가 임실 용암리 사지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기와제작소나 공인이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건물지가 사지건물지의 가능성도 내포할 수 있다.
집선문은 유적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형태에 마름모꼴 안은 종방향의 단선으로 모서리부분은 사선으로 연속되는 양상을 보이는 형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제작기법상에서도 정형화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
타날 판은 모두 장판 타날을 이용하여 횡방향 타날로 하였으며, 내면단부조정에 있어서 물손질 조정만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분할방법은 모두 내측분할방법만을 사용하였다. 암키와 내면에서도 고려시대 이후에만 등장하는 윤철흔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제작기법과 문양은 고려시대 기와의 특징이다. 청석유적 ‘다’지구 기와의 제작연대는 고려 중․후기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검울지에서는 백자와 분청사기도 다량 출토되어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나. 고려(高麗)시대의 인의현(仁義縣)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인의현이라 일컫고 영주(瀛州, 옛 古阜) 관찰사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태조 23) 빈성현(斌城縣)을 인의현으로 고치고 대산 감무(監務)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다. 다시 951년(광종 2)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 안남도호부를 전주로 다시 옮기고 고부군으로 환원되었다. 다시 1019년(현종 10)에는 태산에 감무를 설치할 때, 인의를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가 인의를 분리하여 감무를 두었다. 인의에는 흙으로 쌓았던 옛 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호남평야의 남부지역으로 동진강(東津江) 상류의 비옥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 태인과 고부를 잇는 교통상의 요로(要路)에 있었다. 인의의 옛 이름인 빈굴(賓屈)은 ‘큰 고을’ 또는 ‘큰 성’이라는 뜻을 가진다.5)
또 다시 지방제도는 현종 19년에 72도(道) 안무사(按撫使)를 폐지하고 4도호(都護),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었다가 마침내는 5도 양계(道兩界)․4도호(都護)․8목(牧)․15부(府)․129군(郡)․335현(縣)․29진(鎭)의 제도가 되었다. <표 5-2>
<표 5-2> 5도 양계․4도호․8목․3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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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道) 및 양계(兩界) |
4도호(都護) |
8목(牧) |
3경(京) |
양광도(楊廣道: 경기 및 충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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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
남경(南京: 현 서울) |
경상도(慶尙道: 지금과 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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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晋州) 상주(尙州) |
동경(東京: 현 경주) |
전라도(全羅道: 지금과 같음) |
안남(安南: 全州 뒤에 樹州 지금의 富平으로 옮겼음) |
전주(全州) 나주(羅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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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도(交州道: 강원도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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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도(西海道: 황해도) |
안서(安西: 海州) |
황주(黃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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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東界 동북면이라고도 칭하는바 강원도 일부 및 함남 일부) |
안변(安邊: 지금과 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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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계(北界 서북면이라고도 칭하는바 지금의 평안도) |
안북(安北: 安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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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西京: 현 평양) |
위 표에서 태인은 고려시대부터 전라도(全羅道)에 속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지방 통치조직을 살펴보면 중앙정부에서는 여러 군현 중 외관이 파견된 주현(主縣)이 속현(續絃)을 직할하도록 하였는데, 외관이 파견된 주현(主縣)의 수가 많으므로 이를 14개 정도의 경(京)․도호부(都護府)․목(牧)이 계수관(界首官)이 되어 관할하게 하는 조직을 갖고 있었다. 이는 전기에 도제(道制)의 발달 미숙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도(道)의 장관인 안찰사(按察使)는 전기까지는 중간 기구로서의 역할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 권57, 지제11, 지리(地理)2 전주목조(全州牧條)를 통해 태인의 영속(領屬)관계를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그림 5-1>
<그림 5-1> 전주목 행정구역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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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목(全州牧) 속군 2, 속현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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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부(知事府: 남원)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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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군 2, 속현 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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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군(知事郡: 古阜郡)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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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군 1(太山郡), 속현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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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관(縣令官)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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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현령(臨陂縣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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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현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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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례현령(進禮縣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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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현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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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현령(金城縣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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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현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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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현령(金溝縣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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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현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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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군․현 아래에 향(鄕)․부곡(部曲)․소(所)와 처(處)․장(莊)의 특수한 말단 행정조직을 따로 두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가 주(州), 군(郡)을 설치할 때 지역이 협소하고 호구(戶口)가 작아서 현(縣)을 둘 수 없는 곳에 향(鄕) 혹은 부곡을 두어 소재지 군현에 예속시켰다. 이 중 향(鄕)․부곡(部曲)은 단순한 행정구역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반면, 소(所)․처(處)․장은 경제(經濟)분야에 속했으며, 소(所)는 금소(金所), 은소(銀所), 철소(鐵所), 염소(塩所) 등으로 구분하여 금․은․동․철 및 종이, 자기(瓷器) 등을 생산하였던 곳이었다. 처(處)․장(莊)은 고려 때 처음으로 실시한 제도로 각 왕실을 비롯하여 궁원(宮院)과 사원(寺院) 등이 지배한 일종의 장원(莊園)으로 공물(貢物)을 바치게 했던 곳이다. 그리고 소(所)에 각각 토성(土姓)이 있어 세습적으로 이를 통할했다.
『세종실록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태인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있다.
