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통신[역체(驛遞)]
1. 역참(驛站)
국내 교역이 대부분 장시나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은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육상교통으로 사람은 보행, 기마 이외에는 교자(轎子)를 주로 사용하였고 짐(物貨)을 수송하는 데에는 인력, 소나 말 이외는 관에서는 대차(大車), 편차(便車), 곡차(曲車), 강주(杠輈)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보통 가정에서는 전거(田車) 조차도 보급되지 못하였었다.
물화의 수송에는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다. 수로에서는 판선(板船)이 많이 이용되었다.
우리나라 역로(驛路)제도는 487년(炤知王 9) 신라(新羅)에서 비롯하여 공문서의 전달, 관물의 운송, 내왕관리의 숙박에 이용하였으려 원(院)은 이보다 훨씬 뒤에 와서 고려시대에 설치되었다.
역참(驛站)이란, 역과 참의 기능을 함께 하는 복합어(複合語)로서, 전통시대의 교통통신 기관이다. 즉 역마(驛馬)를 갖추어 관리나 사신 왕래에 따라 마중나가고 배우하는 일(迎送)과 접대를 돕고,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릴레이식 전달(遞送)을 담당하는 것이 역이고,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의 릴레이식 전달을 위해서 설치된 것이 참인데, 대개 같은 곳에서 일을 보았다. 따라서 그 명칭도 역참(驛站)·참역(站驛)·역정(驛亭)·역체(驛遞)·역전(驛傳)·우역(郵驛)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와 같이 역참제의 운영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등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해 나가는 기능뿐 아니라,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육로에서는 역참(또는 참역) 또는 우역이 설치되었고, 내륙수도(內陸水路)나 조운로(漕運路)에는 수참(水站)이 설치되어 효과적인 교통통신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때로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다.
역참(驛참)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도로를 대(大)·중(中)·소(小)로 구분하여 547개의 역에 11명의 역승(驛丞: 고려 ·조선시대 역(驛) ·관(官) 등을 관장한 관직.)과 역에는 역장(驛長)과 역정(驛丁)을 두고 역전(驛田)을 주어 경비를 충당케 하였다. 역정은 6등급으로 구별하여 1과(科; 급) 75명, 2과 63명, 3과 45명, 4과 35명, 5과 12면, 6과 7명을 두었다. 역송(驛送)의 방법은 현령전송(縣鈴傳送)이라 하여 방울을 피대(皮袋)에 달아 전송하였는데 내용의 완급에 따라 지급은 삼급(三急)이라 하여 방울 3개를, 이급(二急)은 방울 2개를, 일급(一急)은 방울 1개를 달았다.
조선시대 초기의 교통체계는 육상교통, 해상교통, 하상교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역제(驛制)는 육상교통을 이어 줬으며 조운(漕運)은 해상과 사상 교통체계의 중심이었다. 역제는 공문서의 전달, 관물의 수송, 외국사신의 왕래와 공무 여행자들에 대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조운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 오는 조세의 운반과 관할을 위해 이루어진 제도였으며 공무여행자를 위한 원제(院制)가 실시되었다.
1457년(世祖 3)에 전국의 538개 역을 40구역으로 나누어 찰방(察訪)을 두고, 혹은 역승(驛丞)을 두기고 했다.1)
조선 시대에 실시되었던 통신 제도인 파발제(擺撥制)에서 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을 참(站)이라고 지칭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으며, 고려 때에 이루어진 교통로를 중심으로 도로를 정비, 발달시켰다. 따라서 조선조의 모든 제도가 정비되었던 성종 대에 역제는 9대 간선도로와 140여 개의 지선을 중심으로 교통망이 형성되었으며, 전국적으로 23개의 찰방도(察訪道)와 18개의 역승도(驛丞道) 관할 하에 모두 543역이 분포하였었다.
그 후 일부 구간에서 역의 폐지, 신설 등이 있었으며, 찰방이 모두 역승(驛丞)으로 대체되었을 뿐 역제는 큰 변화 없이 1895년(고종 32) 우체사(郵遞司)의 설치와 함께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들 도로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하였으나 군사적인 목적이 더 강하였기 때문에 최종 관할은 병조(兵曹)였고, 실질적인 관할은 병조의 승여사(乘輿司)였다.
역(驛)은 국왕(國王)의 명(命)을 수(受)한 관원(御使, 勅使 등이니 현검찰관과 같음)의 사용에 당(當)케하나 평상시에는 찰방(察訪)이라는 관원이 이를 전임하였다.
원(院)은 국왕(國王)의 명(命)을 수(受)한 관원(御使, 勅使와 같음)의 숙처(宿處)이며, 또는 조정(朝廷)과 각 군(各郡)과의 통신(通信)을 취급하는 곳이며 현 우편과 비슷하다.
