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태인(泰仁)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인간(人間)은 수많은 개체(個體)와 문명(文明)의 발전(發展)을 통하여 이 지구상(地球上)에서 번성(蕃盛)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자연(自然)을 지배(支配)하거나 변화(變化)시키기도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삶을 누리기기도 하고 파괴(破壞)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씩 자연의 존재(存在)에 대해 망각(忘却)하면서 인간이 이루어 놓은 사회(社會)와 도시(都市) 속에서 살아간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어느 하나 자연과 관련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환경(自然環境)으로부터 제약(制約)을 받고 이용(利用)하기도 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연계(自然界)의 하나의 구성원(構成員)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자연환경을 빼놓고서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제 1절 지형(地形)
<그림 3-1> 태인 지역의 산과 하천1)
(굵은 테두리로 표시된 산은 고문헌과 고지도에 보이는 산이다.
태인은 우리나라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중부(中部)인 추풍령 부근에서 갈라져 남서 방향으로 전라북도(全羅北道)의 무주(茂朱), 진안(鎭安), 임실(任實)을 지나 전라남도(全羅南道)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남서로 뻗어 내려 전라남도의 무안(務安) 군도(群島)에 이르는 산맥인 노령산맥(蘆嶺山脈)의 북서쪽 사면(斜面)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고도(海拔高度) 400∼600m의 산지(山地)를 이루어 섬진강(蟾津江)과 동진강(東津江)의 분수계(分水界)가 된다. 북서쪽은 평야(平野)가 광활(廣闊)하여 유명한 동진평야를 이룬다. 이런 지형적 특징을 이용하여 칠보발전소(七寶發電所)에서 유역변경식(流域變更式) 발전이 이루어지며, 이 물은 동진강 수로(水路)를 통해 계화도(界火島) 간척지(干拓地)에 공급된다.<그림 3-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의 산천조(山川條)에는
“죽사산(竹寺山) :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 견천(犬川) :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상두산 북쪽에서 나와 이평(梨坪)에 이르러 정읍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동진으로 들어간다. …”
라는 기록이 있고,
『해동지도(海東地圖)』(1750년대 초반, 고대4709-41)에 의하면,
“… 지도는 풍수적 사고를 충실히 따르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읍치가 과장되어 있으며, 산줄기가 백두대간으로부터 이 고을로 들어오는 동쪽 방향이 지도의 위쪽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고을의 실제 지형은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다. 따라서 이 고을 동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동진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김제를 통해 서해로 들어간다. …(이기봉)”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1757~65년)의 형승(形勝)에는
“해와 달이 문을 막고 있다. 고을의 서쪽에 해처럼 둥근 모양의 도산(島山)과 반달 마냥 굽은 모습의 주산(舟山)이 있으며, 그 사이에서 냇물이 흘러나오고 있으므로 민간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2)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65년)의 산천(山川)에는
“죽사산(竹寺山) 진안현(鎭安縣) 마이산(馬耳山)에서 뻗어 나와, 고을의 으뜸이 되는 산줄기를 이룬다. 관아의 북쪽 2 리에 있다.
상두산(象頭山) 진안현 마이산에서 뻗어 나온다. 관아의 동쪽 15 리에 있다.
모악산(母岳山) 상두산의 아래 기슭이다. 관아의 동쪽 20 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진안현 마이산에서 뻗어 나온다. 관아의 남쪽 30 리에 있다.
견천(犬川) 관아의 북쪽 10 리에 있다. 상두산 서쪽 골짜기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 하여, 이평(梨坪)에 이르러 남천(南川)과 합쳐져 흐른다.
남천(南川) 관아의 남쪽 5 리에 있다. 상두산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이평에 이르러 고부군(古阜郡)의 물줄기와 합쳐져 흐르다가 김제군(金堤郡) 동진(東津)으로 흘러들어간다.”3)
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인현지도(泰仁縣地圖』(1872년 지방지도, 규10495)에 의하면,
“태인현은 …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금구(金溝), 남쪽으로는 정읍(井邑)과 연결된다. 고을의 안쪽을 동진강의 상류가 돌아나간다. … 서남쪽 경계의 동진강 상류에는 당시 조수(潮水)가 진퇴(進退)하던 곳이라 기재되어 있다. …”
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림 3-3>,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년)의 여지고(與地考)에는 태인의 산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양진산(養眞山)은 일명 죽사산(竹寺山)이라고 한다. 북쪽 2 리에 있다. … 남천(南川)은 남쪽 5 리에 있다. 대천(大川)은 북쪽 10 리에 있다. 벽골제호(碧骨堤湖)는 북쪽 20 리에 있다. 연지는 남쪽 1 리에 있다. 제방 위에 피향정이 있다.”
