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태인지역의 출판 인쇄문화
문화의 전파와 발달은 서적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져 왔으며, 초기에는 필사(筆寫)에 의하여 서적의 전파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본(寫本)에는 오자(誤字)와 탈자(脫字), 탈문(脫文) 등이 생기게 되어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고 다량 출판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쇄가 발명되었다.
조선시대에 전국 군(郡) 단위 이상의 각 고을마다 대부분 책판이 소장되어 있었고 태인지역도 목활자나 서책을 간행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이를 지역의 문화유산이나 전통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실제 간행된 서책의 규모, 종류, 실존여부 등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1. 태인지역의 고인쇄 문화
조선 시대에는 태인지역이 동진강 지류인 대각천(태인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호남평야의 일부를 차지하는 곡창지대로 인쇄출판에 필수적인 경제적, 문화적 요소를 충족할 수 있는 환경이 확보될 수 있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남창(南倉), 산창(山倉), 창삼(倉三) 등에 모아 서해고 보냈으며, 당시에는 이곳이 부안, 고부, 정읍, 김제, 금구, 임실, 순창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발달하여 호남평야 지역의 교통중심지였다.1)
한편 조선 중기 이후 호남지역은 유학이 크게 진흥되어 사림을 형성하게 되었고, 호남사림의 형성이후 향촌사회에 유학이 널리 보급되어 향촌에서 선현을 봉사하고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서원과 사우의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배향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문집, 실기의 간행, 강학교재나 유교서 간행 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지역 인쇄출판문화의 바탕을 형성하게 되었다.
태인의 경우 대표적 서원으로는 무성서원(武城書院)과 남고서원(南皐書院) 등을 들 수 있으며,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과 더불어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이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다. 특히 이항은 당시의 호남사림의 거유인 기대승, 김인후, 노수신 등의 인물과 고유하였고 그의 문하에 많은 제자를 키워내어 호남사림의 주요 학맥을 형성하였다.
유교관련 문헌 뿐 아니라 불서(佛書)의 간행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사찰로 용장사(龍藏寺)가 있다. 고을의 남쪽 운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 운주사(雲住寺)로도 불리던 곳인데 17세기 중엽 대규모의 불경간행이 이루어졌던 사찰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 지리, 사회적 배경을 지닌 태인 지역은 당시 서책을 간행하기 위한 전제적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의 전파와 발달은 서책을 매개로 대부분 이루어졌으며, 종교적 신안의 대상이나 그 구현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인쇄물은 문화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랜 기간 동안 그 사상적 결과물이 필사(筆寫), 목판인쇄, 활자인쇄 등여러 방법을 통하여 끊임없이 유통되었고, 이는 곧 책판의 제작이나 지방목활자에 의한 서책 간행으로 이어지며 그 지역의 인쇄문화를 꽃 피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지방에서는 학파나 문중을 중심으로 활발한 인쇄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지방관으로 임명된 사대부와 양반관리들은 그들의 학파나 가문을 위한 인쇄 출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고, 아울러 중앙에서 보내오는 경세치민(經世治民)에 필요한 서적도 많이 출간하였다.
태인에서 인쇄가 시작된 시점은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태인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전적(典籍)들은 문헌의 기록과 실물의 출현으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왕조실록의 각종 기사와 『고사촬요(攷事撮要)』의 팔도책판(八道冊板) 및 『鏤板考』, 그리고 여러 종류가 남아있는 각종 책판목록류(冊板目錄類)가 그것이다. 태인지역도 이러한 목록에 수록된 책판의 실물이 전해지기도 하며, 책판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에 인출(印出)하여 서책으로만 남은 것도 있다.