각 역에는 역장(驛長)2)·역리(驛吏)3)·역졸(驛卒)4)·역정(驛丁)5)·역노(驛奴)6) 등을 두어 역무와 공역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관둔전(官屯田)과 마전(馬田) 등의 역전(驛田)을 지급하여 역의 운영 경비와 역원들의 급료를 충당하게 하였다.
관용교통 통신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驛)으로서,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 정도의 거리마다 역을 두고 마필(馬匹)과 역정(役丁)을 두어 공문을 전송하였다. 그리고 공무 여행자에게 역마를 제공하며, 그 밖에 진상이나 공납의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이것은 공용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나 공용에 준하는 사용(私用)에도 허락되는 일이 있었다.
상부의 행정 및 군사적 관계사항이 있을 때에는 말을 태웠거나 혹은 보행으로 다음 역까지 릴레이식으로 신속 정확하게 전달했다.
각급 관원이 출사할 때에는 포마(鋪馬)7)의 문빙(文憑: 증거가 될 만한 문서)을 얻어 릴레이식 순차로 바꿔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다. 정부 각 기관으로부터 여러 주 군에 보내는 공문서를 피대에 넣어 역졸이 이 역에서 저 역으로 체송하는 것인데, 용건의 완급에 따라서 그 피대(皮帒: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자루 가방)에 방울을 달았으니 3급에는 3령을 달고, 2급(보통 급한 일)에는 2령을 달고, 1급(평상시)에는 1령을 달았다.
역참과 역원은 임무는 같았으나 역참은 정령(政令: 정치상의 명령 또는 법령) 및 공보의 전달과 군사적 연락과 관리의 왕래와 숙박 및 특수 물자의 수송 등을 사명으로 일했다. 그러므로 역참에는 역정, 역전 및 역마를 두어 그 직무를 운영케 했다.
역원은 역의 관리(官吏)들이 전통을 가지고 길을 가든 중이거나 또는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해가 저물어 더 가지 못하고 묵어야 할 때 숙박을 한 곳, 즉 국립지정여관이었다.
고관이나 공무 여행자의 숙식에 대비, 지방 관아에는 관(館) 또는 객사(客舍)라는 숙소를 두었고, 요로마다 원(院)이라는 일종의 관영 여숙(旅宿: 여관)을 설치하였다. 원은 사용자가 극히 제한된 까닭에 점차 퇴폐해간 것이 많았다. 사용(私用)으로 여행하는 민간인은 점(店) 또는 주막이라는 사설 여숙을 이용하였다.
원(院)은 원주(院主)를 두어 이를 관리하게하고 재정으로는 원위전(原位田․院田)이라는토지를 주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대로(大路)에 있는 원은 1결(結) 35부(負), 중로(中路)에는 90부, 소로(小路)에는 45부(負)를 주었다.
역마(驛馬)를 사용할 때에는 마패(馬牌)라는 증빙할 표가 있어야 했는데, 사용자의 품계에 따라 각 역에서 제공하는 마필 수에 차이가 있었고, 말을 그 수대로 새겨 넣은 구리쇠로 만든 원패(圓牌)를 마패라고 한다. 마패 발급은 중앙에서는 상서원(尙瑞院), 지방에서는 감사나 병사(兵使), 수사(水使)가 발마패(發馬牌)를 받아서 계문(啓聞) 또는 진상(進上)등 필요한 때에 이것으로 발마케 하고 군사상 긴급한 때에는 쌍마(雙馬)를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국 41개도(道)의 도로에 540여 개의 역이 있었다. 역에는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들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公役)에 담당하게 하였고, 수 개 내지 수십 개의 역을 한 도(道)로 하여 찰방(察訪, 종6품) 또는 역승(驛丞, 종9품)이 이를 관장하는 동사에 교통로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보고하기도 하였다. 각 도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이를 관장하게 하고, 각 역에는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의 관리와 공역(公驛)을 담당시켰다. 역은 삼남 지방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었는데, 대개는 각 읍 인근에 소재하였다.
또 수도 주변이나 경기지방의 도선소(渡船所)인 벽란도, 한강도, 임진도, 노량도, 낙하도, 삼전도, 양화도 등에는 각각 「도승」(渡丞)을 두었다.
역승은 1535년(중종 30)에 모두 찰방으로 승격되어 없어지고 도승도 뒤에 별장(別將)으로 바뀌었다. 역승, 도승은 찰방과 마찬가지로 녹이 주어지지 않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역은 고려시대 이래 비교적 정비되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역의 수효가 540여 개로서 고려사에 보이는 520여 개와 별 차이가 없다. 조선시대는 이 방면의 역의 수는 감소되는 한편 새 국경선을 따라 한성-의주 간, 한성-경흥 간의 간선과 강계방면, 삼수방면의 지선의 정비되었다. 그 대신 중부 이남은 거의 대부분의 역이 고려시대 이래 소재지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답습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 수백 년간 교통상 큰 변화는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역은 삼남지방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고 찰방도 경상도와 같은 곳에는 11개소나 되었다.