태인 인근의 줄기를 이루는 산으로 성황산이 있다. 성황산은 고문헌 등에서 죽사산(竹寺山) 또는 양진산(養眞山)이라 불리는 산으로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나왔다고 보았다.4) 지리산을 향하여 흘러드는 백두대간 중 전북 장수의 영취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산맥이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전주의 주화산(珠華山, 560m)에 이른다. 여기에서 북쪽의 금남정맥과 남쪽의 호남정맥으로 나뉘는데, 태인현의 산들은 호남정맥을 이어 받았다. 주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호남정맥은 산외면의 묵방산(墨方山, 538m)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남북으로 갈려 산맥이 뻗어있다. 묵방산에서 남쪽으로 갈린 산맥은 성옥산(聖玉山, 389m), 운주산(雲住山, 344m) 고당산(古堂山. 664m)을 거쳐 칠보산(七寶山, 472m)에 이르며 태인현의 남쪽을 감싸 안고 있다. 묵방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태인현 읍치를 향하고 있다. 국사봉(547m)을 거쳐 서쪽의 상두산(象頭山, 575m)과 비봉산(飛鳳山, 340m)을 지나면 태인현 읍치 동쪽의 항가산(恒加山, 126.9m)에 이르고, 여기에서 진산(鎭山)인 성황산(城隍山, 竹寺山)과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도리산(島裡山)이라는 얕은 구릉으로 연결된다. 그 외에 시산(詩山, 203m)과 백산(栢山 또는 柏山, 107m)은 높지는 않지만 태인현이 병합되기 이전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의 진산(鎭山)이었기 때문에 고문헌(古文獻)과 고지도(古地圖)에 자주 등장(登場)하는 지명(地名)이다.5)<그림 3-2>
<그림 3-2> 동여도(東輿圖, 1850년대, 奎10340)
<그림 3-3> 1872년 지방지도(규장각 소장)
태인의 높은 산으로는 북동쪽의 감곡면 통석리와 태인면 증산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풍수리지상으로 선녀탄금형(仙女彈琴形: 거문고 타는 선녀형)의 명당인 천애산(天涯山: 天娥山, 215.1m)이 최고봉이다. 천애산 서쪽에는 증산(甑山, 116.2m)이 있는데 모양이 시루처럼 생겨서 시루봉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태인현(泰仁縣) 때에는 태인의 동쪽으로 거산리(居山里), 태흥리(泰興里)와 옹동면 칠석리(七石里)의 경계에 있는 안산(案山)6)인 항가산(恒伽山, 126.9m) 자락이 소재지(所在地)를 감싸고 있고 태인현이었을 때 사림의 소유지였던 산으로 그 풍치(風致)가 절경(絶景)이었으며, 남동쪽으로 슬며시 내리면서 얕은 구릉으로 변하고 남쪽에는 태산(泰山, 33m)이 있다.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7)인 성황산(城隍山, 126.5m)이 솟아있고 이 산은 남동쪽으로 뻗으면서 낮아지다가 태인의 동쪽에서 다시 솟으며, 산의 북쪽 기슭에 작은 암자(庵子)가 있고 그 안에 『약수샘』이 있어 이름을 『옥수(玉水)』라 하였다.