<표 1> 태인지역 소장책판이 수록되어있는 책판목록 | |||||
번호 |
책판목록 |
편저자 |
년도 |
수록책판종수 |
판본 |
01 |
攷事撮要 |
魚叔權 |
1576 |
2 |
乙亥字本 |
02 |
攷事撮要 |
魚叔權 |
1576 |
2 |
乙亥字本覆刻 |
03 |
攷事撮要 |
魚叔權 |
1583 |
8 |
木版本 |
04 |
攷事撮要 |
許篈 續選 |
1583 |
8 |
筆寫本 |
05 |
古冊板有處攷 |
|
16세기말(20世紀寫) |
3 |
筆寫本 |
06 |
冊板置簿冊 |
|
1740년 |
7 |
筆寫本 |
07 |
三南所藏冊板 |
|
1743년 경 |
2 |
筆寫本 |
08 |
諸道冊板錄 |
|
1750년 경 |
5 |
筆寫本 |
09 |
完營冊板目錄 |
|
1759 |
10 |
筆寫本 |
10 |
各道冊板目錄(延) |
|
1778년 경 |
3 |
筆寫本 |
11 |
鏤板考 |
徐有榘 |
1976 |
3 |
筆寫本 |
12 |
林園十六志京外鏤板 |
徐有榘 |
|
3 |
筆寫本 |
13 |
各道冊板目錄(奎) |
|
1840 |
18 |
筆寫本 |
14 |
冊板錄(尹) |
|
|
7 |
筆寫本 |
15 |
冊板錄 |
|
|
13 |
筆寫本 |
16 |
藏板錄 |
|
19세기 |
14 |
筆寫本 |
17 |
完營客舍冊板目錄 |
|
|
13 |
筆寫本 |
18 |
泰仁邑誌 |
|
|
3 |
筆寫本 |
조선전기 태인간행 서책으로 전해지는 실물자료는 매우 드물다. 인쇄방식도 대부분이 목판인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책판목록으로 기록이 남아서 전해지는 것과 일부 실물로 그 상황을 대략 짐작할 뿐이다. 1576년 을해자본 『고사촬요(攷事撮要)』에 실린 것으로 『상례초록(喪禮抄錄)』, 『삼괴당집(三魁堂集)』이다. 1583년 허봉(許篈)이 속선(續選)한 목판본 『고사촬요(攷事撮要)』에는 위의 2종 보다 6종이 더 많은 8종의 책판이 실려 있으며 추가된 6종의 책판은 『삼괴속집(三魁續集)』, 『정씨가숙(程氏家熟)』, 『영천병풍서(靈川屛風書)』, 『퇴계병풍서(退溪屛風書)』, 『용재집(容齋集)』, 『팔도지도(八道地圖)』 등으로 모두 태인의 책판이다.
8종의 책판과 『고사촬요(攷事撮要)』에 기재되지 않고 실물자료로 남아 있는 것을 합하면 조선전기 태인의 간본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현전하는 자료로 『고사촬요(攷事撮要)』에 기재되어 있지 않고 실물이 남아있는 자료로는 1530년 영천사(靈川寺)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1533년 청룡산사(靑龍山寺)에서 간행한 『미륵예참(彌勒禮懺)』, 1549년 태인현에서 간행한 『고령세고(高靈世稿)』가 있다. 영천사는 태인의 모악산(母岳山)에 있던 사찰로 태인의 옹동면 상산리 영천동에서 동쪽으로 10정(町)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사촬요(攷事撮要)』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간본의 서명이 밝혀진 자료를 중심으로 주요한 조선 전기 태인간본의 상황을 정리하면 모두 11종으로 그 내용은 <표 2>와 같다.