“옛 속향(屬鄕)이 3이니, 나향(羅鄕)·능향(綾鄕)·제견향(堤見鄕)이요, 부곡(部曲)이 2이니, 대곡(大谷)·개문(開門)이다. …
호수가 2백 47호요, 인구가 1천 5백 2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9명이요, 진군이 18명이요, 선군이 2백 47명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현의 동쪽 수약동(水若洞)에 있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요,【현의 남쪽 부곡(釜谷)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
태인의 특수 행정 조직을 표로 정리해보면 향 3곳, 부곡 3곳, 소 2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표 5-3>
<표 5-3> 고려시대 태인의 특수 행정 조직 | |||
구 분 |
명 칭 |
위 치 |
문헌 |
향(鄕) |
나향(羅鄕) |
현의 서쪽 10리 |
명칭 - 세종실록 지리지 명칭․위치 - 신증동국여지승람 |
능향(綾鄕) |
현의 동쪽 5리 |
명칭 - 세종실록 지리지 명칭․위치 - 신증동국여지승람 | |
제견향(堤見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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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지리지 | |
부곡(部曲) |
대곡(大谷) |
현의 동쪽 25리 |
명칭 - 세종실록 지리지 명칭․위치 - 신증동국여지승람 |
개문(開門) |
현의 동쪽 40리 |
명칭 - 세종실록 지리지 명칭․위치 - 신증동국여지승람 | |
도전(桃田) |
현의 동쪽 30리 |
명칭․위치 - 신증동국여지승람 | |
소(所 |
자기소(磁器所) |
현의 동쪽 수약동(水若洞)에 있다. |
명칭․위치 - 세종실록 지리지 |
도기소(陶器所) |
현의 남쪽 부곡(釜谷)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 |
명칭․위치 - 세종실록 지리지 |
향․소․부곡 및 장․처의 주민들이 생활하는 것도 촌락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고 보여 지며, 대체로 특수한 신분(천민)의 집단 생활지였다. 한편 일반 군현민의 생활 단위 역시 그 말단은 촌락이었고, 촌정(寸政)의 담당자는 촌장(村長), 촌정(村正)이었으며, 이들은 향촌에서의 유력자이었다. 이들 향리(鄕吏)와 촌장(村長) 등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각 촌락은 일성일촌(一姓一村)을 원칙으로 하는 같은 성씨가 몰려 사는 혈연적 동족집단인 동시에 지역적 촌락공동체이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주민을 성씨와 본관제에 의하여 통제하였는데, 이를 반영한 조선 초기의 우리 고장의 성씨 분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역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 전주부 / 태인현의 기록에는
“태산(泰山)의 토성이 5이니, 박(朴)·시(柴)·허(許)·전(田)·경(景)이요, 인의(仁義)의 성이 5이니, 유(庾)·송(宋)·조(趙)·종(宗)·섭(葉)이요, 내접성(來接姓)이 3이니, 안(安)【서울에서 왔다.】 ·허(許)【태산에서 왔다.】 ·이(李)【고부에서 왔다.】 이다.【어떤 본(本)에는 이 3성이 제견향(堤見鄕)에 속해 있다.】”
라고 되어 있고,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에는
“성씨 본현 박(朴)시(柴)허(許)전(田)경(景). 인의(仁義) 유(庾)송조(趙)종(宗)섭(葉), 안(安) 서울. 허 태산(泰山). 이(李) 고부(古阜). 어떤 이는 이 세 성은 붙인 성이라 한다. 김제에도 보인다. 능향(綾鄕) 경(景)시(柴)박. 나향(羅鄕) 경(慶). 대곡(大谷) 전(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토성(土姓)은 고려 초 각 지방의 구획 당초부터 『세종실록지리지』편찬 당시까지 그 지방에서 토착하면서 그곳 지명을 본관으로 하는 지배적 성씨집단을 가리킨다. 이들 토성은 지방의 향리들이 그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지방의 유력자들이었다. 래성(來姓)과 속성(屬性)은 고려 초에 토성이 분정(分定)7)된 뒤 그 토성의 변동에 따라 새로운 성씨가 보충된 것이다.
이러한 성씨들 중에서 고려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가문은 태산의 전씨로서, 전원균(田元 均)이 무신정권하에서 활동함으로써 그의 가문이 크게 번성하여 문벌을 형성하였다.
전원균(田元均 1149∼1218)의 본관은 태산(泰山: 지금의 泰仁)이고 자는 진정(眞精)이다. 아버지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낸 총문(寵文)이며, 어머니는 허씨(許氏)이다.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문음(門蔭)으로 입사(入仕)하여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3. 기타 제도와 태인
가. 경제제도(經濟制度)
고려시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제도로 토지는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어, 상속·매매·기진(寄進)·전당(典當)이 자유로웠다. 민전(民田)이라 불린 이러한 사적 소유지는 전국에 걸쳐 존재했다. 민전의 소유자는 귀족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왕실도 사유지를 가졌다. 이러한 토지사유제 위에 국가적 토지분급제도로써 전시과제도를 운영했다. 역분전(役分田)을 계승하여 경종대에 처음으로 제정된 전시과(田柴科)는 1706년(문종 30)때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문무 관료에서 군인·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직역을 부담하는 자에게 모두 토지를 지급한다는 원칙 아래 제정된 전시과에서는 대상자를 관직에 따라 18과(科)로 구분하여 일정액의 토지와 시지(柴地)를 지급했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 지급이었다.