전라도의 역의 분포를 보면 삼례도찰방, 오수도찰방, 청암도찰방, 경양도찰방, 벽사도찰방 등이 있었고, 역이 있었던 곳은 전주 삼례, 전주 반석(半石), 임실 오원(烏原), 임실 갈담(葛覃), 임피 소안(蘇安), 함열 재곡(材谷), 여산 양재(良才), 전주 앵곡(鶯谷), 태인 거산(居山), 정읍 천원(川原), 고부 영원(瀛源), 김제 내재(內才) 등으로,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증가된 것으로는 부안 부흥(扶興) 역이있다.
역은 규모에 따라 대로(大路), 중로(中路: 重譯), 소로(小路: 小驛)로 나뉘었다.
대로로(大路路)는 경기에 12역이며, 중로로는 경기에 9역, 공충도에 24역, 전라도에 4역, 경상도(慶尙道)에 5역, 강원도에 6역, 황해도에 11역, 평안도에 13역, 함경도에 37역이며, 기타는 모두 소역(小驛)에 속한다.
공충과 전라 우도는 금천(衿川)ㆍ수원의 통로를 경유하고, 공충과 경상 좌도는 광주(廣州)ㆍ이천의 통로를 경유하고, 전라 좌도와 경상 우도는 과천(果川)의 통로를 경유한다.
전라도(全羅道)의 대로로 중에서 4역에 속하는 삼례도(參禮道)는 전주 삼례역과 속역 12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삼례도에는 모두 3등마 272필과 아전과 군졸 6,349명이 있었다.
중심 역은 조선 초기 종 9품의 역승(驛丞)이 있었으나 성종대 이후 앵곡도(鶯谷道)와 병합하였고, 찰방(察訪)으로 승격되었다.
관할범위는 여산(礪山)-전주(全州)-금구(金溝)-태인(泰仁)-정읍(井邑)-장성(長城) 방면에 이어지는 역로(驛路)와 전주∼남원(南原), 전주∼순창(淳昌), 함열(咸悅)-임피(臨陂)-옥구(沃溝), 함열-만경(萬頃)-부안(扶安)-고부(古阜)로 이어지는 역로이다.
삼례·반석·양재·앵곡역 등은 중로(中路 또는 中驛)에 속하는 역이고, 그 밖의 역은 소로(小路 또는 小驛)에 속하는 역들이었다. 이 역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태인의 역(驛)은 거산역(居山驛, 在縣 南1里)으로 삼례도(參禮道)의 속역(屬驛)으로 태인면 거산리(2001년 지명: 거산리 원거산마을)에 있는 중로(中路)의 역으로 관리(管理) 11명, 번인(番人) 10명, 노복(奴僕) 3명, 실무비(失務婢) 2명, 실무마(失無馬) 11필, 위전답(位田畓) 45석, 16두락(斗落)이었다.8) 이 역은 해남로로 이어진다.
1789년(정조 13)경에 만들어진 읍지를 뒤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편년 미상의 태인군 읍지에는 역원내역을 보면 관리 15명, 노비 15명, 말 15필로 기록되어있다.9)
태인의 원(院)은 태거원(泰居院, 在縣 西五里)과 왕륜원(王輪院)이 있었다.
태거원은 태인현에서 서쪽으로 5리(태인면 거산리(泰仁面 居山里)의 남천(南川; 현 泰仁川) 떨어져 있으며, 현재 태인면 대각교지(大脚橋址, 원래 泰居僑)이다.
왕륜원(在縣 南五里)은 태인현에서 북쪽으로 9리 떨어져 있었고, 전주감영에서 정어원(鼎魚院)을 거쳐 태인현으로 들어오는 길이며, 현재 태인면 고천리 왕림마을이다.
솟튼재와 관련이 있는 정어원(鼎魚院)은 옹동면 용호리 정어치하(鼎魚峙下)10), 감곡면 통석리 통사동(甘谷面 通石里 通司洞) 부근이다. 방위와 거리로 미루어 볼 때 통사동은 북쪽에 위치하며 10리가 넘는 거리이나 현 통사동에는 예로부터 원터(院-)라고 전해 내려온다. 여하튼 정어원(鼎魚院)은 '솟투원재', '솟탄재', 또는 '솟원재' 등으로 불리우는 영어치의 남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미(稅米)를 서울로 운송하는 데는 조운(漕運)이라는 수상 운송수단을 이용하였다. 이를 위해 조운 수로의 요지에 조창(漕倉)을 두어 인근의 세미를 집결시켰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세미는 국경의 군량 보급과 사신의 접대 경비에 충당하기 위해 그 도에 보관하고, 나머지 전국의 세미는 조운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었다. 조운의 운영은 조선 초기에는 관영이던 것이 중기 이후로는 민영으로 바뀌었다.