<표 > 태인의 조선전기 주요 간본 | ||||||
번호 |
서명 |
편저자 |
판본 |
간행지 |
년도 |
비고 |
01 |
妙法蓮華經 |
|
木版本 |
泰仁 靈川寺 |
1530 |
|
02 |
彌勒禮懺 |
|
木版本 |
泰仁 靑龍山寺 |
1533 |
연세대 |
03 |
高靈世稿 |
|
木版本 |
泰仁縣 |
1549 |
日本尊經閣文庫 |
04 |
(喪禮抄錄) |
|
木版本 |
泰仁 |
1576 이전 |
攷事撮要 |
05 |
三魁堂集 |
申從濩 |
木版本 |
泰仁 |
1576 이전 |
攷事撮要 |
06 |
三魁續集 |
申從濩 |
木版本 |
泰仁 |
1576 ~ 1583 |
攷事撮要 |
07 |
程氏家熟 |
|
木版本 |
泰仁 |
1576 ~ 1583 |
攷事撮要 |
08 |
靈川屛風書 |
申 潛 |
木版本 |
泰仁 |
1576 ~ 1583 |
攷事撮要 |
09 |
退溪屛風書 |
李滉 |
木版本 |
泰仁 |
1576 ~ 1583 |
攷事撮要 |
10 |
容齋集 |
李荇 |
木版本 |
泰仁 |
1589 |
攷事撮要 |
11 |
八道地圖 |
|
木版本 |
泰仁 |
1576 ~ 1583 |
攷事撮要 |
이와 같은 조선전기 태인지역 간본의 특징은 간행의 주체가 대부분 관아이며 그 주제는 문집과 자부(子部)2)의 석가류(釋迦類), 예술류(藝術類) 등이다. 특히 문집의 경우 지역에 부임한 인물의 연고에 의해서 간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관판(官版)으로 간행하는 문집의 일반적 배경과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조선후기 태인은 주변의 큰 고을인 전주나 남원지역에 비하여 비록 많은 서책이 간행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서적간행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17세기 중반기 이후로 접어들면서 관판이 비교적 적은 반면에 서원이나 문중 또는 개인이 보다 활발한 간행활동을 하게 되어 개인문집을 중심으로 한 사가판(私家版)의 간행이 있었고 특정 사찰의 간본이나 방각본의 출판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조선전기에 비하여 훨씬 많은 실물자료가 남아있고 인쇄의 방식도 목판인쇄뿐만 아니라 목활자인쇄도 이루어졌다. 3)현재까지 알려진 서책은 조선전기 11종, 조선후기 48종의 목판본과 조선후기 목활자본 2종4) 등이다.
책판목록 |
冊板置簿冊 |
三南所藏冊板 |
諸道冊板錄 |
完營冊板目錄 |
各道冊板目錄(延大) |
古冊板有處攷 |
鏤板考 |
各道冊板目錄(奎) |
冊板錄(尹) |
冊板錄(南) |
完營客舍冊板目錄 |
藏板錄 |
泰仁邑誌 |
책 판명 |
東波集 玄谷集 灵泉集 大文抄史略 學語初讀粉子 一齋集 竹陰集 |
擊蒙要訣 一齋集 |
擊蒙要訣 一齋集 古文眞寶 濂洛風雅 史要聚選 |
吳忠烈公遺稿 擊蒙要訣 老峯集 一齋集 灵源集 玄谷集 東波集 史略大文 語學分字 竹吟集 |
吳忠烈公遺稿 擊蒙要訣 一齋集 |
李一齋集 秋潭集 擊蒙要訣 |
吳忠烈公遺稿 擊蒙要訣 一齋集 |
左傳 禮記 古文前集 古文後集 四書奎璧 濂洛風雅 明律 史要聚選 事文類聚 孔子家語 孔子通記 孝經 經抄 童子習 農家集 救荒方 篆千字 春秋 |
擊蒙要訣 古文眞寶 濂洛風雅 事文類聚 史要聚選 一齋集 吳忠烈公遺稿 |
擊蒙要訣 古文眞寶古文後集 濂洛風雅事文類聚 一齋集 吳忠烈公遺稿 史要聚選 秋潭集 孔子通記 左傳 禮記 四書奎璧 |
濂洛風雅 古文眞寶 濂洛風雅 史要聚選 一齋集 吳忠烈公遺稿 古文後集 孔子通記 禮記 左傳 四書奎璧 童子習 秋潭集 |
擊蒙要訣 古文眞寶 擊蒙要訣 事文類聚抄 史要聚選 學語初讀 榜嚴經 一齋集 靈泉集 竹陰集 鄭玄谷集 吳忠烈公遺稿 秋潭集 老峯集 |
李一齋集 秋潭集 擊蒙要訣 |
종수 |
7 |
2 |
5 |
10 |
3 |
3 |
3 |
18 |
7 |
13 |
13 |
14 |
3 |
2. 지방 최초로 판매용 책, 방각본(坊刻本)을 찍어낸 태인
방각본(坊刻本)5)이란 관각본(官刻本), 사가각본(사가각본) 등에 대칭되는 것으로 상업적인 민간출판 도서를 말한다. 방각본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상업적인 민간 출판 도서로 방간본(坊刊本)·목판본·판본·판각본이라고도 한다. 방각본이란 원래 중국의 남송(南宋) 이후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서점에서 출판한 사각본(私刻本)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방각이라는 용어가 일본인 서지학자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한국의 각서(刻書)를 판주(板主)에 따라 관각(官刻)·사각(寺刻)·사각(私刻)·방각(坊刻) 등으로 나누고, 상인들에 의해 판각되어 서방사(書坊肆)에서 판매된 책자를 방각본이라 했다.