그 밖에 관청에는 공해전시(公廨田柴), 왕실에는 장처전(莊處田)과 궁원전(宮院田), 사원에는 사원전을 주었고, 5품 이상의 관리로 공훈이 있는 자에게 지급하여 자손에게 세습을 허락한 공음전시(功陰田柴), 6품 이하 관리의 자제에게는 한인전(閑人田), 향리에게 향역(鄕役)에 대한 대가로 지급한 향리외역전(鄕吏外役田), 군인에게 지급된 군인전(軍人田), 자손이 없는 하급관리나 군인의 유족에게는 구분전(口分田), 궁성(宮城)에 소속된 내장전(內莊田)을 각기 지급했다. 이러한 전시과체제는 고려 후기에 변화되었다. 본래 세습될 수 없는 수조권을 실제로 문벌귀족들이 사적으로 계승했고, 이를 기반으로 대토지를 겸병(兼倂)8)하게 됨에 따라 전시과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 군사제도(軍事制度)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2군과 6위로, 지방군은 양계의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군현군으로 이루어졌다.
태조의 직속군이 근본이 되어서 편성되었다. 2군(二軍)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을 말하며, 6위(六衛)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를 말한다. 6위는 대체로 995년(성종 14)에 정비된 것 같다. 2군은 6위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왕의 친위군 역할을 하였다. 한편 6위 중에서 가장 핵심을 이룬 것은 좌우·신호·흥위의 3위로서 수도 개경의 수비는 물론 변방에 대한 경술(更戌)의 임무까지도 띠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금오위는 치안, 천우위는 의장(儀仗), 감문위는 궁궐 안팎 제문(諸門)의 수위를 임무로 하고 있었다.
2군·6위에는 정·부지휘관으로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있었다. 이 상·대장군들은 그들 자신의 합좌 기관인 중방을 가지고 있었다.
2군·6위는 모두 약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다. 각 영의 지휘관은 장군(將軍)이었으며, 이들도 장군방(將軍房)이란 합좌 기관을 갖고 있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합해서 45령이 있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고려의 정규 중앙군의 규모는 약 45,000명이 된다. 이후 공민왕 때에는 장군이 지휘관인 왕의 친위부대인 충용위가 신설되었고 4령이 있었다.
2군과 6위는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세습되었다. 군공을 세워 지위를 무신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중류층이었다. 그러나 차츰 토목 공사 등에 동원되거나 군인전을 지급받지 못하게 되자 몰락하거나 도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광군(光軍)은 고려에서 조직된 최초의 전국적인 군사 조직이다. 이것은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하여 중앙에서 통제해 나가도록 조직되었다. 이는 곧 중앙 정부와 지방 호족에 의한 농민 역역(力役)의 공동 지배 아래 조직된 것이었다.
947년(정종 2)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코자 조직된 것으로 짐작되는 광군은, 고려의 집권화 정책이 진전되어 지방제도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주현군(州縣軍)으로 개편되어 보다 강력한 중앙 정부의 지배 밑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전국의 광군 조직을 통제해 가는 통수부(統帥部)로는 광군사(光軍司)가 설치되었다.
고려 때 2군·6위의 중앙군(中央軍) 외에 각 주·현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으로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이 있었다.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지방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초기에 조직된 광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되었다.
주현군은 도(道)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계는 국경 지대의 군사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행정 단위인 진(鎭)마다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진에 주둔하였으므로 주진군으로도 불렀다. 이들은 일단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는 둔전병(屯田兵)적인 상비군이었다. 각 도의 주현군은 보승·정용·1품(一品)으로써 구성되었는데, 보승·정용은 치안·방술(防戌)의 역(役)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품군은 공역(工役)에 동원되는 노동 부대였다. 이때 주진군은 좌군·우군·초군으로 구성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으며, 주현군은 지방의 치안이나 노역에 동원되었다.
『고려사』「병지(兵志)」주현군도의 군액은 그 합계를 적은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 고장이 속하였던 전주목도내(全州牧道內)의 주현군은 보승(保勝)은 150명, 정용(精勇)은 1,214명, 1품(一品)은 867명이고, 고부도내(古阜道內) 보승(保勝)은 54명, 정용(精勇)은 610명, 1품(一品)은 545명, 합계 1,209명이었다. 즉 1,209명 가운데는 태산현과 인의현에 배치된 주현군이 포함된 것이다.
다. 교육(敎育)과 과거(科擧)
고려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에 국립학교인 국자감(國子監)과 동서학당(東西學堂: 뒤의 五部學堂)이 있고, 사립으로는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를 비롯한 12도(十二徒)가 있었다.
태조 때에도 개경과 서경에 학교가 있었지만 992년(성종 11)에 국자감이 설치되면서 교육제도도 완성되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및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이 속해있었다.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졌고, 율(律)․서(書)․산학(算學) 등에는 8품 이하 서인(庶人)에게까지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사학(私學)은 문종 때 최충이 문헌공도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사학 12도가 성립되었으며 후대에까지 융성 발전하였다.
지방에는 주현(州縣)에 설립된 향학(鄕學)이 있었는데, 국초에는 서경, 청주 등에 학원(學院)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다가 예종 때에 지방 학교가 널리 보급되었으며, 인종 때에 이르러서야 학식(學식(式)과 함께 지방 군현에 까지 향학이 널리 보급되었다.
1354년(공민왕 3)에 전주시 풍남동 현 경기전 북편에 전주향교가 건립되었다.