고도서(古圖書)와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난 1989년 이전의 역원(驛院)과 교량(橋梁)에 관한 기록11)은 다음과 같다.
[역원(驛院)]
居山驛 南2里 (승람: 역리(易理) 15명, 역노(驛奴) 15명 역마(驛馬) 15마리)
(여지)(지지)(호남)
鼎魚院 東10里 (승람: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여지)(호남)
泰居院 西5里 (승람: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여지)
王輪院 北9里 (승람: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여지)
[교량(橋梁)]
泰居橋 南5里 (승람)(여지)(지지)(호남) 長灘橋 서5리 (지지)
虎川橋 北5里 (지지)
약칭: (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 東國輿地志, (도서) 輿地圖書, (비고) 增補文獻備考, (호남) 湖南邑誌.
2. 봉수(烽燧)
조선시대 대표적인 통신 수단은 봉수(烽燧)였다. 이는 변방의 긴급한 사항을 중앙이나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적 목적의 통신망이었다. 대략 수십 리 간격으로 마주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를 잇는 봉수대 또는 연대(烟臺)에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내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주요 봉수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의 순천 등 다섯 곳을 기점으로 하고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종점으로 연결되었다.
중앙에 보고된 신호는 병조가 이를 주관해 승정원에 보고하는 체계였다. 위의 다섯 간선 외에도 보조선이 조직되어 있었고, 국경 지대에는 각 초소로부터 본진으로 연결된 것도 있었다.
3. 교량(橋梁)
국도 1호선(京木線):
국도 1호선과 코다리버스(1960년대)
용호교(龍虎橋) - 옹동면(瓮東面) 용호리(龍虎里)
오성교(五成橋) - 옹동면(瓮東面) 오성리(五成里)12)
태성교(泰成橋) - 태인면(泰仁面) 태성리(泰成里)
대각교(大脚橋) - 태인면(泰仁面) 태서리(泰西里)
태인부안선(泰仁扶安線):
백산교(栢山橋) - 태인면(泰仁面) 백산리(栢山里),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태인읍 백산리이다.
태인임실선(泰仁任實線):
신성교(新成橋) - 태인면(泰仁面) 거산리(居山里)
기타각선(其他各線):
동구교(洞口橋) - 태인면(泰仁面) 거산리(居山里)
강삼교(江三橋) - 태인면(泰仁面) 궁사리(弓四里)13)
대각교지(大脚橋址)
태인면(泰仁面) 거산리(居山里) 거산교(居山橋, 태인천 상류)의 동측(東側)에 있었다. 증왕(曾往, 옛날부터)은 교통(交通)에 대한 관념(觀念)이 적어 도로와 다리를 놓는 일(治道橋梁)에 매우(퍽) 등한시(等閑視)하였음으로 통행(通行)에 대한 불편이 대단하였다. 이곳도 남북교통(南北交通)의 주요도로(主要道路)이나 충분한 교량(橋梁)이 없어서 통행인(通行人)의 불편이 많았다. 260여 년 전(1936년 기준)에 태인현 백암리에 거주하는 자선가(慈善家) 박잉걸(朴仍傑先生)이 단독(單獨)으로 사재(私財)를 털어 만년불패(萬年不敗)의 굉장(宏壯)한 석교(石橋)를 가설(架設)하여 통행인(通行人)의 편리(便利)를 도모(圖謀)하였다. 고금(古今)을 물론(勿論)하고 선생의 공노(功勞)를 찬양(讚揚)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세(時勢)의 변천(變遷)을 따라 그 길이 아래쪽(下便)으로 이설(移設, 현 京木線 一等道路)됨에 따라 이 대각교(大脚橋)도 폐지되었다.14)
대각교는 옛날 전주(全州) 감영(監營)에서 남도(南道)로 내려가는 교통(交通)의 요지(要地)였다. 그러나 교량시설(橋樑施設)이 없어 행인(行人)의 불편이 많았으므로 태인현 백암리에 거주하는 박잉걸(朴仍傑)이 사재로 만년불패(萬年不敗)의 석교(石橋)를 가설하였으나 근대에 와서는 그 길이 하편으로 이설됨에 따라 대각교는 자연히 폐교되고 말았다. 그 위치는 현 태인면 거산리에 있는 거산교의 하류로 추측된다. 대각교에는 영조의 생모 최숙빈의 설화와 중종 때의 행평승(行平僧)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15)
대각교 설화 1
대각교(大脚橋)와 행평승(行平僧)
고려(高麗) 때의 숭불사상(崇佛思想)은 불교(佛敎)를 배격(排擊0하고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는 배불숭유(排佛崇儒)의 건국이념(建國理念)을 가진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중종(中宗) 때 행평이라 하는 스님이 있었다. 불가에서 뛰어난 스님(傑僧)이었다.