한국에서 방각본 출현은 조선 중기 이후로, 최초의 방각본 등장 연대는 학자마다 약간씩 다르다. 간기(刊記)가 분명한 최초의 서적은 만력(萬曆) 4년(1576) 7월에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고사촬요 攷事撮要』라는 책이다. 방각본은 발행 장소에 따라 경판(京板)·완판(完板)·안성판(安城板) 등으로 구분되는데, 초기 방각본의 형성 원류는 전라도지방에서 잘 드러난다.
초기의 방각본으로는 먼저 호남지방의 태인판(泰仁板), 완판(完板), 금성판(금성판)를 들 수 있다.
태인판은 17세기 후반 전라도 태인(泰仁)에서 간행된 전이채(田以采)·박치유(朴致維) 간본과 손기조(孫基祖) 간본은 민간의 자생적인 영리 출판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기 방각본이다.
전이채는 태인지방의 아전이었다고 하며, 박치유와 함께 공동의 이름으로 간행한 책이 12종이다. 전이채·박치유 간본인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후집(後集) 5책(冊)(1796), 『증산염락풍아(增删濂洛風雅)』2책(冊)(1796), 『사문유취(事文類聚)』3책(冊)(1799), 『사요취선(史要聚選)』(1799), 『대명율시(大明律詩)』(1800), 『공자통기(孔子通紀)』3책(冊)(1803. 9),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전집(前集) 3책(冊)(1803. 12.), 『효경대의(孝經大義)』(1803..10), 『표재구해공자가어(標題句解孔子家語)』(附『신간소왕사기(新刊素王事記)』(1804. 7), 『농가집성(農家集成)』단(單)(1806. 3),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단(單)(1806. 4), 『동자습(童子習)』단(單)(1808)과 손기조(孫基祖) 간본인『명심보감초(明心寶鑑抄)』(1844) 등이 있다.
이 책들은 당시 문인사회에서 인기 있는 실용적인 책들로, 수요자들의 요구에 따라 방각된 것이다. 즉, 고문(古文)의 연변(演變)과 체법(體法)을 익히기 위해 주로 서당에서 아동용 교과서로 널리 이용되었던 『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을 비롯하여 시작(詩作)에서나 과거시험에 필요한 『사문유초(事文類抄)』와 이를 초략한『사문유취(事文類聚)』, 명나라 유명 시인의 율시(律詩)를 모은 시집(詩集)으로 『대명율시(大明律詩)』, 사전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사요취선(史要聚選)』, 공자의 가계(家系) 및 그 행적을 엮어 전질(全帙)로 간행된 『신간소왕사기(新刊素王事紀)』, 공자의 일생사적(一生事蹟)을 통관(通觀)하도록 엮은 『공자통기(孔子通紀)』, 『명심보감(明心寶鑑)』을 고려 때의 추적(秋適)이 초략(抄略)하였다고 전해지는 우리나라 가정과 서당에서 아동용 초급 교과서로 사용된 『명심보감초(明心寶鑑抄)』, 원(元)나라의 성리학자들의 시(詩)를 모은 『염락풍아(濂洛風雅)』를 우리나라의 박세채(朴世采)가 성리군서(性理群書) 중에서 중요한 것을 초략하여 엮은 『염락풍아(濂洛風雅)』, 신속(申洬)이 서원(西原: 지금 淸州) 현감 당시 계속되는 흉년을 구휼하기 위해 원래의 『구황촬요(救荒撮要)』에 의방소기(醫方所記)와 같은 구황보유(救荒補遺)를 합쳐서 간행한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 신속(申洬)이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지낼 때 각종 농서(農書)를 편집한 것으로 농업의 생산을 돕는 『농가집성(農家集成)』 등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서적(實用書籍)이 간행되었다.