과거제도는 광종이 훈신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실시하였으며, 시험은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 등으로 나누어졌고, 무과는 예종 때 잠깐 실시되었다가 폐지되었다. 이들 가운데 제술과가 가장 중요한 과가 되었다. 한편 과거 이외에도 음서(蔭敍)를 통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는데, 음서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제 1인에게 관직을 허락하여 주는 제도였다.
라. 교통(交通)과 통신(通信)
광활한 국토를 지배하기 위해 전 근대 국가들은 나름의 교통과 통신체계를 구축하였다. 이 교통망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된 역(驛)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역은 육상교통로에 설치되어 중앙과 지방, 외국 사이의 명령의 전달 혹은 사신(使臣)과 사자(使者)9)의 숙식 등을 책임지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참역(站驛)은 삼국시대부터 그 제도적 기초가 마련되었고, 삼국통일 후에는 역로(驛路)를 이용해 지방을 본격적으로 통제해 나갔다. 고려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포섭하고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역로망을 확충하였으며, 이러한 고려태조의 정책은 이후의 국왕들에게 계승되어 성종 2년 전국의 역을 대·중·소로 구분하여 공수전(公須田)을 지급한 이래 6과(六科) 속역(屬驛) 체제에 의한 역로망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은 개경과 서경 및 의주를 중심으로 한 역참조직(驛站組織)이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의 대폭적인 군현제 개편과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이 제도화된 때를 전후하여 역참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고려사』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계로 역참조직이 점차 완비되었고, 거란과의 전쟁이 종식된 11세기 무렵에는 22역도제가 완성되었다.
고려의 역참제(驛站制)에서 역참은 정령(政令) 및 공보(公報)의 전달과 군사적 연락 및 지방 파견 관원의 체송(遞送)과 물자수송 등을 맡았다. 역은 교통량과 군사 및 경제의 중요성에 따라서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 3등급으로 구별하여 토지를 지급하여 경비로 삼았다. 역의 정호(丁戶)도 각 역을 6과(科)로 나누어 역정(驛丁)을 차등 배정하였다. 또한 역마(驛馬)에 있어서도 일정 수의 관마(官馬)가 비치되어 수요에 응하였다.
한편 역을 통한 고문서의 전달은 정부 각 기관으로부터 외방 주부(州府)에 보내는 공문서를 먼저 상서성(尙書省)에 보고하면 상서성에서는 그 가부를 결정하여 수역(首譯)인 청교역(靑郊驛)에 보내고 공문서는 가죽주머니(被袋)에 넣어 역졸(驛卒)이 릴레이식으로 전송하였다. 또한 용건의 완급에 따라서 3급(急)은 3령(鈴)을 달고, 2급은 2령을 달고, 1급의 경우에는 1령을 달았다.
역참조직은 전국 역로의 간선이 22역도(驛道)에 속역인(屬驛)인 역참수의 수가 525개에 달하였다. 우리 고장은 역참이 2곳에 있었는데 신보역(新保驛), 거산역(居山驛)이다. 이들 역은 역도(驛道)인 전공주도(全公州道: 全州에서 懷德구간)의 21개 속역(屬驛) 중의 하나였다.
『고려사』권82, 지제36, 병(兵)2 / 참역(站驛)을 보면,
“전공주도(全公州道)21)는 21개소의 역을 관할한다. 삼례역(參禮驛)【전주(全州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양재역(良材驛)【여양(厲陽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앵곡역(鶯谷驛)【이성(伊城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옥포역(玉庖驛)【운제(雲梯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재곡역(材谷驛), 채평역(彩平驛)【금마(金馬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진림역(榛林驛)·내재역(內材驛)【김제(金堤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고원역(苽原驛)【고부(古阜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군)】, 신보역(新保驛)·거산역(居山驛)【태산(泰山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천원역(川原驛)【정읍(井邑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소안역(蘇安驛)【임피(臨坡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진현역(進賢驛)【진례(進禮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화역(珍化驛)【진동(珍同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제원역(濟元驛)【진례(進禮)】, 경천역(敬天驛)【공주(公州)】, 평천역(平川驛)【연산(連山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득연역(得延驛)·이도역(利道驛)【공주(公州)】, 정민역(貞民驛)【회덕(懷德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10)<그림 5-2>
라고 쓰여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驛)이 1이니, 거산(居山)이었다.【현의 남쪽에 있다.】”
라고 되어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역원 거산역(居山驛)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정어원(鼎魚院)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태거원(泰居院)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왕륜원(王輪院)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그림 5-2> 『고려사』 권82, 지제36, 병(兵)2 / 참역(站驛)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 4절 거란족(契丹族)의 침입(侵入)과 몽고의 난(亂)
1. 거란의 침입과 태인
고려의 북진정책(北進政策) 및 친송정책(親宋政策)과 정안국(定安國)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에 제1차 침략을 한 후, 1010년(현종 1) 11월 요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으며, 이를 거란의 제2차 침략이라고 한다. 제3차 침략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라 하며 1018년(현종 9)에 또다시 쳐들어왔다.
