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태창리 피향정 내 비석군(泰昌里 披香亭 碑石群)
소재지: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
피향정(披香亭) 고비군(古碑群)이라고도 한다.
보물 제289호로 지정된 조선 중기의 누정(樓亭)인 피향정(披香亭) 경내에 있는 비석군(碑石群)이다.
모두 21기로, 그중 3기는 파손된 상태이며, 2기를 제외하고는 1970년경 태인면 곳곳에서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원래부터 피향정 자리에 있었던 비석은 1822년(순조 22) 건립한 ‘순찰사 이서구 영세 불망비(巡察使 李公書九 永世 不忘碑)’와 1910년 건립한 ‘군수 홍범식 애민 선정비(郡守 洪侯範植 愛民 善政碑)’이다.
역대현감 선정비 - 피향정 경내에 있음1)
1. 군수 홍후범식 애민 선정비(郡守 洪侯範植 愛民 善政碑)
원래부터 피향정 자리에 있었던 이 비석은 1910년 11월(庚戌 十一月 日)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 ‘군수 홍후범식(郡守 洪侯範植)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라 새겼고, 뒷면에는 ‘흥학선치(興學善治) 향인입비송덕(鄕人立碑頌德) 경술입절(庚戌立節)’이라 기록돼 있다. 이러한 문구는 감곡면 방교리 고비군(古碑群)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내용으로 그가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표기한 문구이다.
홍범식(1871~1910)은 지역 군수 재임 시절 치적이 많았다. 그는 1907년~1909년까지 태인 군수를 지냈으며 1909년 말경부터 충청도 금산(錦山) 군수로 갔다가 이듬해인 1910년 8월 22일에 친일파들에 의해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이 불법적으로 맺은 합병 조약인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금산 객사 후원의 소나무에 목을 매 순절(殉節)했고 이 일로 일제와 친일파들은 우리 민족의 저항을 우려해 한동안 발표를 유보하다가 8월 29일이 되어서야 순종(純宗)으로 하여금 ‘양국(讓國: 나라를 양보(讓步)함을 말하는 것.)’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구한말 태인 군수를 지냈던 괴산 출신의 일완(一玩) 홍범식(1871~1910)에 대한 지역민들의 애민성정비(愛民善政碑)는 지금까지도 여러 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또한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부친이다.
1906년 면암(勉菴) 최익현과 돈헌(遯軒) 임병찬이 발의한 무성창의(武城倡義) 직후로 당시 태인군에서는 출동했던 일본군 수비대들에 의해 수 없이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죽거나 피해를 입었다. 홍범식 군수는 출몰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쫓아다니며 지역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일일이 항변했고 그로 인해 피해는 최소화됐다. 과거 태인 지역에 그의 공로비가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운이 다해가던 구한말의 일제의 강압적인 국정 참여와 아전들의 세도정치는 태인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전들의 탐학뿐만 아니라 의병창의 이후, 수 없이 출몰했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태인군 곳곳의 마을들을 불시에 찾아가 의병전쟁과 관련이 있다는 구실로 무고한 군민들을 잡아다 고문해 죽이는 일이 허다했다. 그 당시 태인 군수로 부임했던 일완(一玩)은 그와 같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 지역에 출동했던 일본군 수비대들을 찾아가 설득하고 회유하는 등 군민들을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다. 그로인해 그가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은 아전들로 군민들에게 일체의 수탈당하지 않는 등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도 시행, 군민들의 칭송이 높았다.
그 때문인지 그 당시 태인 각 지역별로 군민들이 세운 홍범식의 송덕비는 무려 38개에 이르렀다. 현재까지도 태인 박산리 박동마을 입구 1기, 태인 피향정 고비군 1기, 감곡면사무소 앞 1기, 산외면 오공리 야정마을 1기 등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과거 태인군에 속했던 현재의 감곡면과 신태인, 태인, 북면, 칠보, 산내, 산외, 옹동, 내장 지역에는 홍범식에 대한 영세불망비와 선정비가 곳곳에 흩어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작은 돌거북(귀부, 龜趺) 위에 비신(碑身)은 높이 1.51m, 폭은 0.53m, 두께는 0.22m이다.