전이채·박치유 간본인 『고문진보(古文眞寶)』는 후대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족친(族親)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아 중간(重刊)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전이채·박치유 간본은 처음에는 비영리적인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그 실용성 때문에 문인사회에 필요한 책들을 점차 영리적으로 간행한 듯하다.
태인에서 전이채가 1796년(正祖 20)에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후집(後集) 5책(冊)(1796)을 간행한 뒤로 박치유와 공동으로 1806년(純祖 6)에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단(單)(1806)을 간행하기까지 10년이나 유간기본(有刊記本)의 각서(刻書)사업을 했을 것이다.
1796년((正祖 20, 丙辰)부터 1806년(純祖 6, 丙寅)까지 10여년간 아전인 전이채와 그 동업자인 박치유에 의해 12종 이상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때가 태인방각본(泰仁坊刻本)의 전성시대이다. 태인 현감의 조항진(趙恒鎭) 시대엔 문학서가 간행되었고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영향 아래에서 과학참고서(科學參考書)도 편간(編刊)되었다. 서유응(徐有膺) 시대엔 공자(孔子) 관계서가 간행되었고 한원리(韓元履) 시대엠 농서(農書)가 간행되었다. 시대적 요청도 있었을 것이지만 현감의 취향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6)
이와 같이 민간 주도의 상업적 출판으로 활발했던 각서(刻서) 사업으로 한국의 방각본 출판문화에 있어서 태인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경판(京板), 안성판(安城板), 전주판(全州板), 태인판(泰仁板), 달판(達板) 등으로 대별되는 우리나라 방각본의 주요지역 중에 하나이다. 특히 경판이나 전주판의 방각본이 주로 소설과 같은 이야기책 위주의 출판을 많이 한데 비하여 태인판은 소설류 판본이 1종도 간행되지 않았고 개인의 명의로 집안의 족보나 문집과 같은 사가판(私家版)이 아닌 역사서(歷史書), 문장(文章), 유가서(儒家書), 농서(農書), 의서(醫書) 등 그 주제가 다양하고 양반이나 중인, 평민 등을 대상으로 삼은 자생적 영리출판(營利出版)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출판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표 3> 태인방각본의 종류와 간행시기 | ||||
번호 |
서명 |
책수 |
간행년 |
인출(印出) 기록 |
01 |
詳說古文眞寶大全 後集 |
10권 5책 |
1796 |
丙辰夏開刊 |
02 |
增冊濂洛風雅 |
5권 2책 |
1796 |
歲在丙辰開刊 田以采梓 |
03 |
事文類聚抄 |
3권 3책 |
1799 |
乙未開板 田以采朴致維梓 |
04 |
史要聚選 |
9권 4책 |
1799 |
乙未開板 田以采朴致維梓 |
05 |
大明律詩 |
2권 2책 |
1800 |
歲庚申 田以采朴致維梓 |
06 |
孔子通紀 |
8권 3책 |
1803 |
崇禎紀元後三癸亥九月日泰仁田以采朴致維梓 |
07 |
詳說古文眞寶大全 前集 |
12권 3책 |
1803 |
崇禎紀元後三癸亥十二月日泰仁田以采朴致維梓 |
08 |
孝經大義 |
1책 |
1803 |
崇禎紀元後三癸亥泰仁田以采朴致維梓 |
09 |
標題句解孔子家語 3권2책 (부 新刊素王事記) 1책 |
3권 3책 |
1804 |
甲子秋七月夏澣泰仁田以采朴致維梓 |
10 |
農家集成 |
1책 |
1806 |
崇禎紀元後丙寅春三月上澣茂城田以采朴致維梓 |
11 |
新刊救荒撮要 |
1책 |
1806 |
崇禎紀元後丙寅夏四月下澣茂城田以采朴致維梓 |
12 |
童子習7) |
2권 1책 |
|
田以采朴致維梓 |
13 |
明心寶鑑抄 |
1책 |
1844 |
崇禎後甲辰春泰仁孫基祖梓 |