이 산에는 조선시대 태인현의 성황사(城隍寺)가 있었는데, ‘성황’ 즉 ‘고을의 수호신(守護神)’을 모셔 왕실(王室) 및 나라의 안녕(安寧), 백성(百姓)의 평안함과 수복(壽福) 등을 기원하였다. 태인 현감으로 선정을 펼친 신잠(申潛, 1491~1554))과 그 가족상(家族像)을 수호신(守護神)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외 점촌(87.1m), 원낙양(74.6m), 고천(69.7m), 관동(60.9m) 등에도 낮은 산들이 있다.<그림 3-3>
태인의 남동쪽 장군봉 계곡에서 발원한 동진강 줄기가 서북으로 내리달리면서 칠보에서 내려오는 지류와 시산(詩山)에서 만나 합수한 다음 태인 앞을 지나는데 강이 흐르는 동안 주변은 넓고 긴 들을 만들어 낸다. 이 넓은 들은 태인의 북서쪽에 신태인을 지나면서 이 지방의 산물을 풍족하게 해준다. 태인의 서편 앞들 너머로는 낮은 덕재산(141m)이 솟아있고 동쪽과 북서쪽은 낮은 구릉이거나 평평한 들판으로 형성되어 있다.
태인에서 북쪽으로 성황산 너머와 동쪽의 항가산 너머로는 옹동면 두립(斗立)에서 흘러내리는 개천(開川)과 상산리(象山里) 오성제(五成堤)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합쳐지면서 넓지는 않지만 들판을 형성해 두었다. 태인 남쪽의 동진강과 북쪽 성황산 너머의 개천은 각각 동으로 흐르다가 신태인 남쪽에서 합수하여 부안(扶安) 백산(白山)을 지나 서해 새만금으로 빨려 들어간다.
태인의 입지를 보면 읍내를 성황산과 항가산이 북에서 동으로 감싸듯 둘러지고 남에서 서로 들이 형성되면서 남쪽 전면으로는 동진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形)형의 북고 남저 지형이다.<그림 3-4>
<그림 3-4> 태인 주변 지형도8)
2000년 11월 20일에 시작하여 2001년 7월 30일에 마무리된 문화재청 피향정(披香亭) 실측조사 보고서(實測調査報告書)에 따른 태인(泰仁)의 자연 경관(自然景觀)은 다음과 같다.
동진강 유역의 기름진 거산 평야를 가로질러 호남 고속도로가 대전으로 향하여 지나가고 있다. 고속도로와 가로질러 동진강 수계가 태인의 30리 들판 앞으로 지나가고 거대한 태인장의 공터는 그 옛날의 영화를 자랑하며 호남의 권세가와 부호가 줄지어 태어났던 복지의 고장이다. 북쪽에 진산인 성황산과 남쪽에 피향정, 그 사이의 동쪽에 동헌, 서쪽에 향교가 배치된 고대 읍락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그 모습이 퇴락하였으나 국도 1호, 국도 30호가 지나가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으로는 성황산, 동으로는 항가산, 남으로는 태산을 가지고 있어 자연적으로 거대한 토성과 같은 자연 방어벽을 이뤄 동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과 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천년요새이다. 천연적인 요새는 산뿐 아니라 강으로 둘러싸인 물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한때 유역이 크므로 물난리가 자주 있었다고 하나 사람이 거주하던 곳은 높은 곳에 있었다. 성황산과 항가산에 발원지를 둔 개울물은 어린 시절 물장구와 썰매 타던 놀이터로 맑은 물이 흘렀으나 이미 복개된 수로를 타고 동헌 앞을 지나서 서서히 피향정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또한 줄기도 병행하여 동에서 서쪽으로 마을을 지나 옛날 극장도 지나 피향정 연못 옆으로 구불구불 복개가 되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 물들이 좌우 두 줄기가 흐름에 따라 피향정은 당연히 섬이었으며 함벽루가 있는 곳도 인공 섬이 아니고 자연적인 섬이 있었다고 본다. 한때 함벽루도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연지는 당초 상하 연지가 아니고 피향정 주변으로 2개의 큰 개천이 흐르니 자연적 낮은 부분인 동편 늪지와 서편 늪지는 연꽃이 자생하였던 것 같으며 일제 강점기에 상연지를 필요한 주민 공공시설을 건립하려고 매립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있다. 그리하여 피향정은 앞과 뒷면 동서로 계단이 나타나있는 것은 주 진입로가 아니고 수로로 전마선에 의해 도달될 수 있도록 한 전후의 접근이 가능한 섬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9)
고도서(古圖書)와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난 1989년 이전의 산천(山川)에 관한 기록은10) 다음과 같다.