이와 유사한 선정비가 감곡면에 있는데, 1908년에 건립된 군수 홍범식 휼민 선정비(郡守 洪範植 恤民 善政碑)이다. 무신 9월 일(戊申 九月 日, 隆熙 2年, 1908年)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오석 계통의 이 비석은 1980년경 다른 곳에서 옮겨 본래 방교리 감곡면사무소 모퉁이 도로변에 있던 3기의 고비군과 함께 앞으로 옮세운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현재 비(碑)의 상반신은 결실되어 떨어져나가고 하반(下半) 0.8m정도가 남아 있으며 크기는 넓이 0.32m, 두께 0.09m다. 비석 상반신이 결실된 이유에 대한 구전은 그가 태인 군수를 지냈지만 금산 군수 홍범식이라고 표기돼 있어 후인 들이 표기 오류라고 생각해 결실시킨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자료 내용 - 국문. 한일 강제 병합 당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이 할머님께 보낸 편지이다. 당시 금산(錦山) 군수였던 그는 9월 18일에 괴산에 계신 할머님께 안부 편지와 함께 괴산에서의 일 등을 물어보고 자주 찾아뵙지 못함을 죄송해 하고 있으며, 한번 금산으로 모실 것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에 '손(孫)범식 상서'라고 쓰여 있다. 홍범식은 1907년 태인 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항일 전투를 전개하자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 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선산에 올라 목매어 자결하였다. 1962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었다.<독립기념관 소장 문서-홍범식 친필 편지(1909)>
2. 순찰사 이공서구 영세 불망비 (巡察使 李公書九 永世 不忘碑)
<그림 > 순찰사 이공서구 영세 불망비 (巡察使 李公書九 永世 不忘碑)3)
원래부터 피향정 자리에 있었던 이 비석은 1822년(純祖 22)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순찰사 이공서구(巡察使 李公書九)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뒷면에 ‘도광 2년 임오 10월 18일 입(道光 二年 壬午 十月 十八日 立) 별유사 추방욱 정용주(別有司 秋芳郁 鄭龍周)’라 새겨져있다.
순찰사 이서구(1754~1825)는 조선 후기 4가시인(四家詩人,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인물로, 1793년(正祖 17)에 전라(全羅) 관찰사(觀察使)로 도임하여 1795년(正祖 19) 4월에 떠났다.
이후 1820년(純祖 20) 10월에 다시 도임하여 1822년(純祖 22) 3월에 떠났다. 비석이 세워지던 그해가 도광(道光) 2년 임오년(壬午年)이다. 하지만 그가 과거 태인현에서 어떤 선정을 베풀고 떠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비문에 없다.
기대석(基台石) 위에 관석(冠石)이 있으며 비신(碑身)의 높이 64㎝, 폭 57㎝, 두께 20㎝이고 팔작지붕형 옥개석이 얹혀 있다.
3. 순찰사(巡察使) 이서구(李書九) 불망비(不忘碑) 다음에 서 있는 비석 3기는 모두 전체 비석의 1/3만 남아 있는 상태로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다.
현감(縣監) 이후○○(李侯○○) - 파손된 세 번째 비석
석회암제, 1부분씩 남아 있다.
좌측의 비석은 현감 이후(縣監 李侯)가 남아 있고 좌우에 있는 비문 중 숭정(崇禎) 갑신(甲申)이라는 연기가 보인다. 갑신은 1644년에 세워진 것이다(인조 22년).
비석 우측에 甲申 2월 3일 도임(到任)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1644년(仁祖 22, 甲申) 2월에 도임한 – 1646년(仁祖 24, 丙戌) 7월 기귀(棄歸)한 현감 이성징(李星徵)의 비로 추정된다. 또한 이 비석(윗부분 조각)과 네 번째 비석(아랫부분 조각)을 이어 보면 석재 종류와 글자체(月, 三자 같은 글자체)와 문장 배열이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파손되기 전에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높이는 68cm, 폭 55cm, 두께는 18cm이다.
4. 청백선정비(徵淸白善政碑) - 파손된 네 번째 비석
석회암제, 1부분씩만 남아 있다.
중앙(中央)에 있는 비석은 ‘징청백선정비(徵淸白善政碑)’가 남아 있고 그 좌우에 각 2행씩의 글이 있다. 이에 의하면 병신(丙申)년에 세워진 것이다.
선생안을 참조하여 징(徵)자 글자가 들어간 현감 이성징(李星徵)으로 추정함. 파손된 세 번째 비석의 아랫조각으로 보임.
현재 높이는 68cm, 폭은 62cm, 두께는 18cm이다.
5. 파손된 다섯 번째 비석
석회암제, 1부분씩만 남아 있다. 우측의 비석은 ‘병사민(兵使閔)’이 남아 있다.
현재 높이는 62cm, 폭은 14cm이다.
6. 정읍 관찰사 김공병교 영세 불망비(觀察使 金公炳喬 永世 不忘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군들 중 하나로 1857년에 세워진 것이다.