행평스님(俗姓은 崔氏)은 불교의 엄격한 수도와 계행(戒行)으로 묘법(妙法)을 통달(通達)하여 천태종(天台宗)의 영수(領袖)로 초대받은 대승(大僧)이었다.
유교가 득세하던 그 때에도 중종의 신임(信任)이 두터워 궁중(宮中)을 무상출입(無常出入)하였으므로 많은 유생(儒生)들의 투정(妬情)과 반박(反駁)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하루는 태학관(太學館) 유생들이 모두 나오지 않았다. 별안간 있는 일이라 영문을 모르고 중종은 놀라 그 연유(緣由)를 물었다.
그 때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이 대답하기를 “상감마마께서 불교를 숭상하시니 유생들은 아무 할 일이 없다하여 오늘 한 사람도 나오질 않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중종은 크게 격노(激怒)하여 정극인을 당장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명(命)을 내렸다. 이 때 승상(丞相) 황희(黃喜)가 간(諫)하기를 “상감마마, 후일에 정극인을 무슨 죄목으로 참형(斬刑)했다고 하시렵니까?”하고 물었다.
이쯤 되니 임금도 불교를 반대했다는 죄목(罪目)으로 참형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은 참형의 명령을 거두고 정극인을 북방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했다. 정극인은 끝내 귀양살이를 떠났다. 몇 년 세월이 흘러 정극인이 귀양살이가 풀리게 되고 반대로 행평승(行平僧)이 제주도로 귀양살이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귀양 가는 행평승 일행이 태인의 대각교에 이르러 다른 길손들처럼 잠시 쉬고 되었다.
동서(東西)로는 거산평야(居山平野)가 펼쳐 있고 대각교 밑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맑은 물을 보고 행평승은 자연의 신비로움에 다시 놀란 듯 “아, 여기는 아름다운 산수의 고을이구나!”라고 하며 감탄하였다. 행평은 일행들에게 물었다. “이 물은 어디서 흐르는 물인가?”라고 물었다. “예, 태인 고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인은 반불교(反佛敎) 유생(儒生)의 두목(頭目)인 정극인의 고향인 것이다. 행평은 가슴이 짜릿했다. 지금 자기가 귀양살이에 오른 것도 정극인 같은 유생들의 모략(謀略)이라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리하여 행평은 “내가 원수의 고향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실 수야 있겠는가?” 하고 마시려던 물을 먹지 않고 돌아섰다한다. 이와 같은 전설(傳說)이 있다.
대각교 설화 2
대각교(大脚橋)와 최숙빈(崔淑嬪)
대각교(大脚橋)는 태인면 거산리(居山里)에 있는 다리다. 이 다리는 전주 감영에서 남도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로였다. 이 길로 지나는 사람이 많았으나 다리가 없어 행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3백여 년 전 태인골 백암리(現 칠보면 백암리)에 살던 자선가로 알려진 박잉걸(朴仍傑)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크고 튼튼한 돌다리를 놓았으니 이 다리를 대각교라 불렀다. 그 후 이 다리는 지나는 사람마다 그 분의 고마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숙종(肅宗)때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1936년 기준)에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이 마침 영광(靈光) 군수(郡守)로 발령을 받고 부임(赴任)하러 가는 도중(赴任途中)에 이 다리[此橋]에서 쉬어가게(休憩) 되었다.
옆에는 이제 여덟 살 먹은 딸을 안은 둔촌의 부인도 동행하고 있었다.
마침 둔촌의 일행 앞을 지나가던 어린 소녀 거지[乞食少女]가 있었다. 얼른 보아 옷은 남루(襤褸)하나 용모(容貌)가 단아하고 총명(聰明)하고 잘 생긴 소녀였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이 소녀의 모습은 안고 있는[包] 둔촌 부인의 딸 모습과 닮은 데가 너무 많았다.
지나는 소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둔촌 부인은 이름[姓]과 부모와 가정환경[父母兄弟의 有無를]을 두루 물어 보았다.
성은 최씨(崔氏)요 부모님은 돌아가신지[死別] 오래고 형제친척(兄弟親戚)이 없는 무의무탁(無依無托)한 가련(可憐)한 고아[少女]였다.
둔촌 부인은 자기(自己) 딸을 생각하는 동시에 그를 동정(同情)하여 의복(衣服)을 개착(改着)시켜 딸과 같이 불쌍히 여겨 이 소녀를 데리고 갔다[抱去] 한다.