제2차 침략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母后)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는데, 요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침략의 실제적인 목적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요는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곽산·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자 현종은 인의(仁義)를 거쳐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요는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구주·통주·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국역 『고려사』에서 거란의 침입에 따른 고려 현종(顯宗)의 피난길의 태인 행차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현종 2년(1011) 신해년
• 2년 봄 정월
초하루 을해일 거란 임금이 이끄는 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해 태묘(太廟)와 궁궐 및 민가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날 왕은 광주(廣州: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머물고 있었다. 정축일 호위했던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 등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운 나머지 흩어져 달아나고, 시랑(侍郞) 충숙(忠肅)·장연우(張延祐)·채충순(蔡忠順)·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만이 남아 있었다. 무 인일 왕의 행차가 광주(廣州)를 떠나 비뇌역(鼻腦驛: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와 양성 사이)에 묵었다. 임오일 왕의 행차가 장곡역(長谷驛: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부근)에 묵었다. 을유일 거란군이 퇴각했다. 병술일 왕의 행차가 인의현(仁義縣: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군)을 지나 수다역(水多驛: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부근)에 묵었다. 정해일 왕의 행차가 노령(蘆嶺)을 넘어서 나주(羅州: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에 들어갔다. 을미일 왕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복룡역(伏龍驛: 지금의 광주광역시 복룡동)에서 묵었다. 무술일 고부군(古阜郡: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군)에 묵었다. 기해일 금구현(金溝縣: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에 묵었다. 경자일 전주(全州: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이레 동안 유숙했다. 임인일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거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계묘일 거란 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 채충순을 비서감(秘書監)으로, 박섬(朴暹)을 사재경(司宰卿)으로, 주저(周佇)를 예부시랑(禮部侍郞)·중추원직학사(中樞院直學士)로, 한창필(韓昌弼)을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으로 각각 임명했다. 박섬은 안북(安北)에서 개경으로 도망쳐 왔다가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무안현(務安縣, 지금의 전라남도 무안군)으로 가던 길에 왕 일행을 만나 나주까지 따라갔으나 얼마 후 귀향해 버렸다. 그가 거란군의 퇴각 소식을 듣고 왕을 찾아뵙자 관직을 주었는데, 당시 여론이 그의 이러한 태도를 비난했다.
• 2월
정미일 왕 일행이 전주(全州)를 떠나 여양현(礪陽縣: 지금의 전라북도 여산)에서 묵었다. 무신일 공주(公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엿새 동안 유숙하면서 김은부(金殷傅)의 맏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경술일 김계부(金繼夫)를 병부시랑으로, 이단(李端)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으로 각각 임명했다. 정사일 청주(淸州: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묵었다. 기미일 연등회를 행궁(行宮)에서 열고 그 후 2월 15일에 여는 것을 상례로 했다. 경신일 청주를 떠났다. 정묘일 개경으로 돌아와 수창궁(壽昌宮)에 들었다. 기사일 형부(刑部)에서, 유언경(劉彦卿)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 몸이면서도 보답하려 하지 않고 먼저 적에게 항복하였으니 그 처자를 유배 보내라고 요청하자, 그 건의에 따랐다. |
2. 몽고(蒙古)의 난(亂)과 태인
13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몽고세력의 흥기였다. 몽고고원의 유목민족(遊牧民族)인 몽고족(蒙古族)은 금(金)의 세력 아래에 있었는데, 13세기 초엽에 보르지긴 테무진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에 칸(황제)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가 곧 칭기즈칸이다.
이때부터 몽고는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나갔는데,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에 고려가 강동성(江東城:평양의 동쪽)에 있는 거란족(契丹族)을 몽고와 함께 공략하면서이다. 몽고는 거란을 토벌한 후 고려에 대하여 큰 은혜나 베푼 듯 굴었다. 특히 1221년에 사신으로 온 저고여(著古與)는 몽고 황태자의 지시라 하며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그 태도가 오만불손하여 고려 군신들의 불만을 샀다. 결국 저고여가 1225년에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빌미로 몽고는 1231년부터 1259년(고종 46) 강화 때까지 전후 7차례에 걸쳐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가. 제 1차 침입
1229년에 징기스칸의 뒤를 이어 오고타이가 칸에 오르더니 1231년 8월부터는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은 함신진(咸新鎭: 지금의 義州), 을 거쳐 철주(鐵州: 지금의 鐵山), 귀주(龜州: 지금의 龜山), 정주(靜州), 안북부(安北府: 지금의 安州), 서경, 황주(黃州), 봉주(鳳州: 지금의 鳳山), 평주(平州: 지금의 平山)를 차례로 공략하였고, 연말경에는 개경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양주, 광주, 충주, 청주에까지 남하하여 여러 성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귀주, 자주(慈州) 등에서 분전하여 끝내 성을 지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북계병마사 채송년(蔡松年)의 지휘로 적에게 대항하였지만, 몽고군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결국 개경이 포위되기에 이르자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몽고의 권항사(權降使)를 인견하고, 왕족 회안공 정을 살리타의 둔소(屯所)에 보내 화의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 몽고는 제구유(著古與) 피살사건의 책임을 추궁해왔으나 고려는 이를 금나라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화의를 성립시켰다. 이로써 전쟁은 중단되었고, 다음 해에 살리타는 서북면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남겨두고 철군하였다.