전면에는 ‘관찰사 김공병교 영세 불망비 (觀察使 金公炳喬 永世 不忘碑) 정사 사월(丁巳 四月 日)’이라고 표기돼 있다.
정사년(丁巳年)이면 이 비석은 1857년(哲宗 8)에 세운 비석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병교 관찰사는 철종(哲宗) 7년에 도임해 철종(哲宗) 8년에 전임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적은 명확하게 알려진바 없다.
비신의 높이는 1.47m, 폭 0.51m, 두께 0.21cm이다.
7. 순찰사 서공기순 청백 선정비(巡察使 徐公箕淳 淸白 善政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로 1845년(憲宗 11)에 세워진 것이다.
‘순찰사 서공기순 청백선정비(巡察使 徐公箕淳 淸白 善政碑) 을사 10월 일(乙巳 十月 日)’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비석은 1845년(憲宗 11)에 세운 비석이다.
조선시대 순찰사란 도(道)의 군비 태세를 살피던 직책을 말한다. 지방의 병권을 장악하였던 종2품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겸직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권설직(權設職: 임시직)으로 대개는 지방의 병권(兵權)을 가졌던 행정관이 이를 겸직했다.
서기순 순찰사는 1842년 8월에 도임하여 그해 9월 3일에 떠났다. 전주 풍남문의 ‘풍남문’ 편액은 1842년(헌종 8)에 전라도 관찰사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높이는 1.52m, 폭은 0.54m, 두께는 0.18m이다.
8. 현감 홍후계적 영세 불망비(縣監 洪侯啓迪 永世 不忘碑)
숙종(肅宗)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명확한 판독은 되지 않지만 비 전면에는 ‘현감 홍후계적 영세불망비(縣監 洪侯啓迪 永世 不忘碑)’라는 표기가 있으며 비석 좌우에는 ‘선○일주(善○一周)’, ‘태품중신○유천춘(太禀重新○流千春)’이라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홍계적 현감은 1716년(肅宗 42년) 정월에 부임했다가 바로 교리(敎理)로 전임됐다.
높이 1.58, 폭 0.5m, 두께 0.17m
9. 송지렴 현감 선정비(宋之濂 縣監 善政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숙종(肅宗) 때로 추정한다. 비각 상단이 마멸되어 판독하기는 힘들지만 현감 송지렴은 재임 기간이 1660년(顯宗 1) 3월에서 7월까지다.
비면(碑面)에 ‘현감 송후지렴 청백선정비(縣監 宋侯之濂 淸白 善政碑)’라 새겨져 있다.
높이 1.73m, 폭 0.73m, 두께 0.18m이다.
10. 현감 김후수일 청덕 강명휼민 선정비(縣監 金候壽一 淸德 剛明恤民 善政碑)
연대는 미상이나 숙종(肅宗) 때로 추정된다. 비신(碑身)의 윗부분이 훼손돼 명확한 판독은 힘든 상태지만 ‘현감김(縣監金)’이 없는 체 ‘○○○후수일(候壽一) 청덕 강명휼민 선정비(淸德 剛明恤民 善政碑)‘라 새겨져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김수일 현감이 아닌가 한다. 현감 김수일은 1669년(顯宗 10)∼1672년(顯宗 12) 사이에 재임했다. 태인현지(泰仁縣誌)에는 갈성진민 포승계입비(竭誠賑民 褒陞階立碑)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신(碑身)의 현재 높이는 124m, 폭 0.73m, 두께 0.18m이다.
11. 나염 현감 선정비((羅袡)羅袖? 縣監 善政碑)
비신이 절반 정도가 훼손된 상태로 명확한 판독이 힘들다.
비면에는 현감 나염 선정비(縣監 羅冉 善政碑)로 추정되는 ‘나후염 휼민 선정비(羅侯袡 恤民 善政碑)’이라는 문구가 간신히 보인다. 이것이 나염 현감 선정비(羅袡 縣監 善政碑)가 맞다면 입석 시기는 현종(顯宗) 때로 알려져 있으나 효종 때로 추정된다.
현감 나염는 1649년(仁祖 27) ∼1653년(孝宗 4년)까지 재임하였다.
비석 높이 1.16m, 폭은 0.59m, 두께는 0.18m이다.
12. 관찰사 민공정식 청백 영세 불망비 (觀察使 閔公正植 淸白 永世 不忘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이다.
좌우에는 ‘계파복정일성함희(啓罷卜定一省咸凞), 음제재결 만구풍일(蔭除災結 萬口豊溢)’이라고 표기돼 있다. 측면에 임진 8월 일(壬辰 八月 日)이라는 기록으로 미뤄 이 비석은 1892년(高宗 29)에 세운 비석임을 밝히고 있다.