竹寺山 北2里 (승람) 양진산(죽사산) (여지)(지지)(호남)(비고)
象頭山 東15里 (승람)(여지)(지지)(호남)(비고)
雲住山 南30里 (승람)(여지)(지지)(호남)(비고)
母岳山 東30里 (승람)(여지)(지지)(호남)
七寶山 南20里 (여지) 東南25里 (지지)(비고)
詩山 東21里 古泰山治東小山 (여지)(지지)(비고)
屈嶺 東南36里 (여지), 窟嶺 (비고), 屈峙 (비고)(만기)
雲巖山 東30里 任實界 (지지)
雲南山 東50里 (비고)
墨方山 東南45里 (지지)(비고)
回文山 東南60里 任實 淳昌界 (지지)(비고)
柏山 北10里 (지지)
德星山 西南20里 古阜路 (지지)
流觴臺 古縣內面 (지지)
梨坪 西10里 (지지)
穿峙 東南30里 淳昌路 (지지)
鼎峙 東北15里 金溝路(지지)(비고)(만기)
鞍峙 南30里 井邑路 (지지)
雲岩峙 동30리 任實路 (지지)(비고)(만기)
白如峙 東30里 全州路 (지지)
杻峙 南路 (지지)(비고)(만기)
九折峙 南路 (지지)(비고)(만기)
犬川 北10里 出象頭山 (승람)(여지)(지지)(호남)(비고)
南川 南5里 出象頭山 (승람)(여지)(지지)(호남)(비고)
牛項堤 서20리 (승람) 牛項池 (여지) 牛頭堤 (지지)
蓮池 南1里 堤上有 披香亭 (여지)(지지)(비고)
大角川 縣北10里 爲犬川虎川 至縣西10里 左過南川爲大角川 (지지)
1. 태인의 산
가. 도이산(道伊山)
태인면 태성리 1번 국도변에 위차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시대에 태인신사(泰仁神社)가 산위에 있었다.11)
일명(一名) 도리미산(島利美山)으로 태인의 입구인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숲이 빽빽하게 들억선 산은 높지 않으나 매우 빼어난 풍경으로 사랑스럽고 정상에 태인여자중학교가 있다.
“一名島利美山在舊泰仁入口國道邊蒼松緣竹倚倚㭗密山不高而秀麗風景可愛山頂泰仁女中學校”12)
일명 ‘島利美山’ 태인면 태성리 국도변에 있으며 거산평야(居山平野)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13)
현재는 잔구지형으로 도리미산이라고도 하며 태인면 태성리에 위치함. 과거 태인여중이 있었으나 폐교되고 지금은 전북동화중학교가 위치함.
나. 백산(栢山)
전라북도 정읍시의 신태인읍 백산리에 있는 산이다(고도:109m). 『증보정읍군지』(1974)에 고려 시대 인의현(仁義縣)의 주산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인의현은 1409년(태종 9) 태산군(太山郡, 泰山郡)과 합쳐져 태인현이 된 지역이다. 옛날부터 질 좋은 석재 산지로 유명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태인)에 "죽전(竹箭) · 숫돌(礪石)은 모두 인의성산(仁義城山)에서 난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인의성산은 배산(盃山)과 더불어 백산을 달리 부르던 명칭이라고 한다. 『호구총수』(태인)에 인곡면에 '백산리(栢山里)'가 기재되어 있어 그 이전부터 '백산'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대동지지』에 "백산은 북쪽 1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에 읍치 북서쪽이며, 과학산과 천연산 사이의 산으로 백산이 묘사되어 있다.14)
해발고도 107m. 신태인읍 백산리에 위치하며, 옛날 인의현의 주산(主山)으로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화강암이 노출된 잔구지형으로 부안 백산과 비슷한 형태이다.