그리하여 그 뒤 글공부(工夫)와 예의범절(禮儀凡節)을 가르치며 친딸과 똑같이 생각하며 길렀으니 예의 바르고 얼굴 곱고 재주 뛰어남이 이를 바 없었다.(才質이 敏捷하야 一覽輒記하였다.)
수년 후 둔촌은 외직(外職)에서 내직(內職)으로 승진(陞差)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을 때에도 이 소녀만은 같이 데리고 갔었다.
이 무렵 숙종대왕의 처음 부인(初娶)이신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昇避)하자 다시 현숙(賢淑)한 왕후 민씨(閔氏)를 선택하셨으니 이 분이 바로 둔촌의 딸이었다.
그때까지도 민씨(閔氏) 왕후는 일시(一時)도 떠날 수 없는 최씨를 데리고 입궁(入宮)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숙종대왕께서는 장희빈(張禧嬪)이라는 아름다운 궁녀에 매혹(迷惑)되고 말았다. 장희빈은 대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자 결국 민씨(閔氏) 왕후는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厚德하신 閔氏를 廢黜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최씨(崔氏)는 밤이나 낮이나 민씨(閔氏) 왕후 생각뿐이었다. 밤마다 삼경이 되면 민씨(閔氏) 왕후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 밤에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암행(暗行)에 나섰던 숙종대왕이 발견하시고 옛 주인을 사모하는 갸륵한[嘉尙] 정성에 감탄하여 그를 자기 곁에 있게 하였다.
속담에 낫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전(傳)한다고 숫색시 최씨는 처녀의 몸인데도 배가 불러가니, 까닭을 아는 사람들이 한입 두입 건너 필경(畢竟) 장희빈(張禧嬪)의 귀에 들어갔다. 이를 알게 된 장희빈(張禧嬪)은 최씨(崔氏)를 죽이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숙종(肅宗)께서 낮잠을 주무시는데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마당에 놓인 독 밑에서 용 한 마리가 내려오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가는 꿈이었다.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내전(內殿)마당에 놓인 「독」밑에서 용(龍) 한 마리가 나오려다가 못나오고 거의 죽게 되었다.) 깜짝 놀라 깨어나서 급(急)히 내전(內殿)에 들어와 두 말씀도 않으시고 「독」을 들어라하시니 질식(窒息)하여 거의 죽어가는 최씨(崔氏)가 「독」 밑에 있었다.
이러하므로 숙종(肅宗)께서는 최씨(崔氏)를 구하는 한편 장씨(張氏)를 미워하여 사사(賜死, 사약을 내려 죽게 하고)하시고 인현(仁賢)왕후 민씨(閔氏)를 궁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 후 최씨(崔氏) 몸에서 영조(英祖)가 탄생(誕生)함으로 바로 최씨(崔氏)는 상궁(尙宮)으로 봉(封)하였다.
상궁(尙宮)은 자기 몸이 귀히 됨에 태인 현감에 명하여 친척을 조사하였으나 한 사람도 없었으며 부모의 분묘(墳墓)를 조사(調査)하였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최씨(崔氏)는 상궁에서 숙빈(淑嬪)으로 상대(上待)되었다.
최숙빈(崔淑嬪)은 태인현 최사령(崔使令)의 딸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숙종 20년 9월 13일 영조를 낳았으며 1718년(肅宗 44) 3월 9일 졸(卒)하니 후(厚)한 장례(葬禮)로 우송(優送)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영조(英祖)는 어머니 최숙빈(崔淑嬪)을 위하여 수빈묘(淑嬪廟)를 세웠는데 후에 육상궁(毓祥宮)으로 일컬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영조 4년(무신(戊申)) 박필현(朴弼顯)으로 인한 난리가 일어났을 때 태인현을 관대(寬大)하게 보아 준 것은 영조의 외향(外鄕)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최숙빈의 인연을 지닌 대각교는 근대에 와서 서울 목포간의 국도가 그 위쪽으로 나게 되어 폐교(廢橋)되고 말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최숙빈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딸이며 어떤 설움을 간직하고 영민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두고 세월은 또 흐르고 있다.16)
전경지명답사 - 대각교 터
연구원 한수진
전북(全北) 정읍시(井邑市) 태인면(泰仁面)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인근지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12년에 신태인역(新泰仁驛)이 생기면서 새로운 마을이 조성되었고, 명칭을 구분하기 위해 구태인(舊泰仁)으로 불리게 되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쇠퇴한 상태지만 아직도 과거의 번영을 보여주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지금은 지명만 남아있는 ‘태거원(泰居院)’은 태인이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음을 알려준다.17) 또한 태산선비문화권18)에 걸맞게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있는 향교(鄕校)와 선비들에게 학문을 권하기 위해 세웠다는 읍원정[挹遠亭, 시정(時亭)], 최치원(崔致遠, 857~?)이 풍류를 즐겼다는 피향정(披香亭) 등 선비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유적들이 있다. 이 외에도 신잠(申潛, 1491~1554)이 세운 동헌(東軒)과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잠비(申潛碑) 등 다수의 유형문화재도 남아 있으며 향교 바로 뒤에 있는 성황산(城隍山)은 동학농민군이 연합군(관군·일본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태인에서 우리와 관계있는 지역은 항가산(恒伽山) 중턱의 도창현(道昌峴)19)이다. 도창현은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셨고 도주님께서 무극도장(無極道場)을 세우신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가 민족문화와 관련된 것은 철저하게 파괴하던 시절에 무극도가 해산되어 도장의 건물도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완공 당시에는 여기저기에서 몰려온 구경꾼이 제법 많았을 정도로 명소(名所)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일부만 두 군데에 남아있을 뿐이다.20) 건물의 원형을 볼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셨다는 젖샘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것도 아쉬웠다.