한편 태인의 사찰엣 간행한 전적으로는 태인의 용장사(龍藏寺)에서 1635년에 대규모 판각사업을 벌여서 간행한 불경이 있다.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만행수방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萬行首榜嚴經)』, 『禪源諸詮集都序』,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금강반야파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불설광본대장경(佛說廣本大藏經)』, 『불설지심니라니경(佛說地心尼羅尼經)』,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광본대장경(廣本大藏經)』, 『몽상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 등 실물을 확인학 수 있는 것만 해도 14종이나 되며 1670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간행되었다. 용장사는 운주산 운주사(雲住寺)로 태인읍 남쪽 30리의 위치에 있는 사찰이며 조선 중엽이후부터 운주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이루어진 간경의 규모로 보았을 때 번성하였던 용장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으며 당시 태인지역의 인쇄문화적 기반이 잘 조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용장사에서 판각한 목판의 실물인 ‘방엄경간기판(榜嚴經刊記板)’ 1장이 전해지고 있는데 고창 선운사에 보관되어 있다.8) 『藏板考』의 태인 책판 중에 유일한 불경판으로 수록되어 있는 『방엄경(榜嚴經)』은 이 판을 대상으로 수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9세기에 족보, 개인문집, 실기 등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목활자 인쇄는 태인지역의 인쇄문화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20세기 초까기 적지 않은 인쇄활동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태인지역에서 인쇄된 목활자본은 1884년 무성서원에서 간행한 『무성서원원지(武城書院院誌)』와 1906년에 『수약동재각(守約洞齋閣)』에서 간행한 『탐진안씨세계(耽津安氏世系)』 등 2종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태인, 고부가 정읍군에 통합되면서 대부분의 간행지가 정읍으로 표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태인과 고부를 포함하는 정읍지역의 목활자인본을 살펴보면 <표 4>와 같다.
<표 4> 일제강점기 정읍(태인, 고부 포함)지역 목활자본 | ||||||
번호 |
서명 |
편저자 |
발행소 |
발행년 |
책수 |
소장 |
01 |
海州吳氏族譜 |
吳在奎 等編 |
心敬齋 |
1914 |
5卷 5冊 |
국립도, 계명대 |
02 |
朝鮮簪獻寶鑑 |
柳錫泰 編 |
考巖院堂 |
1914 |
7卷7冊 |
원광대, 전남대, 성대, 연대, 규장각, 고대, 영남대, 간송 |
03 |
朝鮮簪纓譜 |
李原 編 |
所聲面 公坪 |
1915 |
10권10冊 |
계명대, 원광대, 성암 |
04 |
朝鮮簪纓附錄賢姓譜 |
|
|
1916 |
2卷 2冊 |
경북대, 전남대, 고려대 |
05 |
礪山宋氏族譜 |
宋鐘嶽 刊編 |
七寶面院村里 |
1916 |
5卷 5冊 |
국립도 |
06 |
東國萬姓簪纓譜 |
金延述 等編 |
武城書院 |
1916 |
5卷 5冊 |
장서각, 성대, 용인대, 영남대, 연세대 |
07 |
尊聖出義稧案 |
殷鎭夏 等編 |
蓮花齋 |
1916 |
1冊 |
계명대, 고려대, 국립도 |
08 |
康津金氏族譜 |
金鱗基 編輯 |
延謚閣 |
1917 |
14卷14冊 |
장서각, 국립도, 전북대 |
09 |
耽津安氏世譜 |
安東浩 刊編 |
安東浩宅 |
1917 |
1冊(32張) |
국립도 |
10 |
幸州殷氏世譜 |
殷成雨 刊編 |
半箂齋 |
1917 |
8卷 8冊 |
국립도 |
11 |
井邑郡邑誌 |
鄭敬惲 著 |
養士齋 |
1918 |
3卷 3冊 |
전남대 |
12 |
井邑郡鄕校儒林案 |
柳致相[編] |
育英齋 |
1918 |
1冊(45張) |
연세대 |
13 |
淸安李氏世譜 |
李在宇 刊編 |
武城書院 |
1921 |
4卷 2冊 |
국립도 |
14 |
麗朝忠烈錄 |
蔡東說 編 |
1923 |
1冊(56張) |
경북대, 계명대, 연세대 | |
15 |
義城金氏族譜 |
金長鉉 刊編 |
新庵書齋 |
1938 |
2冊 |
국립도 |
16 |
古阜聖廟重修案 |
蓮花齋 |
경북대 |