나. 제 2차 침입
고려는 비록 몽고와 화의(和議)하였지만, 이것이 결코 본의는 아니었다. 게다가 몽고에서는 도단(都旦)을 다루가치로 삼아 개경에 파견하였는데, 그의 오만한 행동과 과중한 공물 요구는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당시 무신정권의 우두머리이던 최우(崔瑀)는 몽고군이 해전에 익숙하지 못함을 이용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각지의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신시키는 등 몽고에 대한 항전태세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이를 전후하여 내시(內侍) 윤복창(尹復昌)과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 민희(閔曦)가 각각 서북면과 서경에서 다루가치를 습격하는 일이 차례로 발생하였다.
고려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즉 1232년에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은 고려정부에 대하여 개경 환도를 요구하면서 경상도에까지 남하하여 약탈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항전을 계속하였고 이해 12월에는 수원의 속읍인 처인성 (處仁城: 지금의 龍仁)에서 김윤후(金允侯)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함으로써, 몽고군은 서둘러 철수하였다. 또한 다음 해에는 북계병마사 민희가 최우의 가병(家兵) 3천 명을 이끌고 서경을 공격하여, 몽고의 1차 침입 때 살리타에게 투항한 뒤 몽고군의 길잡이가 되었던 홍복원(洪福源) 일당을 요양(遼陽)지방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고려 안의 몽고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다. 제 3차 침입
고려에서 패퇴한 직후, 약 2년 동안에 몽고는 주위의 동진국(東眞國) 과 금을 정벌하는 데 힘을 기울이느라 미처 고려에 신경을 쓰지 못하다가 1235년부터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그런데 이번의 침략은 전날의 패퇴에 대한 보복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어, 당구(唐古)를 주장으로 한 몽고군은 고려에 화의를 교섭해오는 일이 없이 경상, 전라도에까지 침공하여 전국토를 유린하였다.
『高麗史․世家, 卷第二十三, 高宗二十三年』<그림 5-3> |
고종 23년(1236) 병신년, 겨울 10월 갑오일 전라도지휘사인 상장군 전보구(田甫龜)가, 몽고군이 전주(全州)와 고부(古阜: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군)지역까지 당도했다고 보고했다. 무술일 내전(內殿)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계축일 의업(醫業) 합격자인 부령(扶寧: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의 별초(別抄) 전공렬 (全公烈)이 고란사(高闌寺) 산길에 군사를 매복, 몽고군 기병 20명을 습격해 두 명을 죽이고 병장기와 말 20필을 빼앗았다. 조정에서는 전공렬에게 상을 내리고 그의 본업인 의업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
冬十月 甲午 全羅道指揮使上將軍田甫龜報, 蒙兵至全州·古阜之境. 戊戌 設消災道場于內殿. 癸丑 扶寧別抄醫業擧人全公烈, 伏兵於高闌寺山路, 邀擊蒙兵二十騎, 殺二人, 取兵仗及馬二十餘匹. 賞公烈, 聽本業入仕. |
<그림 5-3> 『高麗史․世家, 卷第二十三, 高宗二十三年』
1236년(고종 23) 10월 1일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 상장군 전보구(上將軍 田甫龜)의 보고에 의하면 몽고병이 전주(全州) 고부(古阜)땅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 태인 지역은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의병들의 저항이 있었던 것 같다.
1238년에 신라 이래의 국보인 황룡사탑(皇龍寺塔)이 소실되었고,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여 몽고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조판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몽고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하고 피해가 늘어가자 결국 고려는 장군 김보정과 어사(御史) 송언기를 몽고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고 철군을 요구하였다. 이에 몽고는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해에 모두 철수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入朝)하는 것이 역사상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고종이 모후 유씨(柳氏)의 상중임을 빙자하여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의 동생이라 칭하고 대신 입조하도록 하였다.
그 다음 해에 신안공 전은 무사히 귀국하였지만, 이때 몽고는 사신을 함께 보내 섬에 피신한 백성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고 그 수를 점검하여 보고할 것과 독로화(禿魯花, 인질)를 보낼 것, 그리고 반몽 행위를 한 고려의 관원들을 몽고로 압송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신안공 전의 종형인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의 친아들이라 하여 귀족의 자제 10인과 함께 인질로 보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몽고에서 오고타이가 죽고 칸위(汗位) 계승을 둘러싼 분규가 일어났으므로 고려에 더 이상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고, 따라서 고려로서는 독로화의 파견만으로 몽고와의 화의(和議)를 당분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라. 제 4·5차 침입
몽고에서 약 5년간의 분규 끝에 구유구(貴由: 뒤의 定宗)가 즉위하여 국내의 안정을 이루게 되자, 그 다음 해인 1247년에 고려의 국왕친조와 출륙환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이유로 다시 고려를 침입했다. 이때는 아무간(阿母侃)을 주장으로 하여 몽고군이 고려의 북부지방에까지 이르렀으나, 다음 해에 몽고에서 구유구가 죽고 칸위 계승을 둘러싼 분규가 재현되었으므로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따라서 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1251년(고종 38) 내분 끝에 즉위한 망구(蒙哥)는 곧바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국왕 친조와 출륙환도를 재촉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다음해 1월에 이현(李峴)을 몽고에 파견하여 6월에 국왕이 입조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자 몽고에서는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국왕이 직접 출륙하여 맞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무신집정 최항의 반대로 국왕의 출륙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몽고 사신은 이를 힐난하면서 되돌아가버렸다. 이 일이 있은 다음 해인 1253년에 몽고는 에구(也窟)를 주장으로 하여 다시 고려를 침입하였다. 에구는 군사적인 공략을 전개하는 한편 강화도에 사신을 보내와 국왕의 출륙을 촉구하였는데, 고려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지만 역시 최항의 반대로 교섭이 결렬되고 두 나라 사이에 또다시 심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고려 정부는 충실도감(充實都監)을 두고 군사력을 보강하며 항전의 결의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치열한 항쟁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은 전국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하였고, 고려의 피해는 날로 커지게 되었다. 결국 고려는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종이 강화도를 나와 에구의 사신을 맞이하였고, 뒤이어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몽고에 보내 국왕의 친조(親朝)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로써 화의가 이루어져 전쟁은 중지되었다.
