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면 거산리(居山里)
평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서쪽에 동진강이 흐른다.
본래(本來) 태인군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으로서 거미처럼 생긴 산이 있으므로, 거미 또는 거산이라 하였는데, 거산리는 고려(高麗)시대 이후 삼례도(參禮道)의 거산역(居山驛)이 있었다.
1416년(太宗 16) 8월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을 병합한 태인현(泰仁縣)의 맨 처음의 고을 터가 시산리(詩山里 : 현 칠보면)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터가 좁아서 2년 후 태성리(泰成里 : 현 泰仁東軒)로 다시 옮겼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내면(郡內面)의 구오리(舊五里), 육리(六里), 십일리(十一里), 거산리(居山里)와 동촌면(東村面)의 신성리(新成里), 정동리(井洞里)의 각 일부(一部)를 병합하여, 중심 마을 이름을 따라 거산이라 하고, 정읍군 태인면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분리는 원거산(元居山), 수양(垂陽), 상동구(上洞口), 신기(新基)로 나우어져 있다. 수양(垂陽)은 통칭 '수양동', '쇠양골'로 불리운다.1)
『정읍군지(1936)』에 따르면 거산리(居山里)는 거산리(居山里), 하구내(河口內), 구오리(舊五里)로 되어있다.2)
현재의 분리는 원거산(元居山) 마을, 상동구(上洞口)마을, 신기(新基)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위치는 소재지 동남쪽으로 0.5km 지점에 있다.
특산물로는 사과가 있다.
인구현황 | ||||
기준 |
호수(戶數) |
남자 |
여자 |
계 |
1972.12. 31. 3) |
156 |
454 |
462 |
916 |
가. 지명 소개(지명총람 적고, 카페참조)
거산다리(居山橋) - 하며 거산앞다리 서쪽에 있는 다리. 길이 5m, 1933년 1월 준공
거산앞다리 – 거산 서쪽에 있는 다리, 길이 5m.
거산앞들(居山平野) - 거산 남쪽에 있는 들. 궁사리의 궁사평야와 인접되어 있음.
거산역(居山驛)터 – 거산 앞에 있는 조선조 때의 거산역 터.
능허각(凌虛閣)터 – 거산 북쪽에 있는 터. 조선 성종 때에 홍안세가 세웠다 함.
대각교(大脚橋) – 거산다리 동쪽에 있는 다리. 전에 박인걸이 돌다리를 놓았음.
대장혈 – 와우혈 왼쪽에 있는 등성이.
도토마리 – 거산 서쪽에 있는 산. 모양이 도토리처럼 생겼음.
동구네다리(洞口橋) - 동구네 남쪽에 있는 다리.
미네새암 – 거산 동쪽에 있는 샘으로 바위틈에서 나옴.
밤나뭇골 - 황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음.
섬배미 - 거산앞들에 있는 섬처럼 생긴 논.
세가호뜸(三家戶~)으로 불리는 곳이니 일제시대에 웃동구네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
소죽(터) - 쇠말뚝정자나무 옆에 있는 들로 전에 깃대같은 것을 세워 두었던 곳이라 함.
송석정(松石亭) - 거산 서남쪽에 있는 정자로 김용곤(金湧坤)이 건립하였음.
쇠구실방죽 - 거산앞들 가운데 있는 방죽.
쇄눈구녕바우 - 와우혈 서남쪽에 있는 바위.
쇠말뚝정자나무 - 와우혈 뒤 남쪽에 있는 두아름되는 고목나무.
신중바지들 - 거산 서쪽에 있는 들.
신중바지보 - 신중바지들 바로 옆에 있는 보.
쌍수문보(雙水門洑) - 웃드구내 밑에 있는 보.
양치고개 - 도토마리 동쪽에서 태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옥배미 - 거산앞들 남쪽에 있는 논.
와우혈(臥牛穴) - 거산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
왕우혈(王牛穴)- 와우혈 왼쪽에 있는 등성이.
이씨열려문(李氏烈女門) - 거산 서북쪽에 있는 경주최씨 부인 전주 이씨 정문.