무극도장 건물이 전부 이건(移建)된 이후 도장 터를 매입한 사람이 ‘태인기술학교’를 설립했었다. 그 학교에서 서무과장을 맡았던 분께 여쭤보니 당시에 맑은 물이 나오던 샘21)이 있었지만 상수도 공사를 할 때 덮어버려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외에 아쉬운 점이 또 있다. 이제는 터만 남아있는 대각교22)가 그것이다.
『전경』 예시 45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도창현에 있는 우물을 가리켜 이것이 젖[乳]샘이고 후천의 도통군자는 여자가 많으리라 하시며 “상유 도창 중유 태인 하유 대각(上有 道昌 中有 泰仁 下有 大覺)”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나온다. 지도를 놓고 보면 북동쪽에 도창현이 있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동헌과 향교, 피향정 등이 있는 태인의 옛 중심지가 있다. 이 일대는 면사무소와 버스터미널, 학교 등이 있어서 현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숙빈 최씨 만남의 광장’23)이 있는데 그 뒤편에 대각교 터가 있다.
대각교는 태인천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태인에서 고부(古阜)로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했지만 큰비만 내리면 유실되곤 해서 이용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던 것을 약 300년 전, 인근의 백암리에 살던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1676~?)24)이 자비(自費)로 장대석(長大石)을 구입하여 다리를 다시 만들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큰 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명칭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대각교이다. 대각교는 큰물이 져도 별 손상 없이 잘 버티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그 위로 국도 1호선이 개통되면서 헐리고 말았다.
그 후 대각교는 몇 십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979년에 모래 채취 작업을 하면서 발견되었다. 작업을 의뢰하셨던 분25)과 그 땅의 주인26)께 여쭤보니 상판과 좌대로 쓰인 장대석 및 소나무로 깎아 만든 커다란 말뚝이 대량 발견되었으나 원래 형태나 놓인 방향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장대석이 가장 많이 발견된 곳 근처에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길과 주막도 있었는데 이 역시 국도 1호선 개통과 농경지 개간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다. 땅 주인은 장대석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좀 넘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숙빈 최씨 만남의 광장’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언젠가 대각교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낸 장대석 대부분은 땅에 다시 묻고, 농토로 사용할 부분에 묻혀 있던 돌들은 근처에 쌓아 놓거나 정원 둘레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각교 터 위를 지나 동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대각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땅 주인의 민원으로 이루어졌다. 원래의 대각교가 없어지면서 주민들이 그 옆에 있던 거산교를 대각교와 혼용해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땅 주인은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마땅할 대각교가 이름까지 사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민원을 제기하였고, 그 뜻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대각교는 원래 있던 터와는 거리가 좀 멀고, 오히려 신내교 아래쪽이 더 가까운 위치이다. 국도 1호선 설계 당시에는 신내교가 설치된 부분이 둑 형태로 시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천을 막으면 홍수가 났을 때 물이 빠질 곳이 없고 주민이 왕래하기도 불편하다는 민원 때문에 다리형태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땅 주인은 초기 설계 계획을 보고 민원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다리가 ‘대각교’가 되었다고 한다.
대각교 터를 끝으로 예시 45절에 나오는 지명의 위치가 모두 확인되었다. 예전의 모습들이 좀 더 남아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면서도 이렇게나마 조금씩 상제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는 점에 뿌듯함을 느낀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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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고장傳統文化』(정읍군청 공보실, 1983. 11. 9.), 195.
2) [역사] 각 역참(驛站)에 소속된 구실아치들의 우두머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 [역사] 옛날에 역참(驛站)에 딸린 이속(吏屬)을 이르던 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4) [역사] 예전에, 역(驛)에 소속되어 심부름 따위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이르던 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5) [명사] 역에서 부역하던 장정.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6) [역사] 조선 시대, 역마를 갈아타는 역참(驛站)에 딸려 심부름을 하던 사내종.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7) 예전에, 각 역참(驛站)에 갖추어 두고 관청의 업무에 쓰는 말을 이르던 말.