『高麗史․世家, 卷第二十四, 高宗四十年』 고종 40년(1253) 계축년, 8월 계유일 몽고군이 동주산성(東州山城)11)을 함락시켰다. ○ 이 달에 몽고군의 척후 3백 기가 전주성(全州城) 남쪽 반석역(班石驛)까지 당도했으나 별초지유(別抄指諭) 이주(李柱)가 공격해, 적군 절반 이상을 죽이고 말 20필을 노획했다. 癸酉 蒙兵陷東州山城. 是月, 蒙兵候騎三百餘, 至全州城南班石驛, 別抄指諭李柱, 擊殺過半, 獲馬二十匹.
마. 제 6차 침입
몽고군이 철수한 지 약 반년이 지난 1254년 7월에 몽고는 또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 정부의 개경환도(開經還都)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쟈랄타이(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하여 전국토를 유린하였다. 이때 고려의 피해는 실로 막심한 것이어서, 한 해 동안 적의 포로가 된 사람이 20만 명이 넘고 살육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의 대항도 결코 만만치 않아 경상, 전라도의 별초군(別抄軍)을 뽑아서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각 지방에서는 별초군과 백성들이 끈질기게 항전하여 몽고군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쟈랄타이는 고려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면서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에서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시행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1256년에 몽고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주로 서해안 지역을 공략하면서 강화도 갑곶(甲串)의 맞은편에 군사를 집결시켜 강화도의 고려정부를 위협하였다. 이에 고려수군과 백성의 분전(奮戰)으로 몽고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때 마침 몽고에 사신으로 파견된 김수강(金守剛)의 외교활동이 효과를 거두어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바. 제 7차 침입
몽고군이 철수한 뒤에도 고려는 국왕친조와 출륙환도를 지연시켰고, 1257년에는 몽고에 보내던 공물마저 중단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고의 쟈랄타이는 같은 해 6월에 다시 침공하였다. 이때 몽고군은 황해, 경기, 충청도 등지를 약탈하는 한편, 국왕 대신 태자가 입조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고려에서도 이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곧 강화가 성립되는듯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 태자의 입조를 시행하지 않고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파견하였으므로 몽고군은 다시 북계에 집결하여 고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258년(고종 45)에 강화도에서 무신집정(武臣執政) 최의(崔竩)가 유경(柳璥), 김준(金俊)에게 살해당함으로써 항전을 고집했던 최씨 정권이 붕괴되었고, 최자(崔滋), 김보정(金寶鼎) 등에 의한 강화론(講和論)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로부터 몽고와의 화의교섭이 급속하게 진전되어, 이해 5월에 고종이 강화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몽고의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박희실(朴希實)과 조문주(趙文柱)를 몽고에 보내 최의를 제거하였음을 알리고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곧 실행할 것을 약속한 뒤 다음 해 3월에 고려 태자 전(倎: 훗날 元宗)을 몽고에 파견하였다.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 화의(和議)가 성립되고 28년 동안 계속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화의가 고려의 일방적인 항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고려는 태자입조(太子入朝)의 대가로서 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을 것, 몽고사신의 빈번한 왕래를 자제할 것, 개경환도(開京還都)를 재촉하지 말 것, 몽고군을 모두 철수시킬 것, 다루가치를 두지 말 것 등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전쟁 기간에 보여준 고려인들의 끈질긴 저항에 힘입어 얻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제 5절 고려의 멸망과 태인
14세기 후반에 이르면 고려는 점차 국내외적으로 몰락의 징후를 나타내었다. 국내적으로는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와의 대립이 격화되는 한편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은 고려사회를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사회의 혼란을 부패하고 낡은 이상의 권문세족에게 개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고려 말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가 침입해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왜구는 고종 때부터 고려 멸망까지 빈번하게 침략해왔는데, 그중에서도 왜구가 집중적으로 출현했던 시기는 충정왕 (忠定王) 이후 공양왕(恭讓王) 4년까지 약 40여 년간이며, 그중에서도 우왕(禑王) 재위 14년간에 가장 극심하였다. 기록상으로 볼 때, 고려시대 전국적으로 약 592회 정도의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이 중 전라도 지역에 78회 정도의 침입이 있었다.
태인 지역에 왜구가 처음 침입한 것은 우왕 2년 9월의 일로, 왜구 300여 명이 고부․태산 등의 군현을 침범하여 관아를 불사른 뒤, 보안․인의․김제․장성 등지를 침범하고, 다시 전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일이 있었다.
고전번역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6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병진년 전폐왕 우 2년(명 태조 홍무 9, 1376)
“… 추7월 …
○ 왜구가 공주(公州)와 양광도(楊廣道)를 함락시키니 원수 박인계(朴仁桂)가 전사하였다.