마치 잔을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이어서 ‘잔산(盃山 잔뫼, 배산)’이라고 불렀는데 그 후 이름이 잔산에서 잣산으로 변형되면서 잣나무라는 의미의 한자 ‘백(栢)’자를 써서 백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산에는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축조된 테뫼식 산성인 백산리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인의현의 읍성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산중턱에 진안 마이산의 적석탑을 쌓은 이갑룡(李甲龍)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높이 13.7m의 소이암지(笑而庵址) 적석탑이 있다. 소이암은 1900년 경 전광명화(全光明華)라는 부인이 창건한 절이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었다.15)
다. 상두산(象頭山: Sangdusan)
상두산(象頭山)은 옹동면 상산리와 산외면 상두리, 김제시 금산면 선동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575.3m). 남쪽 기슭에는 옛날 상두사의 터가 있다고 한다. 남사면에서 상두천이 발원해 남류하다가 동진강에 합류한다. 석가모니가 설법을 펼쳤다는 인도의 상두산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도 하고, 그 생김새가 코끼리 머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태인)에 “상두산은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진강 물길의 주요한 발원지이기도 한데, 동일 문헌에 “견천(犬川)은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상두산 북쪽에서 나와 이평에 이르러 남천(南川)과 합쳐진다. 남천은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상두산 남쪽에서 나와 이평에 이르러 정읍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동진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여 동진강 상류 물길인 도원천(남천)과 용호천(견천)이 이곳에서 발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태인)에 상두산이 진안 마이산에서 뻗어 나온다고 하였으며 영천사와 상두사가 상두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금구(지금의 김제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나오는 등 여러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에 읍치 북쪽 산외면에 상두산이 상두사와 함께 묘사되어 있는 것을 비롯해 『호남지도(湖南地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4첩 4면) 등에 태인과 금구 경계에 산이 기재되어 있다.16)
『광여도』 등의 군현지도에 '상두산'으로 기재되어 있다. 향토지에 "수류면 금성리의 용복(龍伏) 마을은 뒷산 상두산의 모양이 마치 큰 용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곳에는 건축 시기가 불명확한 주춧돌과 일부 성벽이 남아 있다.17)
575m, 산외(山外), 옹동(瓮東) 양면(兩面)과 김제군(金堤郡)금산면(金山面)과의 사이에 걸쳐 있어 군계(郡界)를 형성하고 있다.18)
김제시와 정읍시에 걸쳐 있는 상두산의 산줄기는 호남정맥 초당골(막은댐)을 지나 모악산기맥 분기점에서 호남정맥을 남쪽 전라남도 광양시 백운산으로 보내고 북쪽으로 가는 모악기맥이 뿌리이다. 모악기맥은 만경강(萬頃江)과 동진강(東津江)을 가르며 엄재, 국사봉에 닿으면 서쪽에 상두산으로 가는 원평지맥을 갈라놓는다. 상두산에서도 산줄기가 두 개로 나누어진다. 남쪽은 비봉산)(332m)과 항가산(128m)을 지나 성황산(125m)에서 멈춘다. 원평지맥은 원평천(院坪川)의 분수령으로 서쪽으로 달리며 천애산(198m)과 명금산(55m)에 이르러 끝을 맺는다.
상두산은 높이 575m이며, 장군대(將軍臺)라고 불리는 주춧돌이 있고 그 동남쪽으로 포곡식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성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축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시대라는 주장과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쌓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성내의 면적은 약 10,000㎡ 정도로 전문가들은 이 산성을 근거로 모악산과 바로 연결된 상두산이 호남 지방의 군사적 요새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상두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서쪽으로는 광활한 호남평야가 펼쳐지고, 날씨가 좋으면 서해 바다가 굽어보인다. 북쪽으로는 모악산, 운장산, 연석산이 뚜렷하다. 북동쪽은 고덕산과 경각산, 동쪽은 국사봉과 오봉산, 남쪽은 추월산과 회문산이 하늘금을 이룬다.19)
옛날에 대운사(大雲寺), 조주사(趙州寺), 용장사(龍藏寺)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절들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주산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마을은 동학농민군 총관령이었던 김개남(金開男 1853~1895)이 태어났던 곳으로, 산기슭에 김개남의 허묘(虛墓, 시신이 없는 무덤)가 있다.20)
라. 성황산(城隍山, Seonghwangsan)