조선 후기 태인 인쇄문화의 특징은 목판본의 경우 조선전기에 비하여 일반 관판경 서류나 유가류 서적 등이 거의 없고, 지역출신 유학자 또는 수령과 연관 있는 인물의 문집을 중심으로 한 사가판(私家板)과 방각본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학맥이나 문중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후기 지방인쇄문화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서류나 유가류 서적의 간행이 거의 없는 것도 같은 주제로 훨씬 많은 판본이 간행된 인근의 전주지역에서 충분히 간행되고 유통된 것에 1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목활자본의 경우 현전하는 자료가 19세기 이후의 것이고 그나마 1914년 이후 정읍에 편입되면서 간행기록을 확일할 수 있는 자료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족보(族譜), 문헌록(文獻錄), 실기(實紀), 지지(地誌) 등이 주로 간행되는 지방목활자의 주제적 특징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태인은 인쇄문화의 기본적 여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충절을 지키고 학문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서책간행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음을 일부 남아서 전해지는 서책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즉 태인 지역과 연고가 있는 학자나 인물의 문집이 상당수 남아있고 인물의 면면도 이러한 학풍과 연관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현재까지 조선시대 태인지역 인쇄문화의 전체적인 상황을 책판목록에 나타난 기록과 현전자료, 목활자인본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목판본 58종과 목활자본 2종이 확인되었다.9)
아직도 미확인된 자료도 더 찾아보아야겠지만 태인지역 간본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서 실전된 자료를 찾아내고 그 간행배경을 파악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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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韓國學文獻硏究所 編, 邑誌-全羅道 濟州道(서울: 亞細亞文化社, 1983) 재인용.
2) [子部] 중국 고전을 사부(四部: 경(經), 사(史), 자(子), 집(集))로 나눈 것 중 자(子)에 속하는 부류. 유가(儒家), 병가(兵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석가(釋家), 기예(技藝), 술수(術數) 등의 서적과 소설(小說), 유서(類書) 등이 이에 속한다.
3) 옥영정(玉泳晸), “조선시대 태인지역의 고인쇄문화에 대한 일고”, 『서지학보』제30호 (2006. 12), 5~16.
4) 옥영정(玉泳晸), “조선시대 태인지역의 고인쇄문화에 대한 일고”, 『서지학보』제30호 (2006. 12), 1.
5) 坊刻本: 高宗 때의 名醫 愼村 黃泌秀는 서울坊刻本의 刊行에 조력하였고 序跋을 썼는데 그 중 『御定奎章全韻』의 義例末 小識에서 ‘坊刻’이 訛謬가 많다고 비판하였고, 『大學章句大全』 의 朱子序 의 小識에서 ‘坊本’ 운운 하였다. 이보다 앞서 坊人, 坊友란 말이 예사로 쓰인 걸 보면 坊이란 민간출판계를 지칭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金侖壽, “태인방각본 『詳說古文眞寶大全』과 『史要聚選』”, 1.
6) 金侖壽, “泰仁坊刻本의 『詳說古文眞寶大全』과 『史要聚選』” 『書誌學硏究』 제5, 6合集 (1990), 42~44.
7) 간지를 표시하지 않아 간행시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전이채, 박치유 간행의 다른 방각본 출간과 비슷한 무렵일 것으로 보인다. 안병희 선생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당시의 국어를 반영하는 “ᄒᆞ여”, “이여늘”, “이여다”, “蔡요” 등의 쓰임을 들고 있다.(안병희, “「童子習 口訣」에 대하여,” 書誌學報 제28호(2004. 12), 233~247.) 재인용
8) 朴相國 編, 『全國寺刹所藏木板集』 (서울: 문화재관리국, 1987). 재인용
9) 옥영정(玉泳晸), “조선시대 태인지역의 고인쇄문화에 대한 일고”, 『서지학보』제30호 (2006. 12),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