높이는 1.30m, 폭은 0.43m, 두께는 0.22m이다.
13. 어사 성공이호 거사비(御使 成公彛鎬 去思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이다.
전체적인 훼손은 없지만 비각 자체가 풍화작용에 의해 비면 전체 문구의 해석이 불가능한 상태다.
희미하게 알 수 있는 문구로 미뤄 비면에는 ‘어사 성공이호 거사비(御使 成公彛鎬 去思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신(碑身) 좌측에는 ‘결언제해(決堰除害) 무덕불○(無德不○) 갑자 정월 일(甲子 正月 日)’이라고 기록돼 있다.
비석의 건립 시기는 1864년(高宗 원년)에 세운 것이다.
높이는 1.18m, 폭 0.42m, 두께는 0.19m이다.
14. 현감 정후이원 영세 불망비(縣監 鄭侯履源 永世 不忘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이다.
1885년(高宗 19)에 세운 것으로 비면에는 ‘현감 정후이원 영세 불망비 (縣監 鄭侯履源 永世 不忘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좌우에는 ‘유자결언(惟茲決堰)’이라고 표기돼 있다.
정이원 현감(鄭履源 縣監)에 대한 특별한 공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이원 현감은 1882년(고종 19)에 도임했던 이정식(李定植) 현감(縣監)의 후임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정식(李定植) 현감(縣監)은 피향정 경내에 공적비는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1871년(高宗 8)부터 시작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書院 撤廢令)에 맞서 대원군의 중형이던 이최응(李最應)과 무성서원(武城書院)의 복호(復戶) 환원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이정식(李定植) 현감(縣監)에 대한 공적비는 현재 무성서원 외삼문(外三門) 밖에 세워져 있으나 피향정 경내에는 없다.
비신의 높이는 1.26m, 폭은 0.4m, 두께는 0.14m이다.
15. 어사 이공후선 구폐 불망비(御史 李公後善 絿弊 不忘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이다.
‘어사 이공후선 구폐 불망비(御史李公後善絿弊不忘碑) 계해 2월 일(癸亥 二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비각 상부 1/3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이는 지금은 사라진 감곡면 통석리 고비군(甘谷面 通石里 古碑群)에 세워져 있던 1863년(哲宗 14)에 세워진 비석으로, 이듬해 피향정 인근 태인 지역에 세워져 있던 것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음을 시사한다.
어사 이공후선 영세 불망비(李公後善 永世 不忘碑)는 과거 태인 지역 전역에 분포돼 있다.
이중 태인 박산리 고비군(朴山里 古碑群)의 1862년(임술년 11월 일) 비석과 감곡면 방교리(甘谷面 芳橋里)의 1862년(임술년 11월 일)은 비각의 건립 시기가 가장 빠르고 건립 시기도 비슷하다.
높이 1.10m, 폭 0.49m, 두께는 0.18m.
16. 현감 김후이회 영세 불망비(縣監 金侯履會 永世 不忘碑)
정확한 연도가 표기돼 있지 않아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비면(碑面)에 ‘현감 김후이회(縣監 金侯履會)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다. 1814년(純祖 14) 7월 – 1819년(純祖19) 6월까지 재임하였다.
현존하는 태인 동헌을 1977년 보수 공사할 때 발견된 상량문으로 미루어 1816년(순조 16) 4월에 현감 김이회(金履會)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신의 높이는 0.93m, 폭 0.16m.
17. 어사 이공후선 영세 불망비(御史 李公後善 永世 不忘碑)
비석은 비교적 보관이 잘되었다.
전면 우측 하단에 ‘임술 십이월(壬戌 十二月)’이라는 문구로 미뤄 이전 이공후선 구폐 불망비(御史李公後善絿弊不忘碑) 보다도 이전에 세워진 비각이지만 상태는 이 비석이 더 양호한 편이다.
또한 감곡면사무소 앞 도로변에 위치한 4기의 고비군 중에서 ‘암행어사 이후선 영세 불망비(暗行御史 李後善 永世 不忘碑)’가 있는데 본래 방교리 감곡면사무소 모퉁이 도로변에 있던 것을 앞으로 옮겨 세운 것으로 1862년(哲宗 13) 임술년 9월(壬戌 九月 日)에 건립한 비석이다. 비문 앞에 은동면(銀洞面)이라고 표기된 내용은 현재의 감곡면 옛 지명이 은동면이었음을 의미한다. 암행어사 이후선(1813~?) 영세불망비에 대한 건립 배경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1862년 당시 전라도 특히 태인군 일대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태인 군민들의 현안을 해결함으로써 지역민들이 영세불망비를 세웠 다는 구전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 어떤 형태의 선정을 베풀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아쉽다.