전라북도 정읍시의 태인면 태성리에 있는 산이다(고도:126m). 조선 시대 태인현의 진산이자 주산으로 예전에는 죽사산(竹寺山)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태인)에 "죽사산은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라고 하고, 『여지도서』(태인)에 "죽사산은 진안의 마이산에서 시작해서 현의 주맥이 되었다. 현 북쪽 2리에 있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국여지지』(태인)에는 "양진산(養眞山)은 혹 죽사산으로도 불리는데, 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진산이다."라는 기록에서 양진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황' 지명은 고을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사가 있었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등에는 성황사가 "현 서쪽 4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최후 결전을 벌였던 전적지이기도 한데, 그때 성황당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21)
태인면(泰仁面)에 위재(位在)하야 구태인현시대(舊泰仁縣時代)의 주산(主山)이니 산상(山上)에 당우(堂宇)가 건설(建設)하였으며 산의 북록(北麓)에 1개소(箇所)의 소암(小庵)이 유(有)하고 암상(庵上)에 약천(藥泉)이 유(有)하니 차(此)를 옥천(玉泉)이라 칭(稱)한다.(見古蹟)22)
고석(古昔, 오랜 옛날)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으며 갑오(甲午) 11월에 관군(官軍)과 동군(東軍)의 대전적지(大戰跡地)이다.(見城隍山)23)
舊 태인(泰仁)의 主山으로 산 정상에 고찰(古刹)이 있는데 북쪽 기슭에 옥천사(玉泉寺0라는 절이 있고 주변에 옥천(玉泉)이 있는데 약수(藥水)라 할 만하다.24)
죽사산(竹寺山)이라고도 부르며 구 태인현시대(舊 泰仁縣時代)의 주산(主山)이며 산의 북쪽기슭에는 1개소(箇所)의 소암(小庵)이 있으며 경내에는 약천(藥泉)이 있었으니 이를 옥천(玉泉)이라 칭(稱)하였다. 1894년 11월 23일에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의 최후전투(最後戰鬪)인 ‘태인전투(泰仁戰鬪)’의 전적지(戰迹地)이기도하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죽사산(竹寺山)’ ‘自鎭安縣馬耳山來 爲縣主脉縣北二里’라 하였으니 언제부터 성황산(城隍山)으로 불리었는지는 미상이다.25
관군(官軍)과 동학군(東學軍)의 접전(接戰)으로 말미암아 성황당(城隍堂)이 소실(燒失)되었다. 과거에는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던 곳이다.246
태인현의 주산으로 1894년 11월 27일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관군 연합군과 최후로 전투를 벌였던 전적지이기도 하다. 성황산전투에서 패배한 전봉준은 입암산 너머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에서 피신하던 중 관군에게 붙잡혀 1895년 3월에 처형되었다. 태인 3.1운동기념탑이 있고 산 아래 태인중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마. 천아산(天娥山)
태인(泰仁), 옹동(瓮東), 감곡(甘谷)의 삼면(三面)에 개재(介在)하야 면계(面界)를 성(成)하였다.(見古蹟)27)
고석(古昔, 오랜 옛날)에 온천(溫泉)이 있었고 1개소(個所)의 사찰(寺刹)이 있었다.28)
높이가 653척(尺)으로 옹동(瓮東), 태인(泰仁), 감곡(甘谷)의 면계(面界)이다.29)
198m, 태인(泰仁), 옹동(瓮東), 감곡(甘谷)이 삼면(三面)에 개재(介在)하여 각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30)
천애산이라고도 부르며, 해발고도 198m. 태인면, 옹동면, 감곡면에 걸쳐있음.
바. 항가산(恒伽山)
태인면(泰仁面)에 위치하고 있으며(位在) 구태인현시대(舊泰仁縣時代)에 사림(士林)의 소요지(逍遙地)로 풍광(風光)이 뛰어나(絶佳) 산중턱(中央山腹)에 묘우(廟宇)와 정자(亭子)가 건설(建設)되어 있다.31)
옛(舊) 태인(泰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사림(士林)의 소요지(逍遙地)로 산기슭에 관성묘(關聖廟)와 지장암(地藏菴), 읍원정(挹遠亭)이 있어 태인공원(泰仁公園)이라 할만하다.32)
태인면(泰仁面)에 위치하고 있으며(位在) 구태인현시대(舊泰仁縣時代)에 사림(士林)의 소요지(逍遙地)로 풍광(風光)이 뛰어나(絶佳) 산중턱(中央山腹)에 읍원정(挹遠亭)과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1894년 11월 23일에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의 최후전투(最後戰鬪)인 ‘태인전투(泰仁戰鬪)’의 전적지(戰迹地)이기도하다.33)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이 태인현(縣)이었을 때 사림의 소유지였던 산으로, 풍치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산중턱에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전통사찰 다천사(茶泉寺)가 있는데 그 이름처럼 약수(藥水)가 유명한 절로, 절 앞에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1855년 태인현감이 선비들에게 문학을 권장하기 위해 처음 세웠다는 읍원정(揖遠亭)과 조선 중기에 태인현감·상주목사 등을 지낸 신잠(申潛 1491~1554)의 사당도 있다.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관우(關羽, 관운장)를 모시는 관성묘(關聖廟)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34)
태인의 성황산과 마주보는 산으로, 읍원정과 관제묘가 있고 다천사라는 절이 있음.
