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씨(林氏) 밤중에 그 집에 불이 났는데, 병든 시어머니가 혼자의 힘으로 일어날 수 조차 없었다. 임씨가 시어머니를 업고 밖으로 나와 화를 면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 윤회(尹淮)의 서(序)에,
“우리나라의 건국은 도당씨(陶唐氏 요(堯) 임금을 말함)와 나란하고, 주(周) 나라에 미쳐서는 기자(箕子)께서 봉강(封疆)을 받았으니, 인현(仁賢)의 덕화는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깊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열성(列聖)이 서로 이으시어 교화를 밝히시고 풍속을 후하게 하셨으니, 가정에서는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고, 사람들은 사랑과 공경을 돈독히 하여 아무리 못난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일지라도 향할 곳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구고 임씨(九皐林氏)는 전의부정(典醫副正) 영순(英順)의 딸인데, 한 고을의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15세가 되어 현재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 박조(朴慥)에게 시집갔는데, 시어머니 전씨(田氏)를 섬겨 부인의 도를 다하였다. 건문(建文) 신사년 봄에 박군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임씨 홀로 태인현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3월 10일 밤중에 집에 불이 났다. 사람들은 모두 창황히 놀라면서 자신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오직 시어머니만은 늙고 병들어 잠자리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임씨가 급히 뛰어 들어가서 시어머니를 안고 나오다가 섬돌에 부딪쳐 쓰러졌는데, 바람에 불기운이 성하자 자기 몸으로 시어머니를 덮어, 머리가 그슬리고 등이 데어 문드러졌다. 건장한 종이 그 의리에 감동되어 뛰어들어서 불을 막으면서 업고 나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고, 의부(義婦)라는 호를 주니, 조정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시를 지어 읊고 노래하여 이미 축(軸)이 가득하였다.
하루는 나의 동년(同年) 친구 유순도(庾順道)가 그 축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졸문(拙文)으로 서문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임씨는 한 사람의 부인일 뿐이다. 학문의 힘과 연마한 공부는 없었지만, 특별히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므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속에 쌓였고, 남편을 잘 섬겼으므로 보고 느껴 온 바가 본래 있었다. 때문에 창졸간에 일을 당하여도 한 생각이 나온 바가 과단성 있어 막을 수 없어서, 뜨거운 불속에 뛰어들어 다만 시어머니를 구하는 것만 급히 생각하고, 일찍이 자기 몸의 위태롭고 또 죽을 것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비록 천성의 진실에서 근본된 것이지만, 어찌 우리 성조(聖朝)의 은택으로 길러서 풍화를 가다듬게 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내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기꺼이 말하여, 후세에 글을 쓰는 자에게 상고함이 있도록 한다.” 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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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부 임씨를 하례하는 시의 서문[賀義婦林氏詩序]
윤회(尹淮)
동방에서 나라를 세운 시기가 도당씨(陶唐氏)와 같은 시대였고, 주(周) 나라 때에 와서 기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았으니, 어진 교화가 오래될수록 더욱 깊이 들어갔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의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교화를 밝히고 풍속을 순후하게 만들어, 집집마다 절의를 숭상하고 사람마다 어버이를 사랑하며, 어른을 돈독히 공경하여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구고 임씨(九臯林氏)는 전의부정(典醫副正) 영순(英順)의 딸인데, 그 고을의 사족(士族)이다. 현재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 박조(朴慥)군에게 시집와서 그 시어머니 전씨(田氏)를 섬기는데, 며느리된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건문(建文) 신사년 봄에, 박군은 서울에 벼슬살이로 가 있고 임씨는 혼자 태인현(泰仁縣)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3월 10일 밤중에 집에 불이 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제 몸만 피하려고 서두르는데, 시어머니만은 늙고 병들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어 임씨가 뛰어들어가 시어머니를 안고 나오다가 섬돌에 부딪쳐 쓰러졌는데, 바람이 세게 불며 불길이 성하니 몸으로 시어머니를 가리다가 머리를 그슬리고 등을 데었다. 건장한 종이 보고서 그 의리에 감동하여 불길을 박차고 뛰어들어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업고 나와 함께 죽음을 면하였다. 그 사유를 조정에 알리자 명을 내려 그녀의 정문(旌門)을 세우고 의부(義婦)라고 부르니,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시를 지어 찬양한 것이 시축(詩軸)에 가득 찼었다. 하루는 우리 동년(同年) 친구 유순도(庾順道)군이 그 시축(詩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고 또 나의 졸렬한 문장을 얻어서 서문을 삼겠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임씨는 일개 여자로 학문의 힘과 연구의 도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특별히 효도로 시어머니를 섬긴 것은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교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요, 남편을 잘 섬긴 것은 본래 보고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위급한 순간에 일념으로 발동하여 씩씩하게 뜨거운 불길 속에 뛰어들어 시어머니를 구해 내는 것만 급하게 알고, 자기 몸이 상하고 죽는 것을 돌볼 여지가 없었으니, 이것이 아무리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라 하지만, 어찌 우리 거룩한 조정에서 은덕으로 백성을 길러서 교화를 격려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내가 태사(太史)의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이런 훌륭한 일을 칭찬하기를 좋아하니, 이 뒤에 사필(史筆)을 잡는 사람은 상고하기 바란다.