장석구리 - 거산 중앙에 있는 논으로 전에 장이 섰었음.
정자나무 - 거산 동쪽에 있는 회나무 두아름.
죽석고개 – 거산 서쪽에서 정우면 화천리로 넘어가는 고개
중방충이 옆다리 – 거산 남쪽에 있는 다리
청룡날 – 거산 동쪽에 있는 샘.
피기동새암 - 밤나무공에 있는 샘.
항가산(恒伽山) - 태인면 거산리, 태흥리, 옹동면 칠석리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20m
항가산(恒伽山) 공동묘지 - 항가산 남쪽에 있는 묘지.
황샘 – 거산 북쪽 동네 옆에 있는 샘.
나. 마을 소개
(1) 원거산(元居山) 마을
원거산「거미」라고도 하며 거산리의 중심마을이다. 고려(高麗)이후 삼례도(三禮道)의 거산역(驛)이 있었던 곳이며, 1416년(太宗 16년)8월에 태산현과 인의현을 병합한 태인현(泰仁縣)의 맨 처음의 고을 터가 되었고 교통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터가 좁아서 2년 후 태성리(泰成里)로 다시 옮겼다. 지금 자리인 태인 초등학교로 동헌(東軒)이 옮겨 터만 남아 있으며 옹동, 칠보를 지나는 국도 30호선이 있다. 거산평야가 자리하고 있으며 동진강 유역으로 항가산(恒伽山)을 등지고 있다.
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0.5km 지점으로 순농사를 하며 가구수는 59가구, 세대수는 60세대, 인구는 167명(남자-76, 여자-91), 경지면적은 40.6ha(밭-4.2, 논-36.4)이다.(2002년 12월 30일 기준)
(2) 상동구(上洞口, 洞口川) 마을
상동구마을은 「동구내」라고 불리는 마을로, 거산천(居山川, 泰仁川)을 중심으로 북쪽은 상동구(上洞口)이고 남쪽은 하동구(下洞口)라 불리는 마을이며 통칭 '동구내'로 부른다., 이 마을 입구에 동진강이 흐르고 있어 쌀 위주의 농사를 하고 있고, 그 강(江)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고 있다.
태인 팔경(八景) 중의 하나인, 대각어화(大脚漁火, 대각에서 고기 잡는 불빛이 장관이다)를 연상하게 하는 마을이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km 지점으로 순농사를 하며 가구수는 18가구, 세대수는 18세대, 인구는 68명(남자-33, 여자-35), 경지면적은 27.5ha(밭-1.4, 논-26.1)이다.(2002년 12월 30일 기준)
(3) 신기(新基) 마을
신기마을은 웃동구네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새터라는 뜻으로 「세가호뜸[三家戶]」으로 불려오다가,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에 생긴 마을로 천주교(天主敎) 공소(公所)가 설치되어 주민 대부분이 천주교도이다.
이곳은 옛날 전주감영을 거쳐 남도로 내려가는 호남의 대로로 대각교(大脚橋)와 태거원(泰居院)이 있었던 곳이다. 1979년 모래 채취 작업 중 발견된 대각교(大脚橋) 유지(遺址)는 이 마을로부터 동쪽 100m 미만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교통의 요지였음을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유적으로 남아 있는 대각교(大脚橋)는 영조때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이 많은 사재를 들여 가설한 다리로 대각교(大脚橋)란 큰 다리란 뜻이다.
밭이 없으며, 밤에는 물고기(게)잡는 주민들로 불야성을 이루었고, 주로 논 농사에서 70년대 이후에는 비닐하우스를 세워 원예작물을 하는 경작문화로 바꿔졌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2.5km 지점으로 순농사를 하며 가구수는 42가구, 세대수는 43세대, 인구는 145명(남자-68, 여자-77), 경지면적은 40.0ha(밭-0, 논-40.0)이다.(2002년 12월 30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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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고장 傳統文化』(정읍군청 공보실, 1983. 11. 9), 390.
2) 張奉善,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36. 11. 20.), 138.
3) 최현식편, 『增補 井邑郡誌』(정읍문화원, 1974. 3.),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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