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중민(許仲民) 어머니는 나이가 75세였는데, 밤중에는 중민의 작은 딸을 안고 잤다. 그러다가 집에 불이 나니 중민이 불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나와 죽음을 가까스로 어머니의 죽음을 면하였는데, 딸은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일이 나라에 알려져 특별히 제용 직장(濟用直長)을 제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34 「태인현」, ‘인물’ -------------------------------------- 해동잡록 5 본조(本朝) 허중민(許仲民) 태인(泰仁) 사람이며, 어머니가 75세 때 중민이 어린 아이를 안고 자다가 집에 불이 나자 중민이 불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업고 나와 죽음을 면했다.(그러나 어린아이는 죽었다.) 일이 알려져 관직을 주었다. 許仲民 泰仁縣人。其母年七十五。夜抱幼兒而寢。其家失火。仲民冒火負母而出。僅免。事聞授職。 박윤근(朴允斤) 아버지가 몹쓸병(악질)을 앓았는데, 박윤근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박윤근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받아내 국에 타서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1513년(중종 8)에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34 「태인현」, ‘인물’
경예손(景禮孫) 일찍이 아버지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경예손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구해냈다. 아버지는 죽음을 면했지만 경예손은 힘이 다하여 마침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송인지(宋仁智) 벼슬이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부모를 잘 섬겼다는 이유로 중종(中宗) 때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도록 명하였다. 송담(宋曇) 효자로서의 행실이 나라에 알려져 장령(掌令)에 추중(追贈)되었다. 송효성(宋孝誠)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 타서 드렸다. 어머니는 병이 곧 나았으며 40여 년을 더 살았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백복립(白卜立)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 타서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효종(孝宗) 때 그 집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포상조치를 내렸다. 박시남(朴時男)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렸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박숙(朴淑)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정이 있어 입지 못했던 상복을 나중에 입었다. 제삿날이 되어 얼음을 두드리면 물고기가 밖으로 뛰어나오고 날아가던 꿩이 스스로 집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박숙의 효성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상으로 벼슬을 주고 그 집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포상조치를 내렸다. 박흥(朴興) 어머니가 병에 걸이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 집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포상조치를 내렸다. 이경하(李擎夏) 아버지가 화적떼와 마주쳐 예축 못할 화를 입을 상황이었다. 이경하가 아버지를 덮어 감싸서 아버지는 목숨을 온전히 건졌지만 이경하는 온봄에 난도질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1)
김오정(金鰲挺)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리고 그 손가락뼈를 가루 내어 약에 타서 드리니 계속되던 아버지의 병이 마침내 나았다. 할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자신이 대신 앓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하늘에 빌었는데 얼마 안 있어 할머니의 병이 나았다. 아버지의 병이 또 위독해지자 예전에 잘랐던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잘라내 그 피를 약에 타서 드렸는데 그전처럼 한결같았다. 아버지는 다시 목숨을 건졌다. 현종(顯宗) 때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 집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포상조치를 내렸다.1)
김두정(金斗挺) 김오정의 아우이다. 부모가 병에 걸리자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부모의 똥을 맛보아 그 병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형을 따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내고 손가락뼈를 갈아 약에 타서 드리니 부모가 곧바로 다시 살아났다. 아버지의 상과 어머니의 상을 계속해서 당하자 죽만 먹고 지내며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현종 때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 집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포상조치를 내렸다.
송도연(宋道淵) 호암(壺巖) 송치중(宋致中)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받들어 모셨다. 아우 송명연(宋明淵)이 악성 종기를 앓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었는데 직접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병을 낫게 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며 6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숙종 때 그 집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포상조치를 내렸다. 1736년(영조 12, 丙辰)에 효자로서의 뛰어난 행적이 나라에 알려져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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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증동국여지승람』권 34 「태인현」, ‘인물’
변주승(역), 『여지도서(輿地圖書)』46 전라도 Ⅲ (디자인 흐름, 2009. 5. 1.), 10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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