賀義婦林氏詩序
東方建國。與陶唐氏並。逮至成周。箕子受封。仁賢之化。愈久而愈深。恭惟我朝 列聖相承。明敎化厚風俗。家尙節義。人敦愛敬。雖庸夫愚婦。無不知嚮方者。九臯林氏。典醫副正英順之女。一鄕之望族也。旣笄。歸今通禮門奉禮郞朴君慥。事姑田氏。盡婦道。建文辛巳春。朴君遊宦京師。林獨侍姑於泰仁縣。三月十日夜分。家失火。人皆蒼皇驚愕。自救之不暇。唯姑老且病。伏枕未起。末如何。林亟入抱其姑出。觸階而仆。風烈火熾。以身蔽姑。頭焦背爛。有健僕感其義。走入捍火。負以出。姑與婦遂得俱免。事聞命旌其門。號爲義婦。朝之賢士大夫。咸以詩詠歌。旣盈軸。一日。吾同年友庾君順道。携以示予。且徵拙文爲序。予惟林氏。一婦人耳。非有學問之力。切磋之益。特以孝養姑氏。愛敬之積中。承事君子。觀感之有素。故能於倉卒之際。一念之發。毅然而不可遏。冒烈焰以赴之。唯拯姑之爲急。曾不䘏其身之危且死也。是雖本於天性之眞。何莫非我盛朝涵濡喣育。以礪風化之致然歟。予忝爲太史。故樂道其美。庶後之秉筆者。得有所考云2)
허씨(허氏) 김시태(金始兌)의 아내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으며 매우 공손하게 시아버지를 모셨다. 남편이 숨을 거두자 남편의 뒤를 따라 저세상으로 떠났다. 절개를 지킨 뛰어난 행실이 경종(景宗) 때 나라에 알려져 그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도아(道娥) 양인(良人) 전시대(田時大)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수습하기를 기다린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조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양씨(楊氏) 벼슬하지 않은 선비 최만즙(崔萬楫)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장사 지내기를 기다렸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조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3)
밀양박씨(密陽朴氏), 갑오동학혁명의 지도인물이었던 문선명(文鮮明; 泰仁面 興天面 江三里; 현 태인면 강삼리)의 아내이다.
1894년(高宗 31) 12월 20일 태인 수성군(泰仁 守城軍)이 문선명을 잡아다 가혹한 태형으로 거의 죽어 가게되자 이를 지휘하던 수성장(守城將)이 끌어 내라고 중지명령을 했음에도 사령 쌍동(쌍동)이 계속하여 두 서너 번을 연타하니 필경 절명하고 말았다. 이의 원수를 갚으려던 박씨부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상을 마치던 날 새벽 가족들이 잠든틈에 음독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날 새벽 쌍동이도 또한 피를 토하고 졸하니 세인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7월에 이르러 태인의 독지가 김재일(金在一)이 사재를 털어 내어 열녀비를 세웠다.4)
열부비(烈婦碑), 정읍시 태인면 낙양리(1969)
진한걸(陳漢傑)과 결혼한 南陽 洪氏는 남편이 急患으로 死境을 헤메자 자기 손가락을 단절하여 먹여서 연명케 하였다. 또한 시부모(媤父母)를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함은 물론 자식을 훌륭히 양육하였다.5)
정읍시 태인면 오류리 원오류(1907)
남원(南原) 양씨(楊氏)는 남편이 산에서 약뿌리를 캐다가 낫에 복부를 찔려 중상을 입자 좋다는 약을 다 썼지만 악화되었다. 이에 단지수혈(斷指輸血)로 60일간 연명케 하였고 사별 후 시부모(媤父母)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5)
열행비(烈行碑),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1970)
장영소(長永紹)의 처(妻) 나주(羅州) 임씨(林氏)는 남편이 운명(運命) 직전(直前)에 이르자 단지수혈(斷指輸血)하여 삼일(三日)동안 연명(延命)케하였으나 끝내 운명하였다. 그 애통함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시부모를 봉양(奉養)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수절(守節)하면서 시부모를 공경(恭敬)에 지극(至極)하였다.6)
열부비각(烈婦碑閣),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1973)
이병익(李炳益)의 처 경주(慶州) 최씨(崔氏)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남편의 쾌유를 빌며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호하였다. 남편의 병이 차도가 없이 더 악화되자 단지수혈(斷指輸血)로 7일간 연명(延命)케 했으나 별세하였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과부가 된 최씨는 맹인(盲人)인 시모媤母)를 지성으로 모셨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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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4 「태인현」, ‘인물’
변주승(역), 『여지도서(輿地圖書)』46 전라도 Ⅲ (디자인 흐름, 2009. 5. 1.), 110.
2) 『동문선』 제93권 / 서(序)
3) 변주승(역), 앞의 책, 110~111.
4) 『내고장 傳統文化』(정읍군청 공보실, 1983. 11. 9), 390.
5) 이수봉, 『백제문화권역의 효열설화연구(호남지방을 중심으로)』(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7), 461.
6) 앞의 책,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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