사. 정어치(鼎魚峙)
101m, 옹동, 감곡의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으며 경목선(京木線) 국도가 통하고 있다.35)
옹동면과 감곡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천아산 부근의 고갯길. 해발고도 101m. 경목선인 1번 국도가 통과하는데, 솥튼재, 솟턴재 라고도 부름. 주변 지형이 솥모양이라하여 솥튼재, 또는 옛날 이곳을 통과하여 원평장에 소를 팔러 가는 사람들이 도적들에게 돈을 털렸다하여 솟턴재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음. 현재는 고갯길 아래로 솟튼터널이 통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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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 第17號 (전라북도․정읍시, 2012), 55~56.
2) 변승주 역주, 『여지도서(輿地圖書)』46 전라도 Ⅲ (디자인 흐름, 2009), 98.
3) 변승주 역주, 『여지도서(輿地圖書)』46 전라도 Ⅲ (디자인 흐름, 2009), 99.
4)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 第17號 (전라북도․정읍시, 2012), 57.
성황산이라는 명칭은 성황당(城隍堂)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추정된다. 죽사산이란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서부터 보이며, 양진산이란 명칭은 『동국여지지』 산천조에 태인현의 진산으로 죽사산의 별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인현의 진산이 진안의 마이산에서 시작되었음은 『여지도서』 산천조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1872년 지방지도』 중 태인현지도에는 태인현의 진산이 전주 모악산(母岳山)에서 시작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5) 『全羅北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泰仁鄕校 萬化樓』 第17號 (전라북도․정읍시, 2012), 56~57.
6) 집터나 묘자리 맞은편에 있는 산. 주산(主山)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함께 풍수학상의 네 요소의 하나이다. 여러 산이 중첩하여 있을 때에는 내안산(內案山)•외안산(外案山)으로 구별함. 두산백과.
7) 나라나 도읍지 또는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 진호(鎭護)한다고 하여 진산이라고 하며,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지냈음.(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3.30)
8) 네이버 지도(2014. 11월 11일)
9) 『披香亭 實測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1), 65.
10) 柳在泳, 『전북전래지명총람』 ((주)민음사, 1993. 3.15), 177~178.
약칭, (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 東國輿地志, (도서) 輿地圖書, (비고) 增補文獻備考, (호남) 湖南邑誌, (만기) (萬機要覽)
1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6.
12) 梁昌成...[等編], 『泰仁誌』(1965), 33.
13)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8.
14) [네이버 지식백과] 백산 [栢山, Baeksan]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2010. 12., 국토지리정보원)
15) [네이버 지식백과] 백산 [栢山] (두산백과)
16)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2010. 12., ), 190.
17) [네이버 지식백과] 상두산 [象頭山, Sangdusan]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2010. 12., 국토지리정보원)
18)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9.19) [네이버 지식백과] 상두산 [象頭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 [네이버 지식백과] 상두산 [象頭山] (두산백과)
21)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2010. 12., ), 190.
22)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8.
23) 앞의 책, 332.
24) 梁昌成...[等編], 『泰仁誌』(1965), 33.
25)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8.
26) 앞의 책, 332.
27)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7.
28) 앞의 책, 28.
29) 梁昌成...[等編], 『泰仁誌』(1965), 33.
30)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10.
31)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6.
32) 梁昌成...[等編], 『泰仁誌』(1965), 33.
33)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8.
34) [네이버 지식백과] 항가산 [恒伽山] (두산백과)
35)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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