이때 왜구가 남쪽 지방에 횡행하여 마침내 부여(扶餘)로 쳐들어와 공주를 함락하고 다시 석성(石城)ㆍ연산(連山)을 침략하므로, 박인계가 맞아 싸우다가 말에 떨어져 피살되니 적은 개태사(開泰寺)를 무찔렀다. 인계는 본래부터 민심을 얻어 당시에 훌륭한 장군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전사를 당하니 서울과 지방이 모두 두려워하여 낙담(落膽)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왜병들은 다시 고부(古阜)ㆍ태산(泰山: 지금의 태인(泰仁)ㆍ흥덕(興德)ㆍ보안(保安: 지금의 부안)ㆍ인의(仁義: 지금 태인의 속현)ㆍ김제(金堤)ㆍ장성(長城) 등의 고을을 침략하고 다시 전주(全州)를 함락시켰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우왕 2년(1376) 병진년11)
• 9월
“…
○ 왜적이 고부(古阜: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군)·태산(泰山: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흥덕(興德: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등지를 침구해 관아를 불사른 다음 다시 보안현(保安縣: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인의현(仁義縣: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김제현(金堤縣: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장성현(長城縣: 지금의 전라북도 장성군) 등지를 침구했다.
○ 우왕이 등신불(等身佛)을 만들고는 승려들을 모아 놓고 궁중에서 점안(點眼)19) 의식을 거행했다.
○ 천변(天變)이 나타나자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
○ 우왕이 말 달리기와 매사냥을 연습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외적으로도 대륙에 정세 변화가 있었는데, 이는 한인(漢人) 반란군의 한 사람이었던 주원장(朱元璋)이 남경(南京)에서 명(明)을 세우고 원(元)의 수도였던 북경(北京)을 함락시켜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는 원․명 교체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륙에서의 원․명 교체는 고려에도 대내외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원․명의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反元政策)을, 대내적으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억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공민왕은 대외정책으로 원의 연락기구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철폐하였고, 기철(忌鐵)을 위시한 친원파의 숙청과 옛 관제의 복구를 단행하였으며,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무력으로 철폐하고 실지(失地)도 회복하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이 인사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기관인 정방(政房)을 폐지시켰으며,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등의 과감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들이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져 대립이 격화되었다.
공민왕이 피살되고 우왕이 왕위에 오른 후 1388년(우왕 14), 명에 의한 철령위(鐵嶺衛) 설치 통보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 사이에 변화를 초래시켰다. 친원파는 그렇지 않아도 명(明)의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 등으로 분개하고 있었는데,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영(崔瑩)을 더욱 분개시켰다. 이에 최영으로 하여금 차제에 명이 차지한 요동 정벌을 꾀하게 하였다.
한편 친명파는 요동 정벌의 현실적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이성계(李成桂)를 중심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영(崔瑩) 등의 친원파는 우왕 14년 최영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遼東征伐)을 시도하였다. 원정을 반대하던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서 조민수(曺敏修)를 회유(懷柔), 회군(回軍)하여 개경으로 돌아왔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축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제 세상은 신흥사대부의 세상이 되었다.
신흥사대부들은 정권을 잡자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사전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전제개혁은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으로 창왕(昌王)을 폐지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면서 조준(照準)․정도전(鄭道傳) 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것이 과전법(科田法)으로 법이 시행되자 권문세족들의 사전이 혁파되는 한편 국가의 공전이 확대되었고, 신진사대부 출신의 관료들에게는 관전이 지급되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권의 장악과 더불어 경제권까지 장악하였으므로 새 왕조의 건설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이들 신흥사대부 자체에서도 개혁의 문제로 두 파가 나뉘어졌다. 하나는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 온건개혁파였고, 다른 하나는 조준․정도전․남은(南誾) 등의 왕조를 바꾸려는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였다. 이때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은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개성의 선죽교에서 반대파 정몽주를 격살(擊殺)하게 하였고, 1392년(공양왕 4)에 양위(讓位)를 강요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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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역 고려사』 고부군.
2)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는 고려 사람으로 원나라에 귀화한 이름이니 당시는 고려의 왕실에서도 원의 몽고식 성명을 사용했던 것이다. 최현식,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82.
3) “정읍 청석․청학유적”, 『발굴 그리고 기록』, 100~105.
4) 『정읍 청석․왕림․청학유적, 정읍 태인 오봉농공단지조성사업부지내 발굴(정밀)조사』
5) 권상로, 한국지명연혁고(동국문화사, 1961).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6) 윤병무, “고려시대 주부군현의 영․속 관계와 계관도”, 『역사학보』 18 (1962)
7) 고려 태조23년(940). 역분전을 부여하고, 주군현의 명칭을 고치고, 전국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일련의 통일완성의 일환으로 지방의 세력자에게 토성분정(土姓分定)을 시행하여 성(姓)을 갖도록 하는 정책시행에 따라 많은 세력자들이 성을 갖게 하였다. 토성분정(土姓分定)은 고려 때에 제도적으로 모든 성씨의 근거지(貫籍地)를 정함.
8) 신흥왕조가 들어서면 민심을 얻기 위해 전 왕조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왕족이 늘어가고 신흥귀족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농지가 농민이 아닌 지배세력에게 쏠리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수탈일 수도 있고, 매입일 수도 있다.
9) 윗사람의 명령이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하는 사람.
10) 『국역 고려사』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1)
11) 『국역 고려사』 세가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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