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절 백제시대(百濟時代)와 태인
백제는 4세기의 중엽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때 크게 발전을 보았다. 이어 백제의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어떤 지방조직을 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제의 지방통치에 대해서는 웅진(현재 충남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난 후의 내용을 중국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도를 고마성(固麻城, 웅진)1) 이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였는데 마치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으로서 전국에 22담로(擔魯)가 있었고 여기에 왕가의 자제와 종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26대 성왕 때 정비된 것으로 보이는 지방통치 제도를 보면 왕도인 사비성(현 충남 부여) 내에는 오부(五部)로 구획하여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라 하였으며, 다시 각부에 오항(五巷)으로 구분하였다. 상부는 동쪽, 하부는 서쪽, 전부는 남쪽, 후부는 북쪽에 각각 위치하였으며, 일부에 백인의 병사가 주재하였는데 오부의 군사를 합치면 2천 5백 명이 된다.
지방은 오방제(五方制, 중방, 동, 서, 남, 북방)2)가 실시되었으며, 지방에는 방성(方城) 이 있어 방성이 다섯이고, 방성에는 방령(方領) 각 1인씩을 두었는데 제2품관인 달솔(達率)을 임명하였으며, 그 밑에 방좌(方佐)라고 하는 2인의 좌관(佐官)이 이를 보좌하였다.
각 방은 군성을 관할하였는데 많을 때는 10군, 적을 때는 6, 7군이 되었다. 각 군에는 3인의 부장을 두었는데 덕솔(德率, 4품) 급을 임명하였고, 방성 내외의 평민 및 나머지 산성은 방령이 이를 통관하였다. 각 방성은 험준한 산을 등지고 쌓아서 백제의 지방 행정은 군사적인 임무와 더불어 이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오방 중 태인 지방과 관련이 있는 중방의 고사성(古沙城)은 지금의 고부를 비정(比定)하고 있다.
백제의 관제에 대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건국 초에는 확연히 정비된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좌보(左輔)·우보(右輔)·좌장(左將) 등의 관직이 존재한다. 좌장은 240년(고이왕 7)의 기록에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아 병마사(兵馬事)를 맡긴 점과, 245년(고이왕 12)에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의 변방민(邊方民)을 쳐 뺐었다는 내용에서 대외 정벌 시 군사를 지휘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우보는 기원전 17년(온조왕 2) 기록에 왕의 족부(族父)인 을음(乙音)을 우보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맡기었다는 내용에서 좌장과 함께 국가의 군대를 관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좌보의 경우는 뚜렷하지는 않지만 2대 다루왕 10년 10월조에 보면 동부 출신의 흘우(屹于)가 우보에서 좌보로 승진하는 사례가 보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국가의 정사 일반을 주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백제의 관제는『삼국사기』의 기록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고이왕대에 체계적으로 정비되고 있다. 250년(고이왕 27)에는 1품관으로 6좌평(대신급, 장관급)을 두면서 내신좌평(內臣佐平, 上佐平, 수상격)은 선납사(先納社)로 왕명 출납에 관련된 일을 맡고, 내두좌평(內頭佐平, 재무장관)은 고장사(庫藏事)로 재정에 관한 일을 맡으며, 내법좌평(內法佐平, 禮式長官)은 예의(禮儀)․외교(外交)로 예의에 관한 일을 맡았다. 위사좌평(衛士佐平, 宿衛兵事)은 친위장(親衛長)으로 숙위(宿衛)에 관한 일을 맡고, 조정좌평(朝廷佐平, 司法長)은 형옥(刑獄事)로 사법에 관한 일을 맡으며, 병관좌평(兵官佐平, 국방장관)은 병마사(兵馬事)로 외방의 병마(兵馬, 軍事)에 관한 일을 맡았다. 또한 달솔(達率, 2품)·은솔(恩率, 3품)·덕솔(德率, 4품)·천솔(仟率, 5품)·내솔(奈率, 6품)의 ‘솔(率)’류와 장덕(將德, 7품, 의대는 紫帶)·시덕(施德, 8품, 의대는 皀帶)·고덕(固德, 9품, 의대는 赤帶)·계덕(季德, 10품, 의대는 靑帶)·대덕(對德, 11품, 의대는 黃帶) 등의 ‘덕(德)’류 및 문독(文督, 12품, 의대는 黃帶)·무독(武督, 13품, 의대는 黃帶) 등의 ‘독(督)’류, 그리고 좌군(左軍, 14품, 의대는 黃帶)·진무(振武, 15품, 의대는 黃帶)·극려(克虞, 16품, 의대는 黃帶) 등을 두었다. 고이왕은 곧이어 2월에 영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의(紫衣, 자주색의 옷)를 입고 은화(銀花)로 관을 장식하며, 11품 이상은 비의(緋依, 비취색의 옷)를 입으며, 16품 이상은 청의(靑衣, 청색의 옷)를 입도록 하였다는 내용에서 관제의 정비와 함께 관리들의 복제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의 관부는 중국 측의 자료인 『주서(周書)』에 보면 뒤에 내관과 외관으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내관에는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京部)·외료부(外寮部)·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악부(樂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後宮部) 등의 12개의 관서가 있으며, 외관으로는 사군부(司軍部, 軍部)·사도부(司徒部, 文敎部)·사공부(司空部, 土木部)·사관부(司冠部, 司法部)·점구부(點口部, 戶口部)·외사부(外舍部, 外戚部)·객부(客部, 外交部)·주부(綢部, 財務部)·일관부(日官部, 天文部)·도시부(都市部, 市?部) 등의 10개의 관서가 있다’라고 하여 12개의 궁내 관서와 10개의 중앙 정무관서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의 태인은 대시산군(大尸山郡)과 빈굴현(賓屈縣, 賦城縣)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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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청남도 공주에 있었던 백제의 수도.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로부터 수도인 한성(漢城)을 빼앗긴 후에 옮겨 세운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이다. 브리태니커.
2) 백제 후기에 실시한 지방 제도. 성왕이 서울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서울을 5부, 전국을 5방으로 나눈 제도이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