8) 『태인현지(泰仁縣誌)』
9) ‘居山驛在邑南邊二里吏十五奴十五馬十五參禮屬 ’, 『태인군읍지(泰仁縣邑誌)』 편년 미상, 泰仁郡(朝鮮)編.
10)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24.
11) 柳在泳, 『전북전래지명총람』 ((주)민음사, 1993. 3.15), 177~178.
12) 梁昌成...[等編], 『泰仁誌』(1965), 39.
13) 앞의 책, 38~39.
14)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36∼37.
15)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337.
16)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36∼37.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337~339.
17) 한양에서 충청ㆍ전라ㆍ경상도 방향으로 가는 길을 삼남대로(三南大路)라고 하는데, 전국 각지로 가는 노선이 9개 있었다. 그중에서 제7로는 동작진을 지나 삼례ㆍ금구ㆍ태인ㆍ정읍을 거쳐 제주에 이르는 970리 길이었다. 이 노선으로 인해 태인은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고, 여행객에게 말이나 숙식을 제공하는 거산역(居山驛), 태거원(泰居院), 주막 등이 설치되었다.
18) 정읍시 북면ㆍ칠보면ㆍ태인면ㆍ옹동면ㆍ산내면ㆍ산외면을 ‘태산선비문화권’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신라시대 때 ‘태산(泰山)’이라 불렸던 곳으로, 선비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유적들이 현재까지 많이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부임한 이래 선비기질의 유풍이 계승되어 조선시대에 정극인, 송세림, 김약묵, 신잠, 이항 등의 유학적 선비인맥이 형성된 곳이다.
19) 『한국지명총람』12권(전북편 下)을 보면 ‘돌챙이(도챙이)고개’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태인 주민들은 예전부터 도창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단어의 조합은 서울의 아현동(兒峴洞)과 같은 경우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현’에서 ‘아’는 아이[兒]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고, ‘현(峴)’은 고개의 한자어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지명을 정리하면서 비슷한 발음의 한자 ‘도창’과 고개의 한자어 ‘현’을 조합하였다는 설도 있다.
20) 『대순회보』134호, 답사기「무극도장의 자취를 찾아서」 참조.
21) “샘에 이름은 없었지만 (주민들이) 젖줄이라고 부르는 것은 들었다.” (2012년 5월 9일 김○○씨 인터뷰 내용 중에서 발췌)
22) 한자 표기에 대한 부분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대각교가 문헌 종류나 구전에 따라 대각교(大角橋), 대각교(大脚橋), 태거교(泰居橋), 대거교(大居橋) 등의 다양한 표기로 쓰이고 있다는 점, 상제님께서 청국 공사를 청도원(淸道院)에서 행하신 것이나(공사 2장 6절) 어음(語音)이 같은 신호(神戶)를 통해 신방축 공사를 보셨던 점(공사 3장 31절) 등을 미루어 볼 때 대각교의 지명 역시 비슷한 경우로 추측된다.
23) 영조 생모인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2006년 3월에 개장되었다. 천애 고아였던 어린 최씨가 남루한 행색으로 대각교를 지나다가 마침 그곳에서 쉬고 있던 민유중 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 민유중의 부인은 측은한 마음에 소녀를 데려다 친딸과 함께 키웠고, 훗날 딸이 간택을 받자 소녀도 함께 보내어 보필하도록 하였다. 후에 딸은 인현왕후가 되었지만 장희빈의 계략으로 폐출되고 만다. 최씨는 밤마다 인현왕후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올렸는데 우연히 숙종이 그 모습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승은을 입는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최씨는 숙빈까지 오르게 되고, 그녀가 낳은 아들은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이 된다.
24) 박잉걸은 만년에 이르러 정읍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자선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가 가난한 이들이 언제라도 가져갈 수 있도록 나무에 옷과 신발을 걸어놓았기 때문에 그 일대를 ‘걸치기’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지명은 아직도 남아있다. 또한 1745년에 칠보면 시산리의 구절재(구절치)고갯길을 닦았고, 이듬해 봄에는 굴치의 잿길을 닦았다.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에 대각교라는 다리를 놓고, 태인의 고을 육방(六房)들에게 많은 토지를 희사하여 아전들이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탔던 석탄사(石灘寺)를 중건하고, 마을의 평안을 위해 남근석(男根石)을 세우고, 춘궁기에는 집의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효행도 뛰어나 나라에서 정려[旌閭: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ㆍ충신ㆍ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내려지기도 했다.
25) 여○○씨 (2012년 4월 19일 인터뷰 내용)
26) 시○○씨 (2012년 5월 9일 인터뷰 내용)
27) 여주본부도장 홈페이지 대순진리회 회보 대순143년(2013) 3월 / 1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