비석의 높이는 1.35m, 넓이 0.47m, 두께 0.18m이다.
18. 현감 민후관호 청덕 선정비 (縣監 閔侯觀鎬 淸德 善政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이다.
좌우에는 ‘염결방총(廉潔芳叢) 조기시진(漕饑施瞋) 위정이인(爲政以仁) 보구사민(普救斯民) 활천유복(活千猶福) 황만기인(況萬其人) 어희영덕(於戲令德) 세세유신(世世惟新)’이라 표기하고 측면에 ‘무인 12월 일(戊寅 十二月 日)’이라 새겼다.
이 비는 1878년(高宗 15)에 세운 비석이다.
태인현지에는 현감 민관호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일정 부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몇 해에 걸쳐 계속됐던 흉년(凶年)으로 인해 많은 군민들이 굶주리게 되자 이들을 먹여 위기에서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천명의 인명을 구제해 만 명의 군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렸다.(병자겸년 손품진민 일경뢰안(丙子謙年 損禀賑民 一境賴安)’는 내용이다. 그의 군민들을 구제했던 치적(治跡)이 고스란히 고비(古碑)에 나타나 있는 셈이다.
따라서 비신은 윗면이 둥글고 높이 1.09m, 폭 41cm, 두께는 14cm이다.
또한 감곡면사무소 앞 도로변에 위치한 4기의 고비군 중에서 ‘현감 민관호 청덕 청정비 (縣監 閔觀鎬 淸德 淸政碑)’가 있는데 본래 방교리 감곡면사무소 모퉁이 도로변에 있던 것을 앞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1879년(高宗 16) 기묘년 3월(己卯 三月 日)에 건립한 비석이다. 비석의 높이는 1.10m, 넓이 0.40m, 뚜께 0.14m이다. 그러나 현감 민관호의 청덕 청정비와 관련된 이야기 역시 구전되는 내용이 없어 그가 어떤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들이 청정비를 세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역민들의 구전이 아쉬움으로 남는다.4)
19. 현감 신후석관 청덕비(縣監 申侯錫寬 淸德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이다.
비석 상단이 1/3 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나머지 문구를 통해서 이 비석이 ‘현감 신후석관 청덕비(縣監 申侯錫寬 淸德碑)’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좌측에는 ‘인위세지망(人爲世之望)’이라고 표기하고 그 밑에 ‘을유 7월 일(乙酉 七月 日)’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은 1849년 7월에 세워진 비석이다.
태인현지에도 그는 1847년(憲宗 13)에 도임해 1849년(憲宗 15)에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 1.11m, 폭 0.52m, 두께 0.17m이다.
20. 순찰사 김공흥근 영세 불망비 (巡察使 金公興根 永世 不忘碑)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 군들 중 하나이다.
비신 상단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태인현지에 나타나는 김흥근 순찰사는 1835년(憲宗 1)에서 1837년(憲宗 3) 3월까지 순찰사를 역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1837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1.15m, 폭은 0.55m, 두께는 0.18m이다.
21. 현감 조후규순 영세 불망비(縣監 趙侯奎淳 永世 不忘碑)
1894년 당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촉발시키는 원흉이 됐던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세운 비석이다.
비면에는 ‘현감 조후규순 영세 불망비(縣監 趙侯奎淳 永世 不忘碑)’라는 문구가 큰 훼손 없이 남아 있으며 뒷면에는 ‘계사 2월 일(癸巳 二月 日) 자 병갑이 고부 군수(子 秉甲以 古阜 郡守) 건각개수(健閣改竪)’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서 계사년은 1893년(高宗 30)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에 세워진 비석임을 알 수 있다.
훗날 전봉준(全琫準)은 공초에서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이 아비의 비각을 세운다고 군민들로부터 2천 냥을 거둬들였다고 밝힌바 있다. 이 비각에 대해 여운용 전 태인유적보존회장은 “본래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며 “동학농민혁명을 거치며 크게 훼손되었을 것 같지만 땅에 파묻혀 있어서 인지,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고 설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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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崔玄植編, 『신편 井州 井邑 人物誌』(1990. 12. 20.), 34.
2) 『全北地方의 善政․功績․紀念碑』 (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도지회, 2012.9.15.), 544~546.
3) 崔玄植編, 『井州 井邑 文化藝術史』(1991. 12. 25.), 117.
4) 『全北地方의 善政․功績․紀念碑』 (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도지회, 2012.9.15.),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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